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조선왕가 최초의 의문사 - 누가 소현세자를 죽였는가
조선왕가 최초의 의문사 - 누가 소현세자를 죽였는가 |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가 사망했다. 그의 나이 34세. |
소현세자는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아버지 인조와 함께 삼전도의 치욕을 겪고 8년 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던 비운의 왕세자이다. 이 소현세자가 청나라 볼모생활을 끝내고 귀국한 지 2달 만에 갑자기 병에 걸려 실제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사망한 것이다. |
1. 소현세자의 시신 |
그의 시신은 보통사람이 사망했을 때와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다. 소현세자의 시신은 급사에 의한 죽음으로 보여지지만 그의 공식 사망원인은 학질로 인하여 죽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대 최고의 의술을 인정 받았던 조선의 어의들이 흔한 질병이었던 학질을 치료하지 못했던 것일까. 또한 시신의 상태는 소현세자의 죽음에 대한 의문을 더하고 있다. |
2. 그의 죽음의 원인은? |
약물중독의 의혹이 점점 커지는 소현세자의 죽음. 하지만 궁궐 내에서, 그것도 임금 다음으로 귀한 존재였던 세자를 독살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이었을까. |
3. 누가 소현세자를 죽였나? |
당시, 소현세자가 독살 당해 죽었을 것이라는 의심이 궁궐 내에서 분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인조는 소현세자의 죽음에 대해 아무런 확인도 하지 않았고, 담당 어의에게 그 어떤 책임도 추궁하지 않았다. 진상을 캐고 있던 세자빈 강씨는 죽음을 당하고, 그 이후 진상규명을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왜 인조는 자신의 아들의 죽음에 그런 태도를 보였던 것일까. |
4. 심양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
조선시대, 세간의 풍문을 적어놓은 한 야사집에서는 소현의 죽음을 두고 청나라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로 인하여 죽음을 맞이했다고 전한다. 이 야사에는 인조가 소현세자를 죽였을 거라는 심증이 담겨있다. 또한 그런 심증과 그의 죽음이 청나라와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소현세자는 볼모로 잡혀 있었던 중국 심양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
5. 새로운 혁명을 꿈꾼 소현세자 |
숭명반첩을 고수하는 인조와 집권 사대부, 그리고 심양에서 새로운 현실에 눈을 뜨고 태도를 바꾼 소현세자. 보수와 개혁의 갈래에서 그들은 갈등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소현세자는 성리학 중심의 조선사회가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귀국한다. 그리고 조선 사회는 그를 사악한 것에 빠진 반역자로 몰아 세운다. |
6. 그의 죽음 이후... |
백성을 위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해 명분보다는 실용적인 학문과 과학기술의 도입을 시도했던 소현세자. 그가 새롭게 바꾸려 했던 노력은 박탈되었고 의문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그 이후의 역사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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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현세자의 비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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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현세자의 볼모 생활
인조 15년(1637) 정월 30일 조선 국왕 이종이 청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복 의식을 행한 후, 소현세자는 그대로 청 진영에 들어갔다가 2월 5일 돌아왔다. 돌아온 지 3일 후인 2월 8일 예친왕 도르곤에게 인도되어 회군하는 청군을 따라 북행하게 되었다. 일행은 세자와 세자빈 강씨(姜氏), 나중에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 남이웅(南以雄) 이하 관원 180명이었다.
소현세자 일행이 심양에 도착한 것은 4월 10일이었고, 인조 23년(1645) 2월 영구 귀국하기까지 거의 8년을 심양에 머물렀다. 그는 약 1개월씩 2번(1640. 3~4, 1643. 1~2) 서울에 머물렀던 기간을 제외하고는 생애의 중요한 시기를 인질로서 생활했다.
세자는 심양에 도착해서는 한때 조선사신 접대관인 동관(東館)에 거주하다가 5월 7일 준공된 심양관소로 옮겼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출입의 제한은 받았으나 그 이외 큰 불편은 없었다. 세자는 청과 조선간의 현안을 중재해 갔으나 양측으로부터 다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하였다. 초기에는 언어가 통하지 않아 청 태종과의 대화에 어려움을 겪었다.
청은 친선도모를 위해 각종 제사, 몽고부족들의 조공, 명나라 장군의 투항으로 인한 회합에 세자와 봉림대군을 반드시 참석시키고, 또한 매월 5일․15일․20일의 왕이나 장군의 황제에 대한 조회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시켰다. 이러한 의례적인 행사에는 청 조정을 움직이는 주요 인물들이 모두 모이는 기회였으므로 세자를 청이 매우 우대했음을 알 수 있다. 예친왕 도르곤을 비롯한 청의 왕족은 세자를 초청하여 연회를 베푸는 등 인간적인 친숙의 기회를 마련하는 데 주력하였다.
청과 조선 사이의 현안은 주로 명 공격을 위한 조선의 원병, 식량지원, 그리고 여진족으로 조선인과 결혼하여 조선에 거주하는 자들의 송환문제였다(인구가 적은 청은 인구 확보에 애를 썼다). 이런 문제에 대해 세자는 자신이 조선의 국정에 간여할 수 없다고 하면서 회피하였다. 세자와 비교적 친숙하였던 영친왕 아지거는 “황제가 무슨 일을 분부할 때마다 세자는 무릇 임의로 혼자 결정할 수 없고 다만 본국에 전보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하나, 이후 만약 황제의 명이 있으면 모름지기 그 뜻을 알고 좋게 대응하여야 할 것이다” 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세자의 독자적 결정이 어려웠던 이유는 부왕과의 관계였다. 이종은 청 조정과 친숙한 세자에게 왕위를 넘기라고 청이 요구할까 두려워했다. 세자의 미지근한 태도는 부왕의 심정을 고려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부자관계는 결국 파국을 맞게 된다.
세자가 주로 접촉하였던 인물은 영친왕(英親王) 아지거(阿濟格 ; 누르하치의 12子), 예친왕(禮親王) 다이산(代善 ; 누르하치의 2子), 예친왕(睿親王) 도르곤(多爾袞 ; 누르하치의 14子), 예친왕(豫親王) 도도(多鐸 ; 누르하치의 15子)와 용골대였다. 특히 당시 누구보다 실권자였고 청 태종의 뒤를 이을 가능성이 높은 도르곤과의 친교로 세자의 심양 활동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세자의 권한이 늘고 또 청에 우호적으로 되어가자 이종의 경계는 심해졌다. 세자는 청이 중국을 차지할만한 자격이 있고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세자는 명을 정벌하는 원정에 2번 참여하였다. 1회는 1641년 태종 홍타이지를 따라 금주와 송산 정벌에 출정한 것이었고 1644년에는 예친왕 도르곤이 지휘하는 명 정벌군을 따라 5월 2일 북경에 입성하였다. 세자는 20여 일만에 심양으로 귀환했다가 9월에 다시 북경에 가서 약 70일 동안 머물렀다(1644. 9. 19~ 11. 26).
2. 아담 샬과의 만남
도르곤은 북경에서 세자와 서양인 선교사 아담 샬(Adam Schall)과의 만남을 주선하였다. 서양의 과학 기술을 높이 평가하던 도르곤이 조선의 발전을 위해 배려한 조치였다(도르곤은 조선의 공주를 요구하여 종실여자를 맞아들이기도 했다).
아담 샬(Adam Schall, 1591~1666)
중국 명나라 말기부터 청나라 초에 걸쳐 포교와 천문역산(天文曆算)을 위해 활동한 예수회 신부. 중국 이름은 탕약망(湯若望)이다. 신성로마제국 쾰른의 명문 출신으로 1611년 예수회 수도사가 되었다. 1622년 북경에 와서 월식을 3차례 예보한 것이 적중하여 유명해졌다. 1645년 순치제 때 섭정이었던 도르곤은 아담 샬(Adam Schall)을 천문대장인 흠천감감정(欽天監監正)에 임명하였다. 청의 신임을 얻은 그는 1650년 북경 최초의 서양식 건축물인 천주당(天主堂, 南堂)을 세웠다.
1664년 강희제가 아직 친정하기 전 보정대신(輔政大臣) 오보이(鰲拜)가 전단하던 시절에 양광선(楊光先)이 서양역법(西洋曆法)을 반박하고, 신부들이 장차 바다를 건너 정복해 올 유럽의 밀정이라고 상소한 때문에 아담 샬은 한때 투옥되어 사형선고를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천재지변이 계속되어 태황태후의 명령으로 석방되었다.
그는 혼천의․해시계․망원경 등 과학기계와 지도․성도(星圖) 등을 제작했고 명나라 말기에는 대포도 많이 주조하였다. 한문으로 저술한 저서가 다수 전한다.
뛰어난 과학자이며 선교사인 아담 샬은 친절을 다하여 서양역법을 도입하려는 세자를 도왔으며, 자신이 고심하여 한문으로 번역한『천문역산서(天文曆算書)』와 여지구(輿地久 ; 지구본)를 주었고 天主像까지 선사하였다. 세자는 아담 샬의 후의에 감사의 서한을 보냈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어제 천만 뜻밖에 보내주신 귀중한 구세주 천주님의 성화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서양 의 문서들을 선물로 받자옵고 제가 얼마나 기뻐하고 감사하는지 귀하는 상상도 못할 것입니다. 곧 그중 몇 권의 책을 급히 읽어보니 그 속에서 정신수양과 덕성 함양에 적합한 도리가 탁월하고 명쾌하게 갖추어져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나라는 학문에 대한 광명이 결핍되어 오늘날까지 이런 진리를 모르고 살았습니다. 천주님 성화와 그 존엄한 모습은 앙모하는 자에게 심오한 인상과 감회를 자아내는데, 이를 벽에 걸어 모시고 우러러 뵈오니 보는 이의 마음이 평온해질 뿐 아니라 실로 속세의 때와 먼지를 청정케 합니다.
천문학에 관한 책은 귀국하면 곧 간행하여 학자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합니다. 그것들은 조선인이 서양의 과학을 습득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서로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태어난 우리들이 이국 땅에서 상봉하여 형제와 같이 사랑해 왔으니 하늘이 아마 우리를 이끌어준 것 같습니다.
나는 이 서적과 천주상을 고국에 가져갈 수 있기를 갈망합니다마는 우리나라는 아직 천주 숭배의 진리를 듣지 못하였으므로 도리어 그 존엄성을 모독할까 염려되어 이를 두려워하는 걱정이 가슴에 사무칩니다. 이런 까닭에 귀하가 동의하신다면 이 천주상만은 돌려드리는 것이 나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세자의 서양문물에 대한 태도를 잘 보여주는 편지이다. 세자는 귀국길에 서양인 선교사 한 사람을 동반하겠다고 말해 아담 샬을 놀라게 하였다. 귀국하기 전 세자와 도르곤은 조선이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 문제를 논의하기도 했다.
3, 귀국과 의문의 죽음
세자는 병자호란 때 끌려간 조선인 포로 가운데 1만 3천명을 인솔하여 귀국길에 올라 인조 23년(1645) 2월 18일 서울에 도달했다. 수많은 서양문물도 가지고 왔다. 1643년 청 태종 사망 후 순치제의 섭정이 되어 사실상 황제 역할을 하고 있는 도르곤과 친숙한 세자의 귀국으로 이종은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도르곤이 양위하라는 지시를 내릴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이종은 귀국한 세자에게 신하들이 진하(進賀)하는 것마저 막았다.
세자는 귀국한지 두 달 만에 병석에 눕게 되었다. 오한과 발열 증세를 보이던 세자는 발병한지 3일 만에 창경궁에서 젊은 나이로 급서했다. 4월 26일이었다. 그렇게 중하지도 않던 병세가 하루아침에 급변한 것은 처방이 잘못된 탓이며, 매일 침을 놓던 의관(醫官) 이형익(李馨益)에게 책임이 있다는 여론이 일었다. 이형익은 3개월 전에 이종이 아끼는 후궁인 소용(昭容 : 왕의 후궁의 하나로 정 3품이다) 조(趙)씨의 추천으로 특채된 자였다. 조씨는 세자빈 강씨와 사이가 나빴다.
국왕이나 세자가 사망할 경우 시의(侍醫)들은 일단 책임을 지고 처벌받는 것이 상례인데 이종은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3일 만에 입관시켰다. 또한 입관할 때 입회하는 인원도 관례를 어기고 제한하였다. 즉 대소렴(大小殮) 때에는 빈궁․당상관 등이 입회해야 하는데도 이를 불허하고 인척 4~5인에게 소렴을 맡겼다.
소현세자는 과연 학질로 급서했는가.『인조실록』에는 소현세자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세자의 시신은 盡黑으로 변해 있었으며 7穴에서 출혈하고 있어 마치 독약에 중독된 사람 같았다.
이 증언은 소렴에 참여하였던 종실인 진원군 이세완(李世完)의 처가 한 것이다. 그녀는 바로 소현세자의 모후인 인열왕후(仁烈王后)의 서제(庶弟)로 세자에게는 이모가 된다.
시신이 검게 변하고 출혈은 독약을 먹고 죽은 사람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며 침을 잘못 놓아서 생기지는 않는다.
소현세자는 이종에게도 소용 조씨에게도 용납대상이 못되었다. 청에 대한 원한이 골수에 쌓인 이종과 청을 인정하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려는 세자의 태도는 상극이었으며, 이종은 양위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강박감에 시달렸다(이종에 대한 인물평은 권모를 잘 쓰고 의심이 많다는 것이다). 세자빈과 사이가 나쁜 소용 조씨는 세자가 즉위할 경우 그 운명은 명약관화한 것이었다.
4 소현세자 유족의 비극
세자의 사망 후에도 이종의 잔학 행위는 그치지 않았다. 소현세자의 장지와 장례일 문제도 세자빈 강씨의 희망은 일축되었고 세손을 왕위계승자로 정위하자는 상소도 각하되었다. 그러던 중 5월에는 봉림대군도 귀국하였다.
이종은 세자가 죽으면 세손에게 왕위를 전한다는 상경(常經)을 어기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기로 결심하고 윤 6월 2일 중신회의를 열었다. 영의정 김류와 낙흥부원군 김자점이 이종을 지지하였으나 좌의정 홍서봉, 우찬성 이덕형, 이조판서 이경석, 병조판서 구인후, 공조판서 이시백, 대사간 여이징(呂爾徵), 부제학 이목 등 대부분의 중신들은 봉림대군의 세자책봉을 ‘종통실서(宗統失序)’ 라고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종의 강변과 억지를 꺾지는 못했다. 세손이 왕위계승 자격을 잃음으로써 소현세자 유족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세자는 이석철, 이석린, 이석견 등 3남과 3녀를 남겨두었다. 유족을 겨냥한 음모가 일어났다.
얼마 후 궁중에서 저주 사건이 일어나 두 명의 궁녀가 투옥되고 잔인하게 고문치사되었다. 그 중 한 사람은 소현세자의 장남인 이석철의 보모 최 상궁이었다. 저주란 당시에 있어 하나의 유행이었다. 저주 사건에 연좌되어 처벌받고 사형당하는 왕족․궁녀․고관은 조선왕조 역대에 끊임없이 있었다. 저주란 귀신에 빌어 상대방에 재앙을 주려는 것으로 鳥獸․시체의 뼈․꼭둑각시 등을 마당․방고래․베개 속 등에 묻어두고 상대가 염병에 걸려 죽기를 바라는 것으로 조선왕조의 궁중에는 특히 저주사건이 많이 발생했다.
1차 저주 사건은 혐의를 받은 궁녀 2인이 죽음을 무릅쓰고 허위자백을 거부하여 확대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종의 마수는 그치지 않았다. 그는 소현세자빈의 형제 강문성(姜文星) 등을 사람됨이 외람(猥濫)하니 후환을 막는다는 이유로 귀양보냈다. 그리고 제 2의 저주 사건이 일어나 소현세자빈의 궁녀 두 명이 또 체포되어 옥사하였다.
인조 24년(1646) 정월에는 왕의 수라에 독을 넣은 사건이 발생하고 소현세자빈이 용의자가 되었다. 엄중 감시를 받고 지내는 그가 이런 음모를 꾸민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소현세자빈은 후원 별당에 감금되고 그를 시중드는 나인 5명이 고문받았다. 이번에도 허위자백을 거부하고 모두 고문치사하였다. 이종의 뜻이 며느리 사형에 있음을 감지한 신하들이 모두 일어나 통렬하게 그 불가를 외쳤다.
왕은 소현세자빈 구호를 논의하는 신하를 모두 같은 무리로 몰아쳤고, 3월 15일에는 끝내 며느리에게 사약을 내렸다. 소현세자빈의 형제인 강문성(姜文星)과 강문명(姜文明)도 장살(杖殺)되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소현세자빈이 죽은 후 2차례의 저주 사건이 재심되었고 이번에는 고문에 못 이겨 허위자백하는 자가 나왔다. 소현세자빈의 친정 어머니마저 처형되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소현세자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되야 했던 이석철은 인조 25년(1647) 7월 12세의 나이로 제주도에 도착했다. 사관은 이종의 처사를 개탄하는 글을 『인조실록』에 남겼다.
지금 석철 등이 국법으로 따지면 연좌되어야 하나 조그만 어린 아이가 무엇을 알겠는가. 그를 독한 안개와 풍토병이 있는 큰 바다 외로운 섬 가운데 버려 두었다가 하루아침에 병에 걸려 죽기라도 하면 소현세자의 영혼이 캄캄한 지하에서 원통함을 품지 않겠는가.
이듬해 9월 석철은 사망했다. 당시 지각있는 이들은 이종이 석철을 반드시 죽일 것으로 예상하였다. 소현세자가 죽은 후 용골대가 석철을 데려다 키우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조선에 온 청의 사신들도 돌아갈 때 소현세자의 묘에 들러 참배하여 이종은 손자인 석철을 경계하였다. 소현세자의 2남 이석린도 석달 후 형을 따라 세상을 버렸다. 이종은 두 왕자를 시종하던 나인 옥진에게 친손자 죽음의 책임을 돌려 고문하여 죽였다.
1649년 이종이 죽고 봉림대군이 즉위하니 그가 효종이다. 효종 5년 황해감사 김홍욱(金弘郁)이 감연히 상소를 올려 소현세자빈의 신원(伸寃)과 소현세자 3남의 석방을 직언하였다. 그러나 진상이 밝혀지면 왕은 재위명분을 잃게 되고 정통성은 소현세자의 3남에게 돌아간다. 왕은 김홍욱을 친국하였는데 김홍욱은 고문을 받으며 간관들에게 호소하기도 하고 언론을 막는 효종을 비난하기도 하였다.
왜 말하지 않는가? 왜 말하지 않는가? 예로부터 말하는 자를 죽이고도 망하지 않는 나라가 있었습니까? 신은 비간(比干 ; 은나라의 충신)과 더불어 지하에서 함께 놀겠습니다. 내가 죽으면 내 눈을 빼내어 도성 문에 걸어두면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겠습니다.
김홍욱은 3일 만에 장살(杖殺)되었다.
소현세자빈의 누명이 풀리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숙종 44년(1718)에 이르러서야 소현세자빈은 복권되었고 김홍욱에게도 정경(正卿)이 증직되었다.
소현세자가 즉위하지 못함으로써 한국사는 아까운 기회를 잃었다. 그의 세계관은 주자학의 명분론을 넘어섰고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조선을 개혁하려는 뜻을 가졌으나 냉혹한 권력의 속성에 희생되었다. 모든 외침과 같이 청의 침공도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 있었다. 낙후된 조선의 실상을 깨닫고 더 넓은 세계에 접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 조선의 지배층은 더 어리석은 길을 택했다. 이점은 제한적이나마 서양과의 꾸준한 교류로 서구 문물을 소화할 능력을 길렀던 일본과 비교해 볼 때 매우 아쉬운 일이다.
부자간의 권력 갈등으로 일어난 소현세자의 비극은 사도세자의 비극으로 재현되었다. 좋은 역사보다는 좋지 않은 역사가 더 잘 되풀이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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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 현 세 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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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왕( ). 인조의 장자, 효종의 형이며, 어머니는 한준겸의 딸 인열왕후(仁烈王后)이다. 1625년 세자로 책봉되었고, 부인은 강석기(姜碩期)의 딸인 민회빈강씨이고 보통 강빈(姜嬪)이라고 부른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삼전도에서 청나라에 항복한 이후, 아우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
이후 9년간 심양(瀋陽)의 심관(瀋館)에 머물면서 많은 고초를 겪었다. 동시에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서 창구역할을 맡아 조선인 포로 도망자의 속환문제,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병력 ·군량 ·선박 요구, 각종 물화의 무역 요구 등 정치 ·경제적 현안을 맡아 처리하였다. 또 청나라 인사들이 벌인 대부분의 행사에 참여하고 청나라 황제의 사냥 등에도 동행하였다.
1640~1642년 인조의 병문안을 위해 잠시 귀국하였고, 1644년 청나라 도르곤[多爾袞]의 원정군을 따라 베이징[北京]에 들어갔다. 베이징에서 독일인 선교사 샬 폰 벨[湯若望]을 만나 그로부터 서양 역법과 여러 가지 과학에 관련된 지식을 전수받고 천주교에 관해 소개받았다.
당시 베이징에서 명나라 멸망의 현실을 직접 목도했기 때문인지 그는 청나라의 현실을 인정하고 청나라와 조선의 관계를 원활히 하려고 애썼다. 이에 청나라의 경제적 요구를 들어주면서 환심을 얻었는데, 그들은 그를 ‘소군(少君)’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심관으로 들어가는 조선 정부의 재정부담이 커졌고, 동시에 부왕 인조의 의구심을 사게 되었다. 인조는 청나라가 소현세자를 즉위시키고 자신을 몰아내려는 공작을 펴는 것으로 의심, 그를 감시하였다.
1645년 영구귀국하였으나 청나라에서의 행실을 문제삼아 인조의 냉대를 받았고 급기야는 병을 얻어 급사하였다. 일설에는 그가 독살되었다는 주장도 있는데, 당시 조야의 배청적(排淸的)인 분위기를 염두에 두면 가능성이 있다. 그가 죽은 뒤 인조는 왕권강화 차원에서 세손(世孫:소현세자의 장자)을 폐위하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이러한 전후과정에서 부인인 강빈 역시 죽음을 당하고, 세 아들은 유배되었다가 죽었다. 이후로 강빈의 옥사를 억울하게 여기고 소현세자를 추모하는 분위기가 있어, 19세기 말에는 그의 후손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역모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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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현세자빈 강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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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식 4700석 남기고 볼모 생활 9년만에 귀국
소현세자빈 강씨는 조선의 왕실 여인 중 조선 땅을 벗어났던 유일한 인물이다. 병자호란 패전에 따른 인질로서였다. 세자빈으로 간택되면 평생 궐 밖 구경을 못하는 법이었다. 그런 대궐을 떠나 수천리 나라 밖 심양까지 갔다.
인조 15년 2월 서울을 떠난 강씨 일행이 압록강과 만주 벌판을 지나 심양에 도착한 때는 4월이었다. 강씨가 도착한 곳은 심양 궁궐 근처의 심양관(瀋陽館·현재 심양시 아동도서관 자리)이었는데, 이곳은 사실상 주청 조선대사관이었다. 이곳에서 소현세자는 청나라와 직접 상대하기를 꺼리는 인조를 대신해 많은 일을 수행했다. 청나라의 파병 요구에 응하고 반청활동을 하다 끌려와 재판 받는 김상헌 같은 대신들을 보호하는 것도 큰일이었다.
소현세자가 이런 정치적 일에 몰두하는 동안 강씨는 심양관의 경제문제 해결이 자신의 몫이라고 판단했다. 심양관에 정착한 조선인 일행은 192명이었는데 이 대식구의 식생활을 해결하는 것 자체가 큰 문제였다. 당시 심양의 남탑거리에는 조선인 포로를 매매하는 노예시장이 있었는데 돈이 있으면 이들을 속환(贖還)할 수 있었다. 이 무렵의 사정을 적은 ‘심양장계’ 인조 15년 5월조는 속환가가 수백 또는 수천 냥이나 되어 희망을 잃고 울부짖는 백성들이 도로에 가득 찼다고 기록하고 있다. 강빈은 이들을 구할 수 있는 현실적 수단이 돈이라는 사실에 주목한 것이다.
그녀는 돈을 벌기로 결심했다. 인조 17년에 심양의 팔왕(八王)이 은밀히 은자(銀子) 500 냥을 보내 면포(綿布)·표범가죽(豹皮)·수달피(水獺皮)·꿀 등을 무역할 것을 요구할 정도로 청나라는 물품 부족에 시달렸다. 강씨는 청나라 지배층의 두둑한 지갑을 조선의 질 좋은 물품과 연결시키면 큰돈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면포·표범가죽뿐만 아니라 종이와 괴화(槐花) 등 약재와 생강도 좋은 무역품이었다. 담배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무역을 통해 경제에 눈을 뜨던 인조 19년(1641), 기회가 찾아왔다. 청나라에서 농사 짓기를 권유해온 것이다. 심양관의 신하들은 농사를 짓게 되면 영원히 조선에 돌아가지 못할 것을 우려해 처음에는 거절했다. 그러나 강빈의 생각은 달랐다.
청나라는 야리강(野里江) 동남 왕부촌(王富村)과 노가촌(魯哥村) 두 곳에 각각 150일 갈이와 사하보(沙河堡) 근처의 1 50일 갈이와 사을고(士乙古) 근처 중 150일 갈이를 농토로 제공했는데 하루갈이는 장정 한 명이 하루에 경작할 수 있는 면적의 농토였다.
강빈은 처음에는 한인(漢人) 노예들과 소를 사서 농사를 지었다. 한인들의 값은 은 25냥∼30냥이었고 소 값은 한마리에 15냥∼18냥이었다. ‘심양장계’에 따르면 인조 20년에 농사로 거둔 곡식은 3319석이나 됐다. 강빈은 점차 한인 농군을 노예 시장에서 속환한 조선인으로 바꾸었다. 죽음의 고비에서 살아난 조선인 농군들이 더욱 열심히 일했을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덕에 수확물은 더욱 많아졌다. 강씨는 조선의 농법이 가미된 이 농산물을 만주 귀족들에게 팔았는데, 큰 인기를 끌면서 비싼 값으로 매매되었다. 무역만 하던 단일체제에서 생산과 무역을 겸하는 복합체제로 발전한 것이다.
강빈의 경영수완 덕에 인질 생활 초기 울며 호소하는 조선인들로 가득 찼던 심양관 앞 거리는 무역하는 인파로 북적거렸다. ‘인조실록’ 23년 6월조는 “포로로 잡혀간 조선 사람들을 모집하여 둔전(屯田)을 경작해서 곡식을 쌓아 두고는 그것으로 진기한 물품과 무역을 하느라 관소(館所)의 문이 마치 시장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강빈은 인질 생활에 좌절하는 대신, 대규모 영농과 국제 무역을 주도하는 경영가로 변신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선택이었다. 소현세자가 천주교와 서양 과학 기술을 받아들이는 개방주의자로 변화한 것과 같은 맥락의 변화였다. 이제 이들 부부가 귀국해서 조선의 임금과 왕비가 되면 조선은 변화할 것이었다.
그러나 인조는 이런 강빈과 소현세자를 의심했다. 그는 강씨가 청나라와 짜고 자신을 폐한 후 소현세자를 세우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이런 의심이 인조 21년(1643) 6월 사망한 강빈의 아버지 강석기의 빈소에 왕곡(往哭)까지 막게 했다. 멀리 심양에서 잠시 귀국한 며느리의 왕곡을 못하게 한 인조의 가혹한 조치는 내외의 많은 비난을 받았다.
소현세자 부부는 인조 23년(1645) 2월 9년 간의 인질 생활을 끝내고 부푼 가슴으로 귀국했다. 이때 심양관에는 4700석의 곡식이 남아 있었다 하니 그녀의 경영수완을 잘 알 수 있다. 그녀는 이런 경영수완으로 조선을 부강하게 만들려고 결심했다. 그러나 세자는 귀국 두달 만에 부왕 인조에 의해 독살되었다. 그녀 또한 비참한 운명에 처해졌다. 인조는 재위 24년 3월 강빈을 폐출해 친정으로 쫓아냈다. ‘인조실록’은 “강빈이 덮개가 있는 검은 가마에 실려 선인문을 나갔는데, 길 곁에서 바라보는 이들이 담장처럼 둘러섰고 남녀 노소가 분주히 오가며 한탄하였다”고 적고 있다. 인조는 이에 그치지 않고 당일로 사약을 내려 강빈을 죽였다. 당시 사관이 “단지 추측만을 가지고서 법을 집행했기 때문에 안팎의 민심이 수긍하지 않았다”고 비난할 정도로 무고한 죽음이었다. 그녀의 죽음은 시대를 앞서 나갔던 실용주의적 여성 경영자의 죽음이자 그녀가 만들려던 개방의 나라, 실용의 나라 조선의 죽음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