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 독재자인가? 영웅인가? |
당으로부터 고구려를 지켜낸 뛰어난 장수인가. 쿠데타로 권력을 잡고 고구려를 패망의 길로 이끈 주역인가. 인물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보는 시각에 따라 늘 달라져왔지만 연개소문은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의 평가를 받고 있다. 고구려의 입장에서 본다면 연개소문은 위태로운 시기에 나라를 구한 구국 영웅이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그의 기록은 부정적이기만 하다. |
1. 중국 경극 속의 연개소문 |
청대부터 전해 내려온 경극은 중국인의 정서를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장군 연개소문은 경극에서 언제나 두렵고 아주 무술이 뛰어난 인물인 동시에 잔인하고 사납고 포악한 인물로 그려졌다. 이러한 경극은 연개소문을 역사적 지도자로 여기던 북한의 요청으로 금지되게 된다. 연개소문은 중국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인물 중 한명이었다. |
2. 연개소문 VS 당 태종 |
연개소문이 살던 640년 경 고구려와 대치하고 있던 중국의 나라는 당이었다. 이때 고구려의 권력자는 연개소문이었고 당나라의 국왕은 태종이었다. 중국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강대했던 시기 중 하나가 당 태종 집권기다. 642년, 당에 굴복하지 않은 나라는 고구려 뿐이었다. |
3. 연개소문에게 철저히 패배한 당태종 |
644년, 당태종은 드디어 고구려를 공격한다. 그러나 안시성 전투에서 철저히 패한 뒤 왕이 직접 길을 만들며 퇴각할 지경이 되었다. 심지어 당태종은 양만춘의 화살에 맞아 애꾸눈이 되고 4년 뒤 숨을 거두었으니 이때부터 당과 고구려는 숙적관계로 접어든다. |
4. 대당 강경론자, 연개소문 |
삼국사기는 연개소문을 포악한 역모자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의 입장에서 본다면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비롯한 신하들이 당나라에 대해서 저자세외교로 일관하는데 반대했던 강경론자였다. 영류왕은 유화책으로서 평화를 유지하고자 했지만 연개소문은 그것이 미봉책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
5. 연개소문은 만리장성을 넘었다? |
연개소문은 당으로부터 방어만 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 공세에 나서기도 했다. 신채호는 당태종과의 전쟁 때 연개소문이 북경까지 들어갔다는 흥미로운 주장을 했다. 북경의 한 교수는 최근 연개소문이 쉽게 북경을 넘나들었을 것이라는 단서를 찾아내기도 했다. |
6. 연개소문의 최후, 그 이후 |
북경을 손쉽게 넘나들었던 연개소문은 당태종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고 신라 김춘추와의 연합도 거절했다. 따라서 그에 대한 당과 신라의 기록이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 기록들을 김부식이 삼국사기에 그대로 인용했던 것이다. 당나라의 시각에서 쓰여진 이 왜곡된 기록이 아직까지 연개소문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가로막고 있다. |
연개소문, 영웅인가, 독재자인가?
전략 환경의 변화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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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개인적으로는 신채호의 민족주의 견해에 대해 동감하지만 김부식의 내용에는 공감하지 못합니다.
연개소문, 영웅인가 독재자인가.
1) 연개소문은 중국에서 경극, 민담등으로 상당히 많이 자주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하게 알 순 없지만 대체로 경극이 나오는 명나라부터 보고있고, 명나라에서 사용했던 연개소문의 가면이 남아있기도 합니다. 이 그림도 연개소문과 관련된 그림입니다. 경극에서 연개소문이 등장할 때, 연개소문의 맞 상대도 같이 나옵니다. 그 고구려를 침략한 사람으로는 당 태종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중간에 있는 인물은 설인귀입니다. 연개소문과 설인귀가 같이 맞수로 등장하고 당태종이 연개소문에 의하여 위험에 처해있을 때 설인귀가 구해주는 장면인것이죠. 실패한 장수라고 혹평을 받기도 하지만 중국에 천여년 동안 경극에 나옴으로써, 설인귀와 맞서는 것은 지속적으로 연개소문의 이름이 오르내린다는 것은 중국인들에게 연개소문이 미친 영향이 강렬했다.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여러 가지 형태로 나와 연개소문의 이미지에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고, 현재 중국 요동지역에 가보면 연개소문의 흔적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고구려의 성들이 곳곳에 있는데 ‘연개소문이 이 성을 쌓았다.’ 연개소문의 설화를 보면 여동생이 등장하는데 ‘지략이 뛰어나고 무력이 뛰어나다.’ 라고 나오는데, 중국 동북 지역 일대에 연개소문의 이미지를 다방면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연개소문이 그동안 어떤 형태로 평가되고 있었던가. 중국에서는 적극적인 평가가 아니고 이야기의 소재로써 써왔고, 우리 학계에서는 중요한 인물로써 많은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오늘 우리는 연개소문을 어떤 방면으로 풀어야 할까.
2) 연개소문의 평가는 바로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빌 수 있고, 유교적 입장에서 연개소문을 계속 평가합니다. 연개소문은 쿠데타를 일으키고, 보장왕을 올리고 정권을 장악한 사람으로써 반역자로 김부식은 취급하였습니다. “유교의 충과 사대의 논리에서 연개소문을 난신적자라고 비판함.” 유교에서는 충과 효라는 것이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데 왕을 시해한 연개소문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인물이 되는겁니다. 충효라는 기준점에서 김부식 이후 조선왕조 말까지 지속적으로 혹평을 받아온 인물입니다. 그런데, 상황이 달라지면서 조선 말, -> 근대로 넘어가면서 외세의 침입으로 역사적 경험을 가지게 되는데 연개소문의 평가가 이때 달라집니다. 박은식, 신채호, 문일평 등 민족주의자 사학자들이 김부식과는 다르게 전혀다른 평가를 하게됩니다. “독립자주 정신과 대외경쟁의 담략을 지닌 우리 역사상 제 1인자로 평가” 다시 말하여서 고구려라는 자주성을 지키기 위한 하나의 결단이였다. 그 자체가 혁명이였다. 쿠데타가 아니다. 연개소문이야 말로 중국의 세력에 맞서서 당당하게 지켜서 우리의 자주성을 지킨 뛰어난 인물이다. 라는 평가를 합니다. 특히, 연개소문에 관한 자료는 우리 측 자료는 남아있는게 별로 있지 않습니다. 당서, 자치통감 등 중국쪽의 자료를 찾아보게 됩니다. 신채호 선생님은 승자에 의하여 만들어진 역사 기록이기 떄문에 당나라를 괴롭히고 당태종을 물리쳤던 연개소문을 필히 좋게 써줄 리가 없다. “연개소문의 쿠데타를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한 혁명이었다고 평가.” 그래서 그 기록은 인정할 수 가 없다. 그리고 새로운 자료를 발굴해서 연개소문에 대한 적극적인 평가를 합니다. 혁명가 라는 입장에서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그 이전과는 다른 것이 등장하게 되는겁니다. 지금 그런 분위기는 지금도 현재까지 일정하게 하나의 맥락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3) 해방이후에 손진태 선생님은 좀 무단적으로 정치를 한 인물이다. 대외적으로는 당 세력에 맞서 싸우는 바람에 나라를 멸망의 길로 가져간 인물이다. “연개소문의 독재적인 폭압정치를 무모한 대외정책이 고구려 몰락의 원인이 되었다고 평가.” 해방이후에는 또 이미지가 바뀌게 됩니다. 또 한편의 일각에서는 연개소문이야 말로 여러 가지 부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고구려를 유지할려고 했던 민족자주성에 기초한 애국 명장이다. 라는 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 인물을 놓고 여러 가지 평가를 한다는 것은 연개소문이 차지하는 역사적 비중이 그만큼 적지 않다. 라는 것이고 역사속에서 인물의 평가가 어렵고 얼마나 다양한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4) 그 사람들이 살고 있는 시대나, 생각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가, 궁극적으로 그런 시대속에서 어떠한 교훈을 얻고자 하는가가 평가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달라지게 됩니다. 시대적 과제가 무엇인가 따라서 앞에 살았던 역사적 인물의 평가가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는것이죠. 그런데 사실은, 연개소문이라는 아주 독특한 편견을 가진 인물이기 떄문에 평가가 양극화가 이루게 되고, 을지문덕, 세종대왕, 김유신, 김춘추, 강감찬 등이 있는데 김유신, 김춘추는 연개소문과 맞섯던 인물인데 연개소문을 높게 이루면 김춘추, 김유신을 낮게보고 김유신, 김춘추를 높게보면 연개소문을 낮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김유신은 신라의 통일을 주도헀던 인물이고, 연개소문은 망국의 최후 집권자이기 때문에 상반된 의견을 내놓습니다. 하지만 연개소문같이 양극을 달리는 평가가 있는 인물도 별로 없습니다. 다양한 평가와 견해가 나오는 것도 연개소문 같은 독특한 특징이 있기에, 더 많이 평가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5) 연개소문과 갖고있는 행적을 보면서 우리는 오늘날에는 어떻게 평가하고, 생각하는 것이 실체에 가까워지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몇가지 기준선을 세워야됩니다. 유교적 기준선인 충과 효. 이것을 기준으로 삼기에는 좀 문제가 있죠. 현재에서도 좀 필요없는 것이니.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제기하였던 민족과 자주의 문제를 하나의 기준으로 삼아서 연개소문의 평가의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겠죠. 정말 연개소문은 신채호 선생님 말씀 그대로 자주적이고 민족의 정체성을 찾기위한 사람들인가, 연개소문은 폭압정치를 하고 대외적으로 무모하게 나갔는가. 자주성과는 상층되는 기준이 되겠지만. 정말 그랬는가. 오늘날 연개소문을 접근함에 있어서 연개소문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되겠죠.
6) 연개소문의 첫 번쨰 행적에 있어서 ‘정변’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쿠데타는 하나의 도박과 같거든요. 한편으로는 최고의 집권자나 왕이되고 한편으로는 가문의 멸족이거든요. 그리고 또 하나의 명분도 있어야 되거든요. 근데 왜 일으켰는가. 아주 중요한 측면입니다. 사대주의자들이 많아서 당에 자꾸 빌빌대는 모습에 연개소문은 정변을 일으켰다. 신채호 선생:) 정변을 일으킨 다음에 연개소문의 정치 운영이 과연 어떠하였는가. 독재적인 권력을 유지하였는가. 도 같이 생각하겠습니다. 두 번째로는 연개소문이 아주 자주적이였다. 정말 자주적이였는가. 연개소문이 당과 맞써 싸우면서 당과 맞서서 싸웠는가. 자주적인 입장으로 그러하였는가. 다른 이유로 그러하였는가. 세 번쨰는 고구려의 멸망과 연개소문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멸망에 대해 어떤 책임을 지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면서 이에 찾아가도록 하겠습니다.
7) 연개소문은 정변을 왜 일으켰는가.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킨 동기를 알기위해, 그림을 보겠습니다. 연개소문의 가문에 대한 글입니다.
“ 공의 성은 천이며 이름은 남생이고 요동군 평양성 사람이다. 멀리 가계를 보면 원래 천에서 생겨나왔다. 증조부는 자유이며 조부는 태조로 모두 막리지를 역임하였고, 아버지 개금은 태대대로 였는데,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모두 쇠를 잘 부리고 활을 잘 다루어, 군권은 아울러 쥐고 모두 나라의 권세를 오로지 하였다.”
여기서 쓰여있는 글은 큰 아들인 남생이 죽은 후에 남생에 대한 개인적인 이력을 담고 있는 묘지가 있는데 묘지에 쓰인 글입니다. 글을 보면 천에서 나왔다는 시조전승의 의미를 담고있습니다. 막리지는 2등에 해당하는 관리직을 역임하였습니다. 개금은 개소문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연개소문에 대한 가문의 핵심적인 내용이 담겨져 있죠. 천이라는 성씨를 가지고 있는데, 연개소문의 ‘연’ 자인데 당나라 ‘이연’ 과의 이름이 같아 당나라 고조와의 이름이 같으니깐 의미만 상통하는 ‘천’ 으로 바꾼겁니다. 근데 이렇게 자기의 시조가 연못에서 나왔다. 시조전승은 연개소문만이 있는게 아니라 만주지역에 있는 곳에서 생겨난 여러 종족들에게도 자기 조상들이 천에서 나왔다. 정에서, 우물에서 나왔다는 말들이 많습니다. 동북지역에서의 기반을 두고 있는 가문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시조전승을 최후까지 스스로 가문 전승으로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처음부터 처음부터 고구려 귀족이였던 것은 아니고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에 귀족으로 편입된 귀족이라고 짐작됩니다. 그리고 증조부 자유, 아버지 태조로부터 막리지라는 최고의 관직을 역임한 집안입니다. 연개소문은 사실은 정변을 일으키지 않고도 권력이 핵심에 들어간 관직입니다. 그런데 왜 정변을 일으켰는가. 삼국사기에는 이런 기록이 나타납니다. “연개소문의 아버지인 태조가 죽자 태조의 관직이 연개소문이 이어져 가야되는데 주변의 다른 귀족들이 반대를 하는 바람에 연개소문이 다른 귀족들에게 고개를 수그리고 사죄를 함으로써 간신히 관직에 오를 수 있ᄋᅠᆻ다. 아버지의 관직을 이어지게 되는데 주변세력들이 견제를 하는 것이죠. 할아버지 대, 아버지 대에서 최고의 권력에 들어간 집안이다 보니 주변 가문들이 견제를 한것입니다. 더군다나 연개소문까지 이어지면 3대까지 이어지는 고구려의 상황속에서 견제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죠. 고구려의 정치를 운영하는 방식은 왕권을 중심으로 하되 여러 귀족들이 하나의 연립체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왕이 일방적으로 결정해서 운영하는 것도 아니며, 귀족들이 일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그래도 귀족들이 왕권보다 상대적으로 힘이 세서 여러 귀족들이 뭉치고 합의하고 동의하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 국가를 운영하는 시스템이였습니다. 이를 귀족 연립 체제였습니다. 귀족의 합의와 동의를 기반으로 한 정치 운영 체제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어떤 장점이 있냐면은 당시 정치 지배층의 의견을 수렴하게 되는 장치이고 부정적으로 보면 어떤 권력이 강한 사람에서 신속한 결정과 추진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권력이 연개소문 가문으로 몰려있었던 겁니다. 이에 불만을 품었던 영류왕과 그 귀족 가문들이 반대를 한겁니다. 중앙에서 내보낼 생각까지 합니다. 당시, 천리장성을 쌓는 당과의 관계가 썩 좋지 않고, 당의 위협이 서서히 고조되는 상황속에서 천리장성을 쌓고 있었는데 연개소문을 내보냅니다. 권력을 잃어버리게 된다라는 생각하에 역으로 쿠데타를 잃으키게 됩니다. 출정한다는 명분으로 잔치를 벌이는 척 하면서 그때 반대파 대신들과 영류왕을 죽이고 권력을 장악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연개소문 정변 자체는 당시 상황속에서 보면 연개소문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던 자신의 가문, 가문이 유지했던 권력을 당대에도 유지할려는 성격이 강한 정변이였습니다. 국가적 상황속에서 정변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되는 위기라던 것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은 자신의 위기이고 가문의 위기였던 것이죠. 그 정변의 요인은 아주 사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명분이 부족했다는 것이고요. 명분이 필요한 정변이였으므로 이에 대한 지지도 많지 않았습니다. 연개소문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는데, 당태종이 쳐들어왔는데 당태종의 침략을 좌절시켰던 안시성 성주가 있는데 안시성 성주가 바로 연개소문의 반대파였습니다. 이후, 간신히 정권을 장악해갑니다. 연개소문의 정변 속에서 자주성이라든가 연개소문의 혁명성을 직접적으로 찾기는 매우 어려우며 권력을 어떤 형태로 장악했다고 하더래고 이 권력을 어떻게 유지해가느냐, 유지에 따라서는 연개소문의 정변이 새롭게 평가될 수 있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연개소문이 독재권력을 유지했느냐, 안했느냐. 라는 부분에서 실상들을 찾아가면서 연개소문의 정변이 가지는 의의를 새롭게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연개소문 아들의 관직 진출인데 첫 번째 아들과 셋째 아들이 관직에 진출하였습니다. 연개소문은 태대대로라는 관직을 만들어 최고의 자리에 올랐고 연남생은 최고 아래의 관직인 선인이라는 관직을 처음에 받았습니다. 연남생은 하나하나씩 단계를 받아서 올라갑니다. 중리서형 = 7급. 중리위두대형 = 5급. 중리위두대형은 중요한 정책을 논의할 떄 참여할 수 있는 관직이였습니다. 차관급이나 되는 관직이였습니다. 장군직도 겸해지고 막리지겸 삼군 대장군을 얻게됩니다. 665년에는 태막리지라는 관직을 얻게됩니다. 셋째아들은 이들이 어떻게 중요한 관직을 세습했는지 잘 보여줍니다. 656년에 위두대군으로 올라가니깐 중리대형으로 올라가고 잘 보시면 따라서 올라가게 되있습니다. 권한을 가지는 관직을 연개소문 집안이 그것을 독점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연개소문은 그 혁명의 동기를 자기 가문의 강화를 하는 것이였고 연개소문의 행적을 보아도 자신의 집안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것이지 고구려의 정치 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왜 정변을 일으켰는가. 에 있어서 긍정적으로 봐줄 측면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8) 왜 연개소문은 당과 맞서 싸웠는가. 이와같은 당과 연개소문의 충돌이라는 것은 어떻게 나타내게 되느냐. 일단은 당과 고구려의 관계에 있어서 고구려라는 존재가 당의 침략을 격파하고 승리로 일정하게 이끌기는 했지만 고구려는 수동적인 것이고 당나라는 능동적인 것이죠.당이 주도해 나가는 것이죠. 이 과정은 당이 중국의 세력권을 확대하고자 고구려를 침공한 것입니다. 전 왕조의 수나라가 고구려의 침공을 하고 계속 패하고 결국 내분으로 망하고. 중국은 통일을 하게되면 그 다음의 행동 방식은 외부로 힘을 뻗쳐 나갑니다.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중화적인 질서를 구축할려고 하는 행동 방식을 보이게됩니다. 바로 당 태종이라고 하는 인물이 중국적 질서의 확장. 중국적 제국적 질서의 확장이라는 것을 추진하였던 핵심적 인물입니다. 이런 당 태종의 욕구가 사실은 계속적으로 팽창되어 가는 과정에서 서역도 정벌하고 당을 괴롭히던 유목국가 돌궐을 정벌하고 남은 국가는 고구려가 된겁니다. 고구려에 대한 침공이 일어나게 된 것이죠. 고구려의 침공이라는 것이 일정하게 나타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연개소문은 이런 당의 팽창에 직접적으로 보이는데 이 막강한 당과 맞써 싸울 생각을 하는가. 유화적인 정책으로 화평관계를 유지하였으면 국가가 멸망으로 이르지 않을 수 있었다. 이런 판단도 가능한데, 연개소문 입장에서는 당과 맞서 싸우지 않으면 그런 입장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당이 고구려를 침략할 때 명분을 내세우는데 자신의 왕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했다는 패륜적인 행위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게 중국을 통일하고 북쪽의 유목국가를 토벌하였던 중국적 질서를 구축한 자신의 취지에 그런 패륜아가 있다는 것은 용서할 수가 없다고 명분을 제시하게 됩니다. 근데 사실은, 당 태종 자신이 연개소문에 비해서는 보복적으로 비난하면서 고구려를 정벌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그러지만, 그런 기준에서 당태종을 보자면 당태종도 패륜아입니다. 정치적 입장에서 아버지를 충돌시켜 당을 세우고 당을 세움에 이세민의 역할이 중요했습니다. 왕으로 즉위하는데 형과 동생을 죽이고 아버지를 강압으로 하고 왕으로 즉위합니다. 개소문으로 봤을 때 이 명분을 취하할려면 자신이 물러나는 수 밖에 없는것이죠. 자신이 백성을 폭력적으로 정치를 하고 그렇게 보이기 떄문에 자신이 물러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정변을 하였으면서 어ᄄᅠᇂ게든지 잘해볼려고 여러 가지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중국의 팽창이라고 하는 팽창 욕구 때문에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하는 것은 대체적인 시대의 대세였고 시대의 명분이 자신에게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연개소문도 당과 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연개소문은 집권 초반에 불안했던 정치 기반에 당나라와 싸우면서 자기 기반을 더욱 단단하게 다지게 됩니다. 전쟁이 일어나게 되니깐 고구려 사회 내분은 중지할 수 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연개소문이 정치적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에 그 지도력이 더 확장됩니다. 지방군사력들이 당군과 맞써면서 많은 군사력을 잃어버리게 되니깐 중앙의 연개소문의 입지가 더욱 강화되는겁니다. 결과적으로 당의 고구려 침공은 고구려가 졌으면 연개소문의 권력도 끝나는 것이지만 1차의 침략을 고구려가 막아냈고 그 주역을 연개소문이 해내었기 떄문에 그 정권의 기반은 더 탄탄해 지는 기반이 됩니다. 연개소문도 또 도박을 하게되는 것이죠. 이기면 더 잘나가는 거고 지면 한번 물러나야 할 상황이니깐 물러나는 거고. 이판사판 도박이죠. 그래서 연개소문이 당과 맞선 이유도 자주적인 부분이다. 사대적인 이런걸 떠나서 민족성 자주성을 지키기 위한것도 당시 상황속에서 맞지 않는 이야기죠. 당시 고구려 사회에서는 연개소문만 자주적인 것이 아닙니다. 정변을 일으킬 당시 안시성 성주인 연개소문의 반대파였습니다. 당태종의 침략을 막아낸 1등 공신인데 연개소문의 정변이 자주성을 지키기 위한 정변이 아니라, 그 뒤에 당과 맞선 행적도 그런 자주적인 입장 때문에 일어났던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시 국제 상황과 국내적 상황속에서 자신의 권력을 지켜나가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9) 연개소문과 고구려의 멸망의 관계 속에서 연개소문은 최후의 집권자였죠. 연개소문이 죽고 난 뒤에 고구려가 멸망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사실은 연개소문이 죽고 난 이후는 멸망의 과정이고 자신이 죽음으로써 나라가 멸망한 것은 최후의 집권자였던 연개소문의 책임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 멸망의 여러 가지 원인을 생각할 수 있는데, 고구려가 멸망의 이유를 찾고자 함은 아주 많이 있습니다.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했을떄 그것을 막아낸 고구려가 나중에 점차적으로 막지못하고 군사적으로 멸망의 길로 가게 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중 하나가 고구려가 신라하고의 동맹을 하지 못한 국제정세의 고려하지 못한점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백제가 멸망하고 나당연합군이 남쪽으로 평양성을 공격하게 됩니다. 더군다나, 이 군량인데 요동을 통해서 보급로를 유지할려면 힘든데, 신라의 보급을 받아가면서 고구려를 공격하고 전투를 치르다보면 훨씬은 용이하게 고구려를 공격할 수 있는 상황이 됩니다. 고구려가 멸망에 이르기까지 주된 이유중 하나는 신라와 당나라가 결합되는 것에 있습니다. 고구려는 신라와 당이 손잡는 것을 차단할 기회가 없었느냐? 가 아니라 중요한 기회가 있었습니다. 642년 그 해에 신라의 김춘추가 평양을 방문합니다. 김춘추가 평화협상하자. 백제의 공습으로 밀리던 신라는 고구려와의 동맹을 하면 그것을 막을 수 있다. 라고 생각한것인데 연개소문은 제시합니다. ‘한강유역을 내놓아라.’ 하자 김춘추와 연개소문의 협상은 깨지고맙니다. 그 후 김춘추는 중국으로 넘어가게되죠. 당태종도 협력자를 기달렸습니다. 혼자 힘으로는 고구려를 멸할 수 없기에 생각한 것이고, 나당연합군은 백제를 함락하고 남북으로 군사적 공격을 받아 점차적으로 멸망의 길을 걸은 고구려는 필연의 사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평양까지 찾아왔던 김춘추를 내치고 당으로 가게한 연개소문의 대외정책의 실책이라는 것도 굉장히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과는 맞서 싸울 수 있어요. 고구려가 아무리 당에 대해서 온건하게 대해도 아마 당태종은 야심을 갖고 침략을 했겠지만 신라를 당쪽에다가 돌려준 그것이 연개소문이 가진 국제정세에 있어서 치명적인 과오라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런 과오를 저질렀는가 생각해보면 연개소문의 권력욕과 관련됩니다. 집권초기에 한강유역을 쉽게 얻거나 자신이 성과를 거둠으로써 자신의 권력 기반을 안정시킬려는 욕구가 강한것이죠. 고구려가 가진 성향과 시스템을 고려했기보다는 내 권력을 어떻게 유지해 나갈것인가. 에 집중한것이죠. 결과적으로 연개소문이 권력을 장악하고 그 뒷까지 계속 해 나갔던 일년의 과정을 보았을 때 연개소문은 사사로운 입장속에서 판단하고 또 국가를 유지해 나갔던 인물이라고 판단이 됩니다. 이 부분이 연개소문이 평가받아야 할 중요한 부분이 되는 겁니다. 나라의 최고 집권자가 국가를 운영하는 행위 기준을 무엇으로 잡는 것이 중요한데 공보다는 사를 중요시 함을 알 수 있고 연개소문을 평가하는 하나의 기준으로 들이댄다면 연개소문을 결코 영웅으로 평가할 수 없습니다. 영웅이 시대의 과제를 책임지고 그 시대의 과제를 고민하고 해결할려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성공된 갖든 가지지 않든 관계없든, 그 거리와 관계가 멀다는 것이지요. 오히려 연개소문을 인물로 추앙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이 사회의 지도자 상에 잘못된 환상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염두해 두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연개소문은 독재자인가 영웅인가 23년간 고구려 최고의 지배자. 남아 있는 얼마 없는 기록에서는 귀족이나 장군을 발판으로 말에 올랐다고 하는 등으로 부정적 인식도 있으나, 한편 신채호는 4천년 역사의 첫번째로 꼽을 수 있는 영웅이라고 평했다. 여기서 두 가지 가정이 가능하다. 당의 기록 조작, 고구려가 빼앗긴 성들을 재탈환하고 식량을 되찾았을 경우. 그런데 당은 이동이 쉬운 요하 중상류를 놔두고 이동이 어려운 늪지대인 요하 하구로 퇴각한다. 더구나 퇴각 중에 왕이 직접 풀을 배고 늪을 매웠다고 한다. 이런 급한 퇴각의 이유는 무엇이었나. 이런 갈등 속에 왕과 대신들이 개소문을 두려워해 연회에 불러 죽이려 하자 개소문이 역으로 쿠테타를 일으켜 100여명을 그 자리에서 죽였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전투로 국력이 소진했다고 판단한 영류왕의 대당 유화 평화유지책에 반대해, 이후 개소문은 언젠가는 당이 공격해 올 것이라고 보고 적극적인 대당 강경책을 쓴다. 결국 연개소문의 쿠테타는 대외정책의 견해차가 일으킨 최종적 격돌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연개소문은 아마 이런 가능성을 염두했던것 같다. 그는 아들들에게 유언으로, 작위를 다투면 이웃나라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일본서기 천지천황 조).
연개소문은 영웅인가? 독재자인가? 국사학과(20010186) 김장호 연개소문하면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쿠테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은 인물..? 아니면 고구려의 뛰어난 장수? 아니면 고구려를 패망의 길로 이끈 주역..? 대륙의 거센 모래폭풍과 대양의 거대한 파도가 연상되는 진짜 사나이 연개소문. 그는 고구려를 멸망으로 몰고 간 제일의 원흉이라는 평가도 많지만 고구려인의 자긍심을 저 한족의 콧대를 보기 좋게 꺽어 버린 위대한 민족기상의 상징이란 평가도 있다. 이렇게 상반된 평가는 그의 삶이 너무나 극적이었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고구려말기인 642년 쿠테타를 통해 권력을 잡은 뒤 665년 세상을 떠날때까지..23년간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최고의 권력가였습니다. 하지만 연개소문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는 게 없습니다. 중국측의 기록과 삼국사기의 몇줄 안되는 기록이 전부입니다. 그 기록을 살펴보면 “연개소문은 흉포하고 무도한 인물이다.” 그리고 “연개소문이 전국을 호령하며 나라일을 제멋대로 하는데 말에 오르내릴때마다 항상 귀족이나 무장들을 땅에 엎드리게 하여 발판을 삼았다". 사람을 그것도 귀족이나 무장을 땅에 엎드리게 하여 발판을 삼을 정도라면 대단히 무자비한 독재자였다는 이야기인데.. 사실 상당히 오랜 세월 연개소문은 그렇게 인식되어왔습니다. 그러던 것이 1920년대 박은식,신채호등에 의해 전혀 다른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신채호는 “4천년 역사에서 첫째로 꼽을 수 있는 영웅.”이라고 연개소문을 극찬했습니다. 인물에 대한 평가야 시대에 따라 보는 시각에 따라 늘 달라져왔지만 연개소문처럼 이렇게 극단적인 두가지의 평가를 받는 경우는 드물텐데.. 그래서 저는 연개소문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자세히 살펴보려고 합니다. ♣ 연개소문의 출생 연개소문은 일명 천개소문(泉蓋蘇文). 동부대인(東部大人) 태조(太祚)의 아들이다. 개금(蓋金) ․개소문(蓋蘇文)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의 개소문 열전에서는 “개소문은(혹은 개금(蓋金)이라 한다.)의 성(姓)은 천씨(泉氏)인데, 자칭 수중(水中)에서 출생하였다고 하여 여러 사람들을 미혹하게 하였다.” 개소문의 성은 연씨(淵氏)인데, 왜 <삼국사기>는 천씨(泉氏)라고 기록했을까? 그것은 중국측 자료를 베꼈기 때문이다. 중국의 자료들은 연개소문을 가장 잔인한 독재자로써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삼국사기>는 신라를 정통으로 보는 사관에서 기술했기 때문에 중국측 사서의 내용은 거의 무비판적으로 사용한 경향이 있다. <자치통감>은 “고구려 동부대인 천개소문이 그 왕을 시해했다. 천은 성이다. 신서(新書)에서 말하기를 개소문이란 자는 혹 개금이라고도 불린다. 성이 천씨인 것은 그 스스로 물 속에서 출생했다고 여러 사람들을 미혹시켰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신서, 즉<신당서>의 내용을 그대로 베낀 것이다. 물 속에서 출생했다고 여러 사람들을 미혹시켰다는 기록도 중국인들의 의도적인 폄하이고 사실은 고대 동북 아시아의 여러 민족이 가지고 있던 시조 전설의 하나로서 연씨 집안에 내려오는 가문전설의 일환으로 보아야 한다. 즉 <삼국사기>에 그려진 연개소문의 모습은 고구려인들이 그린 연개소문의 참모습이 아닌 연개소문의 적국이었던 당나라인들이 덧칠한 연개소문의 모습일 가능성이 높다. 연개소문의 성이 ‘못 연(淵)’자를 쓰는 것은 주몽의 어머니가 물의 신 하백(河伯)과 관련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시조가 물과 관련이 있지않나 생각된다. ♣ 연개소문은 왜 쿠데타를 일으켰을까? 삼국사기에 기록된 내용인데 "개소문은 왕을 시해한 다음 그 몸을 몇도막으로 잘라 개천속에 버렸다" 왕을 죽인 뒤 그 시신을 도막을 낼 정도로 연개소문은 잔인한 인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재미있는 기록은 “몸에 다섯 개가 칼을 차고 있으니 좌우 사람들이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 칼을 다섯 개나 몸에 차고 다녀서 주위사람들이 무서워했다는 이야기인데.. 과연 그럴까요. 그 의문을 풀기위해 한가지 주목해야할 기록이 있습니다. 이 기록은 당나라사람이 고구려풍속에 대해 쓴 <한원>이라는 책에 나와있는 기록인데 “고구려의 일반남자들은 누구나 몸에 칼 다섯자루와 숫돌을 차고 다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연개소문이 칼 다섯자루를 차고 다닌 건 특별히 포악한 성격때문이 아니라 고구려의 일반적인 풍습이었던 것같습니다. 연개소문을 포악한 인물로 그린 삼국사기의 기록이 뭔가 석연치않은데요.. 더욱이 의심스러운 건 연개소문에 대한 기록이 쿠테타를 일으킨 시점으로 집중되어있고 그러다보니 연개소문은 왕을 죽이고 권력을 빼앗은 독재자로 그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실제 연개소문이 쿠테타를 일으킨 과정은 어떠했고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쿠테타를 일으킬 당시 연개소문은 국가의 군사권을 좌지우지했던 대대로직에 있었다. 전선의 움직임을 누구보다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당시의 고구려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어떠했는가? 고구려는 위로는 당.. 아래로는 신라와 긴장관계에 있었다. 고구려로서는 강력한 통일제국 당이 문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구려의 당나라 정책에는 두가지 기류가 나타난다.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비록 이겼지만 고구려의 국력도 상당히 많이 피폐해졌기 때문에 외교적인 유화책으로 평화를 구가하자는 세력이 하나 있었고 또 하나는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이겼는데 당나라라고 이기지못할 게 뭐가 있냐.. 우리가 당나라에 저자세외교를 할 필요없다는 강한 자존적인 입장을 나타내는 그런 기류가 있었다. 당태종은 서서히 고구려에 압력을 가해오기 시작했다. 631년엔 고구려의 자부심인 경관을 무너뜨리라고 한다. 경관은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탑이다. 그런가하면 641년엔 진대덕을 사신으로 파견한다. 진대덕은 당이 보낸 첩자였다. 그는 고구려의 지형과 산천을 염탐해 간다. 당은 고구려를 칠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영류왕이 선택한 대당정책은 유화책이었다. 고구려의 지도인 봉역도를 당에 보내고// 당의 요구대로 경관을 헐어버리며// 그리고 급기야 세자까지 당에 보내 조공을 한다. 연개소문의 입장에서는 당의 속국을 자처하는 행위였다. 광개토대왕 비문이나 모도루 비문에서 보면 자신을 하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강한 자존심이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서 불과 몇십년전에는 통일제국인 수나라와 싸워서 승리했고 결국 수나라를 멸망시킨 강한 자부심이 있는데 바로 그런 자부심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연개소문의 입장에서는 영류왕과 그 주변의 대신들이 취하는 당나라에 대한 저자세외교에 강한 불만을 품고있었을 것이다. 바로 이즈음 연개소문은 쿠테타를 일으킨다. 당시의 상황을 삼국사기가 기록하고 있다. 기록만 가지고 본다면 연개소문은 개인적 원한에 의해 뚜렷한 명분 없이 혁명을 일으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연개소문이 이후에 펼친 정책을 보면 단순한 개인적인 원한이 아니라 특히 당과의 관계에서 온건한 정책을 펼치느냐 강건한 정책을 펼치느냐 그러한 입장차이에 의해 혁명을 일으킨것으로 볼 수 있다. 연개소문의 입장에서는 분명히 고구려를 쳐들어온다고 믿었고 고구려가 당과 싸우는 길만이 나라를 살리는 길이라 믿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영류왕은 수나라와의 전쟁으로 국력소모가 컸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당에 대해 유화책을 써 평화를 유지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연개소문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당이 언젠가는 고구려를 침략해올 것이고 그러한 상황에서 유화책을 쓰는 건 미봉책일 뿐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연개소문이 쿠테타를 일으킨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당시 연개소문은 대당강경론자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는 단순한 쿠데타라기보다는 대당 굴욕외교로 일관한 영류왕과 그 세력에 대한 대당 강경파의 군사정변인 것이다. 즉 단순한 쿠데타가 아니라 다른 세계관을 가진 세력에 의한 혁명이었던 것입니다. ♣연개소문과 이세민 두 세계관의 충돌 연개소문의 일생에 있어서 최고의 라이벌은 당 태종 이세민이었다. 사실 연개소문과 당 태종의 격돌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그것은 두 개인의 충돌이라기 보다는 두 사람이 대표하는 세계관의 충돌이었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자신들을 하늘의 아들이란 뜻에서 천자(天子)라고 불렀다. 그리고 주변 여러 나라의 왕은 이 천자의 위임을 받아 정해진 영토를 다스리는 제후로 인식했다. 중국인들이 보기에 고구려는 제후국에 불과했으나 고구려는 스스로 천제의 아들, 즉 천자라고 선포한 것이다. 광개토대왕릉비 제1면 5행에는 “영락대왕(광개토대왕)의 은혜와 혜택이 하늘에까지 이르고, 대왕의 위력은 사해(四海)에 떨쳤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적어도 만주일대에 관한 천하의 지배자가 중국이 아니라 고구려임을 선포한 것이었다. 결국은 이 양자의 세계관은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당의 고구려 침공의 명분 당 태종은 서기 644년(보장왕3년, 당 태종 18년), 드디어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킨다. 군신들이 이 전쟁에 반대하자 이렇게 말한다. “근본을 버리자니 곁가지를 취하며, 높은 데를 버리고 낮은 데를 취하며,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취하는 이 세 가지는 모두 좋지 않은 것인데 고구려를 치는 것이 이러함을 나도 안다. 하지만 연개소문은 임금을 시해하고 대신들을 도륙했으니 한 나라의 백성들이 모두 목을 늘이고 구원해 줄 것을 기다리고 있다.”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시해하고, 대신들을 도륙해서 고구려 백성들이 구원해 줄 것을 기다리고 있다는 명분을 내걸지만 이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으로서는 내세울 수 없는 명분이었다. 수나라가 고구려에 패해 멸망할 즈음, 그는 아버지 이연과 함께 수나라에 반기를 들어 618년 당나라를 건국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런데 그는 이연의 둘째 아들이어서 아버지를 뒤이어 다음 왕이 되기 어려웠다. 야심이 많은 그는 626년 다음 왕이 될 형 이건성과 동생 이원길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아버지를 협박해서 스스로 당나라의 황제가 되었다. 이세민은 너무나 커다란 야심 때문에 패륜행위 조차도 서슴치 않았던 것입니다. 644년, 전쟁이 일어나기 1년전 당태종은 드디어 고구려의 내정을 간섭하기 시작했다. 당시 신라와의 화해를 도모했던 태종은 사신 현장을 보내 더 이상 신라를 괴롭히면 고구려를 공격하겠다고 협박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연개소문의 입장은 강경했다. 연개소문은 이렇게 말을 한다. “우리가 신라와의 간극이 벌어진 지는 벌써 오래다. 지난번 수나라가 쳐들어왔을 때 신라는 그 틈을 타서 우리 땅 500리를 빼앗아 그 성읍을 모두 차지했으니 그 땅을 돌려주지 않으면 싸움은 아마 그칠 수 없을 것이다.” 신라가 그 땅을 뺐은 것은 수나라가 침공했을 때가 아니라 진흥왕 12년이었지만 이 땅을 다시 되찾는 것은 고구려의 숙원이었다. 급기야 연개소문은 당나라 사신 현장을 옥에 가둬버린다. ♣동북아의 운명을 둔 대전쟁 결국 당태종은 고구려침략을 단행, 644년 12월 당의 원정군이 영주.. 지금의 조양지역에 집결하게된다. 당시 당이 선택한 전략은 수륙양면작전이었다. 645년 3월. 드디어 당의 군대는 고구려를 향해 출정을 한다. 당의 육군은 고구려의 신성공격에 실패하자 개모성,백암성,요동성을 비롯한 10개의 성을 빼앗고 군량미 60만석을 확보하는 전과를 올린다. 그리고 출정 3개월만에 안시성에 도착한다.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으로 들어가기위한 가장 중요한 관문인 안시성. 당태종 친정군을 비롯한 당군과 안시성을 도우러온 고구려지원군까지 합세, 수십만대군이 공방전을 벌인 현장이다. 68일간의 혈전- 그 결과는 고구려의 승리였다. 645년 전쟁에서 안시성전투는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져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양만춘이 당태종에게 맞서 성을 지켰다고 알고 있는 안시성전투 - 이 전투에서의 패배로 당나라군사는 서둘러 퇴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안시성전투가 벌어지기전까지만해도 당은 기세좋게 고구려수도를 향해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당은 안시성전투에서 왜 이렇게 쉽게 무너진 것일까요? 삼국사기에는 당이 퇴각하는 이유가 나옵니다. “요동지방이 일찍 추워 풀이 마르고 물이 얼어 병마가 오래 머물기 어렵고 또 양식이 다하려하므로 군사를 거둔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양식이 다하려하므로 군사를 거둔다? 당시 전투상황을 보면 안시성을 점령하기에 앞서 개모성과 요동성을 점령했던 당은 그곳에서 쌀 60만석을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시성전투에서 패배해서 돌아가는 것이 그로부터 2개월만입니다. 불과 2개월만에 그 많은 양식이 다 떨어졌다... 선뜻 이해가 가지않는데요... 이는 두가지로 가정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당이 전과를 올리기위해 처음부터 기록을 과장했을 가능성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 지역이 고구려군에게 재탈환돼 다시 식량을 빼앗았다는 것입니다.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바로 당이 선택한 퇴각로에 있습니다. 당시 당나라군은 요하하구쪽으로 퇴각합니다. 그곳은 늪지대가 많아 이동하기가 어려운 길입니다. 그런데 굳이 이 요하중상류쪽의 쉬운 길을 두고 어려운 길을 택한 겁니다. 그 이유는 뭘까요? 그 의문을 푼다면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645년 전쟁의 실상을 알 수 있습니다. 645년 당의 군대가 퇴각했다는 요하하류는 전체가 늪지대였다. <자치통감>에는 당태종이 직접 풀을 베어 길을 메우고 수레로 다리를 만들며 퇴각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왕이 직접 나서서 길을 만들어야할정도로 힘겨웠던 퇴각로. 이것은 당시의 전쟁상황이 어떠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조금 더 버티다가는 당태종이 생포되거나 당나라 모든 군사가 전멸할 수밖에 없는 그런 화급한 지경에 처해서 허겁지겁 목숨을 건지기위해서 퇴각한 그런 극악한 상황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당 태종과 연개소문 사이에 동북아시아의 운명을 두고 벌어졌던 이 대회전은 당태종에게 씻을 수 없는 수치만을 안긴 채 끝났다. 야사에 의하면 당태종이 양만춘에게 화살을 맞아 애꾸눈이 되었다고도 한다. 그 사실은 확인해볼 수 없지만 실제 기록에 의하면 645년이후 당태종은 각종 병에 시달린다. 황제가 병을 얻을 정도로 눈알이 뽑혔는지 다른 병을 얻었는지는 이제 확실하지않지만 황제자신이 병을 얻을 정도까지의 상황으로 가는 것은 당나라군사가 고구려에게 전면적으로 패배한 상황을 아주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645년 전쟁에서의 참패에도 불구하고 당태종은 끊임없이 고구려의 국경선을 넘어옵니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당태종과의 전쟁에서 단 한번도 진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당태종이 죽은 뒤 왕위에 오른 당고종도 집요하게 고구려를 쳐들어왔지만 연개소문은 고구려영토를 조금도 내주지않았다. 연개소문이 죽을 때 까지 무려 20여년간 끊이지않았던 당과의 전쟁. 그러나 고구려는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660년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군은 고구려를 압박한다. 그러나 연개소문의 전략앞에 또한번 무너지고만다. 이후 당은 연개소문이 죽을때까지 고구려를 한번도 침략하지못했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665년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했다. 연개소문의 죽음은 고구려의 운명을 바꿔놓는다. 연개소문의 카리스마.. 그 공백은 너무나 컸다. 20년, 기난긴 전쟁속에 묻혀있던 고구려내부의 갈등이 드러났고 신라와 당은 그 갈등을 이용해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결론 중국 기록들이 연개소문을 극악한 인물로 그린 것은 세계제국 당나라에 씻을 수 없는 패배를 안겨준 인물이기 때문이다. 당태종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고 결국은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 연개소문에 대한 중국측의 기록은 아주 극도로 나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 연개소문에 대한 기록은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의 입장에서 기술된 것이 오늘날 남아있는 것인데 신라 입장에서도 연개소문은 김춘추와의 연결을 거절했고 그리고 신라가 속국으로 섬겼던 당나라와 지속적인 긴장관계를 유지했던 그러한 인물이기때문에 신라입장에서도 부정적으로 기술했고 그 부정적인 기술을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는 오랫동안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연개소문이 죽은 뒤 3년만에 고구려는 패망했고 연개소문에 대한 기록도 묻힐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분명 위태로운 시기에 나라를 지킨 뛰어난 장수였습니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자료로는 그가 대내정치는 어떻게 했는지 당시 국민들에게는 어떤 권력자였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분명한 건 잔인무도하고 포악한 독재자로 연개소문을 그렸던 삼국사기의 기록은 당시 고구려의 적국이었던 당나라의 시각에서 쓰여진 왜곡된 기록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에게는 당나라의 조직적인 악마만들기에 희생된 영웅 연개소문을 재평가해서 복원할 필요가 있습니다. ---- end - 연 개 소 문 . 고구려 마지막 집권자로써 철권 정치로 당에 맞섰던 인물로 유명합니다 . 유일하게 만리장성을 넘어 황하 인근까지 다다른 인물로도 유명하고요 . [ 전성기의 고구려 군도 만리장성을 넘어 깊숙히 들어가지는 못했습니다 . ] 그에 대한 평가는 둘로 나뉩니다 . 실제로도 두 평가 자체가 한쪽만 틀리다는 말이 나오지만은 않고요 . 1 . 연개소문은 민족 제 1의 영웅 . 지나친 굴욕 외교로 나라를 망친 영류왕을 대신하여 당과 맞서며 고구려 , 우리 민족의 영광을 동북아시아 전역에 떨친 대영웅이라는 평가가 대부분입니다 . 단재 신채호 선생님 또한 " 연개소문은 우리 역사상 첫째로 뽑을 만한 영웅이다 " 라고 하셨고요 . 연개소문에 대한 영웅론이 당 태종을 죽음 직전까지 몰아갔다는 그 자랑스러움에서 나왔다는 점은 부인할수 없겠고요 . 특히나 현재 남아있는 경극에서 막리지의 칼을 " 비도 " 라 칭한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전술적 재능을 엿볼수 있으며 , 연개소문이 썼다고 전해지는 " 김해병서 " 등의 병서들은 고려 때 지방으로 내려가는 수령들에게 내리는 국왕의 하사품으로 필수목록 이었다고 합니다 . 어쨌든 전무후무한 전술적 재능을 지녔다고 생각합니다 . 2 . 고구려 경제 파탄과 정치 혼란의 주범 ! (1) . 양만춘의 반란 양만춘은 연개소문의 반란이 일어나자 , 반란을 일으킵니다 . 그리고 양만춘의 반란이 장기간 지속되었고 , 양만춘의 반란군을 " 완벽히 " 제압하지 못했다는 점 자체가 , 영류왕을 죽이고 한 반란의 후유증이 바로 평양성과 지방 성들이 멀어진 거라는 겁니다 . 그런 배경을 두고 생각해 보면 요동성과 비사성이 힘없이 발린건 이해가 가지 않나요 ? ( 2 ) . 평양성 포위 . 고구려 경제 파탄과 정치 혼란의 이유는 " 평양성 포위 " 에서 찾을수 있습니다 . 수도 포위라는게 뭘 의미하는 걸까요 ? 고구려 군이 전체적으로 다 패배하고 , 전장의 주도권을 빼앗겼으며 , 각지에서 제대로 맞서지 못했음을 의미합니다 . 수나라 113만 대군 앞에서도 " 포위 " 만은 당하지 않은 평양성이 , 그 반도 안되는 군사들 [ .. 대략 5만 ~ 10만 가량의 군사들에게 포위됐다죠 . ] 에게 매번 포위당하는 꼴을 보여줍니다 . 고구려 군이 사실상 1차 침략 이후로 막장테크 타면서 아예 대응을 못했다는 거죠 . 수도 포위가 가져다주는 파장에 대한 점은 여럿 알아볼 수 있습니다 . ( 3 ) . 경제 파탄 . 고구려는 연개소문 집권 이후 경제가 x판 됩니다 . 지방과 중앙간에 소통이 끊기고 , 지나친 전쟁이 일어나면서 , 인구는 매번 쭈욱 쭈욱 줄어들고 , 경제는 역시 x판 됩니다 . 이게 바로 영류왕이 옳다는 의견의 이유인데요 , 굴욕 외교의 파장은 분명히 있더라도 , 승전국인 고구려가 다시 전력을 회복할 만한 시간이 있었다면 , 그 후 왕에서 고구려는 다시 대전력과 풍부한 물자를 과시하며 중국과 맞서며 제 2의 전성기를 개척해 나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 [ 영토는 얻지 못했더라도 그 당시 고구려의 입지는 어엄청 향상 되었으니까요 ! ] 그러나 고구려는 결국 전쟁을 택함으로써 .. 막장의 열차를 타고 가다가 망국이 됐다는 의견입니다 . ( 참고로 이 3번은 충분히 반박의 여지가 있는 제 주관적 의견입니다 . ) ( 4 ) . 후계 문제 . 연개소문은 후계 문제를 참 오숑송 하게 만들어 놓고 죽습니다 . 최소한 남생에게 넘겨 줄 때는 자신의 모든 세력을 천천히 하나하나 넘겨 준 다음에 대막리지 자리를 넘겨 줬어야 함이 옳습니다 . [ 사실 남생에게 넘어간 내용물을 보면 연개소문과 남생의 세력차가 훤히 드러납니다 . ] 그 여파로 연남생은 요동의 세력을 대거 가지고 투항 , 결국은 그 후의 침공에서 부여 지역 , 요동이 한번에 와르르르르르르르 무너지게 됩니다 . [ 요동 지역에 여전히 남아있는 성들은 있었습니다만 당군을 막을 만한 세력은 아니었으니까요 . 남생을 중심으로 한 요동 세력의 이탈이 컸다고 봅니다 . ] 결국 남생 , 남건 , 남산 삼형제가 상콤하게 나라를 후루룩 말아잡수게 됩니다 .
642년 고구려 평양성의 쿠테타의 주인공 연개소문(淵蓋蘇文, ?∼665).
중국의 오랫동안가장 인기있는 경극이었던 살사문에 연개소문이 등장했었다. 당태종이 위기해 쳐했을 때 장수 설인귀가 나타나 막리지(연개소문)를 이기는 장면이다, 그러나 그 반역사적 표현이 북한의 요청으로 문제시되면서 중국은 연개소문을 극에서 아예 없애버렸다. 경극에서는, 저 두 장수가 당에 있었으면 천하가 두렵지 않다라고 하는 등 연개소문을 뛰어난 장수로 묘사한다. 지방경극에도 연개소문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경극에서 연개소문은 어떻게 묘사되고 있을까. 용맹한 장군이란 뜻의 비도, 이민족을 상징하는 등에 단 고기, 서쪽 즉 고구려를 뜻하는 청룡포, 피와 살기를 상징하는 붉은 수염 그리고 푸른 얼굴은 위엄과 잔악하고 포악한 성품을 상징한다. 김시민의 3800군사가 2만여 일군을 물리친 진주성 싸움은 일본 가부키에 등장한다. 일본에게는 가장 치욕적인 전투였다. 이런 정황에 비추어 중국 경극에 그가 등장하는 이유도 유추할 수 있다.
645년, 정관정요의 정관의 치를 이룬 중국사상에도 손꼽히는 당 태종과 고구려 연개소문의 접전이 시작된다. 동ㆍ서돌궐과 그 아래의 고창국 그리고 토번을 무찌른 그 시기에 당에 굴복하지 않은 나라는 고구려뿐이었다. 당은 돌궐과 고구려를 경계해서 644년 고구려의 내정을 간섭하며, 계속 신라를 공격하면 침공하겠다고 협박한다. 이에 고구려는 신라가 자국의 빼앗을 땅을 반환치 않으면 전쟁종결은 없다고 말하며 당나라 사신 장엄을 굴속에 가둬버렸다.
그리고 드디어 644년, 영주(조양)에 당군 10만이 집결, 645년 3월 출정하여 10여개 성을 빼앗고 6월 안시성을 공격한다. 안시성은 평양성으로 가는 가장 중요한 길목이었다. 68일간 혈전의 승리는 고구려의 것이었다. 성주 양만춘의 항전은 특히 유명하다.
사서에는 당이 양식이 다하려하여 군사를 거둔다고 했는데, 안시성 공방전에 앞서 개모성, 백암성, 요동성을 점령하며 당은 60만석의 군량미를 획득했으며 정작 안시성 공방전은 2달밖에 걸리지 않았다. 식량이 모자랄 리가 없다는 얘기다.
고구려는 곳곳에 성을 쌓고 전시에 가용한 곡식을 챙겨 성안으로 들어가고 들판의 곡식을 모두 태우는 전략, 들판을 깨끗이 한다는 뜻의 청야 작전을 펼쳐 보급로 차단 및 수성전을 행했다. 고구려는 당을 향해 육상과 해상에 일렬로 늘어선 방어성선을 갖추고 있었고 청야 전투를 행할 수 있었다. 이에 당은 배 400척을 건조해 군량미를 실어오게 할 만큼 대비한다. 4만 3천의 당 수군은 비사성을 공격하고 바로 평양성을 공격하려 압록강 어귀로 갔는데 이후 기록은 없다. 이는 요동에서의 육상작전의 차질과 고구려 수군의 활약을 상정케 한다. 고구려군 만여명이 한반도에서 산둥반도로 가는 길목에 있는 오호도를 공격한 기록 그리고 전후 당의 수군총관이 참수되고 책임자가 하옥되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요컨데, 당 수군은 고구려 수군에 막혀 군량비 수송에 실패하고 육군은 확보한 군량미 마저 다시 빼앗긴 것이다. 더구나 육상 보급로는 이전의 경험으로 원래 계획에 없었다. 때문에 식량없이 고립된 당군은 급히 요하하류 늪지대를 힘겹게 건너 만리장성 끝자락의 산해관(임유관)으로 퇴각한 것이다. 태종은 여기서 퇴각 후 처음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한다. 野史에 의하면 양만춘이 화살로 당태종의 눈을 맞추어 애꾸눈이 되었다 한다. 실제 기록에서도 이후 태종은 각종 병에 시달리다 4년 뒤 죽으며 요동을 치는 것을 그만두라고 유언을 남긴다. 당의 전면적 패배를 말한다.
삼국사기에는 개소문이 왕을 시해하고 그 몸을 토막내어 개천 속에 버렸다고 기록돼 있다. 그의 포악함을 강조한 것이다. 또 몸에 다섯 자루의 칼을 차고 다녀 주위에 사람들이 두려워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중국의 기록에 고구려인들이 다섯 자루의 칼을 차고 있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는 고구려 풍습이었고 나아가 많은 기록이 그가 쿠테타를 한 시점에 집중돼 왜곡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대로 군사집안으로 군최고 지휘자인 대대로직에 오른 개소문은 (지리상)아래 위로 압박받는 상황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당은 국내를 탄탄히 하자 고구려에, 수를 이긴 승리의 상징이었던 경관을 무너뜨리라고 하고 사신을 보내 고구려의 산천을 염탐케 한다. 그러나 이런 위급한 시기에 고구려왕 영류왕은 고구려 지도인 봉역도를 당에 보내고 경관을 헐고 세자까지 당에 보내 조공하는 등 당의 속국을 자처하는 정도의 저자세 친당책을 편다. 이는 특히 개소문과 같은 군사집단의 자국에 대한 자존심, 수를 멸망에 이르게 할 정도의 큰 전투를 이긴 자부심을 건드렸다.
신채호는 한발 나아가 고구려 군이 북경 깊숙이 까지 진출했다고 주장한다. 당나라때 고구려인이 이주했다는 기록이 있는 고려영이라는 지명. 군 주둔지란 의미인 영이란 한자, 마을 주변에 남아있는 성의 흔적과 해자, 성문 안쪽에 고려영이라는 비석이 있었다는 증언, 만리장성이 북방민족들에게 크게 장벽이 되지 않았던 사실(만리장성은 방어라는 상징적 의미나 중국을 의식적으로 구획한다는 의미 외에 실질적 방어선으로는 큰 의미가 없었다. 한곳만 무너지면 전체가 소용이 없었고 오히려 산재된 독립산성만 못했다)이나 광개토대왕 때 장성 안쪽 어양을 공격해 성을 쌓았던 전력 등에서 그 가능성은 충분하다. 신당서에는 고려첩자(고구려에 보낸 당의 첩자)가 막리지가 북경으로 올 것이라 말했다하며 실제, 북경 동쪽 200km지점에 황량대라는, 고구려군을 속이려는 거짓 식량 창고(고려포보라는 말이 남아 있음)가 있었다. 이런 거짓 작전은 고구려군의 일일 이동가능지가 아니면 소용이 없으니 이곳이 고구려군과 가까운 곳이었다는 얘기다.
이후 태종과 아들 고종은 계속 고구려를 침략하지만 한치의 땅도 빼앗지 못한다. 그럼 왜 영웅 개소문의 기록은 이렇게 나쁜 것뿐일까?
수당에게 대고구려전에서 최고의 문제는 보급이었고 때문에 신라와 연합한다. 고구려는 이에 대항해 백제와 연합해 당항성을 공격하고 왜에 집중적으로 사신을 보낸다. 즉 반당 연합전선을 구축한 것이다. 이런 노력으로 645년 당태종의 공격시 북방의 설연타(薛延陀)가 당의 배후를 치기도 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그는 외교전에도 뛰어난 감각이 있었던 것이다.
백제를 멸한 나당연합군은 662년 고구려를 공격한다. 하지만 당주력군이 사수전투에서 다시 개소문에게 패한 뒤로는 개소문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한번도 고구려를 침략하지 못한다. 665년 연개소문이 사망했다. 그의 카리스마, 그 공백은 너무나 켰다. 눌려있던 내부 갈등이 터져나와 큰아들 연남생(당태종 이연의 연자를 피휘해 천남생<泉男生, 혹은 전남생(錢男生)>으로 바꾸었고 연개소문의 성도 천으로 쓰여있다)이 당에 투항하고 곧 고구려를 공격하고 셋째 연남산과 둘째 연남건은 끝까지 저항하다 당에 포로로 잡힌다. 이런 내부갈등으로 668년, 고구려는 멸망한다. 당은 당연히 부정적 입장이었고 신라도 개소문이 김춘추의 연합제의를 거부하고 이후에도 적대적 관계였던 사정으로 인해 부정적 기록만 남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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