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3일간의 재판, 영국인 베델을 추방하라
3일간의 재판, 영국인 베델을 추방하라 |
일제 하에서 주권을 잃고 할말조차 할 수 없었던 한국인들에게 든든한 친구이자 울타리가 되어 주었던 한 영국인, 베델. 대한매일신보의 발행인 베델을 둘러싸고 우리나라의 최초 국제재판이 열렸다. 영국인 판사가 주재하고 일본인 원고에 영국인 피고, 거기다 한국인 증인들과 영국인 변호사 …. |
1. 베델의 죄목 |
당시는 군대해산, 헤이그 밀사사건, 고종양위 등으로 조용한 날이 없었다. 이에 연일 계속되는 의병의 출몰과 소요로 한국민과 통감부와의 대결이 최고조에 이른 때다. 통감부 서기관 미우라는 이 일련의 상황을 베델의 신문이 선동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그 증거물로 베델의 신문에 실렸던 논설 3건을 제시했다. |
2. 일본과 영국의 반응 |
일본 외무성은 외교경로를 통해 영국정부에게 베델을 추방하거나 그의 신문을 폐간 시켜달라고 요구한다. 영국은 일본과의 관계에서 마찰을 일으키고 있는 베델을 예의 주시했고, 결국 베델을 재판에 회부한다. |
3. 베델은 누구인가 |
영국의 한 신문사 특별통신원으로 한국에 온 베델은, 통신원 자리에서 해임된 이후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다. 창간된 신보는 발간 초기부터 강한 반일논조를 띠었고 점차 국민들 속에 깊이 파고들어 민족지로써의 자리 매김을 하면서, 일본 당국과 전면적인 대결로 돌입하게 된다. |
4. 국채보상운동 |
1907년 초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대구에서 시작해 전국적으로 광범위한 지지를 받으면서 퍼져나간 일종의 캠페인이다. 일본에 진 국채 1300만원을 민간인들이 담뱃값을 줄여서라도 갚자는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애국계몽운동. 당시 불길처럼 번진 이 자발적인 민중운동의 뒤에는 대한매일신보가 있었다. |
5. 대한매일신보의 논설 위원들 |
양기탁, 박은식, 신채호 등의 논설 위원들은 베델을 끼고 혹은 그의 이름을 빌어 소신껏 자기 주장을 폈다. 특히 훗날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맡았던 박은식은 칼 같은 논설로 유명했다. |
6. 신보의 몰락 |
재판결과, 베델은 상해에 있는 영국인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리고 일본은 신보에 치안 방해라 하여 발매금지처분을 내렸고, 실제로 신보사를 운영해오다시피 하던 양기탁에게는 국채보상금을 횡령했다는 터무니없는 혐의를 씌워 구속했다. |
7. 베델의 죽음 |
상해에서 돌아온 베델은 서울의 한 호텔에서 서른 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추도모임에는 도산 안창호가 추도사를 맡았고 직업, 귀천, 국적,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그리고 대한매일신보는 베델이 세상을 떠난 지 1년 만에 종간호를 냈다. |
1908년 서울에는 영국인 배델을 피고로한 3일간의 재판이 열리게 된다.
영국인 베델은 한국인을 선동했다는 죄목이었다. 재판엔 한국,일본,영국 모두 참여한
특이한 국제재판이었다. 배델을 고소한것은 통감부의 미우라였다.
미우라는 대한매일신보가 한국인을 선동했다는 증거로 스티븐스 사살사건을 찬양한
논설과 일제의 침략이 부당함을 알리는 기사들을 제시했다.
미우라는 이러한 기사들이 한일관계를 악화시킨다고 주장했다, 당시 일제가 치솟던 상황에서
대한매일신보는 강력한 항일논조를 기재했다. 이 대한매일신보는 일제의 황무지개간권요구를
좌절시키는등 일본과 자주 마찰을 일으켰다. 이러한 마찰은 당시 동맹국이었던 영국과 일본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일본은 베델에 관한것을 영국에 계속 보고함으로써 양국관계 악화를
암시했다. 배델은 일본이나 영국에게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다.
일본은 영국정부에 배델 추방을 끊임 없이 건의했다. 그러나 배델에 관한 일은 영국의 치외법권
무시 문제와 관련이 있어 신중하게 접근한다. 영국은 고심끝에 법정을 열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한국의 두터운 방어막이었던 배델이 법정에 서게됬다. 배델이 항일논조를 실은 신문을
창간한 이유는 무엇일까? 배델은 어렸을적부터 일본에서 무역업에 종사했는데 1904년 한국으로
건너온다. 배델은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사항을 알리기 위해 개인신문의 형태로 신보를 창건한다.
대한매일신보는 항일논조로 한국인들에게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한국인들을 격려하고 민중들을
일개우는 역활을 한것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나라의 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됬는데 단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수 있었던것은 대한 매일신보의 활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의연금이 신문사로
직접 전달되고 전국민이 참여하자 신보는 참여운동을 격려하고 지원했다. 민족지로서
대한매일신보는 항일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영국인이 창간했다는 점을 이용해서
당시 항일 논객들이었던 양기탁,박은식,신채호등이 항일논조를 개재했다.
신보는 서방여라나라와 일본들에 이러한 한국의 사정을 자세하게 알렸다.
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신보는 고종의 친서를 통해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알렸다.
이렇게 과감한 적논을 펼칠수 있었던것은 베델의 치외법권이라는 방패덕분이었다.
일본은 신보를 검열할수없었던것이다. 일제는 다른 방법으로 신보의 발매를 방해했지만
신보는 민중들사이에 깊게 퍼져있었다.
3인간의 재판이 끝나고 재판관은 끝내 배델에게 유죄를 선고한다. 배델은 한국에서
추방당한후 사망하고 만다. 그의 추도회와 장례식엔 배델을 추모하는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
대한매일신보는 결국 배델이 죽은지 1년만에 사라지고 만다.
일제의 탄압과 억압속에 희망을 잃지 않고 항일 운동의 구심점이 되어준 배델과
민족의 선각자들,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