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스페셜100선

24 김홍도의 풍속화는 국정자료였다

사랑의고향길 2013. 9. 28. 18:47

김홍도의 풍속화는 국정자료였다 
씨름판의 정경, 춤추는 무동, 빨래터에 모인 여인들, 그리고 서당의 모습 …. 조선 백성들의 삶 구석구석을 서정과 웃음을 담아 사실적으로 그려낸 김홍도. 그의 그림은 어떤 사료보다도 생생하게 18세기 조선 사람들의 패션감각에서부터 놀이문화는 물론 당시의 시대상까지가 고스란히 들어 있는 기록 사진이다. 
1. 서민들의 다양한 패션
그 동안 조선시대 평민들의 복식은 크게 주목 받지 못했다. 일단 평민들이다 보니 유물로 전해져 오는 것이 거의 없었고, 또 별다른 기록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홍도의 풍속화를 통해 밝혀진 2백년 전 조선 백성들의 패션은 놀랄 만큼 다양하고 감각적이었다.
2. 씨름도
김홍도가 30대에 그린 것으로 알려진 풍속화첩 속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씨름그림이 들어있다. 언뜻 보면 단순해 보이는 그림이지만 이 그림을 좀더 꼼꼼하게 살펴보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얘기가 들어 있다. 심지어 언제, 어디서 벌어진 씨름판인지까지도 알 수 있다.
3. 김홍도의 그림이 기억에 잘 남는 이유
김홍도의 풍속화는 누구를 그리던지 친숙한 느낌을 준다. 뿐만 아니라 그의 그림은 아주 어릴 적 교과서에서 본 아련한 기억만 갖고도 쉽게 떠올려진다. 이는 김홍도의 그림이 보는 이들의 뇌간을 자극해 공감대를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 속에는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정확한 비례와 힘찬 구도, 뇌간을 자극하는 필력이 균형 있게 어우러져 있었다.
4. 18세기 진경시대
베를 짜는 농가의 아낙에서 도시의 일꾼들, 그리고 고기잡이 어부에 이르기까지 조선 백성들의 삶 구석구석을 서정과 웃음을 담아 사실적으로 그려낸 김홍도. 그의 풍속화 속에는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이 시대 정신이었던 18세기 조선의 모습이 들어있다.
5. 풍속화는 왕의 국정자료였다
나라의 녹을 받으며 그림을 그린 화원이었던 김홍도가 당시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단적으로 알려주는 기록이 국왕 정조의 개인문집에 남아있다. ‘김홍도는 그림에 솜씨가 있는 자로 그 이름을 안지 오래이다. 30년 전쯤 그나 나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이로부터 무릇 그림에 관한 일은 모두 홍도를 시켜 주관하게 하였다.’여기서 그림에 관한 일이란 국정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화원들에게 풍속화를 그리도록 지시한 일을 말한다.
6. 평민도 글을 배운 18세기 조선
18세기 후반에 그려진 김홍도의 서당그림에는 민저고리를 입은 평민 아이들이 앉아 글공부를 하는 모습이 담겨있다. 엄격한 신분사회 조선에서 18세기 이전가지의 교육은 철저히 양반 가의 자제들을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18세기로 접어들면서 조선은 밑으로부터 변화하고 있었다. 

 

 

 

 

 

 

 

24화 김홍도의 풍속화는 국정자료였다.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는 우리에게 잘알려진 그림이다. 이 풍속화는 200년전 조선의 모습을

사진처럼 생생하게 담고있다.  

김홍도 풍속화 속의 옷을 보면 직업에 따라 다양한 옷을 알맞게 입은것을 알수있다.

또 당시 여성들은 노출패션을 즐긴것도 알수있다.

당시 짧은 저고리가 유행한 이유는 여인들의 미적욕구가 반영된것이다.

김홍도의 풍속화를 통해 평민들의 옷차림을 알수있는것이다.

김홍도 씨름도엔 양반들의 부채를 통해 음력 5월5일 단오날임을 알수있다. 또 샅바를

왼쪽다리에만 착용함으로써 지금의 씨름과는 다르다.

김홍도의 풍속화가 쉽게 기억에 남는 이유는 무엇일까 ? 그림이 시각적으로

자연스러움과 균형은 우뇌가 담당하고 있다. 김홍도는 인체비례를 정확하게 그렸다.

김홍도의 서당화에서 뒤에 있는 사람을 오히려 더 크게 그리는 역원근법표현을

사용했음에도 오히려 자연스러움을 느끼도록하였다. 김홍도의 힘찬 필력은 뇌간을 자극해

쉽게 기억에 남게된다.

태조 이성계의 추상화의 바닥엔 양탄자가 그려져있지만 조선 후기 숙종이후로는 화문석을

바닥에 그리게된다. 이것은 조선후기에 오면서 조선사람들의 인식변화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사례이다. 즉, 중국을 더이상 숭배하지 않고 조선의 것을 더 강조하면서 그림 역시

사실주의적으로 바뀌었다. 풍속화는 사실성과 함께 풍자와 해학적인 요소도 담겨져있다.

김홍도는 우리 풍속화의 틀을 잡은 화가였다. 그의 풍속화속엔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이 시대정신이었던 18c 조선의 모습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18c 조선은 진경시대로 불린다.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이 가장 높았고 사실적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김홍도는 영조의 초상화를 3번이나 그려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 또 정조는 국정보고자료를

위해 풍속도를 많이 그리게했다. 정조 개혁정치에 국정자료로 활용했던것이다.

즉, 풍속화는 국가적 차원에서 제작된것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모습을 국왕이 보고싶어했기 때문이다. 

 

18c 무렵엔 평민의식이 성장하여 중인과 평민이 서당을 직접 세우고 운영했다.

평민들도 교육을 받았던 시대. 18c 조선은 이렇듯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풍속화는 이 변화하는 시대의 기록사진이었다. 또 새롭게 변화하는 시대의 모습도

담겨져있는 소중한 사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