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미륵사는 무왕의 승부수였다
미륵사는 무왕의 승부수였다 |
전라북도 익산에 있는 미륵사탑. 이 탑이 있었던 절에는 용으로 변한 미륵을 맞는 사찰이 있었고, 그 사찰은 세상에서 가장 컸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미륵사는 힘을 잃어가고 있는 나라를 일으키려는 무왕의 야망, 백제 중흥이라는 프로젝트의 핵심적 증거이다. 무왕은 미륵사를 통해 어떤 승부수를 던지려 했던 것일까. |
1. 미륵사 석탑의 비밀 |
오래 전부터 황량한 절터를 홀로 지키고 있는 미륵사탑을 본 사람들은 우선 그 규모에 놀란다. 이 탑은 돌로 만든 최초의 탑이자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석탑으로 알려져 있다. 미륵사탑은 단단한 재질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있어, 이 탑을 쌓기 위해서는 화강암을 수백장 자르고 다듬어야 했을 것이다. 익산에 있는 한 석재공장에서 탑의 기둥 한 개를 실제로 만들어 보니, 기둥 한 개를 자르고 다듬는데도 대엿새는 족히 걸린다. 그런데 미륵사에는 이렇게 힘들게 쌓아올린 탑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었다. |
2. 밝혀지는 미륵사의 전설 |
삼국유사에는 미륵사의 창건설화가 전해진다. ‘하룻밤 만에 못을 메우고 미륵삼존과 회전, 탑, 낭무를 각각 세 곳에 세웠다.’는 내용이다. 건물터 5만 여 평에 창건기간 36년으로 추정되는 미륵사. 거대한 연못을 메워 3 개의 탑과 3 개의 금당을 세운 화려하고 웅장한 사찰, 미륵사를 둘러싼 전설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
3. 서동요의 주인공, 무왕 |
‘선화 공주님은 밤마다 몰래 서동을 품에 안고 잔다’의 서동요. 서동과 선화 공주의 결혼을 가능하게 했다는 서동요의 주인공이 백제 무왕이다. 그리고 서동요속에는 당시 백제와 신라의 팽팽한 줄다리기를 늦추는 정략적인 화해가 담겨있다. |
4. 삼금당의 비밀 |
호방하고 걸출한 영웅이었던 무왕은 미륵사라는 거대한 절을 짓는다. 이 미륵사에서 미륵과 용의 관계를 알려주는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용수’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이다. ‘용수’는 늪에 사는 용을 의미한다. 용의 화신이 미륵을 기다리는 간절한 염원이 미륵사 안에 그대로 담겨져 있다. |
5. 미륵사가 있는 익산. 그 공간에 담겨진 비밀 |
미륵사가 세워진 익산에는 무왕과 선화 공주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쌍릉이 있다. 무왕에게 익산은 어떤 곳이었을까? 백제 역사상 무왕만큼 신라를 집요하게 공격한 왕은 없었다. 무왕은 무려 12번이나 신라를 침공했는데, 익산은 가장 적합한 공격의 전초 기지였다. 이 전초기지 익산에 무왕은 백제의 국력을 결집시켜 미륵사를 창건했다. 전초기지와 대사찰, 익산과 미륵사의 관계를 풀 수 있는 유물이 계속 출토되고 있다. |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석탑인 미륵사지 석탑이 서있는 미륵사지를 통해
백제의 비밀을 풀어본다 .
이 미륵사지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규모의 석탑이 있다.
이 석탑엔 사람이 드나들수 있는 공간이 있고 기둥이 세워져있다.
이석탑은 목조건물 양식을 하고 있다. 추녀끝이 살짝 올라간 반전이나
기둥의 베흘림 양식등도 탑이 목조건물양식임을 증명해준다.
탑은 원래 9층으로 알려져있다.
당시 기술로 어떻게 단단한 화강암을 9층까지 쌓아올릴수 있었을까?
더욱 놀라운 것은 탑은 1개가 다가 아니다. 미륵사에는 이러한 거태한 석탑이 2개가 있었다.
이 미륵사가 당시 얼마나 대단한 절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두 탑사이에는 양쪽의 석탑터 보다 2배정도 넓은 탑터가 발견됬는데 전체 높이가 5-60m로 추정된다.
탑터에 기와등이 발견되 목탑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 이 목탑의 지반을 조사한 결과
연못을 흙으로 메우고 그 위에 다시 판축을 다져서 탑을 세운것으로 나타났다.
미륵사는 기초공사부터 달랐다. 또 이러한 판축은 금당터에도 발견된다. 금당터엔 국내유일의
녹유색의 기와가 발견되기도 했다. 이러한 금당은 모두 3개가 있었다.
미륵사 강당의 치마규모로 유추해보니 400명을 수용할수 있는 엄청난 규모였다,
3개의 탑과 3개의 금당을 가진 삼원양식은 동양어디에도 찾아볼수 없는 독자적인 양식이었다.
총 규모 5000여평으로 신라 황룡사보다 2배 크고 미륵사를 창건하는데 36년이 걸릴정도로
거대한 사찰이었다.
삼국유사에는 서동요 이야기로 유명한 무왕이 이 미륵사를 세웠다고 적고있다.
무왕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를 캐었던 서동은 익산에서 태어났다. 서동은 가난한 몰락왕족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서동이 왕이 될수있었던것은 당시 백제의 상황으로 짐작할수있다.
당시 백제는 성왕의 죽음으로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의 권환이 강했는데 귀족들은
몰락왕조 서동을 왕에 세우게된다. 자신들이 유리해지기 위해서다.
걸출하고 뛰어난 전략가라고 삼국사기는 적고 있다.
그런데 이 미륵사를 무왕이 세운 이유는 무엇일까?
금당터 밑엔 지하공간을 만들었는데 이 지하공간은 배수로와 연결되 연못으로 이어져있다.
미륵사에 지하공간은 연못에 있는 용이 배수로를 통해 금당에 용이 드나들수있는
공간으로 추정된다. 신라 감은사지에도 비슷한 공간이 있다.
미륵을 용의 화신이라 믿었기 때문에 용이 거처할 공간을 만든것이다.
미륵사는 미륵신앙과 관련이 있다. 무왕은 미륵신앙을 통해 왕권을 강화할려 했던 것이다.
미륵사를 수도가 아닌 익산에 세운 이유는 무엇일까?
익산엔 무왕과 선화 공주의 묘로 추정되는 쌍릉이있다.
무왕은 재위기간동안 신라를 여러차례 공격했는데 이 익산은 공격기지로 활용된것이다.
뿐만 아니라 익산은 행정수도로서 역활도 했다.
일본에 관세음응헌기에는 백제 무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지모밀지는 익산이다.
익산 왕궁평에는 성벽과 백제말기 건물터가 발견되어 이를 뒷받침하고있다.
또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는 익산이 별도로 사용됬다고 말하고있다.
이처럼 여러 자료와 문헌을 통해 백제가 또 하나의 수도를 준비하고 있엇음을 알수있다.
이 미륵사엔 힘을 잃어가는 나라를 일으켜 세우려는 무왕의 야망이 숨어있다.
이 미륵사야말로 무왕이 추진했던 백제 중흥 프로젝트의 핵심이었던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