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궁녀는 전문직이었다 |
청와대 경내에는 칠궁이라는 건물이 하나 있다. 이 칠궁은 궁녀가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에 오른 이들을 모시는 곳이다. 궁녀의 신분 때문에 자신은 정실 왕비가 되지 못했지만 아들이 왕이 됐던 여인들이다. |
궁녀란 좁게는 상궁과 내인을 말하고 넓게는 무수리 같은 하녀들까지 포함한다. 평생을 궁궐 내에서만 생활할 수밖에 없었던 궁녀들의 삶은 어떠했으며 위상은 어느 정도였을까. |
1. 최고 자리에 오른 궁녀들 |
칠궁에는 7개의 사당이 있는데 후궁이 낳은 왕들이 자신들의 생모를 기리기 위해 만들었다. 가장 비천한 신분의 궁녀인 무수리였던 영조의 생모, 경종의 생모 희빈 장씨 등의 위패가 있는 곳이다. 칠궁의 주인공들을 만난다. |
2. 궁녀가 하는 일 |
궁궐은 왕과 신하가 만나 정사를 논하고 왕과 왕비 그리고 왕족들이 생활했던 곳이다. 이 곳 어디에 궁녀들도 있었다. 수라상을 마련하던 곳, 왕과 왕비가 함께 잠잘 때 옆방에서 숙직을 섰던 방, 바느질이나 빨래를 하던 곳 등이 궁궐 구석구석에 자리잡고 있다. |
3. 국가 공무원 궁녀 |
궁녀란 궁중에서 일하는 여성 관리라는 뜻이다. 조선시대의 궁녀는 500-600명에 이른다. 그녀들의 최고 보수는 오늘날로 치면 150만원 정도이다. 그들은 여성에게 관직의 길이 막혔던 시대에 국가에서 월급을 받는 공무원이었다는 이야기다. |
4. 궁녀의 선출과 교육 |
궁녀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처녀성을 확인 받아야 하는데, 그 방법이 매우 특이하다. 또한 나이, 신분, 건강 등 매우 까다로운 선출조건을 통과해서 궁녀로 선발되면 소속 부서로 배치되어 교육을 받는다. 이 배치기준과 교육내용은 궁녀들의 통제된 생활을 대변해 주고 있다. |
5. 궁녀의 스캔들 |
궁녀들은 궁궐에 들어온 지 15년이 지나면 관례식을 치른다. 궁녀는 왕을 위해 평생을 살아야 하는 여인이기 때문에 왕에게 시집간다는 의미를 갖는다. 신랑 없는 혼례식인 것이다. 관례식을 치른 궁녀들은 두 명씩 짝을 지어 한방을 쓰게 되는데 간혹 동성연애를 하기도 했다. 또 관료와의 간통사건도 벌어진다. |
6. 승은을 입은 궁녀 |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와 평생을 갇혀 지내는 궁녀들의 최대 희망은 승은을 입는 것이다. 승은은 곧 신분상승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왕의 눈에 띄어 왕자를 낳게 되면 후궁이 되어 권력을 손에 쥘 수 있다. 장희빈은 왕비의 자리까지 올랐던 궁녀였다. |
7. 궁 안의 또다른 실세 |
왕을 보좌하는 상궁은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그 영향력도 커서 정승들도 함부로 하지 못했다. 재산을 관리했던 상궁의 권한도 막강했다. 또한 문자 교육을 못 받은 대비들 옆에서 문서관리를 하던 궁녀들도 상당한 실세로 활동했다. |
8. 퇴출 궁녀 |
왕족 외에는 궁에서 죽을 수 없다는 궁궐법도 때문에 궁녀들은 나이 들고 병들면 요금문이라는 쪽문으로 나가야 한다. 늙고 병든 몸으로 궁궐을 나온 궁녀들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자손도 없고 그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울 곳곳에 그들이 만년의 쓸쓸함을 달랜 자취들이 남겨져 있다. |
1. 칠궁에 모셔진 왕의 어머니들은 궁녀 출신!~
사적 제 149호 칠궁(七宮).
이곳은 조선시대 일곱 후궁의 신주를 모신 곳이다.
비록 정식 왕비가 되진 못했지만
자신이 낳은 아들이 왕이 되었던 여인들.
그들은 궁녀였다.
"이 칠궁은 그동안 청와대 경내에 있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의 출입이 제한돼 왔었는데
이번에 공개될 예정이라고 해서 저희 역사스페셜이 먼저 취재를 해보았습니다.
이 칠궁은 궁녀들의 이야기가 깃들여 있는 곳입니다.
궁녀(宮女)하면 왕의 총애를 받기 위해 암투와 시기를 벌이는 존재이거나
또 왕과 왕비의 곁에서 시중을 드는 모습을 떠올리실텐데요,
이 궁녀는 언제부터 있었던 걸까요?
백제 의자왕과 삼천궁녀 이야기는 여러분도 잘 아실겁니다.
세종실록에 이 전설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의자왕이 신라군에 패하자 그 궁녀들이 바위로 달아나 스스로 떨어져 죽었다.
그래서 낙화대라 부른다"
이 기록으로 보건데 삼천궁녀는 좀 굉장된 것이라 하더라도
삼국시대부터 궁녀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격적인 궁녀는 고려시대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을 이어서 조선시대 체계적인 궁녀제도를 만들었고
그것은 그대로 조선말까지 이어졌다고 합니다.
궁녀란 좁게는 상궁과 내인을 말하고,
넓게는 무수리 같은 하녀들까지 포함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궁녀들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위치는 어디였을까요?
또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궁녀는 누구였을까요?
바로 칠궁안에 그들이 있습니다."
서울 종로구 궁정동 청와대 경내 칠궁.
평소 굳게 닫혀있는 이 문을 들어서면 오랫동안 굳게 닫혀있던 제실을 볼 수 있다.
이곳엔 일곱개의 사당이 있는데
후궁이 낳은 왕들이 자신들의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위패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추존된 왕 진종의 생모인 정빈 이씨.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
장희빈으로 더 유명한 경종의 생모 희빈 장씨.
추촌왕 원종의 생모인 인빈 김씨.
비운의 사도세자(장조)의 생모 영빈 이씨.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
그리고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 귀비 엄씨가 그 주인공들이다.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를 제외한 여섯명은 궁녀 출신들이다.
"후궁, 어머니가 왕비이지 않은 왕들도 상당히 있습니다.
그런 왕들의 생모는 절대 종묘에는 들어갈 수 없으나
그렇다고 일반 사당과 똑같이 모셔질 수도 없기 때문에
격을 높여서 '궁'자를 붙여서 서울의 여기저기 사당을 마련했던 것이죠."
- 홍순민, 궁궐전문가
육상궁.
그 중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는 무수리로 궁녀 중 가장 비천한 신분이었다.
영조는 무수리 출신 어머니에 대한 효심과 열등의식으로
즉위초부터 숙빈 최씨의 묘를 능으로 만들기를 원했다.
"영조는 늘 자신의 어머니, 숙빈 최씨의 신분이 미천하다는 것에 대해
상당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조는 왕이 된 그 이듬해 이곳에 사당을 짓고 이름을 '육상묘'라는 붙입니다.
왕의 사치지만, 막 바로 궁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는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 홍순민, 궁궐전문가
냉청정에는 영조의 어진이 보관되어 있었다.
영조는 그 어떤 곳보다 이곳을 자주 들렸다고 한다.
영조의 어머니에 대한 정이 깃들여 있다.
원래 육상궁을 제외한 궁은 서울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1908년 각 사당을 이곳에 모아 '육궁'이라 불렸고
1929년 순헌귀비 엄씨의 사당이 이곳에 옮겨오면서 '칠궁'이라 불리게 되었다.
칠궁에 모셔진 여섯명의 왕의 생모들.
그들은 궁녀로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었다.
2. 궁궐내 여성관리, 궁녀!~
주된 업무는 무엇이고, 월급은 어느 정도?~
"조선 왕조의 왕들은 조선 왕조의 정궁이었던 경복궁에서 정사를 봐왔습니다.
그러던 것이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소실되자
이후 300년간은 창덕궁이 나라의 크고 작은 일을 치루는 역사의 주무대가 되었습니다.
자, 지금 보시는 이 그림은 조선후기에 그려진 창덕궁의 모습입니다.
왕과 왕비, 또 왕족들이 어느 곳에서 생활했는지 한번 보시겠습니다.
이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은 내전이라고 하는데,
궁궐 뒷부분에 자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보시는 이곳은 희정당인데요, 왕의 침전으로 사용되는 곳이었데
순조 이후로는 왕이 공식 활동을 하는 그런 편전처럼 사용되었습니다.
이 희정당 뒤편으로 구중궁궐 아주 깊은 곳에 왕비가 생활하는 공간이 있었습니다.
바로 대조전입니다.
왕과 왕비가 동침하는 공간이 여기에 있지요.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내전의 동편에는 세자가 생활하는 동궁이 있었고,
또 서쪽 서편에는 왕대비전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곳 어딘가에 궁녀들이 자신이 맡은 일을 하던 그런 곳이 있었을 겁니다.
궁녀들은 이 넓디 넓은 궁궐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었을까요?"
각각의 전각이 즐비하게 늘어서있는 창덕궁.
왕과 신하가 만나 의논하고 정사를 보는 집무공간 뿐아니라
왕과 그 가족들이 모여 생활하는 전각들이 모여있다.
왕과 왕비, 그리고 왕족들은 궁궐내 각각의 전각에서 따로 독립적인 세대를 이루며 생활했다.
따라서 대전, 중궁전, 대비전 등의 궁녀들 또한 각각 따로 뽑았다.
그렇다면 궁녀들의 주된 근무 공간은 어디였을까?
조선후기에 그려진 궁궐의 평면도인 궁궐도형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특별히 궁궐 곳곳에는 소주방이라고 하는 곳이 많이 보이는데
임금의 수라상을 마련하거나 궐내 잔치때 음식을 마련하는 일을 했습니다."
궁녀들은 주로 의식주에 관계되는 일을 주어진 역할에 따라 분담해서 종사했다.
아침 저녁 수라와 잔치 음식을 만드는 일은 궁녀들이 맡은 중요한 업무 중 하나다.
"이 자리는 왕과 왕비의 침전이었던 대조전의 서쪽 행각 바깥에 있는 곳으로써
원래 임금의 수라상을 마련하던 소주방이 있었던 자리입니다.
그런데 1917년 왜정때 불타고 나서
다시 지으면서 서양식 부엌으로 개조되어 지어져 있기는 하나
여전히 임금님의 수라상을 준비하던 곳이었고,
그 일을 하던 나인들이 바로 그 옆 온돌방에 주무시던 곳으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 이강근 교수, 경주대 문화재학과
대조전은 창덕궁에서 가장 내밀한 왕비의 생활공간이다.
왕과 왕비가 잠을 자던 침전에 궁녀들의 특별한 업무가 있었다.
중앙에 큰방은 왕과 왕비의 침전이고
그 둘레에는 여러개의 작은방이 있다.
침전을 둘러싼 이 작은방에서 궁녀들은 숙직을 섰던 것이다.
각각의 작은방에 한 명씩 들어가 숙직을 섰는데 그곳엔 이부자리를 두지 않았다.
왕과 왕비가 함께 잘 때는 노상궁들이 숙직을 섰고
젊은 궁녀들의 접근은 금지되었다.
이 숙직은 지밀에서 했다.
지밀이란 말 그대로' 가장 지엄하고 중요하여 말 한마디 새어나가지 못한다'는 뜻으로,
왕과 왕비의 신변 보호 및 시중, 내전의 물품관리 의전 등을 담당하는 곳이다.
왕과 왕비가 거처하는 침전과 안사랑과 대청 등에서 근무하며
왕과 왕비를 보필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부서가 지밀이다.
왕과 왕비의 옷, 이부자리를 비롯한 궁중에서 소요되는 각종 의복과 침구를 제조하는 침방,
의복과 장식물에 쓰이는 수를 놓는 부서인 수방,
음료와 과자를 만드는 생과방이 있으며,
세수간에선 세수물과 목욕물을 준비하고 내전 청소를 전담한다.
세탁, 다듬이질, 다리미질, 염색을 담당하는 세답방까지 궁녀들은 각 부서별로 일했다.
"침전일과 대체로 수라간을 중심으로 해서 침방이라든지, 수방이라든지, 생과방이라든지
그렇게 궁녀들의 업무가 나누어져 있었던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 이강근 교수, 경주대 문화재학과
궁녀의 수는 얼마나 되었을까?
이익의 성호사설에 영조때 궁녀의 숫자는 684명이라는 말이 나온다.
"듣건데 이제 환관은 335명, 궁녀는 684명...
고종실록에도 궁녀의 수를 적어놓은 기록이 있다.
대전 등 각 궁의 궁녀를 다 합해서 480명
이 기록을 통해 조선시대 궁녀는 400~600명에 이르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전 - 시녀 100인
대비전 - 시녀 100인
중궁전- 100인
세자궁- 60인
세자빈궁- 40인
세손궁- 50인
세손빈궁- 30인
- <고종실록>
<대전회통(大典會通)>에 의하면
궁녀란, 궁중여궁(宮中女宮)의 별칭으로 상궁 이하의 궁인직,
즉 '궁중에서 일하는 여성관리'란 뜻이다.
국사편찬위원회.
궁녀들은 맡은 일에 따라 품계가 나눠져 있었다.
<경국대전>에 그에 대한 기록이 있다.
궁궐 여성들의 품계를 기록한 것을 내명부에서 볼 수 있다.
정1품 빈 이하로부터 종4품 숙원까지는 국왕의 여자로 후궁을 말하며,
궁녀는 정5품 이하 종9품까지 10등급으로 나누고
그 업무에 따라 품계가 달랐다.
"정5품을 양반관료와 비교한다면 참판 그 밑에쯤 되는
상당한 고위 양반관료는 아니지만 중견실무자로서
모든 업무를 총괄하는 책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신명호 박사,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궁녀들이 관리였다면 녹봉을 받았을 것이다.
태조실록에서 그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태상왕전 여관(궁녀)에게 월봉을 지급했다." - 태종실록
궁녀들은 매월 정기적인 보수로 쌀 3말, 그외 옷감 등도 특별히 하사받았다.
매월 - 쌀 3말.
매년 - 명주, 무명 각 1필, 솜 10근,
여름철 - 베, 모시 지급
우리는 장서각(藏書閣)에서 또 다른 단서를 찾았다.
1896년 궁중예산서(宮中豫算書)가 그것이다.
'여관 봉급 240원'
'여관 봉급 315원'
대전 소속 궁녀들에게 지급할 봉급 총액이다.
이때 궁녀들은 돈으로 월급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서류 하나는 궁녀 개개인의 월급을 적어놓은 명세서다.
궁녀들의 봉급은 어느 정도나 되었을까?
'리락원 이십원, 성호길 이십원, 류금윤 십원, 정원엽 십원, 이명 팔원...
우리는 앞의 자료와 순종때 지급된 월급명세서를 재구성할 수 있었다.
1926년 궁녀 월급 명세서.
김충년 196원, 천일청 176원, 장성원 142원, 최현식 60원, 박창희 77원, 김필순 50원...
한국 은행.
당시 가장 높았던 196원은 지금의 화폐가치로 치면 얼마나 될까?
당시 경제상황이 고려되어야 하기 때문에
화폐자체만으로는 과거와 현재의 동일가치를 정확히 환산할 수는 없다.
우리는 1926년에 80킬로그램에 해당하는 쌀가격과 현재의 쌀가격을 비교하여 환산할 수 있었다.
"저희가 과거와 현재의 쌀가격을 환산했을 때 1920년대 쌀가격은 20원이었습니다.
그러나 99년 현재 15만 9천원이기 때문에,
1920년대 196원은 오늘날 150만원을 상회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오경섭 조사역, 한국 은행 발권정책팀
1907년 궁내부비예산명세서.
궁녀들은 맡은 업무와 년차에 따라 월급이 달랐고, 품계에 따라 월급이 차등 지급되었다.
"실제로 궁녀는 조선왕조에서 정식으로 월급을 받는 소위 여성공무원이라 할 수 있어요.
또 그들을 전문직 여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어려서부터 궁궐에 들어와서 자기가 맡은 바 일을 평생토록 하는데,
특히 왕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수준높고 체계있는 자기의 전문적인 영역을 개발할 수 있게 되는 거죠."
- 이배용 교수, 이화여대 사학과
궁녀, 그들은 국가에서 월급을 지급받은 공무원이었으며 전문직여성들이었다.
3. 궁녀들의 선출과 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여관이라, 여성에게 관직의 길이 열려 있지 않았던 남성 중심의 조선사회에서
이 궁녀가 여성관료였다는 사실은 아마 잘 모르셨을 것입니다.
자, 지금 제 뒤에 보이는 그림은
정순왕후의 결혼식 행렬이 그려진 '영조정순가례도감의궤반차도'입니다.
이 그림을 자세히 한 번 볼까요!
왕비의 뒤로 따르는 수많은 행렬 중에서 궁녀들의 행렬이 보입니다.
궁녀들의 행렬을 좀 자세히 보겠습니다.
여기보면 말을 타고 가는 궁녀의 모습이 보이는데요,
기행내인(騎行內人), 말 그대로 말을 타고 가는 궁녀라고 되어있습니다.
결혼식때 예복인 장삼을 입고 있습니다.
또 그 뒤를 따르는 걸어서 가는 궁녀들이 보입니다.
보행내인(步行內人)이라고 합니다.
말을 타지 않은 것으로 봐서 그 지위가 좀 낮은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 뒤에 또 말을 타고 가는 이 궁녀는 누구일까요?
바로 상궁(尙宮)입니다.
역시 장삼을 입고 있습니다.
이 장삼은 보행내인 이하로는 입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자, 이것으로 봐서 궁녀들에게도 계급과 지위가 달랐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여성관리였던 궁녀, 이 궁녀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궁녀들의 선출과 교육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경기도 군포서 당동.
40여 년동안 궁중 풍속에 대해 연구해온 김용숙 교수(전 숙명여대 교수).
그는 고서의 기록과 실존했던 상궁들의 고증을 토대로 궁중 풍속을 연구하는 작업을 해왔다.
우리는 궁녀를 몇살에 뽑는지 김교수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각 부서별로 그 나이가 달랐다.
지밀은 4~5세,
침방과 수방은 7~8세,
그외 부서는 13세 미만으로 궁녀는 어린 나이에 뽑혀 들어왔다.
* 지밀, 침방, 수방의 견습내인 생각시
" 지밀은 왕의 눈에도 닿기 쉬운 자리이고,
궁녀의 제일 대표고, 그러니까 교양도 왕자, 왕녀 못지않게 배운다.
네살 때부터, 말 익힐 때부터 들어와서 후천적인 교육이라고 그럴까,
낳는 것만 밖에서 낳았지 궁중안에서 길러지는거니까,
품격이나 생활관습이나 모든 행동이나 이런 것들이 궁중화 돼 있다고 생각한다."
- 김용숙 교수, 전 숙명여대 교수
그렇다면 궁녀의 출신성분은 어떠했을까?
예종 때 궁녀의 신분에 관한 기록이 있다.
이때만해도 명확한 기준이 없었던 듯 하다.
"시녀도 양반관료 첩의 딸과 양인의 딸을 뽑아서 정하소서" - 한명회
"시녀의 일은 그때 그때 임시로 선택하고, 반드시 법을 미리 정할 필요는 없으며" - 신숙주
- <예종원년>
그러다가 조선 중기 효종 때엔 궁녀를 양가의 딸 중에서 뽑았다.
"내수사에 명하여 양가의 딸을 뽑아들여 궁녀로 삼게 하였다." - 효종 4년
"조선초기에는 관청에 여자종을 선발하기도 하고
기첩 소생의 딸을 뽑아가기도 했어요.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서 양가집의 규수들이 궁궐로 선발되어 들어가는 경우가 허다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일찌기 민간에서 궁녀로 뽑히지 않으려고 조혼을 하는 풍습도 일어나고 그랬어요."
- 이배용 교수, 이화여대 사학과
궁에서는 되도록 양가의 딸을 궁녀로 뽑고자 했으나 폐단이 생기자
영조는 양가의 딸을 궁녀로 뽑지 못하도록 명문화시켰다.
"궁녀는 다만 각 관청의 노비로서 선입하고 양가의 딸은 일체 뽑지 마라." - 속대전 형전
"상인계급들이 많이 들어왔지만, 그런 사람들은 서울에 있는 공상, 이런 계급이 들어왔고,
침방까지는 그래도 중인계급을 썼다는 거예요."
- 김용숙 교수, 전 숙명여대 교수
궁녀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할 절차가 있다.
처녀성(앵무새 감별)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12~13세에, 당시로선 성숙한 나이에만 실시한 것으로
앵무새의 피를 팔에 떨어트려 피가 묻지 않으면 처녀가 아니라해서 탈락시키는 것이다.
* 궁녀의 조선
1. 선조에 죄인이 없어야 한다.
2. 선조 또는 근친에 역지를 앓은 사람이 없어야 한다.
3. 첫번째 부인의 딸이어야 한다.
4. 가까운 친척 중에 결혼을 두번한 사람이 없어야 한다.
왕을 가까이서 모셔야 하고,
또 왕의 여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궁녀의 선출은 조건이 까다로웠다
서울 종로구 원서동, 궁중음식연구원.
궁중음식 기능보유자인 황혜성씨.
그는 주방상궁에게서 궁중음식을 전수받았다.
그의 스승은 소주방에서 음식을 담당했던 한희순 상궁.
궁녀들이 어떻게 일했는지 황혜성씨는 스승인 한희순 상궁에게서 전해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손을 보고서 요게 일하던 손인지, 수나 놓고 바느질이나 할 깨끗한 손인지 아신대요.
손이 거친 사람을 보면 너는 세답방이나 가라 하고,
아무튼 13살에 들어가 그렇게 운명이 정해지는 거예요.
큰방상궁들이 나와서 얼굴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맵시를 보는 것이 아니라, 손을 보고서 갈 자리가 정해졌대요."
- 황혜성, 궁중요리기능보유자
과정 하나하나에 정성을 쏟아야 하고, 까다로운 궁중 법도를 익혀야 가능했던 것이 궁중일이었다.
궁녀는 일단 소속부서에 배치되면 철저한 도제식 교육을 받고 길러졌다.
"그러니까 각 부서에 소속이 되어잖아요.
주방상궁 밑에 들어간 사람은 주방에서 파나 다듬고,
뭐 가져오라하면 가져오는 정도의 일을 하며, 그렇게 그 일을 십년을 해야 해요.
혼자서 독립해서 하는 게 아니지요."
- 황혜성, 궁중요리기능보유자
'쥐부리글려'란 궁녀들에게 입조심을 시키기 위한 교육으로
그해 입궁한 견습 내인들을 세워놓고
내관들이 횃불을 들이대며 입을 지지는 시늉을 하며 위협을 하던 궁중행사였다.
"제1장 제1조가 견습 내인들에게 첫날 하는 말이
"궁중은 무서운 곳이니까 말 한마디도 하지말고, 본 것은 본 곳에 두고, 들은 것은 들은 데 두어라"
- 이배용 교수, 이화여대 사학과
"상궁들도 아주 조용조용 말해야 하구요, 그리고 둘이서 한방 쓰게 되어있어요.
바깥에 소리가 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둘이서 말을 해도 아주 조그맣게 소근소근 말했어요."
- 황혜성, 궁중요리기능보유자
궁녀는 궁중법도는 물론, 맡은 업무이외에
기타 교양을 쌓기 위해 철저한 수양과정을 받아야 했다.
마치 활자로 인쇄한 듯한 이 필체는 궁녀들이 쓰던 궁체다.
궁체연구에 평생을 바쳐온 김진세 교수.
그는 궁체를 궁녀들을 수양시키는 또 하나의 수단으로 보고 있다.
"한마디로 이야기 하면 자기를 버리는 것이다.
자기를 버리면 어떻게 하느냐,
자기를 버리는 대신에 모든 정성과, 모든 힘과 모든 충성심을 윗전을 위해 바치는 것이기 때문에,
글자의 획에 끝마무리까지 정성, 충성심, 정숙, 온화함 등 여성이 지켜야 할 모든 미덕이 다 들어있는 것이죠.
그러기 때문에 이 궁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자기 개성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도 없어요. "
- 김진세 교수, 전 서울대 국문과
어린 나이에 궁궐에 들어와 상궁에게 전문교육을 받으며 키워진 궁녀들.
궁체는 조선시대 궁녀들이 받았던 엄격한 규율과 통제된 생활을 대변해주고 있다.
4. 죽을 때까지 왕의 여자로 혼자 살아야 하는 궁녀의 운명!~
"궁녀들이 그 맡은 바 일이 다 달랐듯이 그 직위에 따라서 그 복장도 조금씩 달랐습니다.
궁녀들이 어떤 복장을 하고 있었는지 한번 살펴볼까요.
먼저 내인이 되기전 견습내인입니다.
노랑저고리에 남색치마를 입었구요,
이들은 생머리를 매었기 때문에 '생각시'라 불렀습니다.
머리모양을 보면, 곱게 빗어서 양옆으로 두갈래로 땋아서 뒷머리에 하나로 묶어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 끝에 댕기로 붙였습니다.
입궐한 지 15년이 지나면 내인이 됩니다.
내인이 되면 머리모양부터 바뀝니다.
땋은 머리에서 얹은 머리가 되구요, 옷은 옥색저고리에 남색치마를 입습니다.
내인에서 다시 15년이 지나면 상궁이 됩니다.
상궁의 머리장식은 개구리모양의 첩지를 달고 있습니다.
또 옷은 옥색저고리에 남색치마, 그리고 당의를 입고 있습니다.
궁녀들은 너댓살 어린나이에 부모곁을 떠나 낯설고 엄하기만한 이 궁궐에 들어와
상궁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30년이 지나야 했습니다.
평생을 갇혀 살아야 했던 궁녀들.
어떻습니까? 이 궁녀들의 생활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궁궐에 들어와 15년이 지나면 견습내인들은
관례식을 치루고 정식 내인이 된다.
이때부터 궁녀로서 본격적인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관례식은 곧 성인으로 독립하는 것을 의미한다.
궁녀에겐 이 관례가 사실상 혼례이기도 했다.
궁녀는 평생을 왕을 위해 살아야 하기 때문에 왕에게 시집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관례는 신랑없는 혼례식인 것이다.
"스승이 옷을 잘해서 입히면,
그것을 입고 고종황제 앞에 가서 큰절을 하고 나면, 그분이 신랑이예요."
- 황혜성, 궁중요리기능보유자
관례식을 치루고 난 궁녀는
스승상궁으로부터 독립해, 두명씩 짝을 지어 한방을 쓰게 된다.
"같은 처소끼리는 절대 안된답니다.
싸움이 날까봐 그러는지, 예를 들면 세수간하고 소주방 내인이면 둘이 같이 살 수가 있는데
뭐랄까 룸메이트라고 할까, 외로운 길을 둘이 살아가는데..."
- 이배용 교수, 이화여대 사학과
동거하는 궁녀들끼리 간혹 동성연애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연산군일기에는 궁녀들의 동성연애에 관한 기록이 있다.
"선왕조의 교붕(동성애)의 풍속을 개혁하고자 했는 바 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범하는 자가 많다." - 연산군 10년
또한 실록에는 궁궐을 출입하는 관리와 궁녀간의 간통 사건도 간간히 등장한다.
"궁녀와 간통한 별시위 이영림에게 두 등을 감하도록 하다." - 세종 21년
"궁녀 장미와 사사로이 수작하고 왕래한 이인은 여연에 귀양보내고 김경재는 무창의 관로로 삼다." - 세종 26년
"궁인과 환시가 이런 죄를 저질러도 한결같이 덮어두었기 때문에
대궐에서 해산하기도 하고, 장번 중관이 방자하게 침실의 가까운 곳에서 교간하기도 하였으니..." - 정조 원년
한번 궁궐에 들어오면 궁녀들은 평생 궁궐에서 갇혀 살아야 했다.
그런데 예외가 있었다.
가뭄이 들면 궁녀를 내보내 살게 했다.
세종조에는 여러 차례에 걸쳐 궁녀들을 수십명씩 출궁시켰다.
"중궁의 시녀 7명, 무수리 6명, 동궁의 시녀 2명을 내어 보내게 하니
또한 가뭄을 걱정한 까닭이다." - 세종 18년
그 이유는 뭘까?
"흔히 전통시대의 도는 음양의 조화가 어그러졌을 때 일어난다고 보는 것입니다.
가뭄이라든가 천재가 일어났을 때 궁궐에서는
너무 어릴 때 궁궐에 들어와 갇혀 사는 여인들의 어떤 원한이 쌓여있지 않는가 하여,
그런 의미에서 궁녀들 몇몇을 궁궐밖으로 내보내면서
그것을 좀 풀어주고 음양의 조화를 모색해가는 그런 절차도 있었습니다."
- 이배용 교수, 이화여대 사학과
그러나 궁밖으로 나왔다고 생활이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궁밖으로 나왔다고 궁녀는 다른 남자와 살 수 없었다.
"사헌부에서 우정승 조영무의 죄를 청하였으니 출궁한 여자를 첩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 태종실록
"궁녀는 국왕옆에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국왕의 여자가 될 가능성이 높은 여성들이었습니다.
국왕옆에 있었다는 하나만으로
출궁이 되어도 신하들은 감히 범접을 못하게 했고 궁녀들은 수절을 하게 했습니다."
- 신명호 박사,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경국대전>에 조정의 관리로서 궁밖에 내보낸 궁녀를 데리고 산 자에게
곤장 100대에 처한다는 규정이 보인다.
"조정의 관리로서 궁중에서 내보낸 궁녀를 데리고 사는 자는 장 100에 처한다." - 경국대전 금제조
궁녀는 궁궐과 자신을 얽매는 굴레속에서
외부와의 인연을 끊고 차단된 채 외롭고 쓸쓸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
5. 궁궐에 또 다른 실세가 될 수 있었던 궁녀들!~~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와 평생을 갇혀 살아야 했던 궁녀들.
그들에게 최대의 희망이 있다면 왕의 승은을 입는 길일겁니다.
왜냐면 왕의 총애를 받고 승은을 입게 되면 그들의 위상은 물론 대우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시중을 드는 입장에서 시중을 받는 입장으로 변하기 때문이지요.
또 후궁은 왕비처럼 간택을 해서 뽑기도 했는데
궁녀는 일의 특성상 왕을 접할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이런 간택 절차가 없어도 후궁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궁녀가 승은을 입어 왕자녀를 낳게 되면은
종4품 숙원에서 높게는 정1품의 빈, 즉 후궁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400~500명의 궁녀들 속에서 왕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는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을 겁니다.
따라서 왕의 승은을 입는다는 것은 궁녀들이 권력을 쥐는 일이었을 겁니다."
칠궁엔 왕의 승은을 입고 권세를 누린 대표적인 인물이 있다.
바로 장희빈이다.
장희빈은 숙종의 총애를 얻어 왕자를 낳고, 왕비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경종을 원자, 또 세자로 책봉하는 과정에서
당시 서인과 남인 사이에 심각한 당쟁,
환국을 불러오는 그 정치적 소용돌이의 중심에 서 있었던 인물이구요,
또 당시에 왕비였던 인현왕후와 왕비의 자리를 주고받는 상황에서,
다시말해 인현왕후가 쫓겨나고 희빈 장씨가 왕비가 되었다가,
다시 쫓겨나고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희빈 장씨는 죽음을 당하는
그런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밟았던 분입니다."
- 홍순민, 궁궐전문가
숙종은 이후 후궁을 왕비로 승격시키는 것을 법으로 금했다.
"이제부터 나라의 법전을 명백하게 정하여
어빈(후궁)이 후비의 자리에 오를 수 없게 하라" - 숙종 27년
승은은 곧 신분상승을 의미한다.
그것은 궁녀들의 최대 희망이었다.
"치마를 뒤집어 입고 나오면 승은을 입었다는 말이 있었거든요.
삼축당 김씨(고종의 후궁)가 그래요.,
불러서 올라갈 때는 만인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려서 투기와 안 되기를 바라는....
치마까지 뒤집어 입지 않아도 다 소문 난데요. 몇분안에...
얼마나 바라는 일이었겠어요."
- 김용숙, 전 숙명여대 교수
왕의 승은을 입기만하면 젊은 궁녀도 일약 특별상궁으로 뛰어오르게 된다.
"왕의 승은을 입고 또 아주 행운이 있어 왕자나 왕녀를 생산하게 되면
품격이 상승해서 정1품에서 정4품까지 후궁의 대열에 오를 수도 있고,
또 자기 친정 가솔들이 궁궐에 들어오는 발판이 될 수도 있지만,
그런 영광도 있을 수 있지만 또 한편에서는 왕비의 질투라든가, 궁녀들의 시샘을 받을 수 있고,
또 정치적인 파란을 탈 수도 있는데, 우리가 그런 후궁들을 역사속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는 것이죠."
- 이배용 교수
승은은 왕과 궁녀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왕은 궁중내에서 남성 통치자로서 남성의 의례를 대표하고
왕비는 여성 통치자로서 여성의 의례를 대표하는데,
그런 상황에서 궁녀들은 왕비를 도와서 여성의 의례를 담당하고 여성의 노동을 담당하지만,
동시에 국왕이 궁녀들을 자기 여자로 만들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그런 공적인 관계가 순식간에 사적인 남녀관계로 변화될 수 있는
그런 이중적인 관계가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신명호 박사
낙선재.
여든 두살의 이해원 공주,
고종의 둘째 아들인 의친왕의 딸이다.
어릴 때 살던 사동궁에서 왕이 살던 본궁으로 들어왔을 때를 기억하고 있다.
"이 방에 피아노가 있었다구.
조그만 일본여자가 교사 노릇을 했어.
우리가 여기 들어와서 놀았어."
그녀가 기억하는 상궁들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젊은 상궁들은 우리를 귀여워 했어요.
이제 생머리를 하고 들어오면 놀리고 노래하라고 그러고, 춤추라고 그러고 우릴 놀리고 귀여워했어요.
그렇게 위엄있게 안했어요.
위엄있는 내인들이 있죠. 큰방내인 큰방상궁, 대전상궁이나 하는 분들은 위엄을 갖췄어요."
- 이해원공주, 의친왕 딸
상궁들은 왕의 측근에서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으며
그 영향력이 커 정승들도 함부로 하지 못했다.
실제로 왕이 총애하는 궁녀에게 줄을 대기 위해 뇌물을 주었던 사례를 실록에서 찾을 수 있다.
"왕이 총애하는 궁녀 녹수에게 뇌물을 주다." - 연산군 8년
"부자들이 왕이 사랑하는 궁녀에게 뇌물을 주자 이런 명이 내려진 것이다." - 연산군 8년
어명을 받들고 내명의 재산을 관리했던 제조상궁은
정치적으로도 그 영향력을 발휘하는 위치에 있기도 했다.
특히 수렴청정 시기 대비전의 궁녀들의 권세는 막강했다.
"조선시대 여성들의 문자교육은 사실상 없습니다.
대비들은 수렴청정을 해서 국정을 총책임지지만
상소문이라든가 명령서, 또 한문으로 된 공문서를 읽을 수도 없지요.
이때 대비옆에서 각종 공문서를 번역해주고 또 대비의 명령을 한문으로 작성해주는
이런 역할을 글자를 아는 궁녀들이 담당했습니다.
이런 궁녀들은 대비의 막후에서 상당한 권력을 장악했다고 생각합니다."
- 신명호 교수
권력의 최측근에 서 있던 궁녀.
그들은 궁 안에 또 다른 실세로 자리하고 있었다.
6. 궁녀들은 어떻게 노년을 지냈을까?~~
"궁녀는 입궁을 하게 되면 평생을 왕실을 위해 봉사를 해야 했습니다.
한번 입궐하면 나갈 수 없는 게 바로 궁녀들이었습니다.
이 글은 어느 궁녀가 지은 시조입니다.
'연못에 든 고기들아. 누가 너희들을 몰아다가 이곳에 두었니,
북쪽 바다 넓고 맑은 못을 어디에 두고 이 못에 와 있느냐.
들고는 못나가는 처지는 너와 나 무엇이 다르랴."
궁궐속에 갇혀 사는 자신들의 처지를 연못속에 물고기에 비유를 한 것인데요,
구중궁궐 꽃다운 궁녀 하면 얼핏 화려한 생활이 연상될 지 모르지만
정작 당사자에게 이 궁궐은 창살없는 감옥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외부와 단절된 채 평생을 궁궐에서 살아야 하는 궁녀도
나이가 들어 병이 들면 궁궐밖으로 나와야 했습니다.
마땅히 거처할 곳이 없던 궁녀들에게 이것은 또 다른 어려움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궁녀들은 자신들의 집이나 마찬가지였던 이 궁궐을 나와 어디서, 어떻게 만년을 보냈을까요?"
창덕궁의 뒷문인 요금문은 환자나 죽게 된 사람이 나가는 문이다.
왕족 이외엔 궁에서 죽을 수 없다는 왕실 법도 때문에
궁녀들은 나이 들고 병들면 이 요금문으로 나가야 한다.
"병들게 되면 가마에 태워서 산 것처럼 서쪽문으로 데리고 나갔대요.
그러니까 늙어도 죽어도 제대로 대접을 받기 어려웠던 거죠."
- 황혜성 궁중요리기능보유자
그렇다면 궁녀들은 궁궐에서 나와 어디서, 어떻게 살았을까?
서울 은평구 갈현2동 궁말.
궁녀들이 모여 살아서 궁말리라고 불리웠던 곳이다.
숙종때부터 궁녀들이 모여 살기 시작해
조선시대말까지 이삼십 가구를 이루었다고 한다.
"서오릉에 숙종을 모시면서, 왕을 생전에 모신 대전에 내전에 궁녀들이 여기 나와 살게 되었죠.
더군다나 정년퇴직하면 묘가 가까워 참배하기도 좋고 하니까 여기 와서 많이 살았죠."
- 이성영, 향토사학자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이곳엔 90년대초까지 상궁의 묘가 있었던 곳이다.
궁녀들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자손이 없기 때문에 그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장되는 부분도 그냥 원형을 옮겼는지,
화장을 했는지 이것은 지금 저희들이 알 수가 없는 부분입니다.
- 정동일, 고양시 문화재전문위원
서울 상계동에 자리한 학림사.
학림사 입구엔 특별한 부도가 있다.
부도는 스님들의 사리나 유골이 안치되어 있어야 한다.
"여기 보면 '상궁 연화의 부도탑'이라고 음각이 되어 있습니다."
- 이강남, 향토사학자
놀랍게도 이 부도의 주인공은 궁녀였다.
상궁연화(尙宮連花), 그녀는 궁궐에서 나와 이곳에서 만년을 보낸 궁녀였다.
"여기 몸담고 있었던 상궁이 데리고 있었던 노비를 통해 저희들이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죠.
그때 노비 이야기로는 여기에 많은 상궁들이 몸담고 있다가 만약 그분들이 생을 마치게 되면
바로 요 밑 300미터 아래에 화장터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화장을 했다고 합니다."
- 최도원 스님
서울 강남의 봉은사.
이곳엔 또 다른 궁녀의 흔적이 남아있다.
영산회상도.
석가여래상 뒤의 불화가 바로 그것이다.
"망상궁, 돌아가신 상궁이 시주를 했던 것 같구요,
그 외에도 상궁 신사생 김씨 청정화(尙宮辛巳生金氏淸淨花)도 옆에 적혀 있습니다.
고종이 재위해 계셨던 40여 년 시기에
전국에 불화가 약 220점 정도 그려졌다고 조사가 되는데
그 220점 중에는 약 10% 22여 점에 궁녀의 이름이 보입니다.
그 궁녀들은 단순히 궁녀 누구라고 하지않고 불명까지도 등장됩니다. "
- 김상현 교수, 동국대 사학과
마땅히 의지할 곳이 없었던 궁녀들은 말년을 절에 의탁하여 생을 마감했던 것이다.
서울시립중계노인복지관.
이곳엔 마지막 상궁 한 분이 살고 있다.
의지할 곳없이 떠돌다 이 복지시설에서 만년을 보내고 있었다.
마지막 왕 순종황제의 윤비를 모셨던 성옥염 상궁은 어떻게 이곳으로 오게 되었을까?
"정확히는 잘 모르지만, 여기 계신 성옥염 할머니는 봉은사 절에 계시다가 중풍이 걸려
관리가 힘드시니까 저희 복지관쪽으로 의뢰를 하셔서 오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 박희삼 사회복지사
성옥염 할머니의 침상은 비어 있었다.
중풍이 악화돼 병원으로 옮긴 것이다.
서울 강남병원.
성옥염 마지막 상궁(81세)과 황혜영 궁중요리기능보유자.
두사람은 서로를 기억하고 있었다.
이 시대 마지막 상궁은 외롭게 자신의 생을 이어가고 있었다.
"규율과 법도에 얽매여 외롭고 쓸쓸한 생을 했던 궁녀들.
그들은 어쩌면 봉건적인 왕조사회의 희생자였습니다.
그러나 여성의 활동이 제약되었던 시기, 왕과 왕비를 보필하던 임무와 함께
최상층의 궁중음식과 복식, 그리고 궁중문학을 보존해온 궁녀들의 역할이 과소평가되어선 안 될 것입니다.
궁녀들은 나라로부터 정식 월급을 받고 일한 여성들이었습니다.
그녀들은 어느 한 분야에서의 장인이었고, 최고의 전문직 여성들이었습니다."
- 유인촌의 역사스페셜.
조선시대 궁녀는 전문직이었다
칠궁 사당
이 칠궁은 궁녀에 관한 얘기가 깃들여 있는 곳이다.
궁녀하면 아마도 왕의 승은을 입기 위해
암투와 시기를 벌이는 모습이거나 아니면 왕과 왕비의
곁에서 시중을 드는 시녀의 모습이 먼저 떠오르지
않을까 싶다.,
이 궁녀들은 언제부터 있었던 것일까?
* 삼국시대
백제 의자왕과 삼천 궁녀의 전설은 -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얘기이다.
-세종실록 책 표지내용 한문으로 나온다
세종실록에 그 전설이 기록을 보면
'의자왕이 신라에게 패하게 되자 궁녀들이 이 바위로
달아나 스스로 강물에 떨어져 죽었으므로 낙화대라
하였다'
이 기록으로 볼 때 삼천궁녀는 과장이라 하더라도
삼국시대에 궁녀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고려시대
본격적인 궁녀제는 고려시대때 시작됐다고 한다.
그것을 이어 조선시대 초기에 구체적인 규정과 체제를
마련한 것이라고 한다.
이때 정비된 궁녀제는 조선말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궁녀의 범위
궁녀란 좁게는 상궁과 내인을 말하고
넓게는 무수리나 비자같은 하녀들까지 포함된다.
그렇다면 궁녀가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는 어디였을까?
그리고 궁녀로서 최고의 위치에 오른 사람은
과연 누구였을까요?
바로 이 칠궁안에 그들이 있다 *
칠궁이란 무엇인가?
- 그곳엔 궁녀로서 최고의 위치에 오른 이들이 있다
서울 궁정동, 청와대 경내 -
평소 굳게 닫혀 있는 이 문을
들어서면 오래된 재실을 볼 수 있다
이곳엔 7개의 사당이 있는데 후궁이 낳은
왕들이 자신들의 생모를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
7궁의 위패
그렇다면 이 위패의 주인들은 누구일까
-정빈이씨 진종 생모위패
추존된 왕 진종의 어머니인 정빈 이씨-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
장희빈으로 더 유명한 경종의 생모 희빈 장씨-
추존왕 원종의 생모인 인빈 김씨
비운의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귀비 엄씨가
그 주인들이다.
이중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를 제외한
나머지 여섯명은 궁녀 출신이다.
홍교수 "후궁 어머니가 꼭 왕비이지 않은 왕들도 상당
히 있다 그런 왕들의 생모는 절대로
종묘에는 들어갈 수 없으나 그렇다고 일반
사당하고 똑같이 모실 수 없기 때문에 격을
높여서 궁자를 붙여서 서울의 여기저기에 그런
사당들을 마련했던 것이다."
그중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는 무수리로
궁녀 중 가장 비천한 신분이었다
육상궁 영조는 무수리 출신의 생모에 대한 효심과
열등 의식으로 직위초부터 숙빈최씨의 묘를
능으로 만들길 원했다
홍교수 "영조는 자기 어머니 숙빈 최씨의 신분이 미천
하다는데에 대해서 상당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그러기 때문에
영조는 왕이 되던 그 이듬해 원년에 이곳 사당
을 짓고 육상묘라고 하였다 왕의 사친이지만
바로 궁이라고 붙이기는 어려웠던 것 같다."
냉천전 사당 냉천정에는 영조의 어진이 보관돼 있었다
영조는 그 어떤 곳보다 이곳을 자주 들렀다고
한다.영조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의 정이
깃들어 있다
사당,덕안궁 원래 육상궁을 제외한 나머지 사당은
서울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1908년 각 사당을 이곳에 모아 육궁이라고
불렀고 1929년 순헌귀비 엄씨의 사당이
옮겨 오면서 칠궁이라 불리게 되었다
위패 칠궁에 모셔진 여섯명의 왕의 생모들
그들은 궁녀로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었다.
조선전기 임금들은 주로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에서
정사를 보았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소실되자 이후 3백년간은
창덕궁이 나라의 크고 작은 일을 치르는
역사의 주무대가 되었다.
왕과 왕비 왕족의 생활공간
동궐도
이것은 1820년대 조선 후기에 그려진 창덕궁의 모습
인데요, 왕과 왕비 그리고 왕족들은 주로 어디서
생활하였을까?.
왕과 왕비의 일상적인 생활 공간을 내전이라고 하는데요,
궁궐의 뒷부분에 자리하고 있다.
희정당
이곳 희정당은 원래는 왕의 침전이었으나, 순조이후로는 왕이
공식활동을 하는 곳인 편전처럼 사용되었다고 한다.
대조전
이 희정당 뒤편, 구중 궁궐 가장 깊은 곳에
왕비가 기거하고 생활하던 공간이 있다. 대조전이다.
왕과 왕비가 동침하는 침전이 바로 이곳에 있다.
왕과 왕비의 생활 공간인 내전의 동편에는 세자의 활동
공간인 동궁이 있었다. 서편 뒤쪽으로는 왕대비전이 있었다고 한다.
궁녀의 공간과 할 일
그렇다면 궁녀들도 이 일대 어디에선가에서 생활하며 자신들이 맡은 일을
했을 텐데요, 궁녀들은 이 넓디넓은 궁궐안 어디서-
과연 어떤 일을 했던 것일까 *
궁녀의 임무 하는일(독특한 일 중심)
-체계적이었으며 월급까지 받았다
궁궐 외경
각각의 전각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는 창덕궁
인정전
왕과 신하가 만나 의논하고 정사를 보는
집무 공간 뿐 아나라 왕과 그의 가족이 생활
하는 전각들이 모여 있다
왕과 왕비 그리고 왕족들은 궁궐내에서 각각의
전각에서 따로 독립세대를 이루며 생활했다.
대조전
따라서 대전 중궁전 동궁전 대비전 등의
궁녀들 또한 각각 따로 뽑았다.
그렇다면 궁녀들의 주된 근무 공간은
어디였을까,
조선시대 후기에 그려진 궁궐의 평면도인
동궐도형에서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동궐도형에는 소주방이라고 하는 곳이 여러
군데 보여서 임금의 수라상을 마련하거나
아니면 궐내의 잔치때 잔치 음식을 마련하는
곳들이 많이 분포돼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궁녀의 일
궁녀들은 주로 의식주에 관계된 일을 주어진
역할에 따라 분담해서 일했다.
수라간
아침, 저녁 수라와 잔치 음식 등을 준비하는
일은 궁녀들이 맡은 중요한 업무 중의 하나다.
이강근 교수 "이자리는 왕과 왕비의 침전이었던 그
대조전의 서쪽 행각 바깥에 있는 것으로서
원래 임금님의 수라상을 마련하던 소주방이있던 자리이다.
그런데 1917년 외정때에
불타고 나서 다시 지으면서 서양식으로
개조돼 있기는 하나 여전히 임금님의 수라상을
마련하던 곳이었고 그 수라상을 마련하던 궁중
나인들이 주무시던 곳이 바로 이옆에 있는 방
온돌방이었던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대조전
대조전은 창덕궁에서 가장 내밀한 왕비의
생활 공간이다
왕과 왕비가 잠을 자는 대조전의 침전에
궁녀들의 특별한 업무가 있다
왼쪽 방문열리고 들어가면
중앙의 큰방은 왕과 왕비의 침전이고
그 둘레에는 여러개의 작은 방이 있다.
침전을 둘러싸고 있는 이 작은 방에서
궁녀들은 숙직을 섰던 것이다.
각각의 작은 방에 한명씩 들어가 숙직을
섰는데 그곳에 이부자리를 두지 않았다.
왕과 왕비가 함께 잘때는 노상궁들이 숙직을
섰고 젊은 궁녀들의 접근은 금지됐다
숙직과 부서
1. 지밀
이 숙직은 지밀에서 했다
지밀이란 말 그대로 가장 지엄하고 중요하여
말한마디 새어 나가지 못한다는 뜻이다.
왕과 왕비가 거처하는 침전과 안사랑 대청등이
있는 곳에서 근무하며 왕과 왕비를 보필하는
가장 중요한 업무를 맡은 핵심 부서가
지밀이다
2. 침방
왕과 왕비의 옷, 이부자리 등을 만드는 부서이다.
3. 수방
의복과 장식물에 쓰이는 수를 놓는 부서이다.
4. 생과방
음료와 과자를 만드는 곳인 생과방이 있다.
5. 세수간
세수간에선 세숫물과 목욕물을 준비하는 일을 전담한다. 내전 청소도 이들의 임무다
6. 세답방
빨래와 그 뒷손질을 담당하는 세답방까지 궁녀들은 각 부서별로 일했다.
"침전 일과 주변에 주로 수라간을 중심으로 해
서 침방이라든지 수방이라든지 또 생과방
이라든지 하는 궁녀들의 작업실들이 배치돼
있었던 것으로 된다"
궁녀의 수는 얼마나 될까
영조때 이익의 성호사설에 궁녀는
육백팔십사명이라는 기록이 있다.
고종 실록에도 궁녀의 수를 적어 놓은
기록이 있다
대전에서 세손빈궁 시녀수12
대전 및 각전궁의 궁녀는 다 합해서 480명-
이들 기록을 통해 조선시대 궁녀는 5백명에서
6백명에 이르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전회통
대전 회통에 의하면 '궁녀란 궁중 여관의 별칭
으로 상궁이하의 궁인직' 이것은 즉
궁녀란 궁중에서 일하는 여성 관리라는 뜻이다
궁녀도 직급이 있었던 것일까
궁녀들은 맡은 일에 따라 품계가 나눠져
있었다. 경국대전에 그에 대한 기록이 있다.
"궁녀와 후궁을 포함한 궁궐에서 근무하는
여성들을 내명부라고 했다"
정1품 빈이하로부터 종4품 숙원까지는 국왕의
여자로 후궁을 말하며,
궁녀는 정5품에서 종9품까지 10등급으로
나뉘며 그 업무에 따라 품계가 달랐다
신명호 교수 "정5품이면 양반 관리하고 비교한다면 참판
밑에쯤 되는 상당한 고위 관리는 아니지만
중견 실무자라로서 모든 업무를 총괄하는
책임자라고 할 수 있다"
월급 지급
궁녀들이 관리였다면 녹봉을 받았을 것이다
태조실록에서 그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궁녀들은 매월 정기적인 보수로 쌀 세말
그외 옷감 등도 특별히 하사 받았다.
1896에 쓰여진 궁중예산서가 바로 그것이다
여관봉급- 이백사십원.
대전 소속 궁녀들에게 지급할 봉급 총액이다
이때 궁녀들은 돈으로 월급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월급 명세서
궁녀들의 봉급은 어느 정도나 됐을까
우리는 앞의 자료와 연구 논문를 근거로
순종때 지급됐던 궁녀들의 월급 명세서를
재구성할 수 있었다
-발권정책팀 당시 가장 높은 보수였던 196원은
지금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
당시 경제 상황이 고려돼야 하기 때문에
화폐 자체로는 과거와 현재 돈의 가치를 정확히 환산할 수는 없다.
-쌀가격추이 책 우리는 1926년의 80킬로그램에 해당하는
쌀가격과 현재의 쌀가격을 기준으로 비교할 수 있었다.
"쌀가격 기준으로 환산했을 때 그당시 1920년
대 당시는 20원 했다 99년말 현재 15만9천원 상회했기
때문에 그것을 기준으로 했을 때
1926년에 196원은 오늘날 150만원을 상회 한다고 할 수 있겠다"
-궁내부비예산 명세서 궁녀들은 맡은 업무와 연차에 따라 월급이
달랐고 품계에 따라 월급이 차등 지급됐다
-이배용 교수 "실제로 궁녀는 조선왕조에서 정식으로 월급을
받는 소위 여성 공무원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그들을 전문직여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어려서부터 궁궐에 들어와서 자기가 맡은 일을
평생토록 하는데 특히 왕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수준 높고 체계있는 자기의 전문
영역을 개발할 수 있게 되는거다."
-서류 여관 봉급 궁녀-그들은 국가에서 월급을 지급 받았던
공무원이었으며 전문직 여성들이었다
여성에겐 관직의 길이 열려 있지 않았던 남성 중심의 조선 사회에서
궁녀가 여성 관리였다는 사실은 잘 모르셨을 거다.
영조정순후가례도감도청의궤의 반차도
왕비를 따르는 수많은 행렬 중에 여기 궁녀들의 행렬도 보인다.
기행 내인
- 말 그대로 말을 타고 가는 궁녀라고 써 있다..
가례때 입는 장삼을 입었다.
보행내인
그 뒤를 따라서 걸어 가는 이들은 보행내인입니다.말을 타지 않고 걸어
가는 것으로 보아 직위가 좀 낮은 듯 보인다.
상궁
장삼을 입고 말을 타고 가는 이 사람은 상궁이다.
장삼은 보행내인 이하는 입을 수가 없었다.
이걸로 봐서 궁녀도 계급과 직위가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여성 관리인 궁녀가 되는 길
궁녀의 선출과 교육
각 부서별로 그 나이가 달랐다
지밀
4,5세,침방과 수방은 7,8세 그외 부서는 13세 미만으로 궁녀는 어린 나이에 뽑혀 들어왔다
-김용숙 교수 "지밀은 왕의 눈에 닿기도 쉬운 자리고 제일
대표 그러니까 교양도 어느면에서는 왕자 왕녀
못지 않게 4살부터 들어와서 말 익힐때부터
후천적인 준비라고 할까 궁중에서 길러지는
것이니까 품격이나 관습이나 못든 행동이나
이런 것들이 궁중화되어 있다고 생각했을 것"
궁녀의 출신 성분은 어떠했을까
예종때 궁녀의 신분에 관한 기록이 있다
한명회는 '양반 관료 첩의 딸과 양인의
딸을 뽑자'고 했고
신숙주는 '그때그때 임시로 선택하고 법을 미리
정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이때만 해도 명확한 기준이 없었던 듯하다.
그러다가 조선 중기 효종때엔 궁녀를 양가의
딸 중에서 뽑았다
-이배용 교수 "조선초기에는 관청의 여자 종을 선발하기도
하고 기첩 소생이 궁녀로 선발되기도 했다
그런데 점차로 시기가 흐르면서 양가집의
규수들이 궁궐로 선발돼서 들어가는 경우가
허다하게 나타나고 그러다 보니까 민간에서
일찍이 궁녀로 뽑히지 않기 위해서 조혼을
하는 풍습도 생겨나고 그랬다"
궁에서는 되도록이면 양가의 딸을 궁녀로
뽑길 원했지만 폐단이 생기자 영조는 양가의
딸을 궁녀로 뽑지 못하게 법으로 명문화시켰다.
-김용숙 교수 "상사람들이나 이런 사람들이 많이 들어왔지만
서울에 있는 공상 계급에서 들어왔고 침방
까지는 중인 계급을 썼다는 것이다."
궁녀가 되기 위해 거쳐야 할 절차
궁녀가 되기 위해선 반드시 거쳐야 할
절차가 있다. 처녀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팔에 앵무새 피
이것은 12,13세의 당시로서는 성숙한 나이의
경우에만 실시하던 것으로
앵무새의 피 한방울을 팔에 떨어뜨려 피가
묻지 않으면 처녀가 아니라해서 탈락시켰다.
-김용숙 교수 "선조에서 죄인이 없다거나 병에 걸린 사람
전과자 그런것도 없어야 되고"
왕을 가까이서 모셔야 하고 또 왕의 여자가 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궁녀의 선출 조건은
까다로웠다.
-황혜성선생 "손금보는 것처럼 그럼 손을 보고 일하던 손인
지 아니면 수나 놓고 깨끗이 바느질이나하는
손인지 아신단다. 그래서 너는 세답방이나
가라 손이 너무 거친사람을 보고는 너는
세답방,빨래터나 가라 아무튼 13살에 들어가서
운명이 그렇게 정해지는 거예요,그러니까 큰방
상궁들이 와서 얼굴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맵시를 보는 것이 아니라 손을 보고 갈자리를
정해 줬단다."
수라상 과정 하나하나에 정성을 쏟아야 하며 까다로운
궁중 법도를 익혀야만 가능했던 것이 궁중일이었다.
수라상 요리 궁녀는 일단 소속 부서에 배치되면
철저한 도제식 교육을 받고 길러졌다
황혜성 선생 "각 부서마다 다 나눠서 소속이 됐다.
주방상궁 밑에 들어간 사람은 주방에서 파나
다듬고 너 가져와라 하면 가져오고 그런
정도로 일을 시키니까 그 일을 따라서 10년을
해야 돼요 혼자서 독립해서 시키는게 아니다."
쥐불 겁주기
쥐부리 글려란 궁녀들에게 입조심을 시키기
위한 교육이었다.그해 입궁한 견습 내인들을
세워 놓고 내관들이 횃불을 입으로 들이대며
지지는 시늉을 하며 위협하던 궁중 행사였다.
김용숙 교수 "첫째 일장 일조가 맡은 첫날 궁중은 아주
무서운데니까 나라님을 모시고 아주 무서운
데니까 말한마디도 하지 말고 보면 본데
들으면 들은데 둬라"
황혜성교수 "아주 조용조용 말을 하고 둘이서 한방써도
바깥에 소리가 나가지 않게 둘이서 말할 때도
아주 소근소근 얘기한다."
궁체
궁녀는 궁중 법도는 물론 맡은 업무, 기타
교양을 쌓기 위한 철저한 수련 과정을 거쳐야
했다
빽빽한 궁체 마치 활자로 인쇄한 듯 보이는 이 필체는
궁녀들이 쓰던 궁체다.
그는 궁체를 궁녀들을 수련시키는 또하나의
수단으로 해석하고 있다
김진세 교수 "한마디로 말하면 자기를 버린 글씨다 자기 버
리면 어떻하느냐 자기를 버리는 대신에 모든
정성과 모든 힘과 모든 충성심을 윗전을 위해
바쳐야 되기 때문에 끝까지 끝이 내려올 때
까지도 붓끝에 충성심 정성 정숙 온아함 이
여자들이 지켜야 할 모든 것들이 거기 가
있는 것이다. 궁체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개성
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궁체 어린 나이에 궁궐에 들어와 스승인 상궁에게
전문 교육을 받으며 키워진 궁녀들-
궁체는 조선시대 궁녀들이 받았던 엄격한 교육
과 통제된 생활을 대변해 주고 있다
궁녀의 복장
궁녀들이 맡은 바 임무가 다 달랐듯이 직위에 따라 복장도 조금씩 달랐다.
-생각시,각시, 궁녀, 상궁
궁녀들은 어떤 복장을 했는지 한번 볼까
-생각시,각시 복식 은
먼저 내인이 되기 전 어린 나이의 견습 내인이다.
생머리를 매었기 때문에 이들을 생각시라고 불렀다.
생각시 머리 모양
머리를 보시면 이렇게 곱게 빗어 뒤에서 두가닥으로 땋아 말아 올려서 뒷머리
밑에 나란히 붙여서 묶는 것이다., 그위에 댕기를 늘이고 다녔다고 한다.
내인
입궁한지 15년이 되어 내인이 되면 머리 모양이 달라진다.
머리를 얹어 쪽을 졌다.
옷은 남치마에 옥색저고리와 생각시와 같다.
상궁복장(첩지,궁중정장)
그리고 일반 내인에서 15년이 지나면 상궁이 된다.
상궁들은 옥색저고리와 남색 치마에 당의를 입었다
머리장식인 개구리 모양의 첩지를 머리에 달았다.
궁녀는 네다섯의 어린 나이에, 부모 곁을 떠나 낯설고
엄하기만한 궁궐에 들어와 30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내고서야
상궁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평생을 궁궐에서 살아야 했던 궁녀들- 어떻습니까,
궁녀들의 생활이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
궁녀의 생활( 연애 스캔들 포함)
궁궐에 들어와 15년이 지나면
견습 내인들은 관례식을 치르고 정식 내인이
된다.이때부터 궁녀로서 본격적으로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관례식
관례식은 곧 성인으로 독립하는 것을 의미한다
궁녀에겐 이 관례가 사실상 혼례이기도 했다
궁녀는 왕을 위해 평생을 살아야 하는
여인이기 때문에 왕에게 시집가는
것과 마찬가지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관례는 신랑 없는 혼례식인 것이다
황혜성 "스승한테 옷을 한벌 잘 해서 입혀야 된다. 스승
이,그걸 입고 고종황제 앞에 나란히 같은해
들어간 사람들이 서서 큰절을 한번 하고 나면
그게 신랑이다."
관례식 올린 궁녀2명 관례식을 치른 궁녀는 스승 상궁으로부터
독립해 두명씩 짝을 지어 한방을 쓰며 살게 된다.
김용숙 "그사람들은 같은 처소끼리는 또 안된다
말이 똑 같이해서 싸움 날까봐 그런지 이를
테면 세수간하고 소주방내인이면 둘이서 같이
살수가 있는거예요 같이 뭐라고 그럴까
룸메이트라고 그럴까요 그렇게 해서 둘이
살아 갔는데"
동거하는 궁녀들끼리 간혹 동성연애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연산군 일기에는 궁녀들의 동성 연애에 관한
기록이 있다
'선왕조에 교붕 즉 동성 연애의 풍속을
개혁코자 했는바 이를 두려워 하지 않고
범하는 자가 많다'
세종,정종실록책 또한 실록에는 궁궐을 출입하던 관료와
궁녀간의 간통 사건도 간간히 등장한다
한번 궁궐에 들어오면 궁녀들은 평생을 궁궐
에 갖혀 살아야 한다.그런데 예외가 있었다
출궁기록 가뭄이 들면 궁녀를 궁궐 밖으로 내보내 살게 했다.
세종조에는 여러차례에 걸쳐 궁녀를 수십명씩 출궁시켰다.그 이유는 뭘까
이배용 교수 "전통시대에서 자연적인 재해는 음양의 도가
어그러졌을 때 일어난다고 보고 있다 그럴 때
가뭄이라든가 천재가 일어날 때 유교를 이념
으로 하는 국가에서는 너무나 지나치게 어려
서부터 궁궐에 들어와 갖혀 사는 어떤 여성
들의 원한이 쌓여 있지 않은가 그런데서 궁녀
들중에서 몇 명을 바깥으로 보내서 그것을
풀어주고 그러면서 음양의 조화를 모색해 가는
그런 절차도 있었다"
그러나 궁밖으로 나왔다고 생활이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궁밖으로 나왔다고 해도 궁녀는 다른 남자와 살 수 없었다
신명호 교수 "궁녀는 국왕 옆에서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국
왕의 여자가 될 가능성이 큰 여성들이었다
그래서 국왕 옆에 있었다는 사실하나만으로
출궁이 되어도 신하들은 국왕의 여자일 가능성
이 있었던 여자이기 때문에 감히 범접을
못하게 수절을 하게 했다"
경국대전에는
'조정의 관리로서 궁중에서 내보낸 궁녀를
데리고 사는 자는 장 백대에 처한다'
는 규정이 보인다
궁녀는 궁궐과 자신을 얽메고 있는 굴레속에서
외부와의 인연을 끊고 차단된채 외롭고
쓸쓸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와 평생을 갇혀 지내는 궁녀들,
그들에게 있어서 최대 희망 사항은 바로 승은을 입는 것이다.
왜냐하면 왕의 총애를 받아 승은을 입게 되면
그 위상은 물론 대우가 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시중을 드는 입장에서 시중을 받는 입장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궁녀의 권력과 승은
후궁 역시 왕비처럼 간택을 해서 뽑기도 한다,
궁녀들은 일의 특성상 왕을 가까이 할 기회가 많기
때문에 간택 절차를 거치지 않고 바로 후궁이 될
수 있었다.
궁녀가 승은을 입고 왕자녀를 낳게 되면 종4품 숙원에서
높게는 정1품의 빈, 즉 후궁의 자리에 올라가게 된다.
그러나 5,6백명의 수많은 궁녀들 사이에서 왕의 눈에
띄어 총애를 얻는 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I
따라서 왕의 승은을 입는 것은
궁녀가 권력을 손에 쥘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
장희빈
칠궁엔 왕의 승은을 입고 권세를 부렸던
대표적인 인물이 있다. 바로 장희빈이다-
장희빈은 숙종의 총애를 얻어 왕자를
낳고 왕비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다
홍성민 "경종을 원자 세자로 책봉하는 과정에서 당시
서인과 남인들 사이에 심각한 정치적 파란을
불러오게 했던 중심에 서 있던 인물이다.
그 당시에 왕비였던 인현왕후와 왕비를 서로
주고 받으면 다시 말하면 인현왕후가
왕비 자리에서 쫓겨 났다가 그 자리에 희빈
장씨가 왕비가 되었다가 다시 쫓겨났다가 인현
왕후가 들어오고 결국 희빈 장씨는 죽음을
당하고 아주 파란 만장했던 그런 인생 역정을
밟았던 분이다"
숙종은 이후 후궁을 왕비로 승격시키는
것을 법으로 금했다.
승은은 곧 신분 상승을 의미한다. 그것은
궁녀들의 최대 희망이었다
김용숙 인터뷰 "치마를 뒤집어 입고 나오면 승은 했다는 말이
있었는데 삼축당 김씨(고종의 후궁)가 그래요
불려서 올라갈때는 만인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
려서 투기와 안되기를 바라는... 치마까지
뒤집어 입지 않아도 다 소문난데요, 몇분안에"
왕의 승은을 입기만 하면 젊은 궁녀도 일약
특별 상궁이라는 지위로 뛰어 오르게 된다
이배용 교수 "아주 행운이 있어가지고 왕녀나 왕자를
생산하게 되면 품격이 상승해서 정1품에서 종4
품까지 후궁 대열에 오를 수 있고 자기 친절
가솔들이 궁궐에 들어올 수 있는 발판이 될 수
있는데 그런 영광도 있지만 한편에서는 왕비의
질투라든가 궁녀간의 시샘이라든가 또 정치
적인 격동기에서는 파란을 탈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불행을 겪었던 후궁들도 역사속에서 많이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내명부기록 승은은 왕과 궁녀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신명호 박사 "왕은 궁중내에서 남성 통치자라서 남성의례를
대표하고 왕비는 여성통치자로서 여성의
의례를 대표하고 그런 상황에서 궁녀들은 바로
왕비를 도와서 여성 의례를 수행하고 여성
노동을 담당하는 그런 부분이지만 동시에
국왕이 궁녀를 자기 여자로 할 수 있는 가능
성이 높기 때문에 공적인 부분이 순신간에
국왕과의 사적인 남녀간의 관계로 변화될
수 있는 그런 이중적인 관계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낙선재 여든 두 살의 이해원 옹주-
고종의 둘째 아들인 의친왕의 딸이다.
어린 시절 살던 사동궁에서 왕이 있던
본궁으로 들어 왔을 때를 기억하고 있다
이해원 옹주 "여기는 윤비가 계셨고 이방을 여기 피아노가
있었다. 그래서 피아노 배우셨다고 일본여자가
교사였다. 밤낮 여기와서 놀았다. 마루에서"
상궁들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이해원 옹주 "여기서 젊은 상궁은 우리를 귀여워했다.
생머리를 하고 들어오면 놀리고 노래하라고
그러고 춤추라고 그러고 우릴 놀리고 귀여워
했다. 그렇게 위엄있게 안하고 위엄있는 내
인들이 있고 큰방 내인 큰방 상궁 대전
상궁이나 하는 분들은 위엄을 갖췄다."
상궁들 상궁은 왕의 측근에서 중요한 정보를 얻을
있었으며 그 영향력도 커 정승들도 함부로
하지 못했다.
뇌물 실제로 왕이 총애하는 궁녀에게
줄을 대기 위해 뇌물을 주었던 사례를
실록에서 찾을 수 있다
제조상궁 어명을 받들고 내전의 재산을 관리했던
제조 상궁은 정치적으로도 그 영향력을
발휘하는 위치에 있기도 했다
수렴 청정 특히 수렴 청정 시기 대비전의 궁녀들의
권세는 막강했다
신명호 박사 "대비들은 조선시대 여성교육이라는 것은 사실
문자 교육이라는 것은 사실상 없다 대비들이
수렴 청정을 해서 국정을 총책임지지만 상서
문이라든가 명령서를 한문으로 작성할 수도
없고 한문으로 된 공문서를 읽을 수도 없죠
그럴 경우 대비 옆에서 각종 공문서를 번역
해주고 대비의 명령을 한문으로 작성해 주고
이런 역할들을 글자를 아는 궁녀들이 담당했다
.그럴 경우는 궁녀들이 대비 수렴청정기 막후
에서 상당한 실세로 활동했다"
권력의 최측근에 서 있던 궁녀,
그들은 궁안의 또다른 실세로 자리하고 있었다
궁녀는 입궁하게 되면 평생 동안 왕실을 위해 봉사해야 했다.
한번 궁궐에 들어오면 나갈 수 없는게 바로 궁녀들이었다
궁녀가 지은 시조
'연못에 든 고기들아
누가 너를 몰아다가 여기에 두었느냐
북쪽바다 맑고 넓은 연못
어디두고 이 못에 와 있느냐
들고서 못 나가는 처지는
너나 나나 무엇이 다르랴'
궁궐에 갇혀 사는 자신의 심정을 연못 속의 물고기에
비유했다. 구중궁궐의 꽃다운 궁녀하면 화려한
생활이 연상될지 모르지만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궁궐은
창살없는 감옥이었을지 모른다.
나이든 궁녀
이렇게 외부와 단절된 채 한평생을 궁궐에서 지내온
궁녀들은 나이가 들어 병이 들면 궁궐에서 나와야 했다.
마땅히 의지할 곳이 없었던 궁녀들에겐 또다른 어려움이기도 했다. 과연 궁
녀들은 그들의 집이었던던 궁궐에서 나와
어디서 어떻게 만년을 보내었을까 *
궁녀의 만년(마지막 상궁과 퇴출)
창덕궁의 뒷문인 요금문은
환자나 죽은 시신이 나오는 문이다
왕족외엔 궁에서 죽을 수 없다는 궁궐법도
때문에 궁녀들은 나이들고 병들면 이 요금문
으로 나가야 한다
황혜성 선생 "산것처럼 태워서 이서문 뒤쪽으로 넘어가면
서쪽에 문이 하나 있다. 그리로 데리고 나갔
단다. 죽어도 대접을 제대로 받기도 어렵고"
궁궐에서 나와 궁녀들은 어디서 어떻게 살았을까
서울 은평구 갈현동, 궁말.
궁녀가 모여산 마을이라고 해서 궁말이라고
불리었던 곳이다.
궁녀 마을 숙종때부터 궁녀들이 살기 시작해
조선시대말까지 20,30가구를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이성영 향토사학자 "서오능에 숙종왕을 모시게 되가지고 그왕을
생전에 모시던 대전에 내전에 모시던 궁녀들이
여기 나와서 살게 됐죠 정년 퇴직후 여기와서
능이 가까운데 여기와서 많이 살았다"
-김상궁 묘역 고양시 일산구-
이곳에는 90년대초까지 상궁의 묘가
있었다.
정동일 "뒤에 보이는 산등성이 정발산인데 정발산
아래 쪽 내려와서 나무 심어져 있고 조그만
돌이 있는곳 이곳이 안동김씨의 묘역이 있던
곳이다"
서울 상계동에 자리한 학림사-
학림사 입구엔 특별한 부도가 있다
부도는 스님들의 사리나 유골이 안치돼 있어야
한다.
이강남 "여기보면 상궁연화 요렇게 음각이 돼 있는데
상궁연화의 부도탑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부도 상궁연화 글씨 놀랍게도 이 부도의 주인은 상궁이었다-
상궁 연화-그녀는 궁궐에서 나와 이곳
학림사에 만년을 보냈던 궁녀였다
스님 "여기 몸담고 있었던 상궁 노비를 통해서 자세
히 얘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여기 많은 상궁
들이 몸담고 있다가 생을 마치게 되면 바로 요
밑 300미터 위치에 화장터,그곳에서 화장을
했다"
봉은사 서울 강남의 봉은사
이곳엔 또다른 궁녀의 흔적이 남아 있다
경내 부처 석가 여래상 뒤의 불화가 바로 그것이다
"시주 만 상궁 돌아가신 상궁이 시주했던 것
청정화는 불명이다
마땅히 의탁할 데 없던 궁녀들은 절에 시주
하며 그들의 만년의 쓸쓸함을 달랬던 것이다
김상현교수 "고종이 재위해 있던 한 사십여년 동안에 불화
가 한 220점 그중에 22점 대개 10% 정도의
불화에 궁녀들의 이름이 보입니다.그 궁녀들은
단순히 궁에 누구라고만 쓰지 않고 거기에
불문까지도 등장이 된다."
궁녀의 조선에서의 위치
규율과 법도에 얽매여 외부와 차단된 채
외롭고 쓸쓸한 생을 보내야 했던 궁녀...
어쩌면 이들은 봉건적인 왕조 사회의 희생자였다
그러나 여성의 활동이 제약되던 시기
왕과 왕비를 보필하는 임무와 함께
최상층 문화인 궁중의 음식과 복식
그리고 한글문학, 궁중문학 등을 보존해온
궁녀들은 과소 평가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궁녀는 국가로부터 정식월급을 받고 일한 여성들이었다.
그들은 한 분야에서의 장인이었으며
최고의 전문직 여성들이었다 *
역사 스폐셜 "조선시대 궁녀는 전문직었다" 를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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