북녘땅 고구려 고분벽화 무엇을 그렸나? |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특별히 고구려의 고분을 찾았던 일이 화제가 되고 있다. 고구려는 기원전 37년부터 기원후 668년까지 존속하는 동안 수많은 고분을 남겼는데, 고구려 고분들의 대부분은 압록강 부근과 평양 부근에 밀집해 있다. 북한에 있는 고구려 고분벽화를 중심으로 테마여행을 떠난다. |
1. 고구려의 주거와 식생활 |
평안남도 대안시에 있는 덕흥리 고분은 5세기 초에 만들어진 무덤이다. 덕흥리 고분 |
은 입구로 들어가면 먼저 널길이 나오고 그 뒤로 방이 있는 복잡한 구조이다. 그리고 벽면은 온통 그림으로 빼곡하다. 벽의 그림은 무덤 주인공의 생전 모습을 담은 것으로 이런 벽화를 인물 풍속도라 한다. 고구려 사람들은 어떤 형태의 집에서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 고구려인들의 흔적들이 고구려의 고분벽화에 생생하게 재현되어 있다. |
2. 고구려의 놀이문화와 여가생활 |
덕흥리 고분에서 그리 멀지 않은 평안남도 강서군의 수산리 고분 역시 5세기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분의 내부는 하나의 널방으로 된 단순한 구조이다. 이 수산리 고분의 벽화 중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외출 장면이다. 시종을 거느리고 나들이에 나선 귀족이 뭔가를 유심히 보고 있는데, 그것은 놀랍게도 서커스이다. 함께 따라온 시종들도 흥미진진한 표정이다. 이밖에도 벽화에 새겨진 고구려의 놀이문화는 매우 다양하고 생동감이 넘친다. |
3. 고구려의 복식(服飾) |
황해도 안악군에 있는 안악3호분은 고구려의 고분 중 큰 규모에 속한다. 내부도 복잡해서 널길로 들어가면 널방 입구 양쪽으로 작은 곁방 두 개가 있다. 이 무덤 벽화의 인물들은 화려하고 격조가 있다. 주인공은 위엄 있는 차림새로 앉아있고, 부인인 듯한 여자는 머리 모양과 옷차림에 잔뜩 호사를 부렸다. 그녀 옆에 있는 시녀들도 마찬가지이다. 이 벽화는 고구려 고분벽화 중에서도 규모가 가장 크고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고구려의 독특하고 다양한 패션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
4. 고구려의 막강한 군사력 |
안악3호분의 행렬도는 가장 많은 병사가 등장하는 벽화이다. 수레를 탄 주인공의 출행장면을 그린 이 행렬도는 등장하는 인물만도 무려 250명에 달한다. 이 행렬도에서 주인공을 둘러싸고 행진하고 있는 무사들을 보면 한때 동아시아 최강의 군대로 이름을 날렸던 고구려 군사들의 힘을 느낄 수 있다. |
5. 벽화의 비밀 |
노랑, 빨강, 초록 등 지금도 선명한 색상을 유지하고 있는 고분벽화는 대략 1500년 전에 그려진 것이다. 고구려의 역사를 생생하게 전하고 있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비밀은 무엇일까.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쌍영총 벽화 조각이 한 점 보관되어 있다. 쌍영총은 북한에 있는 고구려 고분으로 5세기 말에 축조된 무덤이다. 이 쌍영총 벽화 조각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니 단면에서 붉은 색과 검은 색의 안료가 나타났다. |
6. 강서대묘 내부와 사신도(四神圖) |
북쪽의 신 현무는 암컷인 거북과 수컷 뱀이 서로 엉켜있는 북쪽의 신 현무, 서쪽의 신 백호, 남쪽을 대표하는 주작, 동쪽의 신 청룡. 이 네 동물의 그림은 고구려 회화예술의 극치를 보여주며 벽화예술의 최고봉으로 손꼽히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에 갔을 때 찾아갔던 평안남도 남포시에 있는 강서대묘. 그 무덤 안으로 들어간다. |
7. 천하의 중심, 고구려 |
수준 높은 예술과 강성했던 고구려의 국력. 그 당시 고구려는 동북아를 호령하며 아시아 곳곳에 발길이 미쳤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를 천하의 중심이라고 여기며 당당한 삶의 자세와 자신감을 보여왔다. 고구려 벽화는 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
역사스페셜 - 고구려 고분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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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스페셜- 북녘땅 고구려 고분벽화, 무엇을 그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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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1. 오프닝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김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했을때,특별히 고구려 고분을 찾았던 일이 화
제가 되고 있습니다.그동안 역사스페셜에선 고구려에 대해 몇차례 방송하면서 고분을 함께
다룬 바 있습니다.그런데 이번 방문을 계기로 일반의 관심이 아주 높아져 있습니다. 더군다
나 고구려 고분은 세계의 주목을 받는 것이기도 합니다.그 내부에 그려진 벽화가 규모나 수
준에 있어서 세계 최고로 손꼽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엔 고구려 고분의 벽화
에 한정해서,그 중에서도 북한에 있는 것들을 집중적으로 들여다보려고 합니다.고구려는 기
원전 37년부터 기원후 668년까지 존속하는 동안 수많은 고분을 남겼습니다. 현재까지 발굴
된 것만도 무려 2만여기나 됩니다.대부분은 초기 수도였던 이곳 압록강 부근 '집안'과 후기
수도였던 여기 '평양' 부근에 밀집해 있습니다.그중 벽화가 그려져 있는 고분은 95기인데,3
분의 2가 넘는 70여기가 북한땅 평양 인근과 황해도에서 발견됐습니다.이들 고분벽화는 그
갯수만큼이나 그림도 아주 다양합니다.여러 인물이 등장하고, 생전의 모습이 담겨있고, 정
신세계를 묘사한 그런 그림도 있습니다. 고구려의 생생한 역사가 벽화 속에 들어있는 것입
니다. 그런 만큼 이 시간엔 몇 가지 주제를 가지고 북한에 있는 고구려 고분 벽화를 찾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말하자면 테마여행인 셈이죠.첫번째 테마는 '고구려 사람들은 어떤 집
에서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 하는 것입니다.그것은 이곳 덕흥리 고분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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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1
평안남도 대안시에 있는 덕흥리고분,5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이다.입구로 들어가면 먼저 널
길이 나온다.그 뒤로 두 개의 방이 있는 복잡한 구조다.벽면은 온통 그림으로 빼곡하다.앞방
벽면에 그려진 이 사람이 무덤의 주인이다.높은 관리들이 썼던 관을 쓰고 있다. 그 위쪽으로
주인공에 대한 기록인 묘지명이 보인다.주인공의 이름은 진,유주자사란 벼슬을 지냈고,광개
토대왕 시절에 일흔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진의 옆쪽으론 유주에 속했던 13군의 태수
들이 하례를 올리고 있다. 생전의 모습을 담은 이런 벽화를 인물풍속도라고 한다. 고구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INT 전호태 벽의 그림은 사랑채와 안채의 생활이 구분되서 표현돼있다.
앞방 입구인 이곳은 대문,주인이 외부 사람들을 만나는 앞방은 사랑채일 것이다.그 뒤쪽,관
을 놓았던 널방은 안채를 옮겨놓은 듯하다.벽엔 살림집의 면모가 그려져 있다. 이것은 창고
다.통풍을 고려해 바닥에서 조금 떨어져 지었다.연꽃이 피어있는 연못,집 안에 정원이 있었
던 모양이다. 한쪽엔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장면도 있다. 꽤나 큰 마당이 있었을 것이다.마구
간과 외양간도 있다. 말이나 소는 고구려의 귀한 가축이었다. 주인공이 행차하는 그림엔 수
레가 등장한다. 말이나 소가 끄는 수레는 고구려 귀족들의 교통수단이었다.
INT 김용만 "-수레의 활용과 상업 발달-"
다른 고분의 벽화를 보면, 집 안에 차고가 있다. 그만큼 수레를 중하게 여겼던 것이다. 차고
옆으로 고기간이 눈에 띈다.고구려 사람들은 육식을 즐겼다.우물도 있는데, 추를 이용해 물
을 길어 올리도록 돼있다.생활의 지혜가 엿보인다. 방앗간엔 디딜방아가 있다. 고구려의 주
식은 쌀과 조였다.부엌의 화덕 위엔 큼지막한 시루가 놓여있는데, 여기에 곡류를 쪄서 먹었
던 것이다. 다른 벽화엔 집 전체 모양을 그린 전각도가 있다. 이를 바탕으로 귀족의 집을 컴
퓨터 그래픽으로 복원해 봤다.대문 안으로 들어가면, 먼저 바깥채가 있다.여기에 주인의 사
랑채와 시종들이 기거하는 행랑채가 있었을 것이다. 중문을 지나면 안채다. 안채엔 잘 가꿔
진 정원이 있고,마구간과 외양간이 들어서 있다.말이나 소를 놓아둔 만큼 이렇게 구석진 자
리를 택했을 것이다.그 옆에 창고가 있다. 사다리로 올라가게 돼있다.이밖에도 살림을 위한
여러 건물이 있었고, 이런 안채 한 가운데서 귀족부부가 살았다.실내는 휘장을 둘러 화려하
게 장식했다.그런데 앉아있는 자리는 평상이다.그렇다면 난방은 어떻게 했을까? 서울 구의
동 아차산에 있는 고구려 유적지.이곳에서 난방을 했던 흔적이 발견됐다. 온돌 자리가 그것
이다.한반도의 전통적인 온돌 문화가 고구려에 있었던 것이다. 아궁이의 온기를 전할 수 있
도록 돌로 만든 구들이 길게 이어져 있다.연기가 빠져나가도록 만든 굴뚝도 여러 개 출토됐
다.중국 집안에 있는 고구려 유적지엔 온돌 형태가 보다 뚜렷하다. ㄱ자 모양으로 방 일부에
만 설치하는 쪽구들이다.
INT 김용만 "-고구려의 온돌 문화로 엿보는 고구려 사람들의 활기찬 생활-"
고구려 귀족이 살았던 실내는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방 한쪽엔 탁자와 의자를 놓아,식탁
이나 손님 맞이용으로 사용한다.휘장으로 공간을 구분짓고,그 안쪽에 평상을 놓는다.평상엔
기둥을 세워 역시 휘장을 두르는데, 여기에서 사람을 맞이하거나, 잠을 잔다.그리고 한쪽 벽
엔 쪽구들을 설치해 난방을 해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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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2. 고구려 여가생활 도입
이것은 앞서봤던 덕흥리 고분의 널방에 있는 벽화입니다.이쪽의 이 그림을 한번 보시죠. 달
리는 말 위에서 활을 쏘아 막대를 쓰러뜨리는 경기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과녁을
지났는지 몸을 뒤로 한껏 돌려서 활을 당기고 있고 5개의 과녁 가운데 이쪽 2개는 표적이 땅
에 떨어졌습니다. 이 사람은 이제 막 활쏘기를 시작하려고 하는군요.그리고 이 사람은 붓대
를 쥐고 뭔가 적고 있는 걸로 봐서 기록자인가 봅니다. 그 옆에서 예의주시하고 있는 이 두
사람은 아마도 심판관일 겁니다.여기 한켠엔 뭔가 적혀있군요.'서쪽 뜰 안에서 마사희를 하
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무덤의 주인은 마사희라고 하는 이런 놀이를 하며 여가를 보냈던
모양입니다. 이 밖에도 벽화에 나타난 고구려의 놀이문화는 아주 풍성합니다. 고구려 사람
들은 여가를 어떻게 보냈을까요? 다른 고분으로 가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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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2
덕흥리고분에서 그리 멀지않은 평안남도 강서군. 이곳 수산리 고분 역시 5세기 것으로 추정
되고 있다. 내부는 널길과 하나의 널방으로 된 단순한 구조다.널방 입구엔 문지기가 그려져
있다. 눈을 부릅뜨고, 손엔 창을 들었다.험상궂은 모습이 무덤을 지키기엔 손색없어 보인다.
이곳 벽화중 특히 눈에 띄눈건 외출 장면이다.시종을 거느리고 나들이에 나선 귀족이 뭔가
를 유심히 보고있다.그것은 놀랍게도 서커스다.함께 따라온 시종들도 흥미진진한 표정이다.
한 재주꾼은 나무 다리로 춤을 춘다.또다른 재주꾼은 여러 개의 막대기와 공을 엇바꿔 던진
다.이런 서커스 구경이 당시 여가 생활의 하나였던 것이다.
INT 전호태 "-고구려 서커스는 국제 교류의 중요한 자료다.-"
한쪽 벽에 있는 행렬도에선 악기가 보인다. 두 사람이 어깨에 메고 있는 큰 북, 기다란 뿔나
팔도 있다.고구려의 악기는 다양하다. 지금까지 발굴된 고분 벽화에 나타난 악기만도 38종
에 달한다.악기는 자체 개발한 것도 있지만 교역의 산물이기도 하다.비파 모양의 완함이 대
표적이다.
INT 전호태 "-완함과 국제교류 양상-"
고구려 사람들은 춤도 즐겼다. 무용총의 춤 그림을 보면 지휘자인 영무를 비롯해 춤꾼과 가
수가 등장한다.고구려 춤의 명성은 대단했다. 당나라 시인 이태백은 한 편의 시를 남기기도
했다. '깃털모양 금장식 절풍모를 쓰고 흰색 무용신을 신고 망설이다가 어느새 팔을 저으며
훨훨 춤을 추어 새처럼 나래 펼치고 요동에서 날아왔도다' 벽화에 나타난 춤동작을 기초로
해서 이애주 교수는 고구려 춤을 연구했다.그가 복원시킨 고구려 춤은 이렇다. 우리의 전통
적인 춤사위와 흡사하다.
INT 이애주 "-고구려 춤의 춤사위에 대해-"
손으로 상대를 공격하는 무술인 수박은 남자들의 놀이다.씨름도 벽화에 곧잘 등장한다.주로
힘 겨루기를 하며 여가를 보냈던 것이다.이 밖에도 도둑잡기 놀이, 말길들이기 놀이, 칼놀이
가 있다.즐기면서 또한 힘을 기르는 것이다. 남자들이 가장 즐겼던건 사냥이다.호방한 기마
인의 생동감이 넘쳐난다.이런 사냥 역시 평상시에 힘을 기르는, 일종의 군사훈련이다.
INT 윤명철 "-고구려 상무정신의 배양-"
고구려는 초급 교육기관인 경당에서 신분에 관계없이 활쏘기를 가르쳤다. 활쏘기는 사냥을
통해 연마되고 군사력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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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3. 고구려의 服飾 도입
천오백년전,그때 이미 고구려에 이렇듯 아슬아슬한 묘기의 서커스가 있었다니,참으로 놀랍
지 않습니까? 벽화는 이밖에도 기록엔 없는 많은 정보를 알려주곤 합니다.서커스를 관람하
고 있는 이 사람들을 보면, 당시 귀족들은 외출할 때 아주 큰 양산을 썼는데,양산은 대가 굽
은 박쥐 모양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들이에 나선 이 귀족 남자는 누런 색의 기
다란 두루마기를 입고, 머리엔 검은 색의 관을 쓰고 있습니다. 그 뒤에서 양산을 받쳐든 시
종은 서커스를 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저고리와 바지 차림입니다. 그리고 이 귀
족 여자는 저고리와 치마를 입고 있습니다.저고리의 깃과 도련, 소매 끝에는 아름다운 무늬
가 수놓아져 있고, 치마는 오색의 색동치마입니다. 대단히 화려하죠? 그 뒤에 서있는 시녀
역시 저고리와 주름치마를 입고 있습니다.화려하진 않지만,나름대로 멋을 부린 모습입니다.
이 그림만 봐도 고구려의 패션은 다양하고 신분에 따라서 차이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 테마는 '고구려의 복식'으로 잡아볼까요? 인물 풍속도를 그린 벽화가운데 가
장 규모가 크고 상태 또한 잘 남아있는 안악3호분으로 가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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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3
황해도 안악군엔 있는 안악3호분.고구려의 고분가운데 큰 규모에 속한다. 한변이 30미터를
넘고 높이는 7미터에 달한다.내부도 복잡하다.널길을 들어가면 널방 입구 양쪽으로 조그만
곁방 두 개가 있다.한쪽 곁방 벽면에 무덤의 주인이 그려져 있다.휘장이 둘러진 화려한 방에
위엄있는 차림새로 앉아있다.그 옆 기록에 따르면, 이름은 동수인데, 중국에서 귀화한 귀족
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인물에 대해선 또다른 설도 있다. 우선 그는 머리에 왕이 썼다는 백
라관을 쓰고 있고, 손엔 도깨비 모양의 귀면 부채를 쥐고 있다.그리고 벽화엔 왕을 상징하는
깃발이 등장한다. 따라서 무덤의 주인은 왕이라는 것이다. 어떻든 이 무덤의 인물들은 화려
하고 격조있다.주인공 옆 벽면엔 부인인 듯한 여자가 있는데,머리 모양과 옷차림에 잔뜩 호
사를 부렸다.그녀 옆에 있는 시녀들도 마찬가지다.주인공 맞은 편 벽엔 그에게 소속된 신하
와 무사들, 의장대와 악대까지 그려져 있다.그림 옆엔 글자도 적어 두었다.고구려의 관직명
이나 기타 명칭들을 알 수 있게하는 귀중한 자료다. 이곳 벽화는 고구려 고분벽화 중에서도
규모가 가장 크다.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는만큼 고구려의 복식도 엿볼 수 있다.기본 복장
은 남녀 모두 저고리와 바지다. 활동하기 편한 차림이다. 여기에 두루마기를 걸치기도한다.
추위를 막는 덧옷이자,귀족의 의례용 옷이다. 여자들은 바지 위에 치마를 덧입기도 한다.옷
은 색상도 다양하지만,무늬도 여러 형태가 있다. 점박이 무늬도 그중 하나다.무용총의 접객
도를 보면 점박이 무늬의 의상이 많이 등장한다. 오늘날 유행하는 이런 무늬가 당시에도 있
었던 것일까?
INT 민길자 "-사라사 염법의 점박이 무늬와 국제 교류 양상에 대해-"
고구려는 서역까지 진출해서 시베리아나 인도와도 교류했다.점박이 무늬가 그 증거다.벽화
속 고구려의 패션은 이렇다.귀족남자의 외출복은 두루마기,길이가 길고 소매통이 넓다.이것
은 귀족여자의 외출복,색동의 주름치마가 아름답다.귀족 남자의 평상복은 저고리와 바지다.
소매통과 바지통이 넓다.귀족여자의 평상복은 저고리 끝단에 무늬를 넣고,주름치마로 멋을
냈다.다음은 평민남자의 평상복이다.소매통과 바지통이 귀족에 비해 훨씬 좁다.평민 여자의
평상복도 단순한 차림이다.치마 끝으로 바지가 내비친다. 다음은 관복,소매가 특히 넓고 끝
자락이 발등을 덮는다.활동성은 떨어지는 복장이다.무용복은 소매의 통이 넓고, 발목에 이
를 정도로 길다.머리 모양도 옷차림 만큼이나 다양하다.뒤로 묶어서 내린 이 머리는 시집을
안 간 여자들이 주로 했던 것이다.이마에서 좌우로 상투를 틀 듯 올린 쌍상투머리도 마찬가
지다. 얹은 머리는 신분과 지위에 관계없이 시집간 여자들의 일반적인 형태다. 얹은 머리를
변형시킨 고리튼 머리다.반고리 모양으로 머리를 틀어 둘레를 감싸고, 여러 장식으로 치장
했다.
INT 임명미 "-고리튼 머리의 심리적 측면과 민족의 자부심-"
남자는 상투머리가 일반적이다.여기에 모자를 쓰곤 한다.천으로 머리를 감싼 이것은 '건'이
다.시종들이 주로 했던 것이다.삼각형 모양의 이것은 절풍이다. 신분에 관계없이 가장 즐겨
했다.절풍에 새깃을 꽂은 조우관,깃은 신분이 높을수록 많아진다. 책은 관리의 의례용 모자
다.문관의 것은 뒷부분이 가닥져 구부러져 있고,무관의 것은 뒤가 뾰족하게 솟은 형태다.
비단으로 만든 '관'은 신분이 높은 사람만 썼다. 지위에 따라 색깔이 다르다. 벽화에 나타난
고구려 복식은 이렇듯 다양하다.사회가 분화되고, 질서 속에서 안정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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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4. 고구려 군사 도입
고구려는 잘 아시다시피 거대한 영토를 가진 나라였습니다. 게다가 국제교류 또한 아주 활
발했습니다.그것이 가져다주는 풍요를 안악3호분에 있는 이들 부부의 화려하면서도 당당한
모습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그리고 이 바탕에 있는 것, 그것은 바로 대제국을 일군 고구려의
막강한 군사력입니다.그렇다면 그 모습은 어땠을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이것은 안악3호
분의 다른 벽면에 있는 대행렬도입니다. 높이가 2m, 길이가 6m나 되는 한 장의 판석 위에
거의 들어차게 그린 것으로,화면의 크기는 고분벽화 가운데서도 으뜸입니다.복잡하고 다채
롭기도 단연 첫손가락에 꼽히는 것이죠.이 행렬도에 등장하는 인물만도 무려 250여명에 달
합니다.악대가 앞서고,그 뒤를 여러 무장한 군사들이 따르고 있는데요,여기 수레를 타고 있
는 주인공의 출행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한 시가 퍼레이
드 같은 것이죠.그런데 주인공을 둘러싸고 행진하는 무사들을 보면, 그 생김새가 아주 다양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한때 동아시아 최강의 군대로 이름을 날렸던 고구려 군사를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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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4
안악 3호분의 행렬도는 가장 많은 병사가 등장하는 벽화다.그 모습도 다양하고,무기도 여러
가지다.이것을 컴퓨터로 복원해 하나씩 살펴봤다. 온 몸을 갑옷으로 무장하고 말을 탄 병사,
철갑기병이다.행렬 맨 뒤엔 가볍게 무장한 기병도 보인다.보병으론 창을 든 창수가 있다.갑
옷을 입고 방패를 들었다.칼을 든 환도수,역시 갑옷과 방패 차림이다.도끼를 든 부월수는 갑
옷을 입지 않았다.궁수는 갑옷을 입고,화살통을 허리에 찼다.이것이 바로 대륙을 누비며,영
영토를 넓혀갔던 고구려 군대다.여러 무기는 고구려의 뛰어난 제철 기술이 뒷받침했다..
INT 전호태 "-무장체계와 철산업-"
구의동에 있는 고구려군사유적지.이곳에서 화살촉과 창 등 다양한 철제 무기류가 출토됐다.
고구려 군사중 최강이라고 일컬어지는 철갑기병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유물도 나왔다.투구
가 그것이다. 이를 토대로 투구를 복원해봤다. 고구려 철갑기병은 이런 투구를 썼던 것이다.
유적지에서 출토된 철편들 가운데엔 갑옷에 쓰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철편들도 있었다.갑옷
은 이렇듯 철편을 이어붙인 찰갑이었다.이것은 가볍고도 튼튼하다.웬만한 화살은 튕겨나가
고 만다.다른 고분의 벽화엔 철갑기병의 또다른 무기가 등장한다.발에 신고 있는 못신이 그
것이다.끝이 뾰족한 못신은 전투 도중,적군을 말 위에서 내려 찍는 데 위력을 발휘한다.온몸
을 무장한 철갑기병,그렇다면 그가 탔던 말은 어땠을까? 북한의 철령 유적지. 3-4세기의 것
으로 추정되는 이곳에서 수십개의 말 모양 토우가 나왔다. 몸통과 얼굴은 온통 갑옷으로 무
장돼 있다.철갑기병의 말도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고구려 철갑기병의 모습은 이렇다. 완
전무장을 한 이런 철갑기병이 고구려의 최전선에 있었던 것이다.
INT 이인철 "-철갑기병의 위력에 대해-"
실제 전투는 어땠을까? 벽화에 나타난 성 전투를 보면,안에선 육박전이 벌어지고,밖에선 철
갑기병이 공격을한다.무기체계를 통해 평원전을 재구성해보면 철갑기병이 맨 앞에 서고,그
뒤로 경마기병이 선다.다음은 보병인 창수가 포진하고, 이어 검수와 부월수, 궁수가 뒤따른
다.전투가 시작되면 궁수가 활을 쏜다.철갑기병은 측면을,경마기병은 후방을 공격한다.그리
고 보병이 육박전을 벌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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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5. 벽화의 제작 기법 도입
동아시아를 무대로 용맹을 떨쳤던 고구려의 군사들, 이 벽화에서 그 힘이 느껴지지 않으십
니까? 이것은 대략 천오백년전에 그려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생김새하며 표정까지 지금
도 생생히 살아있습니다. 군대의 힘찬 행진소리, 말밥굽 소리, 악대의 우렁찬 행진곡.. 이런
소리까지 들려오는 듯 합니다. 여기보면, 노랑, 빨강, 초록 등 채색도 다양하게 돼있어 한층
더 생동감이 넘쳐납니다. 색상도 선명한데요, 사실 고분 벽화가 천오백년의 세월을 견딘다
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고분 안팎의 기온 차이로 대개는 내부에 이슬이 맺혀 벽면
이 번들거리고, 그로 인해서 물감이 흘러내리기 때문입니다. 또한 시간이 흐르면서 벽면에
서 물감이 아예 떨어져 나가기도 합니다. 물론 고구려 고분벽화도 일부 훼손이 되긴 했습니
다만, 대부분은 양호한 상태로 발견돼 고구려의 역사를 전하고 있습니다.그 비밀은 무엇일
까요? 고구려 고분벽화의 제작기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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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5
국립중앙박물관엔 쌍영총 벽화 조각이 한 점 보관돼 있다. 쌍영총은 북한에 있는 고구려 고
분으로 5세기 말에 축조된 것이다.이것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봤다. 단면에서 붉은 색과 검은
색의 안료가 나타났다.
INT 안병찬 "-적색과 흑색의 안료에 대해-"
천연광석인 진사나 먹은 자연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다. 이들을 비롯해 벽화의 안료는
모두 물에 녹지 않는 천연 광물성이다.때문에 채색이 습기에 쉽게 번지지 않았던 것이다.그
렇다면 이런 안료를 벽면에 어떻게 부착시켰을까? 쌍영총 벽화 조각의 단면을 다시 분석해
봤다.안료 아래쪽의 흰색은 석회다.검은색은 석회에 잘 붙은 반면,붉은색은 조금 떠있다.두
가지 방법이 있는 것이다. 그 하나는 프레스코기법이다. 진영선 교수는 그 방식대로 고구려
벽화를 재연하고 있다. 프레스코 기법은 벽면에 그림을 그리기 전에 먼저 석회칠을 두껍게
한다.그것도 세 번에 걸쳐 바른다.
INT 진영선 "-프레스코 기법에 대해-"
고구려 사람들은 돌벽 위에 굵은 모래와 석회로 1차 바탕을 만들었다. 다시 가는 모래와 석
회를 섞어 바르고,마지막에 고운 석회를 칠했던 것이다.이때 회칠이 마르기 전에 그림을 그
린다. 그래야만 안료와 석회가 함께 마르면서 단단하게 굳는다. 안료가 벽면에서 떨어져 나
가는 현상이 미연에 방지되는 것이다. 석회에 잘 붙어있는 검은 색이 바로 프레스코기법이
다.반면에 석회에서 떠있는 붉은 색은 또다른 방식인 건식화법이다. 회칠이 이미 말라버린
벽면에 아교를 섞어 그리는 것이다.고구려 사람들은 이렇듯 습기에 견딜 수 있는 재료와 기
법으로 벽화를 제작했다. 과학적 지식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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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6. 四神圖 고분벽화(강서대묘) 도입
고구려의 뛰어난 기술은 이렇듯 생동하는 그림을 돌벽에 그려 천 오백년의 세월을 날 수 있
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까지 당시의 모습을 그린 이런 벽화들을 통해 고구
려의 생활상을 들여다 봤습니다. 북한에 있는 고구려 고분벽화들 가운데 이런 인물 풍속도
벽화는 고구려 전성기인 5세기를 전후로 해서 주로 그려진 것들입니다. 하지만 6세기를 넘
어서면서부터는 전혀 다른 양식의 그림이 벽화의 주제로 등장합니다.거기에서 고구려의 또
다른 면모를 볼 수 있습니다.그 중 대표적인 것은 여기 평안남도 남포시에 있는 강서대묘입
니다.(김대통령이 북한에 갔을때 찾아갔던 바로 그 고분입니다) 흙으로 쌓아올린 봉분의 직
경은 대략 51m, 높이는 9m에 달합니다. 어마어마한 크기죠.이 강서대묘는 7세기 중엽에 만
들어진 것인데, 특히 뛰어난 축조술과 아울러 내부의 벽화로 유명합니다. 이번엔 직접 안으
로 들어가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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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6
내부는 널길과 널방으로 된 단순한 구조이다.시신을 안치했던 널방은 화강암으로 정교하게
축조했다. 사방 벽면과 천장엔 온통 그림이 그려져 있다.특히 눈길을 끄는건 벽면의 그림이
다.현실엔 존재하지 않는 기이한 형상의 네 마리 동물이 각각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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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6-1. 강서대묘 내부와 四神圖 소개
이곳 널방은 한변의 길이가 3m를 넘고,높이는 3.5m쯤 됩니다.꽤 큰 방인데요,제 양 옆의 이
곳이 관을 놓았던 자리입니다.두 개 인걸로 미루어 부부합장묘였을 겁니다. 그리고 네 벽엔
상상속의 神的 동물이 각각 그려져 있는데,이것을 사신도라고 합니다.이 쪽이 입구 맞은 편
북쪽이고,여기 그려진 이 동물은 현무입니다. 거북과 뱀이 서로 엉켜서 독특한 형상을 하고
있는데,한눈에도 생동감 넘치게 잘 그렸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이 그림은 구도와 표
현력에 있어 완벽에 가까운 걸작으로 주목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 현무 뿐만아니라 이곳 내
부의 전체 벽화가 고구려 회화예술의 극치를 보여주며 벽화예술의 최고봉으로 꼽히기도 합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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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6-2
북쪽의 神 현무는 본디 암수 한 쌍이 한 몸이다. 거북은 암컷,뱀은 수컷을 나타낸다. 음양조
화의 상징이다. 뱀과 거북의 머리가 서로 마주 보며 불꽃을 뿜고 있다. 뱀의 비늘 묘사가 구
체적이다. 거북의 몸체에도 구갑무늬를 사실적으로 표현했다.거북이 자아내는 운동감과 뱀
의 탄력있는 곡선미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느껴진다.서쪽의 신 백호는 나쁜 기운을 물리친다
고 한다. 입구쪽을 향해 달리는 모습이다. 넓은 혀를 내밀고, 몸엔 호피 무늬가 그려져 있다.
선을 많이 생략하고 장식도 없다. 간략하면서도 환상적인 표정이 돋보인다. 백호 옆쪽 벽면
에 그려져 있는건 주작이다. 주작은 남쪽을 대표하는 신이다.이 주작은 입구인 남쪽의 양벽
에 두 마리가 서로 마주보고 있다. 음양조화를 나타낸다.좌우로 벌린 양 날개와 긴 꼬리, 바
람에 날리는 듯한 깃털 묘사가 세밀하다.하늘을 나는 생동감이 넘친다.동쪽의 신 청룡도 입
구쪽을 향해 날고 있다.이 역시 나쁜 기운을 물리친다는 영물이다.도깨비 모양의 머리를 쳐
들고 눈은 부릅떴다. 청룡은 치밀한 세부 묘사에 화려한 채색을 더했다. 탄력있는 필치에서
긴장감이 강렬하다.이 네마리 동물은 음양오행설에서 각각 사방을 대표하는 신적인 존재,즉
四神이다.나쁜 기운을 물리치며 동서남북을 지키는 것이다.
INT 이태호 "-사신도가 등장하게 된 배경-"
천장은 고임돌을 올리면서 구석을 약간씩 좁혀들어갔다.정교한 축조방식이다.이곳 맨 꼭대
기엔 황룡이 있다.황룡은 음양오행설에서 사방의 중심이 된다.
INT 이태호 "-황룡은 왕무덤의 상징이다.-"
황룡 주위에도 온갖 그림이 있다.수많은 꽃과 구름이 보이고,그 사이를 상상속의 동물과 신
선이 날아다닌다. 이것은 고구려 사람들이 생각했던 내세, 즉 하늘세계를 표현한 것이다.하
늘을 마음대로 날아다닌다는 비천이다. 날개옷과 유연한 몸짓이 잘 묘사돼 있다. 천장에 있
는 산 그림도 색채의 명암과 원근 표현이 뛰어나다.
INT 이태호 "-벽화의 회화예술에 대해-"
강서대묘의 벽화는 고구려고분 벽화 가운데 그 회화 수준이 절정에 달한 것이다. 그것은 고
구려의 발달된 회화 수준을 대변한다.영혼의 안식처인 무덤에서 고구려의 뛰어난 예술혼이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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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7. 고구려의 천하관 도입
이렇듯 수준 높은 예술은 어디에서 비롯됐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강성했던 고구려의 국력
이 가져다주는 안정된 사회일 겁니다.4C에 광개토대왕은 대규모에 걸쳐 세력 확장을 시도
합니다. 그리고 5C가 되면 고구려의 국력은 절정에 달합니다. 당시 고구려의 영토를 보면,
서쪽으로는 요하, 북쪽으로는 송화강 유역, 동쪽으로는 연해주 남단, 남쪽으로는 한반도 중
부 일대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이를 기반으로 고구려는 동북아 패권국가로서의 위치를 확
고히 합니다.그리고 북아시아 삼림지대와 내륙아시아 유목지대,한반도 남부의 신라와 백제,
바다 건너 왜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력을 행사합니다.더불어 대외교류도 활발히 진행됩니다.
고구려 외교 사절은 내륙 아시아는 물론 중앙아시아의 서쪽 끝에 있는 이곳 사마르칸트, 지
금의 우즈베키스탄 중심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렇듯 고구려는 동북아를 호령하며 아시아
곳곳에 발길이 미쳤던 겁니다.그리고 그 밑바탕엔 대제국 고구려가 세계를 바라보는 독자적
인 천하관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천하관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우리는 다시 한번 이곳
벽화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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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7
고구려의 천하관을 알기위해선 다시한번 강서대묘의 벽화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이곳 사
방 벽면에 그려진 사신은 우주의 방위신이다.이들은 무덤을 지키고, 죽은 자를 영혼의 세계
로 인도하는 수호신이다.사신이 영혼을 인도해 가는 곳,그곳은 바로 하늘세계다. 천장 벽화
에서 보이는 것처럼 하늘세계는 신선들이 사는 곳이다.고구려 사람들은 이 신선들을 그들의
조상이라고 생각했고,죽으면 그들 또한 신선이 된다고 여겼다.스스로를 하늘의 자손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INT 전호태 "-천손의식에 대해-"
천손의식은 광개토대왕 비문에도 보인다. 앞부분에 주몽신화가 기록돼 있는데,주몽의 아버
지는 천자인 해모수다. 따라서 주몽은 하늘 신의 자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루 고분의
묘지명에도 나타난다. 주몽의 어머니는 물의 신인 하백의 딸,때문에 주몽은 해와 달의 아들
이 된다.벽화엔 해와 달이 자주 등장한다.천손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고구려는 천손의 나라
이므로 풍요도 보장받는다. 이 믿음은 다른 벽화에서 엿보인다. 여기엔 해신과 달신을 비롯
해 여러 문명신이 묘사돼 있다.불의 신은 오른손에 불꽃이 너울거리는 막대를 쥐고 있다.소
의 머리를 하고 있는 이것은 농업의 신이다.손에 곡식 이삭을 들었다. 수레바퀴신은 바퀴살
이 있는 개량된 바퀴를 만들고 있다.그 옆은 쇠를 부리는 제철신이다.부젓가락으로 쇠를 집
고 망치로 단련하고 있다. 이렇듯 하늘이 선택하고 보살피는 나라라는 믿음은 고구려가 갖
는 자부심이었다.그리고 스스로를 세상의 중심으로 여겼다.그것이 바로 고구려의 천하관이
었다.
INT 전호태 "-이민족을 통합하는 천하관의 기능에 대해-"
고구려는 천하의 중심이기때문에 천체 운행도 고구려를 중심으로 운행된다고 생각했다. 벽
화엔 별자리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것은 모두 고구려가 자체 관측한 것이다.그 정확도 또한
뛰어나서, 고구려의 천문관측술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보여준다. 우주 운행원리를 파악함
으로써 고구려가 천하의 중심이 되는 국가임을 증명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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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8. 클로징
'고구려' 하면 우리는 한반도를 넘어 북쪽 대륙으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나라로만 떠
올리곤 했습니다.군사강대국이라는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그들의 문화는 오히려 가려져 있
었습니다.하지만 고구려는 그 광대한 영토를 바탕으로 국제성을 흡수하며,고유 문명을 일군
나라였던 것입니다.그 문명은 대제국 고구려에 어울릴만큼 발달해 있었고, 동아시의 중심이
되는 것이었습니다.그리고 고구려는 스스로를 천하의 중심이라고 여기며 당당한 삶의 자세
와 자신감을 보였습니다.벽화는 이 모든 걸 말해줍니다. 고구려의 생생한 역사가 담긴 고분
벽화, 그것은 매우 다양하면서도 우수하다는 점에서 세계 최고로 꼽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해야 한다는 움직임도 일고 있습니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분명 우리
민족의 값진 유산입니다. 거기 담긴 역사는 현재와 미래를 위한 저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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