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스페셜100선
62 역사 버라이어티, 왕건 코리아
사랑의고향길
2013. 9. 28. 19:10
역사 버라이어티, 왕건 코리아 |
KBS가 베일에 싸인 고려의 모습을 <태조 왕건>이라는 드라마를 통해 복원하기 시작했다. KBS가 막대한 투자와 철저한 고증을 통해 고려를 복원하려는 이유는 천년 전 그때와 지금의 한반도 상황이 매우 유사하다는데 있다. 그래서 KBS는 고려를, 또 그 고려를 세운 왕건을 눈 여겨 보는 것이다. |
1. 철저한 고증을 거친 고려마을 |
드라마 무대로 만들어진 고려마을에는 웅장한 건물 하나가 주변을 압도하고 있다. 고려궁궐의 중심 건물로 왕이 업무를 보던 회경전이다. 또한 초가집 50여 동이 줄줄이 들어서 있고 곳곳에 시장거리들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고려시대에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서민 가옥인 마루집이 있고, 화려한 귀족의 가옥도 자리잡고 있다. |
2. 왕건이 내린 성과 본관 |
‘벽진 이씨’, 왕건은 후백제와의 전투가 있기 1년 전 이총언에게 이씨 성과 함께 벽진을 관할할 수 있는 권한인 본관을 하사하며 자연스럽게 고려의 세력으로 끌어 들인다. 고려의 벽진은 현재의 경북 성주 지역이다. 약 60여 호가 모여 사는 홈실마을은 생긴 지 800년이나 된 벽진 이씨의 집성촌이다. 벽진 이씨의 내력을 알아보기 위해 마을의 종가를 찾았다. |
3. 왕건의 부인 29명 |
왕건은 그의 나이 예순 살까지 29명이나 되는 부인을 왕비로 맞이하는데, 모두 지방 유력 가문의 딸들이었다. 비록 이유와 명분이 있는 결혼이었다고는 하지만,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여성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왕건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
4. 친필에서 드러나는 왕건의 성격 |
왕건역을 맡은 탤런트 최수종씨는 왕건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덕을 최고로 하는 인물이다. 포용력 있고 때를 기다릴 줄 알고 참을성이 있는 인물이다.’그렇다면 실제 왕건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왕건의 친필을 통해 왕건이 어떤 인물인지 알아 보기로 했다. 왕건의 친필은 풀이 뒤엉키듯 자연스러운 초서체의 글씨였다. |
5. 거대한 사찰 개태사 |
충남 논산의 개태사는 통일의 대업을 이룬 후 왕건이 세운 절이다. 당시 개태사는 지금의 조계사처럼 전국의 불교를 관장했던 곳인데, 이 개태사에는 창건될 때부터 있었던 어마어마한 솥이 하나 있다. 만약 실제로 이 솥을 사용했다면 절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개태사의 발원문에는 왕건이 꿈꾼 통일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
6. 국제 무역항 벽란도 |
‘코리아’가 고려에서 유래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고려는 그 어느 때보다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사회였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바로 국제 무역항 벽란도이다. KBS는 제천에서 만2천 여 평의 공간에 벽란도를 복원해 냈다. 드라마를 위해 고증을 거쳐 제작된 120미터 길이의 선착장 양쪽으로 두 척의 고려배가 모습을 드러냈다. |
7. 고려의 호텔, 객관 |
수도 개경에는 커다란 호텔이 무려 10여 군데나 있었다. 바로 객관인데, 벽란도를 통해 개경으로 들어온 외국 사신이나 상인들이 거처하는 곳이었다. 객관에는 외국인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던 연회장도 있었다. |
8. 고려의 대외문화 |
고려의 대외문화에 대한 자세는 개방적이고 포용적이었다. 특히 고려인들은 중국지역에 많이 진출했는데, 상인들이 얼마나 많이 진출했던지 사신들과 함께 고려인들이 너무 많아 당대 최고의 문장가 소동파는 철종에게 상소를 여러 번 올린다. 소동파의 상소문은 세계속의 코리아로 발돋움한 고려인의 역동성과 진취성을 역설적으로 말해주고있다. |
드라마 <태조 왕건>의 오픈세트장인 문경에 나와 있습니다.
이곳은 드라마의 주요 촬영장으로 쓰일 고려마을인데요.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고려시대에 와 듯 합니다.
그런데 고려하면 웬지 조선에 비해 낯설고 생소한데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사실 고려는 많은 부분 베일에 싸여있는 나랍니다.
우리에게 전해지는 유물유적은 물론 역사서적도 풍부하지 못해
고려를 제대로 그린 변변한 사극이나 역사소설조차 없습니다.
그런 고려를 새천년 들어 KBS가 앞장서 되살려 내고 있습니다.
막대한 투자. 철저한 고증, 왜 KBS는 고려 복원에 나선 걸까요?
그것은 천년전 그때와 지금의 한반도 상황이 매우 유사하다는데 있습니다.
수많은 지방세력이 득세하던 혼란의 후삼국시대,
분열된 한반도를 고려 태조 왕건은 그만의 방식으로 통합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하는 건 왕건이 취했던 민족통합 방식과
그에 바탕한 통일 고려의 모습입니다.
바로 거기서 이 시대의 과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고려를 찾아 떠나는 시간여행,
오늘은 특별히 네 분의 길잡이를 모셨습니다.
서동균 혹시 내 성씨는 어디서 비롯됐을까하는 의문을 품어본 적 없습니까?
있다면 저를 주목해 주십시오.
이은희 고려통합엔 특급 비밀이 하나 있는데, 거기엔 여성이 관련돼 있습니다.
무슨 얘기냐고요? 저를 따라 오시죠.
정재윤 남편이 이 얘기를 들으면 저는 바로 쫓겨날 지도 모릅니다.
저에게 사모하는 남자가 생겼거든요.
여러분도 그를 알게되면 제 마음을 이해할 겁니다. .
김경민 흔히들 뉴욕 파리 런던등을 국제도시라고 하잖아요.
고려에도 이들 도시 못지않은 국제도시가 있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잠시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MC 네 분의 기세가 대단한데 무척 기대가 됩니다.
거두절미하고 누가 먼저 소개하실 거죠?
서동균 지금 저희가 있는 곳이 드라마의 무대로 쓰일 오픈세튼데요.
철저한 고증을 거처 천년전의 고려마을을 되살려 놓았습니다.
먼저 여러분을 고려마을로 모시겠습니다.
------------------------------------------------------------------------------------------------
〔VCR 1〕
고려궁 들어가고 8초 -거대한 문을 통과하면 웅장한 건물 하나가 주변을 압
도한다.
회경전 FS 16초 -고려궁궐의 중심건물로 왕이 업무를 보던 회경전이다.
이 건물은 개성에 남아있는 고려궁터 만월대 유적을
참고로 실제 건물의 85% 크기로 축소 제작되었다.
배치도 8초 -(흘리고)
리포터 + 이차장 현장음 ------------------------------------------------------------
리포터 : 고려 궁궐은 이게 전부 단가DY?
이차장 : 고려궁엔 회경전 말고도 수많은 전각들이 있었고 왕궁의
둘레가 60리에 이르고 13만평에 이른다는 거대한 왕궁이
있었지만 드라마 세트장이기 때문에 회경전을 중심으로
한 일부만을 제작하게 되었다.
-------------------------------------------------------
배치도 3초 -(흘리고)
두 사람 걷고 8초 -초가집 50여동이 줄줄이 들어서 있는 이곳엔 서민집
시장거리등이 자리하고 있다.
구경중인 관광객들 ------------------------------------------------------------
리포터 : 안녕하신가? 무엇을 골똘히 보나?
관광객 : 집이 이상하게 생겨서.
리포터 : 이 집은 뭔가?
이차장 : 이 집은 온돌과 마루집이 혼재되어 있던 시대에 남아있
는 유일한 고려건물로서 토기를 이용한 화로를 사용해
난방을 했다.
리포터 : 아래가 뚫려있는 이유는 뭔가?
이차장 : 습기가 많이 차고 더운 지방에서...
리포터 : 밥도 지어 먹었나?
이차장 : 더운 지방은 화덕을 많이 사용했다.
-------------------------------------------------------
서민집 sk 5초 -이 마루집이야말로 고려시대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
한 서민가옥이다.
배치도 3초 -(흘리고)
리포터+이차장 ------------------------------------------------------------
리포터 : 되게 화려하다. 이 집은 뭔가?
이차장 : 귀족의 가옥이다.
리포터 : 왕궁하게 비슷하게 2층으로 되어있다.
이차장 : 다락집은 중층집이라 불리는데 부호나 재력가들의 사랑
채로 설정한 건물이다. 그 용도는 귀빈접대나 연회장으
로 쓰이는 건물이다. 당시 권력가들은 왕궁 못지않게 상
당히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에서 살았다.
리포터 : 잠깐 이게 무슨 소리지?
------------------------------------------------------------
잔치중인 귀족집 ------------------------------------------------------------
리포터 : 많은 분들이 있다. 저희가 찾아온다고 잔치상까지...
귀 족 : 이런 무험한--
리포터 : 무슨 날인가?
귀 족 : 오늘 태조대왕께서 나에게 성을 내린 기쁜 날이다.
오늘부터 나는 이씨성이다.
리포터 : 잠깐만, 성을 내렸다고---
귀 족 : 벽진에 가봐라. 그러면 알 수 있을거다.
리포터 : (고개 갸우뚱) 벽진이라고...
------------------------------------------------------------
도로 TR 3초 -고려의 벽진은 현재의 경상북도 성주지역.
집성촌 부감+걸어가고 20초 -약 60여호가 모여사는 홈실마을은 생긴 지 800년이나
된 벽진이씨의 집성촌이다. 벽진이씨의 내력을 알아보
기 위해 마을의 종가를 찾았다.
종손 현장음 ------------------------------------------------------------
시조어른은 지금부터 1100년전에 고려태조때 이총자언자 되시는
분인데 저는 이 어른의 34대손이다. 시조 어른께서는 고려태조께
서 국토를 통일하는데 크게 기여한 분이다. 지금도 벽진장군이 쓰
던 말구이 유물이 있다.
------------------------------------------------------------
말구이 쪽으로 다가가고 6초 -시조 이총언을 모시는 경수당엔 이총언이 사용했던
돌로 된 말구유가 전해져 온다.
말구이 주변 사람들 모여있고 ------------------------------------------------------------
리포터 : 뭐 하시는 건가?
할아버지 : 말구이가 시조어른께서 사용하던 말구인데 천백여년전
에 쓰이던 건데 말구이에 씻으면 눈병이나 피부병에
씻으면 영험이 있다고 해서...
------------------------------------------------------------
모여있고 -후손들에게 이 말구유는 영험함의 대상이다. 그것은
시조에 대한 존경심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닐까?
모여있고 ------------------------------------------------------------
리포터 : 더 나빠지는데
할아버지 : 조금 있으면 된다.
리포터 : 좋아지는 것 같다.
리포터 : 나 피부병 있는데...
할아버지 : 안된다. 여기서 목욕하면 안된다.
리포터 : 아무도 없는데.
할아버지 : 낮에는 안된다. 사람들 있는데...
시조어른에게 참배를 하고...
------------------------------------------------------------
사당으로 가고 ------------------------------------------------------------
할아버지 : 참배를 하려하면 여기서 해야한다.
리포터 : 그럼 하지.
할아버지 : 안된다. 의관정제를 하고 그렇게 참배를 해야지.
리포터 : 옷을 입어야 하는건가?
------------------------------------------------------------
위패 30초 -이총언은 당시 벽진군의 유력한 지방세력으로 신라계
사람이다. 왕건은 후백제와의 전투가 있기 1년전 이총
언에게 이씨성과 함께 벽진을 관할할 수 있는 권한인
본관을 하사하며 자연스럽게 고려의 세력으로 끌어 들
인다. 결국 이총언은 왕건의 사람이 되어 후백제와의
마지막 전투에 참가해 큰 공을 세운다.
지배영역 C.G 13초 -벽진이씨라는 본관을 하사받은 이총언은 실질적으로
충청도 인근지역의 조세권까지 관장하는 실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된다.
도로 TR 5초 -이러한 예는 비단 이총언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
다.
사당 찾아가고 ------------------------------------------------------------
리포터 : 계세요. 아무도 안계신가봐요. 안동김씨. 안동권씨. 안동
장씨. 세 성이 같이 계신가 보다.
계세요.
------------------------------------------------------------
둘러보고 -이곳 삼태사묘는 고려 개국공신 세 명을 모신 곳이다.
------------------------------------------------------------
후손들 : 어서 오시오.
리포터 : 서울 KBS에서 왔다.
----------------------------------------------------------
앉아 얘기하고 FS 7초 -일명 삼태사라 불리는 권행. 김선평. 장정필. 이들 역
시 성과 본관을 하사받은 사람들이다.
------------------------------------------------------------
권씨 INT 930년 사성을 받았다. 왕건태조한테 사성을 받을 때 김가에서 권
가가 된 분은 우리 시조 할아버지가 처음이다. 그때부터 권가가
생겼다. 그 전에는 권가가 없었다.
------------------------------------------------------------
삼태사 묘정비 15초 -안동의 지방세력으로 신라인이었던 삼태사는 고려통
일의 분수령이 되는 병산전투에서 왕건을 도와 큰 승
리를 이끌어낸다. 그 공로로 왕건은 삼태사 모두에게
는 안동의 지배권을 인정해 준다.
보물각~철문 여는 것까지 보고
문 열리면 -지금도 태사묘 보물각엔 삼태사의 유물이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다.
금고문 여는 것 보고
다 열리면 -보존상태도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흑관모 35초 -지금봐도 위엄있고 화려한 이 유물은 고려의 고급관
리들이 사용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유물들은 안동을
본관으로 했던 삼태사가 고려의 지배층에 편입해 어
느정도의 권한을 가지고 이 지역을 다스렸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있다. 이처럼 본관은 왕건이 유
력 지방세력에게 내린 지방통치 권한으로 엄청난 특권
이었다.
리포터 ------------------------------------------------------------
리포터 : 여러분 어떤가? 폼 나지 않나?
삼태사 가운데 권행은 성을 하사받고 김선평과 장정필은
안동지역의 지배권을 인정받은 거다. 그런데 교수님 왕
건은 이들에게 성을 하사하며 지배권을 인정한 겁니까?
------------------------------------------------------------
박종기 교수 INT ------------------------------------------------------------
신라말 고려초의 역사적인 상황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시
기는 한국사의 그 어느 시기보다도 수많은 지방세력으로 분열되
어 있는 사회였다. 결과적으로 고려왕조라는 통합국가를 탄생하기
위해서는 지방세력을 통합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 바로 이런 통
합의 원리가 본관제였다. 한편으로 이러한 본관제는 결과적으로
지방세력들에게 자율권을 부여함으로서 해당지역에 대한 개발을
용인하게 되는 것이고 자율권으로 바탕으로 지방세력들은 독자적
인 지방문화를 발전시켜가는 계기로도 작용했던 것이다.
--------------------------------------------------------------
------------------------------------------------------------------------------------------------
〔스튜디오 2〕
MC 그러니까 요즘 우리가 얘기하는 본관과 성씨가 고려때부터 사용된거군요.
얼마전 사리체프라고--
러시아에서 귀화한 축구선수가 자신의 이름을 신의손이라 하고
본관을 소속팀과 관련있는 구리로 정했다고 하던데요.
귀화한 외국인조차 본관이 있으니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본관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 곘네요.
서동균씬 장성 서가라고 했고, 나머지 분들은 본관이 어딘가요?
이은희 전주이가다.
정재윤 초개정가다.
김경민 경주김가다.
MC 여기엔 본관이 같은 성씨를 가진 분들이 없는데,
왜 본관이라는 게 평소에는 잊고 살다가도
새로운 사람을 만났을 때 성씨가 같으면 꼭 본관을 묻게 되잖아요?
본관이 같으면 금방 가까워지는데...그건 왜 그런가요?
서동균 본관이 같은 성씨를 가졌다는 것은 곧 친인척 관계를 의미합니다.
본관이 같을 때 스스럼없이 가까워지는 건
그로인해 서로가 자연스럽게 일체감을 느끼기 때문인데요.
이러한 본관제를 잘 활용한 사람이 왕건입니다.
왕건은 전국의 중요한 지방세력에게 성씨를 부여하면서
지역민을 재량껏 다스릴 수 있는 지배권을 함께 주었습니다.
그대신 지방세력에게 충성을 이끌어 낸 것이지요.
요즘으로 말하면 지방자치제라고 할까요?
천년전 지방자치제가 바로 본관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MC 본관과 성씨에 그렇게 큰 뜻이 담겨 있는 줄 몰랐습니다.
고려를 들여다 보는 작업이 점점 더 재미있어지는데요.
또 어떤 흥미로운 내용을 준비하셨습니까?
이은희 시대극하면 떠오르는게 바로 화려한 의상인데요.
드라마 <태조왕건>도 복식 재현에 상당한 공을 들였습니다.
이번에 복원한 복식은 우리 복식사에 큰 획을 그을만한 일이라고 하는데요
저는 이 복식에서부터 고려통일의 비밀을 풀어나가겠습니다.
------------------------------------------------------------------------------------------------
〔VCR 2〕
리포터 들어가고 ------------------------------------------------------------
리포터 : 안녕 뭐하나?
유수정 : 지금 태조왕건의 의상을 차에 싣고 있는 중이다.
리포터 : 그렇게 많이 필요한가?
유수정 : 그럼. 차로 여덟대 분량의 의상을 싣고 있다.
리포터 : 한 번 촬영하는데 그렇게 많은 의상이 필요한가?
유수정 : 평균적으로 여덟대 정도 필요하고 많을때는 10대 이상
나가고 있다.
리포터 : 전투복도 여러종류가 있네.
유수정 : 계급이 다 틀리기 때문에 여러 종류가 있다.
------------------------------------------------------------
귀족 여자옷 ------------------------------------------------------------
리포터 : 여자 의상은 어디있나?
유수정 : 이은희씨 뒤에. 이것은 귀족 여자의 저고리다. 저로기 위
에다 치마를 입게된다. 이것도 저걱도 치마다. 치마 멜빵
달린게 특이하다....형태가 다양하다.
리포터 : 이게 뭔가?
유수정 : 배자다. 소매통의 넓이에 따라 신분이 다르다.
리포터 : 뒤에도 더 화려한 옷이 있다. 소매통 넓다.
저도 귀족의 이상을 한 번 입어보고 싶은데 어울리나?
------------------------------------------------------------
옷 fan 5초 -당시 의상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화려했다.
옷 입고 나오는 리포터 ------------------------------------------------------------
리포터 : 어때요. 제가 왕비로 변신을 해 봤는데...
유수정 : 정말 예쁘다. 그런데 옷을 잘못 입은 것 같다.
숄은 어깨에서 내려와야 하고 옷고름도 잘못되었다.
옷고름이 중앙에 와야한다. 예쁘다.
리포터 : 왕비가 입을 의상은 이거 한벌인가요?
유수정 : 스물아홉벌 정도 된다.
리포터 : 왕비가 옷을 굉장히 자주 갈아입나봐.
유수정 : 아니요. 왕건의 비가 스물아홉명이나 된다.
리포터 : 왕건 혼자서 왕비가 스물아홉명씩이나 되나? 와--
------------------------------------------------------------
기다리는 리포터 ------------------------------------------------------------
리포터 : 아무도 없는 우물가에서 청승이냐고. 이곳은 보통 우물
가가 아니다. 천년 전 어느날 왕건이 장화왕후 오씨를
처음 만나 사랑을 이룬 특별한 우물이다.
------------------------------------------------------------
완사천 줌 아웃 fs 18초 -왕건과 장화왕후 오씨가 처음으로 만났다는 완사천.
기록에 의하면 목이 마른 왕건이 마침 우물에 있던 오
씨에게 물을 청했고 오씨는 버드나무잎을 띄어 물을
건냈다고 한다.
걸어 올라가고 흘리고
기념비 보이면 12초 -이 극적이고 로맨틱한 만남을 후손들은 기념비를 세
워 기억하고 있다. 그렇다면 왕건과 만난 장화왕후 오
씨는 어떤 인물였을까?
집성촌 들어가는 TR 7초 -장화왕후의 후손들이 모여사는 나주의 오씨 집성촌을
찾았다.
들어가고 ------------------------------------------------------------
리포터 : 안녕하세요.
후 손 : 어서오세요. 장화왕후처럼 아름다운 아가씨가 오셌네.
리포터 : 장화왕후의 후손들이잖아. 어떻게 생각하나?
후 손 : 절세미인에다 10살 때 사서삼경 다 읽었다고 그런다.
기지가 똑똑하고 그래서 왕건 태조께서 반하신 것 같다.
리포터 : 그렇게 미인이셨다면 저도 따라갈 수 있을까?
후 손 : 미색은 합격이지만 거기에 기지만 가졌으면...
리포터 :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군요.
후 손 : 이게 우리 집안 보책이다. 고려태조 왕후로 되어있다.
신라 진성왕 7년에 탄생하셨다고 되어있다.
------------------------------------------------------------
장화왕후 가르키고 12초 -왕건의 나이 서른네살 무렵에 맞아들인 두번째 부인,
장화왕후는 재색을 겸비한 매력있는 여인으로 전해진
다
족보 손으로 가르키고 20초 -그런데 왕건은 단지 장화왕후 한사람만을 보고 결혼
을 결심했을까? 후손들은 왕건이 오씨에게 청혼한 것
에는 또다른 이유가 있다고 믿고 있다.
#후손 INT ------------------------------------------------------------
오씨들이 나주에서 대단한 세력이었다. 제 생각에는 왕건 태조께
서 나주에 주둔하면서 오씨와 깊은 관계를 맺는것도 하나의 정략
이 아닐거냐. 이렇게 생각을 한다.
------------------------------------------------------------
나주 헬기 샷 6초 -이것이 사실이라면 나주는 왕건에게 어떤 의미를 갖
는 곳이었을까?
김주식 교수 INT ------------------------------------------------------------
당시의 나주지역은 오늘날 나주뿐만 아니라 그 인근에 있는 목포
나 해상지역까지도 포함하는 넓은 지역을 뜻한다. 따라서 군사적
인 측면에서 본다면 나주지역은 후백제의 배후지였기 때문에 배
후지를 칠 수 있다는 전략적 가치를 들 수가 있다.
------------------------------------------------------------
후삼국. 나주 C.G 12초 -또한 나주는 드넓은 곡창지대를 낀 산물의 집산지로
이곳을 차지할 경우 후백제를 경제적으로도 압도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김기덕 교수 INT ------------------------------------------------------------
나주 목표 지역을 중심으로 해상세력을 확실히 자기의 지지기반
으로 하기위해 장화왕후 오씨집안을 선택한 것이고 장화왕후 오
씨 집안에서 보면은 중앙에서 떨어져 있고 후백제 배후에 있는
실정이기 때문에 왕건과 결합함으로써 신분상승에도 유리하고 또
자기들의 집안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그런 목적으로 두 집안이
결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유선생 INT ------------------------------------------------------------
고려가 건국하는데 결정적인 뒷받침을 했고 그 후 여러번 국난이
있을 때마다 왕실을 든든히 하기위해 노력을 했다.
------------------------------------------------------------
------------------------------------------------------------
리포터 : 왕건은 장화왕후와 결혼을 하며 나주를 완전히 왕건편은
만드는 효과를 봤다. 장화왕후 외에도 많은 왕비들이 있
는데 그들을 만나러 가겠다.
------------------------------------------------------------
<가상 스튜디오 -- 왕비> -----------------------------------------------------------------------------
리포터 이동하고 (놀라는 표정)
왕비① 나타나고 -태조의 첫 번째 부인 신혜왕후 유씹니다. 황해도 정주
그러니까 지금의 개풍이 제 고향지요. 지아비가 궁예를
몰아내는 거사를 꾀할 때 도움을 드려 저도 고려개국 공
신 중 한 명이지요.
(어머 여기도 계시네!!)
왕비② 나타나고 -강원도 강릉 출신의 명주원 부인 왕씹니다. 아버지는 왕
예고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강릉의 지방세력이죠. 왕건
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은 집안의 후손입니다.
(아니 여기도!!)
왕비③ 나타나고 -신혜왕태후 김씹니다. 고향이 신라의 경주이고 아버지는
억렴이라 합니다. 신라 경순왕이 저의 삼촌 되시죠.
스물아홉 왕비 다 나타나면 -왕건은 그의 나이 예순한살까지 부인을 맞는데 이들 모
두는 지방 유력 가문의 딸들였습니다.
왕비 분포도 보며 -통일때까지 왕건이 맞이한 부인은 모두 스물아홉명이고
출신지도 다양했습니다. 지역별로 보면 황해도가 9명, 경
상도가 6명, 경기도 4명, 그리고 충청도 강원도가 각각 3
명이고 전라도가 두 명. 나머지 두 명은 출신지를 알 수
없습니다.
#지도를 뒤 배경으로 서있는 리포터 -태조 왕건은 왜 이렇게 많은 부인이 필요했을까요?
----------------------------------------------------------------------------------------------
김기덕 교수 INT ------------------------------------------------------------
정략결혼이라 하지만 통일정책에 상당히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일
부 가문만 왕비가 되거나 중앙의 가문만 되는 것이 아니라 전국
적으로 스물아홉명의 분포를 보였다는 것 자체가 지방화 시대를
말해주는 것이고 어떤면에서 전국지방을 아우른다는 점에서 태조
왕건의 혼인정책은 이후에 한국사의 전개과정에서 민족통합에 상
당한 의미를 부여했다.
------------------------------------------------------------
---------------------------------------------------------------------------------------
〔스튜디오 3〕
MC 비록 이유와 명분이 있는 결혼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부인이 스물아홉명이나 된다는 사실은 정말 놀랍군요.
우선 궁금한 게 이들 모두가 같은 궁에서 함께 살았나요?
이은희 몇몇 왕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각자의 고향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왕비 칭호는 내려 졌지만
왕건과는 하룻밤의 인연으로 끝난 왕비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그 출신지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왕비도 있는데
이는 혼인은 했지만 함께 살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러니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궁중여인들간의 암투도 없었겠죠.
MC 그렇다니 안심이 되네요. 사실 걱정이 되었는데.. .
비록 왕건 개인의 인격이나 취양과는 무관하게 이뤄진 혼인이라도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여성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는 면에서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왕건의 입장에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은희 당시 왕건의 가장 절박한 과제는 지방세력의 힘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일부다처가 가능한 사회에서
그것을 해결하기에 혼인정책만큼 적절한 방법은 없었을 겁니다.
아마도 스물아홉명의 부인이 없었다면,
왕건의 후삼국 통일은 --- 글쎄 좀 어렵지 않았을까요?
MC 스물아홉명의 왕비가 고려 통일의 일등공신들였군요.
그러고보니 왕건은 통일하기까지 많은 이들의 협력을 끌어냈습니다.
어떤 인물이길래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믿고 따랐을까요?
참 궁금해지는데요.
정재윤 사실, 왕건 하면 아무래도 통일을 이룬 제왕이니
당당한 체구에 호탕한 성격을 지닌 장수로서의 이미지가 강한데요.
왕건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아봤습니다.
------------------------------------------------------------------------------------------------
〔VCR 3〕
분장실 앞 리포터 서서 ------------------------------------------------------------
리포터 : 남자분장실이다. 대본 보이나 따끈따끈하다. 태조왕건 대
하드 라마의 출연진이 분장하고 있다. 과연 어떤 모습으
로 변할지 궁금한데 안으로 들어가 보겠다.
------------------------------------------------------------
대본 TS 8초 -드라마에서 왕건역을 맡은 탤런트 최수종. 그는 요즘
왕건의 이미지를 만드는데 한창이다.
문 열고 들어가고 ------------------------------------------------------------
리포터 : 주문을 할 때 어떤쪽에 신경을 써서 분장을 해달라고 주
문하나?
최수종 : 얼굴 전체적으로 표현되는 부분이 바로 눈썹하고 눈이
많이 표현이 되기때문에 다른 부분보다 따뜻하게 해달라
고 한다.
------------------------------------------------------------
분장 마친 최수종+리포터 ------------------------------------------------------------
리포터 : 최수종씨가 생각하는 왕건은?
최수종 : 한마디로 표현해 지혜와 용기보다는 큰 그릇을 위해서는
덕을 최고로 하는 그런 인물 포용력 있고 때를 기다릴
줄 알고 참을성 있는 그런 인물이다.
------------------------------------------------------------
리허설 11초 -드라마에서의 왕건은 덕이 있는 외유내강형의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최수종 연기 보고)
왕건 친필 TS 15초 -그렇다면 실제 왕건은 어떤 사람였을까? 정몽주의 포
은집에 실려있는 이 글씨는 왕건의 친필로 알려져 있
다. 먼저 이 글씨를 통해 왕건이 어떤 인물인지 알아
보기로 했다.
리포터+이선생 ------------------------------------------------------------
리포터 : 반갑다. 선생님이 KBS 대하드라마 타이틀 쓰신분 맞지.
영광이다. 왕건이란 글자는 쓰셨지만 왕건이 쓴 글자는
보셨는지?
이선생 : 본 적이 없다.
리포터 : 그래서 제가 포은집에 있는 왕건의 친필시를 복사해 가
지고 왔다.
이선생 : 이 글씨를 봤을때는 광초를...
------------------------------------------------------------
왕건 친필 12초 -이 글은 풀이 뒤엉키듯 자연스런 초서체의 글씨로 중
국의 시인 이태백이 동림사의 승려와 헤어지며 쓴 시
를 왕건이 옮겨 적은 것이다.
친필 읽고 ------------------------------------------------------------
이무호 : 동림사에서 손님을 이별하는데 밝은 달이 떠올라 원숭이
가 우는구나. 웃으면서 이별하는 *산이 멀기만하니 어찌
호개를 긋는 걸 번거로워 하리오.
------------------------------------------------------------
이무호 선생 얼굴 6초 -같은 초서체로 글씨를 남긴 역사속의 인물들과 비교
해 보기로 했다.
모택동 글씨 자막 뜨면 ------------------------------------------------------------
이무호 : 모택동의 글씨도 보면 광초를 많이 쓰고 글씨가 웅혼창
정한 맛이 태조왕건의 글씨와 아주 흡사한 점이 많이 있
다.
------------------------------------------------------------
모택동 vs 왕건 4초 -시대는 다르지만 통일고려와 통일중국을 이뤄냈던 두
인물의 글씨는 놀랍게도 닮아 있었다.
대원군 글씨 ------------------------------------------------------------
이무호 : 흥선대원군의 글씨가 있다. 이 글씨를 처음 봤을 때 좌
실 우경하고 왼쪽은 실하게 쓰고 오른쪽은 가볍게 밖은
굵게 안은 약하게 이것을 봤을 때 청나라에서 억압생활
을 할 때 쇄국정책을 쓴 걸로 봐서 대원군의 성격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
대원군 vs 왕건 6초 -평생 고립의 길을 택했던 대원군의 글씨는 왕건의 것
과는 느낌이 달랐다.
이무호 INT ------------------------------------------------------------
왕건은 글씨로 봐서는 성격 자체가 다르다. 아주 확 트인 인물로
봐야한다. 이 글씨로 봤을 때 굵은 회과 가는획과 모가나고 둥근
획과 같이 가미가 되어 성격이 포괄적이고 호방한 기색을 가지고
있으면서 제왕의 기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
왕건 글씨 TS 흘리고 -(그림 흘리고)
궁예 C.G 17초 -기록에 나타난 궁예와 견훤 왕건의 신라에 대한 태도
를 통해 왜 왕건이 통일군주가 될 수 있었는지 알아
보았다. 우선 궁예는 신라에 적대적인 태도로 일관했
다. 이것은 궁예에게 포용이나 통합의 의지가 없었다
는 것을 의미한다.
견훤 C.G 17초 -견훤은 포석정에서 놀고있던 경애왕을 살해하고 군대
를 철수 시킨다. 이는 스스로 통일의 기회를 포기한
것으로 견훤은 통일에 대한 의지나 전망이 부족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왕건 C.G 11초 -반면 왕건은 군사적으로 우위에 있으면서도 신라를
방문해 신라왕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한다. 이것으로
신라인들의 호감을 얻어낸다.
이재범 교수 INT ------------------------------------------------------------
왕건이 보인 우호정책은 단순한 신라와의 우호가 목적이 아니라
후삼국 통일이라고 하는 원대한 포부를 달성하고자하는 전략적
차원에서 행해진 것으로 이해해야 할것이다. 따라서 후삼국 통일
이 왕건이라고 하는 경륜이 있고 점진적으로 통일을 달성하고자
했던 사람에게 돌아갔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역사적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
개태사 전경 4초 -충남 논산의 개태사. 통일의 대업을 이룬 후 왕건이
세운 절이다.
거대한 솥+리포터 ------------------------------------------------------------
리포터 : 이곳에 올라와 보니 제 뒤에 큰 덩어리가 있다. 종도 아
닌것 같고 개태사 철탑. 솥인지 냄비인지 어마어마하다.
가까이 와서 보니 더 크다. 솥의 크기를 재보겠다.
------------------------------------------------------------
------------------------------------------------------------
팔로 솥 크기 재보고 리포터 : 여섯번. 진짜 넓다. 제 팔이 짧은 팔이 아니다. 여섯번을
돌리고 남는다
------------------------------------------------------------
솥 TS 6초 -만약 실제로 사용했던 솥이라면 이것으로도 절의 규
모를 짐작할 수 있다.
스님 + 리포터 ------------------------------------------------------------
리포터 : 언제부터 있었나?
스 님 : 개태사가 창건될 때부터 있었다.
리포터 : 왜 이렇게 큰가? 솥인가 냄빈가?
스 님 : 그 당시 개태사는 지금의 조계사처럼 전국의 불교를 개
태사에서 관장했다 그때 대중들이 엄청 많이 모여 살았
다. 이 솥 규모를 보면 약 500명의 스님이 살지 않았나
싶다.
리포터 : 뭐에 쓰는 건가?
스 님 : 밥솥인줄 알았는데 국솥이다.
------------------------------------------------------------
리포터+김교수 16초 -개태사는 어느 정도의 규모였을까?
리포터+김교수 ------------------------------------------------------------
김교수 : 저쪽에 있는 금당터에서부터 현재의 개태사 저 지역까지
가 사찰 경내였다. 현재는 작은 사찰처럼 되어 있지만
옛날에는 호국사찰로 왕실의 위용을 나타낼 수 있는 사
찰로 방대한 규모였다.
리포터 : 왕건이 큰 절을 지은 이유?
김교수 : 왕건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전술 민심을 수습하는데 천
재적인 소질 가지고 있기 때문에 후백제를 통일한 뒤에
도 후백제 잔존세력의 불만 저항 이런것이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그것을 제압할 수 있는 사업
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렇게 거대한 사찰을 건립했다.
------------------------------------------------------------
논 sk+개태사 발원문 12초 -이 발원문에서 왕건이 꿈꾼 통일을 읽을 수 있다. 그
것은 백성들이 편히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
다.
---------------------------------------------------------------------------------------
〔스튜디오 4〕
MC 그동안 제가 생각했던 이미지와는 많이 다르네요.
통일을 이룩한 왕이라면 엄숙하고 위엄을 내세우는 타입이 연상되는데,
왕건은 무척 부드러운 인물같습니다.
정재윤 왕건은 전형적인 외유내강의 인물로
뚜렷한 비전을 세우고 그것을 주도면밀히 실천했던 사람입니다.
적을 죽이기보다는 따뜻하게 감싸 안았고,
큰 뜻을 위해서는 자기를 낮추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고려말의 유학자 이제현은 태조의 포부와 도량을
중국 송나라 태조에 비길한 하다고 했습니다.
통일을 끌어 낼 충분한 자질을 갖춘 인물로 평가하고 있는거죠.
새천년을 맞아서도 우리민족의 최대 과제는 여전히 민족통합인데
이럴때 왕건에게서 리더쉽의 모델을 찾아 보는 건 어떨까요?
바로 지금이 왕건과 같은 지도자가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MC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지도자 그런 왕건이 세운 나라가 고련데
그러면 고려는 어떤 나라였습니까?
김경민 외국에서 우리나라를 코리아라고 부르는 것은 다 아시죠.
아주 당연히 받아들이는 그 사실에 실은 큰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코리아란 명칭은 고려에서 비롯됐는데
그것은 본격적으로 우리의 이름이 세계에 알려진 것이
고려때였기 때문이죠.
고려는 그 어느 때보다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사회였던 것입니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바로 국제무역항 벽란돕니다.
------------------------------------------------------------------------------------------------
〔VCR 4〕
충주호 앞의 김경민 ------------------------------------------------------------
리포터 : 여기가 예성강이냐고요. 아니죠. 여기는 제천의 충주호
다. 여기 왜 왔냐면 고려시대 쓰던 대형선박이 완성되었
다. 너무 크고 멋있다. 저 배로 한 번 가볼까요.
------------------------------------------------------------
선착장 뛰어가 9초 -드라마를 위해 제작된 120미터 길이의 선착장. 그 양
쪽으로 두 척의 고려배가 모습을 드러냈다.
배 위 9초 -배의 구조에서 기능까지... 고증을 거쳐 복원된 고려배
는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리포터+정교수 -----------------------------------------------------------
리포터 : 교수님 배 왜 이리 크지?
정교수 : 이 정도 배는 별거 아니다. 고려는 막강한 해상세력을
가진 국가였다. 태조왕건의 10여척은 각 방 16보라 하여
그 길이와 폭이 96자되는 배였다.
리포터 : 96자는?
정교수 : 배의 길이 29미터. 갑판이 넓은배다.
리포터 : 이배는 왜 만들었나?
정교수 : 이 배는 군함으로 승무원이 70-80명이 탔다.
배의 순항속도는 4.5노트는 시속 8킬로 정도.
선수를 넓게 한 것은 접근단계에서 전투 정면을 확장하
기 위한 것이고 상선같은 경우는 유선함으로 선수가 날
씬하게 되어있다.
------------------------------------------------------------
누각 오르고 6초 -(흘리고)
리포터 누각 가르키며 ------------------------------------------------------------
정교수 : 누각이다. 올라와 보니 알겠지. 누각에서 멀리 볼 수 있
다. 바로 그 때문에 누각을 만든거다. 이 누각에서 적선
을 내려다 보며 공격을 하면 편리하게 적을 공격할 수
있지. 또 이곳에서 장수가 지위를 하기 위해서는 넓은 것
을 보고 지위를 해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높게 만든거다.
리포터 : 일반 상선은 누각이 높지 않은데 군함을 높게 만들어서
지위도 하고 적군도 볼 수 있게. 그래서 이러한 것을 누
선이라고 불렀다.
이 배는 뭐죠?
정교수 : 이 배는 무역선이다. 바로 군함에 비해서는 선체가 낮다.
무역선의 특징은 선체가 낮은거다. 먼 바다에서 바람을
적게 받아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낮게 만들었다.
------------------------------------------------------------
배 부감 fan 세트장 부감 16초 -제천은 문경에 이은 또 하나의 대규모 야외세트장.
만2천여평의 공간에 벽란도를 복원해 냈다. 고려시대
의 벽란도는 어떤 곳이었길래 이런 엄청난 복원이 이
뤄진 걸까?
벽란도의 지리적 위치 C.G 10초 -벽란도는 당시 수도 개경에서 불과 30여리 떨어진 고
려의 관문으로 고려는 벽란도를 통해 세계를 호흡했
다.
#들어오는 외국상인 ------------------------------------------------------------
리포터 : 외국상인들이 들어오고 있다. 만나보겠다. 어디서 왔나?
연기자 : 아라비크. 인도.
리포터 : 뭘 팔나 왔나?
연기자 : 카페트. 가죽동물. 아유코리안?
리포터 : 노 코려. 베리 굿.
그 당시에도 고려를 코리아라고 했나봐.
어디로 갔는지 따라가 보겠다.
-----------------------------------------------------------
<가상 스튜디오 -- 객관> ----------------------------------------------------------------------
객관 외경 + 리포터 다가서고 리포터 : 따라오긴 왔는데 (두리번 거리며) 여기가 어디지?
객관 안내원 등장 리포터 : (안내인 보고 반갑게 다가간다) 저기요 여기가 어디죠?
안내인 : (정중하고 깍듯한 태도로 안내한다)
여기는 객관입니다.
벽란도를 통해 개경으로 들어온 외국 사신이나 상인들이
거처하는 곳으로 요즘으로 말하면 호텔쯤 되는 곳이죠.
제가 안내해 드릴테니, 따라 오시죠.
응접실로 안내해 보여주고 리포터 : (두리번 거리고, 어리둥절한 표정)
안내인 : 객관은 한꺼번에 여러 사람이 머물러야 하기 때문에
규모가 크고 방도 많습니다.
여기는 호텔로 치면 로비에 해당하는 곳인데
각방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모여 이런저런 얘기를 나
누죠.
연회장 구경시켜 주고 안내원 : 외국인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던 연회장입니다.
리포터 : 당시에도 연회가 ---
안내원 : 그럼요. 고려를 제대로 알리는데에 연회만큼
좋은 기회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히 신경을 써서 준비하죠.
다시 응접실로 나오고 리포터 : (세상에나 외국인을 위해 이렇게 훌륭한 시설을 만들어
놓았다니 중얼중얼 ---)
안내원 : 쉿 조용히 ---
리포터 : (조용--) 누구죠?
안내원 : 고려상인과 외국상인이 거래를 위한 협상을 하고 있습니
다.
리포터 : 저 가운데 있는 사람은 누구죠?
안내원 : 통역을 하는 역관입니다.
통역은 보통 중국인이 맡아합니다.
고려상인 뒷모습 보면서 리포터 : 당시엔 어떤 물건들을 거래했나요?
안내원 : 고려에서는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던 인삼과
곱게 짠 삼베 종이 먹등을 수출했고
비단 향신료 약재등을 수입했습니다.
리포터 : 정말 교역이 활발하게 이뤄졌군요.
리포터 + 안내원 리포터 : 밖으로 나오니 더 넓어 보이네요?
안내원 : 서긍이라는 송나라 사신은 이곳을 궁궐만하다고 했습니
다. 그만큼 크고 웅장했다는 얘기죠.
리포터 : 그런데 객관은 이곳 뿐인가요?
안내원 : 개경에는 이런 객관이 십여군데 있습니다.
리포터 : (놀라는 표정)
수도인 개경에 외국상인들을 위한 커다한 호텔이
무려 10군데나 있었다는 것은
고려가 그만큼 활발한 국제무역을 했다는 얘기네요.
객관 입구에서 서로 인사 리포터 : (인사하며) 오늘 구경 잘했습니다.
안내인 :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
교역국 C.G 14초 -객관이 10여군데나 있었다는 것은 고려의 교역이 그
만큼 활발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고려는 중국은 물론
태국 월남 나아가 아라비아와도 교류가 있었다.
쌍화점 재연 18초 -고려가요는 외국인의 잦은 왕래를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쌍화사러 갔더니 회회아비가 내 손목을 쥐었어
요' 고려가요 쌍화점의 한 대목으로 아예 고려에 정착
해 살았던 외국인이 있었다는 말이다.
회회아비 4초 -쌍화는 만두를, 회회아비는 위그르인을 가르킨다.
지도 C.G 6초 위그르인은 중앙아시아의 이슬람문화권에 속하는 민족
으로 고려의 교역이 먼 이곳까지 미쳤다는 것을 증명
해 주고있다.
이희수 교수 INT ------------------------------------------------------------
고려의 대외문화에 대한 자세는 개방적이고 포용적이었다. 우리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열려있는 사회였다. 교역상인들뿐 아니라
원대지배하에 실크로드를 통해 중앙아시아계 관료들이 들어왔고
상인들이 들어와서 자유롭게 정착하고 고려여인들과의 결혼을 통
해 귀화 동화하는 과정을 거쳤다. 외국인들이 한국사회에서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아주 자유롭고 평화롭게 정착할 수
있었던 여건이 성숙되어 있었다.
------------------------------------------------------------
배에 오르는 한국인들 ------------------------------------------------------------
리포터 : 근데 지금 어디 가는거냐?
연기자 : 외국으로 장사하러 나간다.
리포터 : 뭘 팔러 가나?
연기자 : 인삼 팔러 간다.
------------------------------------------------------------
윤명철 교수 INT ------------------------------------------------------------
상대적으로 고려인들도 똑같이 그런 지역에 갔던 것이죠. 특히 고
려인들은 중국지역에 많이 진출했는데 이미 왕건때 산동반도에
있는 등주와 청주 이런 지역에 가서 상업적인 교역을 하고있다.
점차 시대가 내려가면서 오늘날 절강 복권 강남지역에서 교역을
한다. 상인들이 많이 진출하지. 이때 상인들이 얼마나 많이 진출
했냐면 사신들과 함께 고려인들이 너무 많아서 당대 최고의 문장
가 소동파는 이들로 인해서 피해가 막심하다는 상소를 철종에게
여러번 올린다.
------------------------------------------------------------
벽란도 부감+자막 13초 (자막 --고려의 상인들이 시도때도 없이 조공을 핑계로
들어와 중국을 소란케 한다)
-이 소동파의 글은 세계속의 코리아로 발돋움한 고려
인의 역동성과 진취성을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
〔스튜디오 5〕
MC 코리아가 고려에서 비롯됐다는 당연한 사실이 새롭게 다가오는데요.
움추려 드는 그런 자세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밖으로 열려있는 그런 사회가 고려였습니다.
고려는 다가가 들여다 볼수록 매력적인 사횐데요.
김경민 그렇습니다. 고려는 우리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개방적여서
국제유행이나 문화조류를 받아들이는데도 거침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고려는 세계문화를 호흡하고 받아들이는
동양의 용광로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런 점이 세계속의 고려, 즉 코리아를 만들어 냈습니다.
고려는 단순히 삼국시대와 조선을 잇는 그저 거쳐가는 시대가 아니라,
대단히 역동적인, 크고 활기찬 시대였던 것입니다.
MC 고려가 한층 가깝게 느껴지는데 저만의 느낌은 아닐 겁니다.
네 분 오늘 나와주셔서 감사.
(서로인사)
MC 지금까지 우리는 천년전 태조 왕건이 이룩한 새로운 민족통합 방식과
고려왕조가 지향했던 개방성과 진취성을 보았습니다.
역사는 오늘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했습니다.
여전히 지역간 남북간의 통합이 민족적 과제로 남아있고
나아가 세계화라는 시대적 과제를 수행해야 하는 지금
우리는 고려의 역사경험 속에서
오늘을 풀어갈 해법을 찾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KBS는 고려를, 또 그 고려를 세운 왕건을 눈여겨 보는 것입니다.
이곳은 드라마의 주요 촬영장으로 쓰일 고려마을인데요.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고려시대에 와 듯 합니다.
그런데 고려하면 웬지 조선에 비해 낯설고 생소한데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사실 고려는 많은 부분 베일에 싸여있는 나랍니다.
우리에게 전해지는 유물유적은 물론 역사서적도 풍부하지 못해
고려를 제대로 그린 변변한 사극이나 역사소설조차 없습니다.
그런 고려를 새천년 들어 KBS가 앞장서 되살려 내고 있습니다.
막대한 투자. 철저한 고증, 왜 KBS는 고려 복원에 나선 걸까요?
그것은 천년전 그때와 지금의 한반도 상황이 매우 유사하다는데 있습니다.
수많은 지방세력이 득세하던 혼란의 후삼국시대,
분열된 한반도를 고려 태조 왕건은 그만의 방식으로 통합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하는 건 왕건이 취했던 민족통합 방식과
그에 바탕한 통일 고려의 모습입니다.
바로 거기서 이 시대의 과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고려를 찾아 떠나는 시간여행,
오늘은 특별히 네 분의 길잡이를 모셨습니다.
서동균 혹시 내 성씨는 어디서 비롯됐을까하는 의문을 품어본 적 없습니까?
있다면 저를 주목해 주십시오.
이은희 고려통합엔 특급 비밀이 하나 있는데, 거기엔 여성이 관련돼 있습니다.
무슨 얘기냐고요? 저를 따라 오시죠.
정재윤 남편이 이 얘기를 들으면 저는 바로 쫓겨날 지도 모릅니다.
저에게 사모하는 남자가 생겼거든요.
여러분도 그를 알게되면 제 마음을 이해할 겁니다. .
김경민 흔히들 뉴욕 파리 런던등을 국제도시라고 하잖아요.
고려에도 이들 도시 못지않은 국제도시가 있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잠시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MC 네 분의 기세가 대단한데 무척 기대가 됩니다.
거두절미하고 누가 먼저 소개하실 거죠?
서동균 지금 저희가 있는 곳이 드라마의 무대로 쓰일 오픈세튼데요.
철저한 고증을 거처 천년전의 고려마을을 되살려 놓았습니다.
먼저 여러분을 고려마을로 모시겠습니다.
------------------------------------------------------------------------------------------------
〔VCR 1〕
고려궁 들어가고 8초 -거대한 문을 통과하면 웅장한 건물 하나가 주변을 압
도한다.
회경전 FS 16초 -고려궁궐의 중심건물로 왕이 업무를 보던 회경전이다.
이 건물은 개성에 남아있는 고려궁터 만월대 유적을
참고로 실제 건물의 85% 크기로 축소 제작되었다.
배치도 8초 -(흘리고)
리포터 + 이차장 현장음 ------------------------------------------------------------
리포터 : 고려 궁궐은 이게 전부 단가DY?
이차장 : 고려궁엔 회경전 말고도 수많은 전각들이 있었고 왕궁의
둘레가 60리에 이르고 13만평에 이른다는 거대한 왕궁이
있었지만 드라마 세트장이기 때문에 회경전을 중심으로
한 일부만을 제작하게 되었다.
-------------------------------------------------------
배치도 3초 -(흘리고)
두 사람 걷고 8초 -초가집 50여동이 줄줄이 들어서 있는 이곳엔 서민집
시장거리등이 자리하고 있다.
구경중인 관광객들 ------------------------------------------------------------
리포터 : 안녕하신가? 무엇을 골똘히 보나?
관광객 : 집이 이상하게 생겨서.
리포터 : 이 집은 뭔가?
이차장 : 이 집은 온돌과 마루집이 혼재되어 있던 시대에 남아있
는 유일한 고려건물로서 토기를 이용한 화로를 사용해
난방을 했다.
리포터 : 아래가 뚫려있는 이유는 뭔가?
이차장 : 습기가 많이 차고 더운 지방에서...
리포터 : 밥도 지어 먹었나?
이차장 : 더운 지방은 화덕을 많이 사용했다.
-------------------------------------------------------
서민집 sk 5초 -이 마루집이야말로 고려시대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
한 서민가옥이다.
배치도 3초 -(흘리고)
리포터+이차장 ------------------------------------------------------------
리포터 : 되게 화려하다. 이 집은 뭔가?
이차장 : 귀족의 가옥이다.
리포터 : 왕궁하게 비슷하게 2층으로 되어있다.
이차장 : 다락집은 중층집이라 불리는데 부호나 재력가들의 사랑
채로 설정한 건물이다. 그 용도는 귀빈접대나 연회장으
로 쓰이는 건물이다. 당시 권력가들은 왕궁 못지않게 상
당히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에서 살았다.
리포터 : 잠깐 이게 무슨 소리지?
------------------------------------------------------------
잔치중인 귀족집 ------------------------------------------------------------
리포터 : 많은 분들이 있다. 저희가 찾아온다고 잔치상까지...
귀 족 : 이런 무험한--
리포터 : 무슨 날인가?
귀 족 : 오늘 태조대왕께서 나에게 성을 내린 기쁜 날이다.
오늘부터 나는 이씨성이다.
리포터 : 잠깐만, 성을 내렸다고---
귀 족 : 벽진에 가봐라. 그러면 알 수 있을거다.
리포터 : (고개 갸우뚱) 벽진이라고...
------------------------------------------------------------
도로 TR 3초 -고려의 벽진은 현재의 경상북도 성주지역.
집성촌 부감+걸어가고 20초 -약 60여호가 모여사는 홈실마을은 생긴 지 800년이나
된 벽진이씨의 집성촌이다. 벽진이씨의 내력을 알아보
기 위해 마을의 종가를 찾았다.
종손 현장음 ------------------------------------------------------------
시조어른은 지금부터 1100년전에 고려태조때 이총자언자 되시는
분인데 저는 이 어른의 34대손이다. 시조 어른께서는 고려태조께
서 국토를 통일하는데 크게 기여한 분이다. 지금도 벽진장군이 쓰
던 말구이 유물이 있다.
------------------------------------------------------------
말구이 쪽으로 다가가고 6초 -시조 이총언을 모시는 경수당엔 이총언이 사용했던
돌로 된 말구유가 전해져 온다.
말구이 주변 사람들 모여있고 ------------------------------------------------------------
리포터 : 뭐 하시는 건가?
할아버지 : 말구이가 시조어른께서 사용하던 말구인데 천백여년전
에 쓰이던 건데 말구이에 씻으면 눈병이나 피부병에
씻으면 영험이 있다고 해서...
------------------------------------------------------------
모여있고 -후손들에게 이 말구유는 영험함의 대상이다. 그것은
시조에 대한 존경심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닐까?
모여있고 ------------------------------------------------------------
리포터 : 더 나빠지는데
할아버지 : 조금 있으면 된다.
리포터 : 좋아지는 것 같다.
리포터 : 나 피부병 있는데...
할아버지 : 안된다. 여기서 목욕하면 안된다.
리포터 : 아무도 없는데.
할아버지 : 낮에는 안된다. 사람들 있는데...
시조어른에게 참배를 하고...
------------------------------------------------------------
사당으로 가고 ------------------------------------------------------------
할아버지 : 참배를 하려하면 여기서 해야한다.
리포터 : 그럼 하지.
할아버지 : 안된다. 의관정제를 하고 그렇게 참배를 해야지.
리포터 : 옷을 입어야 하는건가?
------------------------------------------------------------
위패 30초 -이총언은 당시 벽진군의 유력한 지방세력으로 신라계
사람이다. 왕건은 후백제와의 전투가 있기 1년전 이총
언에게 이씨성과 함께 벽진을 관할할 수 있는 권한인
본관을 하사하며 자연스럽게 고려의 세력으로 끌어 들
인다. 결국 이총언은 왕건의 사람이 되어 후백제와의
마지막 전투에 참가해 큰 공을 세운다.
지배영역 C.G 13초 -벽진이씨라는 본관을 하사받은 이총언은 실질적으로
충청도 인근지역의 조세권까지 관장하는 실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된다.
도로 TR 5초 -이러한 예는 비단 이총언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
다.
사당 찾아가고 ------------------------------------------------------------
리포터 : 계세요. 아무도 안계신가봐요. 안동김씨. 안동권씨. 안동
장씨. 세 성이 같이 계신가 보다.
계세요.
------------------------------------------------------------
둘러보고 -이곳 삼태사묘는 고려 개국공신 세 명을 모신 곳이다.
------------------------------------------------------------
후손들 : 어서 오시오.
리포터 : 서울 KBS에서 왔다.
----------------------------------------------------------
앉아 얘기하고 FS 7초 -일명 삼태사라 불리는 권행. 김선평. 장정필. 이들 역
시 성과 본관을 하사받은 사람들이다.
------------------------------------------------------------
권씨 INT 930년 사성을 받았다. 왕건태조한테 사성을 받을 때 김가에서 권
가가 된 분은 우리 시조 할아버지가 처음이다. 그때부터 권가가
생겼다. 그 전에는 권가가 없었다.
------------------------------------------------------------
삼태사 묘정비 15초 -안동의 지방세력으로 신라인이었던 삼태사는 고려통
일의 분수령이 되는 병산전투에서 왕건을 도와 큰 승
리를 이끌어낸다. 그 공로로 왕건은 삼태사 모두에게
는 안동의 지배권을 인정해 준다.
보물각~철문 여는 것까지 보고
문 열리면 -지금도 태사묘 보물각엔 삼태사의 유물이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다.
금고문 여는 것 보고
다 열리면 -보존상태도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흑관모 35초 -지금봐도 위엄있고 화려한 이 유물은 고려의 고급관
리들이 사용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유물들은 안동을
본관으로 했던 삼태사가 고려의 지배층에 편입해 어
느정도의 권한을 가지고 이 지역을 다스렸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있다. 이처럼 본관은 왕건이 유
력 지방세력에게 내린 지방통치 권한으로 엄청난 특권
이었다.
리포터 ------------------------------------------------------------
리포터 : 여러분 어떤가? 폼 나지 않나?
삼태사 가운데 권행은 성을 하사받고 김선평과 장정필은
안동지역의 지배권을 인정받은 거다. 그런데 교수님 왕
건은 이들에게 성을 하사하며 지배권을 인정한 겁니까?
------------------------------------------------------------
박종기 교수 INT ------------------------------------------------------------
신라말 고려초의 역사적인 상황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시
기는 한국사의 그 어느 시기보다도 수많은 지방세력으로 분열되
어 있는 사회였다. 결과적으로 고려왕조라는 통합국가를 탄생하기
위해서는 지방세력을 통합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 바로 이런 통
합의 원리가 본관제였다. 한편으로 이러한 본관제는 결과적으로
지방세력들에게 자율권을 부여함으로서 해당지역에 대한 개발을
용인하게 되는 것이고 자율권으로 바탕으로 지방세력들은 독자적
인 지방문화를 발전시켜가는 계기로도 작용했던 것이다.
--------------------------------------------------------------
------------------------------------------------------------------------------------------------
〔스튜디오 2〕
MC 그러니까 요즘 우리가 얘기하는 본관과 성씨가 고려때부터 사용된거군요.
얼마전 사리체프라고--
러시아에서 귀화한 축구선수가 자신의 이름을 신의손이라 하고
본관을 소속팀과 관련있는 구리로 정했다고 하던데요.
귀화한 외국인조차 본관이 있으니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본관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 곘네요.
서동균씬 장성 서가라고 했고, 나머지 분들은 본관이 어딘가요?
이은희 전주이가다.
정재윤 초개정가다.
김경민 경주김가다.
MC 여기엔 본관이 같은 성씨를 가진 분들이 없는데,
왜 본관이라는 게 평소에는 잊고 살다가도
새로운 사람을 만났을 때 성씨가 같으면 꼭 본관을 묻게 되잖아요?
본관이 같으면 금방 가까워지는데...그건 왜 그런가요?
서동균 본관이 같은 성씨를 가졌다는 것은 곧 친인척 관계를 의미합니다.
본관이 같을 때 스스럼없이 가까워지는 건
그로인해 서로가 자연스럽게 일체감을 느끼기 때문인데요.
이러한 본관제를 잘 활용한 사람이 왕건입니다.
왕건은 전국의 중요한 지방세력에게 성씨를 부여하면서
지역민을 재량껏 다스릴 수 있는 지배권을 함께 주었습니다.
그대신 지방세력에게 충성을 이끌어 낸 것이지요.
요즘으로 말하면 지방자치제라고 할까요?
천년전 지방자치제가 바로 본관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MC 본관과 성씨에 그렇게 큰 뜻이 담겨 있는 줄 몰랐습니다.
고려를 들여다 보는 작업이 점점 더 재미있어지는데요.
또 어떤 흥미로운 내용을 준비하셨습니까?
이은희 시대극하면 떠오르는게 바로 화려한 의상인데요.
드라마 <태조왕건>도 복식 재현에 상당한 공을 들였습니다.
이번에 복원한 복식은 우리 복식사에 큰 획을 그을만한 일이라고 하는데요
저는 이 복식에서부터 고려통일의 비밀을 풀어나가겠습니다.
------------------------------------------------------------------------------------------------
〔VCR 2〕
리포터 들어가고 ------------------------------------------------------------
리포터 : 안녕 뭐하나?
유수정 : 지금 태조왕건의 의상을 차에 싣고 있는 중이다.
리포터 : 그렇게 많이 필요한가?
유수정 : 그럼. 차로 여덟대 분량의 의상을 싣고 있다.
리포터 : 한 번 촬영하는데 그렇게 많은 의상이 필요한가?
유수정 : 평균적으로 여덟대 정도 필요하고 많을때는 10대 이상
나가고 있다.
리포터 : 전투복도 여러종류가 있네.
유수정 : 계급이 다 틀리기 때문에 여러 종류가 있다.
------------------------------------------------------------
귀족 여자옷 ------------------------------------------------------------
리포터 : 여자 의상은 어디있나?
유수정 : 이은희씨 뒤에. 이것은 귀족 여자의 저고리다. 저로기 위
에다 치마를 입게된다. 이것도 저걱도 치마다. 치마 멜빵
달린게 특이하다....형태가 다양하다.
리포터 : 이게 뭔가?
유수정 : 배자다. 소매통의 넓이에 따라 신분이 다르다.
리포터 : 뒤에도 더 화려한 옷이 있다. 소매통 넓다.
저도 귀족의 이상을 한 번 입어보고 싶은데 어울리나?
------------------------------------------------------------
옷 fan 5초 -당시 의상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화려했다.
옷 입고 나오는 리포터 ------------------------------------------------------------
리포터 : 어때요. 제가 왕비로 변신을 해 봤는데...
유수정 : 정말 예쁘다. 그런데 옷을 잘못 입은 것 같다.
숄은 어깨에서 내려와야 하고 옷고름도 잘못되었다.
옷고름이 중앙에 와야한다. 예쁘다.
리포터 : 왕비가 입을 의상은 이거 한벌인가요?
유수정 : 스물아홉벌 정도 된다.
리포터 : 왕비가 옷을 굉장히 자주 갈아입나봐.
유수정 : 아니요. 왕건의 비가 스물아홉명이나 된다.
리포터 : 왕건 혼자서 왕비가 스물아홉명씩이나 되나? 와--
------------------------------------------------------------
기다리는 리포터 ------------------------------------------------------------
리포터 : 아무도 없는 우물가에서 청승이냐고. 이곳은 보통 우물
가가 아니다. 천년 전 어느날 왕건이 장화왕후 오씨를
처음 만나 사랑을 이룬 특별한 우물이다.
------------------------------------------------------------
완사천 줌 아웃 fs 18초 -왕건과 장화왕후 오씨가 처음으로 만났다는 완사천.
기록에 의하면 목이 마른 왕건이 마침 우물에 있던 오
씨에게 물을 청했고 오씨는 버드나무잎을 띄어 물을
건냈다고 한다.
걸어 올라가고 흘리고
기념비 보이면 12초 -이 극적이고 로맨틱한 만남을 후손들은 기념비를 세
워 기억하고 있다. 그렇다면 왕건과 만난 장화왕후 오
씨는 어떤 인물였을까?
집성촌 들어가는 TR 7초 -장화왕후의 후손들이 모여사는 나주의 오씨 집성촌을
찾았다.
들어가고 ------------------------------------------------------------
리포터 : 안녕하세요.
후 손 : 어서오세요. 장화왕후처럼 아름다운 아가씨가 오셌네.
리포터 : 장화왕후의 후손들이잖아. 어떻게 생각하나?
후 손 : 절세미인에다 10살 때 사서삼경 다 읽었다고 그런다.
기지가 똑똑하고 그래서 왕건 태조께서 반하신 것 같다.
리포터 : 그렇게 미인이셨다면 저도 따라갈 수 있을까?
후 손 : 미색은 합격이지만 거기에 기지만 가졌으면...
리포터 :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군요.
후 손 : 이게 우리 집안 보책이다. 고려태조 왕후로 되어있다.
신라 진성왕 7년에 탄생하셨다고 되어있다.
------------------------------------------------------------
장화왕후 가르키고 12초 -왕건의 나이 서른네살 무렵에 맞아들인 두번째 부인,
장화왕후는 재색을 겸비한 매력있는 여인으로 전해진
다
족보 손으로 가르키고 20초 -그런데 왕건은 단지 장화왕후 한사람만을 보고 결혼
을 결심했을까? 후손들은 왕건이 오씨에게 청혼한 것
에는 또다른 이유가 있다고 믿고 있다.
#후손 INT ------------------------------------------------------------
오씨들이 나주에서 대단한 세력이었다. 제 생각에는 왕건 태조께
서 나주에 주둔하면서 오씨와 깊은 관계를 맺는것도 하나의 정략
이 아닐거냐. 이렇게 생각을 한다.
------------------------------------------------------------
나주 헬기 샷 6초 -이것이 사실이라면 나주는 왕건에게 어떤 의미를 갖
는 곳이었을까?
김주식 교수 INT ------------------------------------------------------------
당시의 나주지역은 오늘날 나주뿐만 아니라 그 인근에 있는 목포
나 해상지역까지도 포함하는 넓은 지역을 뜻한다. 따라서 군사적
인 측면에서 본다면 나주지역은 후백제의 배후지였기 때문에 배
후지를 칠 수 있다는 전략적 가치를 들 수가 있다.
------------------------------------------------------------
후삼국. 나주 C.G 12초 -또한 나주는 드넓은 곡창지대를 낀 산물의 집산지로
이곳을 차지할 경우 후백제를 경제적으로도 압도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김기덕 교수 INT ------------------------------------------------------------
나주 목표 지역을 중심으로 해상세력을 확실히 자기의 지지기반
으로 하기위해 장화왕후 오씨집안을 선택한 것이고 장화왕후 오
씨 집안에서 보면은 중앙에서 떨어져 있고 후백제 배후에 있는
실정이기 때문에 왕건과 결합함으로써 신분상승에도 유리하고 또
자기들의 집안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그런 목적으로 두 집안이
결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유선생 INT ------------------------------------------------------------
고려가 건국하는데 결정적인 뒷받침을 했고 그 후 여러번 국난이
있을 때마다 왕실을 든든히 하기위해 노력을 했다.
------------------------------------------------------------
------------------------------------------------------------
리포터 : 왕건은 장화왕후와 결혼을 하며 나주를 완전히 왕건편은
만드는 효과를 봤다. 장화왕후 외에도 많은 왕비들이 있
는데 그들을 만나러 가겠다.
------------------------------------------------------------
<가상 스튜디오 -- 왕비> -----------------------------------------------------------------------------
리포터 이동하고 (놀라는 표정)
왕비① 나타나고 -태조의 첫 번째 부인 신혜왕후 유씹니다. 황해도 정주
그러니까 지금의 개풍이 제 고향지요. 지아비가 궁예를
몰아내는 거사를 꾀할 때 도움을 드려 저도 고려개국 공
신 중 한 명이지요.
(어머 여기도 계시네!!)
왕비② 나타나고 -강원도 강릉 출신의 명주원 부인 왕씹니다. 아버지는 왕
예고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강릉의 지방세력이죠. 왕건
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은 집안의 후손입니다.
(아니 여기도!!)
왕비③ 나타나고 -신혜왕태후 김씹니다. 고향이 신라의 경주이고 아버지는
억렴이라 합니다. 신라 경순왕이 저의 삼촌 되시죠.
스물아홉 왕비 다 나타나면 -왕건은 그의 나이 예순한살까지 부인을 맞는데 이들 모
두는 지방 유력 가문의 딸들였습니다.
왕비 분포도 보며 -통일때까지 왕건이 맞이한 부인은 모두 스물아홉명이고
출신지도 다양했습니다. 지역별로 보면 황해도가 9명, 경
상도가 6명, 경기도 4명, 그리고 충청도 강원도가 각각 3
명이고 전라도가 두 명. 나머지 두 명은 출신지를 알 수
없습니다.
#지도를 뒤 배경으로 서있는 리포터 -태조 왕건은 왜 이렇게 많은 부인이 필요했을까요?
----------------------------------------------------------------------------------------------
김기덕 교수 INT ------------------------------------------------------------
정략결혼이라 하지만 통일정책에 상당히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일
부 가문만 왕비가 되거나 중앙의 가문만 되는 것이 아니라 전국
적으로 스물아홉명의 분포를 보였다는 것 자체가 지방화 시대를
말해주는 것이고 어떤면에서 전국지방을 아우른다는 점에서 태조
왕건의 혼인정책은 이후에 한국사의 전개과정에서 민족통합에 상
당한 의미를 부여했다.
------------------------------------------------------------
---------------------------------------------------------------------------------------
〔스튜디오 3〕
MC 비록 이유와 명분이 있는 결혼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부인이 스물아홉명이나 된다는 사실은 정말 놀랍군요.
우선 궁금한 게 이들 모두가 같은 궁에서 함께 살았나요?
이은희 몇몇 왕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각자의 고향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왕비 칭호는 내려 졌지만
왕건과는 하룻밤의 인연으로 끝난 왕비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그 출신지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왕비도 있는데
이는 혼인은 했지만 함께 살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러니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궁중여인들간의 암투도 없었겠죠.
MC 그렇다니 안심이 되네요. 사실 걱정이 되었는데.. .
비록 왕건 개인의 인격이나 취양과는 무관하게 이뤄진 혼인이라도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여성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는 면에서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왕건의 입장에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은희 당시 왕건의 가장 절박한 과제는 지방세력의 힘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일부다처가 가능한 사회에서
그것을 해결하기에 혼인정책만큼 적절한 방법은 없었을 겁니다.
아마도 스물아홉명의 부인이 없었다면,
왕건의 후삼국 통일은 --- 글쎄 좀 어렵지 않았을까요?
MC 스물아홉명의 왕비가 고려 통일의 일등공신들였군요.
그러고보니 왕건은 통일하기까지 많은 이들의 협력을 끌어냈습니다.
어떤 인물이길래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믿고 따랐을까요?
참 궁금해지는데요.
정재윤 사실, 왕건 하면 아무래도 통일을 이룬 제왕이니
당당한 체구에 호탕한 성격을 지닌 장수로서의 이미지가 강한데요.
왕건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아봤습니다.
------------------------------------------------------------------------------------------------
〔VCR 3〕
분장실 앞 리포터 서서 ------------------------------------------------------------
리포터 : 남자분장실이다. 대본 보이나 따끈따끈하다. 태조왕건 대
하드 라마의 출연진이 분장하고 있다. 과연 어떤 모습으
로 변할지 궁금한데 안으로 들어가 보겠다.
------------------------------------------------------------
대본 TS 8초 -드라마에서 왕건역을 맡은 탤런트 최수종. 그는 요즘
왕건의 이미지를 만드는데 한창이다.
문 열고 들어가고 ------------------------------------------------------------
리포터 : 주문을 할 때 어떤쪽에 신경을 써서 분장을 해달라고 주
문하나?
최수종 : 얼굴 전체적으로 표현되는 부분이 바로 눈썹하고 눈이
많이 표현이 되기때문에 다른 부분보다 따뜻하게 해달라
고 한다.
------------------------------------------------------------
분장 마친 최수종+리포터 ------------------------------------------------------------
리포터 : 최수종씨가 생각하는 왕건은?
최수종 : 한마디로 표현해 지혜와 용기보다는 큰 그릇을 위해서는
덕을 최고로 하는 그런 인물 포용력 있고 때를 기다릴
줄 알고 참을성 있는 그런 인물이다.
------------------------------------------------------------
리허설 11초 -드라마에서의 왕건은 덕이 있는 외유내강형의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최수종 연기 보고)
왕건 친필 TS 15초 -그렇다면 실제 왕건은 어떤 사람였을까? 정몽주의 포
은집에 실려있는 이 글씨는 왕건의 친필로 알려져 있
다. 먼저 이 글씨를 통해 왕건이 어떤 인물인지 알아
보기로 했다.
리포터+이선생 ------------------------------------------------------------
리포터 : 반갑다. 선생님이 KBS 대하드라마 타이틀 쓰신분 맞지.
영광이다. 왕건이란 글자는 쓰셨지만 왕건이 쓴 글자는
보셨는지?
이선생 : 본 적이 없다.
리포터 : 그래서 제가 포은집에 있는 왕건의 친필시를 복사해 가
지고 왔다.
이선생 : 이 글씨를 봤을때는 광초를...
------------------------------------------------------------
왕건 친필 12초 -이 글은 풀이 뒤엉키듯 자연스런 초서체의 글씨로 중
국의 시인 이태백이 동림사의 승려와 헤어지며 쓴 시
를 왕건이 옮겨 적은 것이다.
친필 읽고 ------------------------------------------------------------
이무호 : 동림사에서 손님을 이별하는데 밝은 달이 떠올라 원숭이
가 우는구나. 웃으면서 이별하는 *산이 멀기만하니 어찌
호개를 긋는 걸 번거로워 하리오.
------------------------------------------------------------
이무호 선생 얼굴 6초 -같은 초서체로 글씨를 남긴 역사속의 인물들과 비교
해 보기로 했다.
모택동 글씨 자막 뜨면 ------------------------------------------------------------
이무호 : 모택동의 글씨도 보면 광초를 많이 쓰고 글씨가 웅혼창
정한 맛이 태조왕건의 글씨와 아주 흡사한 점이 많이 있
다.
------------------------------------------------------------
모택동 vs 왕건 4초 -시대는 다르지만 통일고려와 통일중국을 이뤄냈던 두
인물의 글씨는 놀랍게도 닮아 있었다.
대원군 글씨 ------------------------------------------------------------
이무호 : 흥선대원군의 글씨가 있다. 이 글씨를 처음 봤을 때 좌
실 우경하고 왼쪽은 실하게 쓰고 오른쪽은 가볍게 밖은
굵게 안은 약하게 이것을 봤을 때 청나라에서 억압생활
을 할 때 쇄국정책을 쓴 걸로 봐서 대원군의 성격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
대원군 vs 왕건 6초 -평생 고립의 길을 택했던 대원군의 글씨는 왕건의 것
과는 느낌이 달랐다.
이무호 INT ------------------------------------------------------------
왕건은 글씨로 봐서는 성격 자체가 다르다. 아주 확 트인 인물로
봐야한다. 이 글씨로 봤을 때 굵은 회과 가는획과 모가나고 둥근
획과 같이 가미가 되어 성격이 포괄적이고 호방한 기색을 가지고
있으면서 제왕의 기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
왕건 글씨 TS 흘리고 -(그림 흘리고)
궁예 C.G 17초 -기록에 나타난 궁예와 견훤 왕건의 신라에 대한 태도
를 통해 왜 왕건이 통일군주가 될 수 있었는지 알아
보았다. 우선 궁예는 신라에 적대적인 태도로 일관했
다. 이것은 궁예에게 포용이나 통합의 의지가 없었다
는 것을 의미한다.
견훤 C.G 17초 -견훤은 포석정에서 놀고있던 경애왕을 살해하고 군대
를 철수 시킨다. 이는 스스로 통일의 기회를 포기한
것으로 견훤은 통일에 대한 의지나 전망이 부족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왕건 C.G 11초 -반면 왕건은 군사적으로 우위에 있으면서도 신라를
방문해 신라왕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한다. 이것으로
신라인들의 호감을 얻어낸다.
이재범 교수 INT ------------------------------------------------------------
왕건이 보인 우호정책은 단순한 신라와의 우호가 목적이 아니라
후삼국 통일이라고 하는 원대한 포부를 달성하고자하는 전략적
차원에서 행해진 것으로 이해해야 할것이다. 따라서 후삼국 통일
이 왕건이라고 하는 경륜이 있고 점진적으로 통일을 달성하고자
했던 사람에게 돌아갔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역사적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
개태사 전경 4초 -충남 논산의 개태사. 통일의 대업을 이룬 후 왕건이
세운 절이다.
거대한 솥+리포터 ------------------------------------------------------------
리포터 : 이곳에 올라와 보니 제 뒤에 큰 덩어리가 있다. 종도 아
닌것 같고 개태사 철탑. 솥인지 냄비인지 어마어마하다.
가까이 와서 보니 더 크다. 솥의 크기를 재보겠다.
------------------------------------------------------------
------------------------------------------------------------
팔로 솥 크기 재보고 리포터 : 여섯번. 진짜 넓다. 제 팔이 짧은 팔이 아니다. 여섯번을
돌리고 남는다
------------------------------------------------------------
솥 TS 6초 -만약 실제로 사용했던 솥이라면 이것으로도 절의 규
모를 짐작할 수 있다.
스님 + 리포터 ------------------------------------------------------------
리포터 : 언제부터 있었나?
스 님 : 개태사가 창건될 때부터 있었다.
리포터 : 왜 이렇게 큰가? 솥인가 냄빈가?
스 님 : 그 당시 개태사는 지금의 조계사처럼 전국의 불교를 개
태사에서 관장했다 그때 대중들이 엄청 많이 모여 살았
다. 이 솥 규모를 보면 약 500명의 스님이 살지 않았나
싶다.
리포터 : 뭐에 쓰는 건가?
스 님 : 밥솥인줄 알았는데 국솥이다.
------------------------------------------------------------
리포터+김교수 16초 -개태사는 어느 정도의 규모였을까?
리포터+김교수 ------------------------------------------------------------
김교수 : 저쪽에 있는 금당터에서부터 현재의 개태사 저 지역까지
가 사찰 경내였다. 현재는 작은 사찰처럼 되어 있지만
옛날에는 호국사찰로 왕실의 위용을 나타낼 수 있는 사
찰로 방대한 규모였다.
리포터 : 왕건이 큰 절을 지은 이유?
김교수 : 왕건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전술 민심을 수습하는데 천
재적인 소질 가지고 있기 때문에 후백제를 통일한 뒤에
도 후백제 잔존세력의 불만 저항 이런것이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그것을 제압할 수 있는 사업
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렇게 거대한 사찰을 건립했다.
------------------------------------------------------------
논 sk+개태사 발원문 12초 -이 발원문에서 왕건이 꿈꾼 통일을 읽을 수 있다. 그
것은 백성들이 편히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
다.
---------------------------------------------------------------------------------------
〔스튜디오 4〕
MC 그동안 제가 생각했던 이미지와는 많이 다르네요.
통일을 이룩한 왕이라면 엄숙하고 위엄을 내세우는 타입이 연상되는데,
왕건은 무척 부드러운 인물같습니다.
정재윤 왕건은 전형적인 외유내강의 인물로
뚜렷한 비전을 세우고 그것을 주도면밀히 실천했던 사람입니다.
적을 죽이기보다는 따뜻하게 감싸 안았고,
큰 뜻을 위해서는 자기를 낮추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고려말의 유학자 이제현은 태조의 포부와 도량을
중국 송나라 태조에 비길한 하다고 했습니다.
통일을 끌어 낼 충분한 자질을 갖춘 인물로 평가하고 있는거죠.
새천년을 맞아서도 우리민족의 최대 과제는 여전히 민족통합인데
이럴때 왕건에게서 리더쉽의 모델을 찾아 보는 건 어떨까요?
바로 지금이 왕건과 같은 지도자가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MC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지도자 그런 왕건이 세운 나라가 고련데
그러면 고려는 어떤 나라였습니까?
김경민 외국에서 우리나라를 코리아라고 부르는 것은 다 아시죠.
아주 당연히 받아들이는 그 사실에 실은 큰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코리아란 명칭은 고려에서 비롯됐는데
그것은 본격적으로 우리의 이름이 세계에 알려진 것이
고려때였기 때문이죠.
고려는 그 어느 때보다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사회였던 것입니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바로 국제무역항 벽란돕니다.
------------------------------------------------------------------------------------------------
〔VCR 4〕
충주호 앞의 김경민 ------------------------------------------------------------
리포터 : 여기가 예성강이냐고요. 아니죠. 여기는 제천의 충주호
다. 여기 왜 왔냐면 고려시대 쓰던 대형선박이 완성되었
다. 너무 크고 멋있다. 저 배로 한 번 가볼까요.
------------------------------------------------------------
선착장 뛰어가 9초 -드라마를 위해 제작된 120미터 길이의 선착장. 그 양
쪽으로 두 척의 고려배가 모습을 드러냈다.
배 위 9초 -배의 구조에서 기능까지... 고증을 거쳐 복원된 고려배
는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리포터+정교수 -----------------------------------------------------------
리포터 : 교수님 배 왜 이리 크지?
정교수 : 이 정도 배는 별거 아니다. 고려는 막강한 해상세력을
가진 국가였다. 태조왕건의 10여척은 각 방 16보라 하여
그 길이와 폭이 96자되는 배였다.
리포터 : 96자는?
정교수 : 배의 길이 29미터. 갑판이 넓은배다.
리포터 : 이배는 왜 만들었나?
정교수 : 이 배는 군함으로 승무원이 70-80명이 탔다.
배의 순항속도는 4.5노트는 시속 8킬로 정도.
선수를 넓게 한 것은 접근단계에서 전투 정면을 확장하
기 위한 것이고 상선같은 경우는 유선함으로 선수가 날
씬하게 되어있다.
------------------------------------------------------------
누각 오르고 6초 -(흘리고)
리포터 누각 가르키며 ------------------------------------------------------------
정교수 : 누각이다. 올라와 보니 알겠지. 누각에서 멀리 볼 수 있
다. 바로 그 때문에 누각을 만든거다. 이 누각에서 적선
을 내려다 보며 공격을 하면 편리하게 적을 공격할 수
있지. 또 이곳에서 장수가 지위를 하기 위해서는 넓은 것
을 보고 지위를 해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높게 만든거다.
리포터 : 일반 상선은 누각이 높지 않은데 군함을 높게 만들어서
지위도 하고 적군도 볼 수 있게. 그래서 이러한 것을 누
선이라고 불렀다.
이 배는 뭐죠?
정교수 : 이 배는 무역선이다. 바로 군함에 비해서는 선체가 낮다.
무역선의 특징은 선체가 낮은거다. 먼 바다에서 바람을
적게 받아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낮게 만들었다.
------------------------------------------------------------
배 부감 fan 세트장 부감 16초 -제천은 문경에 이은 또 하나의 대규모 야외세트장.
만2천여평의 공간에 벽란도를 복원해 냈다. 고려시대
의 벽란도는 어떤 곳이었길래 이런 엄청난 복원이 이
뤄진 걸까?
벽란도의 지리적 위치 C.G 10초 -벽란도는 당시 수도 개경에서 불과 30여리 떨어진 고
려의 관문으로 고려는 벽란도를 통해 세계를 호흡했
다.
#들어오는 외국상인 ------------------------------------------------------------
리포터 : 외국상인들이 들어오고 있다. 만나보겠다. 어디서 왔나?
연기자 : 아라비크. 인도.
리포터 : 뭘 팔나 왔나?
연기자 : 카페트. 가죽동물. 아유코리안?
리포터 : 노 코려. 베리 굿.
그 당시에도 고려를 코리아라고 했나봐.
어디로 갔는지 따라가 보겠다.
-----------------------------------------------------------
<가상 스튜디오 -- 객관> ----------------------------------------------------------------------
객관 외경 + 리포터 다가서고 리포터 : 따라오긴 왔는데 (두리번 거리며) 여기가 어디지?
객관 안내원 등장 리포터 : (안내인 보고 반갑게 다가간다) 저기요 여기가 어디죠?
안내인 : (정중하고 깍듯한 태도로 안내한다)
여기는 객관입니다.
벽란도를 통해 개경으로 들어온 외국 사신이나 상인들이
거처하는 곳으로 요즘으로 말하면 호텔쯤 되는 곳이죠.
제가 안내해 드릴테니, 따라 오시죠.
응접실로 안내해 보여주고 리포터 : (두리번 거리고, 어리둥절한 표정)
안내인 : 객관은 한꺼번에 여러 사람이 머물러야 하기 때문에
규모가 크고 방도 많습니다.
여기는 호텔로 치면 로비에 해당하는 곳인데
각방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모여 이런저런 얘기를 나
누죠.
연회장 구경시켜 주고 안내원 : 외국인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던 연회장입니다.
리포터 : 당시에도 연회가 ---
안내원 : 그럼요. 고려를 제대로 알리는데에 연회만큼
좋은 기회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히 신경을 써서 준비하죠.
다시 응접실로 나오고 리포터 : (세상에나 외국인을 위해 이렇게 훌륭한 시설을 만들어
놓았다니 중얼중얼 ---)
안내원 : 쉿 조용히 ---
리포터 : (조용--) 누구죠?
안내원 : 고려상인과 외국상인이 거래를 위한 협상을 하고 있습니
다.
리포터 : 저 가운데 있는 사람은 누구죠?
안내원 : 통역을 하는 역관입니다.
통역은 보통 중국인이 맡아합니다.
고려상인 뒷모습 보면서 리포터 : 당시엔 어떤 물건들을 거래했나요?
안내원 : 고려에서는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던 인삼과
곱게 짠 삼베 종이 먹등을 수출했고
비단 향신료 약재등을 수입했습니다.
리포터 : 정말 교역이 활발하게 이뤄졌군요.
리포터 + 안내원 리포터 : 밖으로 나오니 더 넓어 보이네요?
안내원 : 서긍이라는 송나라 사신은 이곳을 궁궐만하다고 했습니
다. 그만큼 크고 웅장했다는 얘기죠.
리포터 : 그런데 객관은 이곳 뿐인가요?
안내원 : 개경에는 이런 객관이 십여군데 있습니다.
리포터 : (놀라는 표정)
수도인 개경에 외국상인들을 위한 커다한 호텔이
무려 10군데나 있었다는 것은
고려가 그만큼 활발한 국제무역을 했다는 얘기네요.
객관 입구에서 서로 인사 리포터 : (인사하며) 오늘 구경 잘했습니다.
안내인 :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
교역국 C.G 14초 -객관이 10여군데나 있었다는 것은 고려의 교역이 그
만큼 활발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고려는 중국은 물론
태국 월남 나아가 아라비아와도 교류가 있었다.
쌍화점 재연 18초 -고려가요는 외국인의 잦은 왕래를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쌍화사러 갔더니 회회아비가 내 손목을 쥐었어
요' 고려가요 쌍화점의 한 대목으로 아예 고려에 정착
해 살았던 외국인이 있었다는 말이다.
회회아비 4초 -쌍화는 만두를, 회회아비는 위그르인을 가르킨다.
지도 C.G 6초 위그르인은 중앙아시아의 이슬람문화권에 속하는 민족
으로 고려의 교역이 먼 이곳까지 미쳤다는 것을 증명
해 주고있다.
이희수 교수 INT ------------------------------------------------------------
고려의 대외문화에 대한 자세는 개방적이고 포용적이었다. 우리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열려있는 사회였다. 교역상인들뿐 아니라
원대지배하에 실크로드를 통해 중앙아시아계 관료들이 들어왔고
상인들이 들어와서 자유롭게 정착하고 고려여인들과의 결혼을 통
해 귀화 동화하는 과정을 거쳤다. 외국인들이 한국사회에서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아주 자유롭고 평화롭게 정착할 수
있었던 여건이 성숙되어 있었다.
------------------------------------------------------------
배에 오르는 한국인들 ------------------------------------------------------------
리포터 : 근데 지금 어디 가는거냐?
연기자 : 외국으로 장사하러 나간다.
리포터 : 뭘 팔러 가나?
연기자 : 인삼 팔러 간다.
------------------------------------------------------------
윤명철 교수 INT ------------------------------------------------------------
상대적으로 고려인들도 똑같이 그런 지역에 갔던 것이죠. 특히 고
려인들은 중국지역에 많이 진출했는데 이미 왕건때 산동반도에
있는 등주와 청주 이런 지역에 가서 상업적인 교역을 하고있다.
점차 시대가 내려가면서 오늘날 절강 복권 강남지역에서 교역을
한다. 상인들이 많이 진출하지. 이때 상인들이 얼마나 많이 진출
했냐면 사신들과 함께 고려인들이 너무 많아서 당대 최고의 문장
가 소동파는 이들로 인해서 피해가 막심하다는 상소를 철종에게
여러번 올린다.
------------------------------------------------------------
벽란도 부감+자막 13초 (자막 --고려의 상인들이 시도때도 없이 조공을 핑계로
들어와 중국을 소란케 한다)
-이 소동파의 글은 세계속의 코리아로 발돋움한 고려
인의 역동성과 진취성을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
〔스튜디오 5〕
MC 코리아가 고려에서 비롯됐다는 당연한 사실이 새롭게 다가오는데요.
움추려 드는 그런 자세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밖으로 열려있는 그런 사회가 고려였습니다.
고려는 다가가 들여다 볼수록 매력적인 사횐데요.
김경민 그렇습니다. 고려는 우리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개방적여서
국제유행이나 문화조류를 받아들이는데도 거침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고려는 세계문화를 호흡하고 받아들이는
동양의 용광로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런 점이 세계속의 고려, 즉 코리아를 만들어 냈습니다.
고려는 단순히 삼국시대와 조선을 잇는 그저 거쳐가는 시대가 아니라,
대단히 역동적인, 크고 활기찬 시대였던 것입니다.
MC 고려가 한층 가깝게 느껴지는데 저만의 느낌은 아닐 겁니다.
네 분 오늘 나와주셔서 감사.
(서로인사)
MC 지금까지 우리는 천년전 태조 왕건이 이룩한 새로운 민족통합 방식과
고려왕조가 지향했던 개방성과 진취성을 보았습니다.
역사는 오늘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했습니다.
여전히 지역간 남북간의 통합이 민족적 과제로 남아있고
나아가 세계화라는 시대적 과제를 수행해야 하는 지금
우리는 고려의 역사경험 속에서
오늘을 풀어갈 해법을 찾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KBS는 고려를, 또 그 고려를 세운 왕건을 눈여겨 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