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300년 전 '여성군자'가 쓴 요리백과 - 음식디미방
300년 전 '여성군자'가 쓴 요리백과 - 음식디미방 |
지금으로부터 330년전, 요리책이 있었다면 믿을 수 있을까. 그것도 조선의 유교적인 사회분위기에서 일흔 된 여성이 책을 썼다는 것은 더욱 흥미를 자극한다. 문제의 책은 바로 음식을 아는 방법이라는 뜻을 가진 음식디미방이다. 음식디미방의 첫 장을 열면 1670년대 조선 양반 가의 문화가 진수성찬으로 펼쳐진다. |
1. 음식디미방-요리백과사전 |
안동에 살던 정부인(貞夫人) 장씨에 의해 쓰여진 음식디미방. 한글로 씌어진 이 책의 내용을 보면 다양한 음식의 조리법이 종류별로 나뉘어 체계적으로 적혀있다. 국수, 만두를 비롯한 면병류, 어육류, 소과류, 주류까지 종류가 모두 146가지다. 조리법 뿐 아니라 그 발상이 비닐하우스와 비슷한 보관법에까지 정통한 이 책의 저자는 이문열의 소설 ‘선택’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
2. 정부인 장씨의 학문적 소양 |
장씨는 숙종때 이조판서까지 지냈던 갈암 이현일의 어머니다. 그녀는 1598년 안동장씨 장흥효 가문에서 태어났다. 대학자였던 부친을 둔 덕으로 그 시대 보통 여자들과는 달리 자연스레 학문을 접할 수 있었던 그녀는 시경,서경까지 터득하였고, 글씨, 그림실력도 뛰어났다. |
3. 실증적 요리서 중 최초! |
음식디미방 이전에도 요리책은 있었지만, 한문으로 쓰여져 있고 간단한 소개정도에 그쳐 실용성과 편리함이 떨어졌다. 하지만 이 책은 내용이 한글로 되어 있어 쉽게 읽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146가지 음식에 대한 장씨만의 비법과 조리기구까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여 지금도 이 책을 따라서 그대로 요리를 할 수 있을 정도다. |
4. 양반문화를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 음식디미방 |
당시 양반집에서는 다양한 술을 빚었다. 탁주는 주로 종들이 마시게 했고 손님접대에는 청주를 사용했다. 조선시대 양반가의 손님접대문화가 다양한 술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처럼 음식디미방은 조선시대 문화를 읽게 해준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음식디미방은 단순한 요리서가 아니라 조선중기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역사서이다. |
5. 시대적 소명에 충실했던 정부인 장씨 |
최근 정부인 장씨의 가정에 대한 충실을 예찬한 이문열의 소설에 대해 여성계에서는 현대여성이 추구하는 삶에 역행되는 것이라며 반박했다. 하지만, 이런 분분한 논쟁은 무의미한 일인지도 모른다. 정부인 장씨의 삶에 대한 평가는 그녀의 시대적인 배경을 통해서 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17세기 임란,호란으로 무너진 질서가 재 복구되던 시기,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
6. 맛질방문이란? |
음식디미방에 적힌 음식 중 16가지 음식 밑에는 맛질방문이라는 말이 쓰여있다. 이 말의 뜻을 놓고 갖가지 해석이 대립하던 중 실제 뜻은 참으로 소박한 곳에서 드러났다. 정부인 장씨의 외갓집이 있던 곳이 경북 예천에는 맛질마을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곳에서 어린 시절 친정어머니에게 듣고 배웠던 요리까지 음식디미방에 적으면서 ‘맛질방문’이라 쓴 것이다. 후손들에게 대대로 전해지길 바라는 그녀의 마음은 맛질방문을 통해 얻어진 최고의 요리책, 음식디미방 곳곳에 스며있다. |
이 책은 이리 눈 어두운데, 간신히 썼으니. 이 뜻 잘 알아 이대로 시행하고, 딸자식들은 각각 베껴가오되, 가져갈 생각일랑 하지말고. 부디 상치말게 간수하여, 수이 떨어 버리지 말아라 |
책의 이름은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이다. 앞에 음식이라는 말이 있어 음식에 관련된 책이라는 건 짐작이 가능한데, '디미방'이라는 말이 낯설 것이다. '디미'는 한자어다. 알지(知)에 맛미(味). 그리고 방법방(方). 고어에서는 '지' 발음을 '디'로 했기 때문에 지미방이 디미방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음식디미방은 '음식의 맛을 아는 방법'이라는 의미로, 요리책이다.
300년 전의 요리책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져 있나? |
백두현 (경북대 국문학과) 교수 : 이 책의 표지는 '규곤시의방(閨壺是議方)'이다. 규곤은 여자들이 거처하는 안뜰로 규방이라는 뜻이다. 시의방은 옳은 뜻을 풀이해서 쓴 방법이다. 표지에는 이렇게 규곤시의방이라 되어있는데, 한 장을 넘겨서 안을 보면 책이름이 다시 '음식디미방'이라 나온다.
음식디미방은 장씨부인이 직접 손으로 써놓은 기록이고, 표지에 있는 규곤시의방은 장씨부인의 남편인 이시명(李時明 1590~1674) 어른께서 이 책의 외형적인 품격을 갖추느라고 나중에 써서 종이에 붙인 것이다.
책의 맨 앞에 장씨부인의 남편이 쓰신 한시로, 새색시가 시집 와서 시부모님의 입맛을 몰라서 망설이고 있다는 내용이 소개가 된다. 본문에서는 만두법이라든지 여러 가지 탁면법 상화법 요리법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그리고 맨 끝에 장씨 부인이 흘린체로 직접 쓰신 발문이 있다. 발문의 내용은 "이 책이 이렇게 눈이 어두운데 간신히 썼으니 이 뜻을 잘 알아서 쓰인대로 시행을 하고 딸자식들은 이 책을 배껴갈 수는 있지만 가져갈 생각은 절대 하지말라. 잘 간수해서 떨어지지 않게하라."는 당부의 말을 적고 있다. |
규곤시의방(음식디미방)은 장씨 부인의 아들인 존재(存齋) 이휘일의 종택에 있다가 1958년에 경북대학교 도서관에 기증되었다. 그래서 그 기증된 책을 당시 경북대 국문과 김사엽 박사가 60년도에 논문을 써 발표를 하게 되어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백두현 (경북대 국문학과) 교수 : 오늘날에 이 자료를 가지고 연구하는 사람들로 봐서는, 당시 사람들이 무슨 재료로 어떤 음식을 어떻게 먹었는가를 그대로 알 수 있는 생활문화사적 가치가 큰 자료다. |
한복려 (궁중음식 연구원장) 선생 : 이 책에 나와 있는 음식들은 일상적으로 먹는 게 아니고, 별미가 나온다. 밥이라든가 이런 흔한 반찬종류는 별로 없고, 국수를 해먹어도 오미자국에 띄운다든지 석이가루를 썼다든지, 이런 귀한 재료를 많이 썼기 때문에, 특별한 날 맛있게 해먹는 게 많다. |
복숭아 간수법: 독에 소금과 밀가루죽을 넣고 복숭아를 넣어 봉하면, 겨울에도 제철에 딴것 같으니라. |
노완섭 (동국대 식품공학과) 교수 : 복숭아를 밀가루풀에 넣는 건 아주 좋은 방법이다. 복숭아도 호흡을 하면 영양이 소모되고 수분이 날라 간다. 그러니까 이걸 밀가루풀에 집어넣으면 빠져나가는 수분을 막아 주고 또 설사 수분이 빠져나가더라도 흡수가 된다. 그 다음에 어차피 호흡하면 영양소가 소모되니까 밀가루풀에서 탄수화물이라는 영양소가 복숭아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왜냐하면 복숭아속에 있는 것도 주로 탄수화물이기 때문. 그러니까 그게 빠져나가더라도 풀에 있는 영양소가 들어가게 된다. 말하자면 복숭아와 밀가루풀 사이에 영양의 균형을 맞춘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현명한 방법이다. |
가지 간수법 : 서리 내리기 전에 가지를 따 꼭지를 뽕나무 재에 묻어 두면, 변치 않고 새것 같으니라. 생포(전복) 간수법 : 생전복을 참기름 단지 속에 넣으면 오래 두어도 새것 같으니라. |
가지를 보관할 때에는 뽕나무재에 넣어 두라고 적고 있는데 이는 재의 살균력을 이용한 것이며, 생전복을 참기름에 넣는 건 공기를 차단시켜 전복을 싱싱하게 보관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지금의 비닐하우스와 같은 방법을 이용해 겨울철에 채소를 길러 먹는 방법이 소개되어 있다. 겨울에도 야채와 과일을 즐기기 위한 지혜가 발달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글은 KBS 역사 스폐셜'300년전 여성군자가 쓴 요리백과-음식디미방' 1999.12.18 방송분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이문열씨가 소설의 자료로 이용한 것은 정부인 장씨 실기. 숙종 때 이조판서까지 지냈던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이 어머니인 정부인 장씨의 팔십 평생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실기에 의하면 정부인 장씨가 태어난 곳은 안동 금계리. 조일전쟁(임진왜란)이 끝나던 해인 1598년 안동 장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안동장씨 족보에 의하면, 정부인 장씨는 경당 장흥효(敬堂 張興孝, 학봉 김성일의 정통 계승자)의 무남독녀다. 장흥효는 조선중기의 대학자로 집 가까이 광풍정(光風亭)이라는 정자를 지어놓고 수백명의 제자를 길러냈던 인물이다. 관직도 마다한 채 평생을 제자들과 함께 학문을 논하는 데에만 전념했던 것이다. 이러한 장흥효가 35살 되던 해, 뒤늦게 얻은 자식이 정부인 장씨다. 장씨는 자연스레 학문을 접하게 되었고, 그 수준도 높았다. 전가보첩은 장씨가 10살 전후에 쓴 시를, 수로 놓아 모아놓은 것으로 이 시를 통해 장씨의 학문적인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장씨의 시에는 조선시대 여느 여류시인들의 서정적인 시와는 다른 성리학의 사상이 많이 흐르고 있다.
이동환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 : 장씨부인의 시 작품은, 바로 퇴계(이황) 심학의 주류적인 맥락 속에서 이뤄진다. 장씨 부인는 10여 세의 이른 나이에 심학에 대한 지성적인 자각하에 쓰여진 작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사적으로 음미하게 되는 것이다. 실기에 의하면 정부인 장씨는 소학과 중국의 역사서인 십구사략을 공부했다고 전하고 있다.
박광용 (카톨릭대 사학과) 교수 : 당시 보통여자는 소학 정도인데, 정부인 장씨는 소학은 기본일 뿐 아니라, 소학의 위인 사서오경. 그리고 현실에 실제 적용할 수 있는 현실경험 역사책인 십구사략을 모두 공부한 걸로 되어있다. 그리고 15세 전후에 남아있는 시들은 수준이 높아 중국의 고서와 전부 관통이 된다. 정부인 장씨는 글씨도 능했다고 한다. 지금은 초서체로 쓴 학발시(鶴髮詩)만이 남아있는데, 당대 최고의 명필가인 청풍자(淸風子) 정윤목과의 일화로 그 실력을 짐작할 수 있다.
김구현 (안동문화원 이사) : 하루는 청풍자께서 친구에게 노는 겸 찾아갔다. 찾아가서 여러 가지 고담준론을 하다가 글씨에 미쳐서 경당(장흥효)께서는 이 사람에게 나한테 글씨 좀 남기고 가게 해서 쓰신다. 쓰시고 난 뒤에 아버지 경당은 당신 외동딸이 쓴 글씨를 보인다. 청풍자는 처음 그것을 보더니만, "이게 과연 우리나라 사람 글씨인가, 이렇게 잘 쓴 글씨가 있나, 이 글씨는 조선 사람의 글씨와 유를 달리한다. 내가 처음 볼 때는 중국 대가의 글씨인줄 알았다."고 했다 한다.
|
조선시대 여자들은 남자들과 같은 교육을 받지못했다. 남자들이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배울 때 여자들은 여사서(女四書)라고 해서 여자들이 지켜야 할 법도와 예절을 배웠다. 그런데 대학자의 집안에 무남독녀로 태어난 정부인 장씨는 집안의 분위기와 타고난 총명함으로 인해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그 수준도 높았다. 일반적으로 선비들의 교육과정 중 최고의 수준이라는 시경과 서경까지 터득했다고 한다. 이러한 학식이 뒷받침이 되었기에 이런 체계적인 요리책을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이 음식디미방이 나오기 전에 요리책이 없었던 건 아니다. '수운잡방(需雲雜方)'이라는 요리책은 음식디미방보다 100여년 전인 1540년에 탁정정 김수(濯淸亭 金○)라는 사람이 쓴 책이 있다. 그리고 '도문대작(屠門大嚼)'으로 1611년 바닷가로 귀양 간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許筠)이 유배지의 거친 음식들을 먹게 되자, 전에 먹던 좋은 음식을 생각나는 대로 적은 책이 있다. 이 책들은 모두 한문으로 되어있을 뿐 아니라 음식에 대한 간단한 소개정도에 그치고 있다.
그런데 음식디미방은 146가지 음식의 조리과정을 아주 자세하게 설명해놓고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은 그 이전의 책들과는 달리 조리방법에 대한 정보를 주는 본격적인 조리서인 것이다. 더욱이 각각의 조리과정에 대한 설명이 어찌나 자세하고 구체적인지 지금도 이 책을 보고 그대로 따라 할 수 있을 정도다. |
한복려 : 탁면이라는 것은 녹두로 녹말을 만들어서 그걸 화채로 만들어서 먹는 방법이다. 오미자와 깨가 있어서 그 국물에 만드는 거다. |
녹두를 맷돌에 쪼개, 물에 담궈 많이 불으면, 껍질을 벗기고 맷돌에 갈아라
탁면법의 처음은 녹말가루를 만드는 방법부터 시작된다. 녹두를 물에 불려 껍질을 벗긴 뒤 맷돌에 갈으라고 적고 있다.
지금처럼 시중에서 쉽게 녹말가루를 구할 수 없던 때. 가루를 만드는 것은 중요하고도 어려운 일이었다. 때문에 국수나 만두 조리법에는 가루를 내는 방법을 조리법의 첫머리에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아주 가는 체로 받고, 다시 가는 모시베로 걸러 두라
녹두를 갈은 뒤엔 가는 체로 건더기를 걸러 내고 또다시 모시베로 걸러 내라고 적고 있다. 조리과정에 필요한 기구의 이름까지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책에 쓰인 방법대로 가는체와 모시베를 이용해 여러번 걸러내는 건 고운 가루를 내기 위한 것으로, 이 과정에선 특별한 조리기구를 써야한다. 음식디미방에선 단계별로 필요한 조리기구를 정확하게 써놓고 있어 그대로 따라 하기만 하면 된다.
한복려 : 음식디미방에는 조리할 때 어떤 재료를 쓰라는 것이 단계별로 되어있다. 그래서 체를 예를 들자면 여러 가지 종류가 나오는데, 체 입자에 따라서 고운 것. 그러니까 깁체 또는 총체라고도 하는데 또 중간체가 되겠고, 굵은 것은 어레미라는 것. 발을 어떻게 곱게 하느냐에 따라 체의 이름을 다르게 부르고 또 한가지는 이 발을 뭘로 만드느냐에 따라 총체 말총 만들었다든지 그런 표시가 있다. 어느 건 가루를 내릴 때 고물을 내릴 때 쓰지만, 녹말을 만들어야 할 땐 아주 고운 걸 내려야 할 땐 다른 주머니나 보자기를 쓴다. 그것에서도 베를 썼다든지 모시를 썼다든지 명주주머니를 썼다든지 그런 것도 명확하게 되어있어서 얼마나 과학적으로 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
뿌연 빛이 없이 가라앉으면, 맑은 물은 따라 버려라
가라앉은 가루는 식지에 엷게 널어 말려서, 다시 찧고 (체로)쳐서 가루로 (모아)두고
책에 소개된 대로 녹두를 갈아서 짜낸 물을 그릇에 담아두면, 하얀 액이 바닥에 가라앉는데 이것이 녹말가루다. 이제 가루를 말려서 찧으면 녹말가루가 된다.
쓸 때마다 가루 한홉에 물 너무 걸지 않게 파서 양푼에 한 숟가락씩 담아 뜨거운 솥물에 골고루 둘러 이내 익으면
찬물에 담갔다가 조각 조각 썰어라.
양푼은 지금의 쟁반과 같은 그릇이다. 양푼에 녹말물을 넣어 뜨거운 물에 익힌다. 익힌 녹말가루를 찬물에 담는 건 잘 떼어 내기 위해서다. 음식디미방에는 이러한 세심한 부분도 빠짐없이 기록돼 있다.
오미자를 물에 우려낸 뒤에 고운체에 받치면 오미자차가 된다. 여기에 국수와 함께 얼음을 넣으라고 음식디미방에는 쓰여 있다. 이것이 음식디미방에 소개된 탁면법이다. 그런데 탁면법의 마지막엔 또 한가지 정보가 덧붙여져 있다.
하오미자차가 없으면, 참깨를 볶아서 찧어 (체로) 걸러 그 국에 말면 토장국이라 느니라.
한복려 : 재미있는 건 여기에서 마지막에 오미자가 없다. "참깨를 갈아서 해라" 했다. 그게 바로 토장법이라고 나와 있는데, 깨의 색깔이 누릇하게 흙토자를 붙여서 토장법이라고 한 것 같다. 이 방법은 정말 본인이 경험하지 않고서는 이런 방법이 나올 수 없다. 생각해보면 새콤한 맛. 또 한가지는 고소한 맛 두 가지를 똑같은 재료를 넣어서 한다는 것이, 우리가 볼 때 얼마나 지혜로웠나 알 수 있다. |
음식디미방에 가장 많이 소개된 것이 청주로 여러번 걸러내 맑게 뽑아 낸 고급주다. 그 다음은 짧은 기간에 숙성시킨 뒤 걸러내지 않고 그대로 쓰는 탁주로 청주에 비해 급이 낮은 술이다. 일일주는 여기에 속한다. 제조방법으로 나누면 이렇게 5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양반집에서 이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술을 빚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의문을 풀 수 있는 단서가 있다. 지난 89년 현풍 곽씨 문중에서 묘를 이장하던 중 관속에서 발견된 편지다. 묘의 주인공은 정부인 장씨와 같은 시대에 살던 곽주(郭澍 1569~1617)라는 사람의 부인으로, 1602년에서 52년까지 50여 년간 곽주가 그의 부인에게 보낸 편지다. 편지의 양은 모두 170매. 그 안에는 양반사회의 일상적인 모습들이 담겨져 있다.
편지엔 탁주의 쓰임새를 알 수 있는 내용이 있었다. 종들에게 탁주를 내주라는 것이다. 도수가 낮고 질이 좋지않은 탁주는 주로 종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맑은 술. 즉 청주의 쓰임새를 알 수 있는 내용도 있다. 술 잘 먹는 친구들이 서울에서 오니 좋은 술을 내오라고 하는데, 좋은 술은 바로 청주다. 그런데 음식디미방에 나온 술 중, 그 종류가 유난히 많은 것이 청주다. 단지 손님 접대를 위해 그렇게 많은 청주가 필요했던 것일까? 그 의문을 풀 수 있는 또 하나의 단서가 있다. 유희춘(柳希春)이라는 양반이 1567년에서 1577년까지 10년간 쓴 방대한 양의 일기가 그것이다. 이 미암일기(眉巖日記, 보물 260호)에는 매일매일의 사소한 일들이 기록 되어있는데, 그 중엔 손님접대에 대한 기록이 자주 나온다. 그리고 ○월 22일 기록에는 덕현에서 귀한 손님이 찾아와 즐겁게 담소하며 술을 먹었다는 기록이 있고, 바로 다음날인 23일에도 손님들이 와서 주과를 마셨다고 적고 있다. 이렇게 미암일기에서 손님이 찾아온 횟수는 10년간 모두 3,841회. 거의 매일 손님과 함께 술을 마신 셈이다. 양반가에서 손님을 맞아 술을 대접하는 건, 매일 반복되는 일상적인 일이었다. 때문에 집에는 늘 술이 있어야 했으며, 술은 그 집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여겨졌다.
조선시대 양반가의 손님접대문화는 다양한 술을 만들어 냈다. 정부인 장씨가 음식디미방에 특별히 53가지의 술제조 방법을 소개해놓은 것도 양반가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 좋은 술을 빚는 것이기 때문이다. |
음식디미방이라는 책을 통해 당시 사대부가에서는 어떤 음식들을 즐겨 먹었는지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양반가의 문화를 읽을 수 있다. 이 책은 단순한 요리서가 아니라 조선중기의 사회상을 보여 주는 역사서인 것이다. 이러한 귀중한 책을 남긴 것이 1600년대 안동에 살던 정부인 장씨. 사실 조선시대 여성이 책을 쓴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시서화에 능한 신사임당이나 허난설헌도 자신들의 작품들만 따로 남겼을 뿐, 스스로 책을 만들지는 않았다. 그러한 시대에 방대한 양의 음식조리법을 정부인 장씨는 책으로 남겼다.
그런데 정부인 장씨를 두고 논란이 많았다. 정부인 장씨를 주인공으로 하고있는 이문열씨의 소설 선택이 발표된 뒤 여성계의 반발이 심했다. 그건 결혼이후의 정부인 장씨의 삶 때문이다. 학문의 수준이 높고 글씨와 그림에도 뛰어났던 정부인 장씨는 결혼 이후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역할에만 충실 한다. 이러한 정부인 장씨의 삶에 대해 이문열씨는 소설 선택을 통해 재능이 많은데도 결혼이후 가정을 돌보는 데에만 전념했던 정부인 장씨의 삶이 얼마나 가치있는 것인가를 들어서 가정보다는 사회활동에만 가치를 두는 현대여성들의 생각을 비판했다. 그러자 여성계에서는 어머니와 아내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삶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건 현대여성들이 추구하는 삶에 역행되는 것이라며 반박을 했다. 그러나 어쩌면 이러한 논란은 무의미한 일인지도 모른다. 정부인 장씨의 삶에 대한 평가는 시대적인 배경을 통해서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정부인 장씨가 살던 시대는 17세기. 이 시기 여성들의 삶에는 커다란 변화가 생기게 된다. 그 변화상을 볼 수 있는 단적인 예가 양반집의 구조다. 여성들의 활동공간이 집 안의 깊숙한 곳으로 옮겨지게 된다. 안채가 따로 구분되어 집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배영동 (안동대 민속학과) 교수 : 조선후기 사회로 오면, 특히 가부장적인 권위가 강화되고 남녀의 내외법이 보다 분명하게 정해짐으로서 남성공간과 여성공간의 분화가 엄격하게 적용되고, 그것이 보편화됨으로서 사랑채와 안채의 분화도 잘 나타나고 있다.
가옥구조의 변화는 바로 남성중심 사회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사실 이러한 변화는 조선 건국초기부터 시도되었다.그러나 여성의 활동이 자유로웠던 고려의 사회분위기가 하루 아침에 바뀌지는 않는다. 그러던 것이 17세기에 와서 변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배용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 : 17세기는 임진왜란이라든가 병자호란 양란을 거치며 그동안 이어져 온 질서가 흐트러지고, 그러면서 다시 복원하고 계승해야 되는 그런 과제도 남아있는 시기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17세기 조선은 피폐해져 있었고, 사회기강마저 무너졌다. 이에 조정에서는 나라를 다시 세우고 사회기강을 바로 잡기위해 유교적인 이념을 강조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살았던 정부인 장씨도 여느 여성과 다르지 않았다. 결혼을 한 뒤엔 내외법에 따라 가정을 돌보는 일에 전념하게 된다.
정부인 장씨는 아버지 장흥효의 제자였던 석계 이시명 과 결혼했다. 그런데 종가가 있는 마을 입구엔 정부인 장씨의 유적비가 세워져 있다. 그리고 집안에서는 존경받는 어른으로 모셔지고 있다. 사당엔 부군인 이시명과 나란히 위패가 모셔져 있었는데 불천위였다. 4대까지만 모시는 일반적인 제사와는 달리 불천위로 영원히 모셔지고 있는 것이다.
정부인 장씨를 두고 여성군자로 부르기도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정부인 장씨가 재령이씨 집안에 시집온 것은 19살 때다. 당시 이시명은 서당에서 후학을 기르던 분으로 상처를 하고 슬하에 1남2녀를 두었다. 정부인 장씨는 이시명과의 사이에 6남1녀를 두어 전처의 소생까지 10명의 자식을 길렀다. 그 중 일곱 아들은 학자로 대성했을 뿐아니라, 행실도 반듯해 주위에서 칠현자(七賢子)로 불리 웠다. 일곱 아들이 남긴 문집은 지금도 서당의 창고를 가득 메우고 있는데, 특히 둘째 이휘일은 홍범연의(洪範衍義)라는 정치철학서를 남겼고, 셋째 이현일은 퇴계 이황의 학풍을 잇는 대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높은 지식이나 지위를 갖는 것보다, 착한 일 하는 사람이 되길 원한다. (행실기 중에서)>
일곱 아들 중, 셋째아들 갈암 이현일이 이조판서에 오르면서 장씨에겐 정부인이라는 품계가 내려진다. 그리고 훗날 이현일은 일곱 아들이 반듯하게 자랄 수 있었던 건, 정부인 장씨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실기에 적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실기엔 아내로도 현명했던 정부인 장씨의 일화가 소개되어있다. 당시 선비들은 명나라에 대한 신의가 두터웠다. 부군인 석계 이시명도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세력을 확장해가자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산속(수비산)으로 들어갔다.
김구현 (안동문화원 이사) : 장부인이 생각하기에, "좋은 제자를 만나서 학문을 가르쳐야 하는데 영양골짜기에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지 않느냐. 어떻게 하면 학문을 펴느냐" 여러 가지 구상하는 중에 땅을 팔고, 친정에서 5리 떨어진 곳에 가서 땅을 산다.
그리고 동네이름을 "클대" "명나라명"의 대명동이라고 지어, 부군 이시명을 마을로 내려오도록 했다. 지금도 이 마을을 사람들은 대명동이라 부른다. 이렇게 정부인 장씨는 지혜를 발휘해 남편을 마을로 돌아오게 했고, 이후 석계 이시명은 서당을 짓고 후학을 기르는데 전념한다.
정부인 장씨는 끊어질 뻔했던 친정의 대를 이어 주기도 했다. 3년간 친정집에 머물며, 어린 새어머니를 대신해 집안의 대소사를 치뤘으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친정을 시댁근처로 옮겨 어린 동생들이 성장할 때까지 돌보았다. 정부인 장씨는 두 집안의 어른으로 그 역할을 다 했던 것이다.
이배용 :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시니까 친정 돌볼 수 있을 만큼 인정되고 그걸 통해 가족의 화합과 조화를 이뤄 내는 건, 장부인의 지혜라든가 하는 당시 어른으로서 장부인의 폭넓은 역할의 많은 족적을 남길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 않았나 생각되고, 지금도 불천위로 정부인 장씨를 제사를 받드는 건, 당시 남성중심의 가치를 서서히 변화시켜서 여성의 존재가치를 일깨워 주는데 일익을 담당했다고 본다.
정부인 안동장씨(貞夫人 安東張氏)는 인지한 어머니로 현명한 아내로, 그리고 효심 가득한 딸로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다. 그렇게 철저하게 자신의 역할을 해냈기에 300여 년이 흐른 뒤에도 어른으로 존경받고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 남자들, 그것도 사회지도층인 사대부에 대한 최고의 호칭인 군자로도 불리워지고 있다.
그러한 장씨가 나이 일흔에 써 내려간 것이 바로 음식디미방이다. 책 뒷면에 이 책을 잘 보관하라는 당부의 말을 쓰면서 그 첫머리에 "이리 눈이 어두운데"라고 쓴 것처럼, 침침한 눈으로 평생의 경험을 되살려 조리서를 써 내려간 것이다. 그렇게 정성스레 음식디미방을 쓴 이유는 단 한가지. 후손들에게 전하기 위해서였다. 음식조리법을 대대손손 전하기 위한 장씨의 마음. 이 책은 장씨가 팔십 평생을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징표인 것이다.
그런데 음식디미방을 보면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146가지 음식 중에 16가지 음식에는 음식이름 밑에 '맛질방문'이라는 말이 쓰여 있다. 맛질방문?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황혜성 : 맛질이 뭐냐 백방으로 생각하다가. 맛있는 방법이다. 방문이라는 건 방법이라는 뜻. 그러니까 이 어른이 맛있는 방법이다 하고 이렇게 여러 개로 열 몇개를 죽 써놓은 걸로 알았다. 그런데 나중에 이것을 해석해서 책까지 내놓은 다음에 문제가 생겼다. '맛질'이라는 소리를 외갓집에서 하더라. "그게 아니구요 맛질이라는 동네가 있다구요." 근데 그게 장씨네 외가 동네였다.
장씨의 외갓집이 있었다는 경북 예천. 과연 맛질마을이 있다. 그리고 간판에도 맛질이라는 글씨들도 눈에 띈다.
안동권씨 일족 : 내가 알고 있기로는 말을 캐러 가는 길목이라서 맛질이라고 했었다. 그리고 이 고장에서 만드는 솜씨가 좋은 사람들이 살았다고 해서 맛질이라고 하기도 한다.
맛질마을에는 안동장씨의 외가인 안동권씨가 살았다. 지금도 일부 안동권씨들이 남아있고, 장씨의 외갓집 터도 전해져 오고 있다. 장씨는 어린 시절 친정어머니에게 듣고 배웠던 요리까지 음식디미방에 적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요리에 대한 지식을 모두 동원해서 책을 쓴 것이다. 책에 쏟은 장씨의 정성은 글에서도 나타난다.
안귀남 (안동대 국문과) : 한글이 쉽게 읽히고 쓸 수 있게 한다는 그런 장점을 가장 잘 살렸다. 문장을 하더라도, 말하듯이 했다.
실제 내용을 보면, 마치 며느리를 앞에 두고 말을 하듯이 쓰고 있다. 한문실력이 뛰어난데도 굳이 한글로 써내려 간 것은 후손들이 늘 가까이에 두고 보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박광용 (카톨릭대 사학과) 교수 : 정부인 장씨께서 말년에 음식디미방에 대해서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던 건 틀림없다. 거의 가보 비슷하게 보존하라는 말씀을 남겼다는 거다. 이건 본인이 학문과 도덕으로 가문을 세우고, 그 마지막 완결로 본인이 이제까지 노력해왔던 가정공동체에 대한 봉사. 또한 사회공동체에 대한 봉사로 음식디미방을 남겨 놓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후손들에게 대대로 전해지길 바랬던 장씨의 마음. 그 간곡한 바램이 음식디미방 곳곳에 스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