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신윤복은 왜 여인을 그렸나?
신윤복은 왜 여인을 그렸나? |
성과 본능에 대한 긍정. 풍속화가 혜원 신윤복의 그림은 그 이전의 조선화가들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새로운 화풍이었다. 그는 유교적 윤리관이 지배했던 조선시대의 남녀간의 자유연애와 풍속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
1. 신윤복의 그림 |
신윤복은 200년 전 조선의 도시풍경을 화폭에 담아 냈다. 그의 그림에는 자유연애에서 양반유생의 매춘 현장에 이르는 다양한 모습들이 담겨 있었다.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는 주제, 솔직한 감정의 표현. 신윤복은 이런 것들을 그림에 담고 싶어했다. 1990년대 중반 프랑스 출판계는 신윤복 그림을 재평가하며 ‘예술적인 에로티시즘’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
2. 베일에 쌓인 화가, 신윤복 |
화가 신윤복은 그의 그림만큼이나 베일에 쌓여 있다. 근역서회징에 단 두 줄만 언급되어 있는 그의 자취는 초라하기만 하다. 그의 아버지 신한평은 어진을 그리는 도화서의 화원이었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신윤복은 당시 도화서에서 일하면서 김홍도와 풍속화를 배웠다. |
3. 신윤복이 표현한 여성들 |
그의 그림 속엔 항상 여성이 등장한다. 다른 화가도 여성을 그렸지만 신윤복은 그들과 다르다. 배경으로써, 틀에 박힌 아이콘으로 그려진 것이 아니라 저고리 고름을 푸는 관능미 넘치는 여성, 자유연애를 하며 세상을 즐기는 여성 등 살아서 생동감 넘치는 실제의 여성이었던 것이다. |
4. 양반들의 모습을 통해 본 사회상 |
신윤복이 살았던 시대는 19세기, 당시는 내외법이 강화된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그림 속 남녀는 오히려 더욱 자유분방하다. 성리학적 명분으로 자기를 억제하고 절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이를 벗어나 적나라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간 전혀 다른 양반들의 모습, 신윤복은 이런 양면성을 가진 상층부를 그림으로써 풍자하고 있었던 것이다. |
5. 시대가 원한 신윤복의 그림 |
예술은 시대를 반영하는 사회의 거울이다. 신윤복의 그림 또한 사회의 변화를 솔직하게 담았고, 사람들은 자신의 얘기를 담은 쉽고 장식성이 강한 신윤복의 그림을 원했다. 신윤복은 자신의 삶을 기반으로 해서 어린 아이부터 노인까지 각계 각층의 조선인들을 차별없이 사실적으로 그렸던 것이다. |
6. 사후 100년 뒤 복권된 신윤복 |
추사 김정희의 등장으로 문화 개혁이 일어나면서 신윤복으로 대표되는 풍속화의 맥이 끊겨버린다. 그러나 그의 사후 100년 뒤 일본인 잡화점들이 인사동 거리를 뒤덮고 있을 때, 조선인이 운영하는 고서적상 한남서림의 등장으로 신윤복의 그림들은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현대에 들어서 신윤복 그림이 재조명되고 있다. |
신윤복은 왜 여인을 그렸나?
성과 본능에 대한 긍정.
풍속화가 혜원 신윤복의 그림은
그 이전의 조선화가들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새로운 화풍이었다.
그는 유교적 윤리관이 지배했던 조선시대의
남녀 간의 자유연애와 풍속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1. 신윤복의 그림
신윤복은 200년 전
조선의 도시풍경을 화폭에 담아 냈다.
그의 그림에는 자유연애에서 양반유생의
매춘 현장에 이르는 다양한 모습들이 담겨 있었다.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는 주제,
솔직한 감정의 표현.
신윤복은 이런 것들을 그림에 담고 싶어했다.
1990년대 중반 프랑스 출판계는
신윤복 그림을 재평가하며
‘예술적인 에로티시즘’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2. 베일에 쌓인 화가, 신윤복
화가 신윤복은
그의 그림만큼이나 베일에 쌓여 있다.
근역서화집에 단 두 줄만
언급되어 있는 그의 자취는 초라하기만 하다.
그의 아버지 신한평은
어진을 그리는 도화서의 화원이었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신윤복은
당시 도화서에서 일하면서 김홍도와 풍속화를 배웠다.
3. 신윤복이 표현한 여성들
그의 그림 속엔 항상 여성이 등장한다.
다른 화가도
여성을 그렸지만 신윤복은 그들과 다르다.
배경으로써,
틀에 박힌 아이콘으로 그려진 것이 아니라
저고리 고름을 푸는 관능미 넘치는 여성,
자유연애를 하며 세상을 즐기는 여성 등
살아서 생동감 넘치는 실제의 여성이었던 것이다.
4. 양반들의 모습을 통해 본 사회상
신윤복이 살았던 시대는 19세기,
당시는 내외법이 강화된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그림 속 남녀는 오히려 더욱 자유분방하다.
성리학적 명분으로 자기를 억제하고 절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이를 벗어나 적나라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간 전혀 다른 양반들의 모습,
신윤복은 이런 양면성을 가진 상층부를
그림으로써 풍자하고 있었던 것이다.
5. 시대가 원한 신윤복의 그림
예술은 시대를 반영하는 사회의 거울이다.
신윤복의 그림
또한 사회의 변화를 솔직하게 담았고,
사람들은 자신의 얘기를 담은 쉽고
장식성이 강한 신윤복의 그림을 원했다.
신윤복은 자신의 삶을 기반으로 해서
어린 아이부터 노인까지 각계 각층의
조선인들을 차별없이 사실적으로 그렸던 것이다.
6. 사후 100년 뒤 복권된 신윤복
추사 김정희의 등장으로
문화 개혁이 일어나면서 신윤복으로
대표되는 풍속화의 맥이 끊겨버린다.
그러나 그의 사후 100년 뒤 일본인
잡화점들이 인사동 거리를 뒤덮고 있을 때,
조선인이 운영하는
고서적상 한남서림의 등장으로
신윤복의 그림들은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현대에 들어서
신윤복 그림이 재조명되고 있다.
여인이 자주색 저고리를 연다.
여인의 옷고름 사이로 얼핏 단아한 매무새가 드러났다.
- 어설픈 손재주로 가야금을 탔으니 이제 님의 농현을 기다립니다.
- 나더러 가야금을 타라는 것인가?
- 소리내는 악기가 가야금뿐이겠습니까? 사내의 손에 울고 웃는 최고의
악기는 여인의 몸이겠지요.
- 옷고름 여미거라
- 기방의 천한 몸이라 꺼리시는 것입니까?
- 하나의 줄이 끊어졌다고 가얏고가 음조를 잃더냐. 네몸을 헛되이 여기지 마라.
한 사내의 하룻밤이 아니라 수많은 자들의 영원한 찬탄을 받아야 할 몸이다.
.
.
.
. 바람의 화원(이정명 소설) 중에서...,
![]() [ 기방무사 (妓房無事) (1805) ]
방안에서 남녀가 무슨 일을 하고 있다가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에 당황한 듯 하죠? 아마도 방 안의 여인은 기생의 몸종이고, 방안의 남자는 기생을 찾아왔다가
그녀의 몸종과 사랑을 나누던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갑자기 기생이 들어오니 사내는 이불로 자신의 벗은 몸을 가린 듯 하구요.
혜원의 춘화 중에는 이와 같은 내용으로 이불을 덮지 않은 채 벌거벗은 사내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이 있답니다.
![]() [ 단오풍정(端午風情) (1805)] 신윤복의 작품 중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작품이죠. 단오날에 창포물에 머리를 감고, 그네를 뛰며 놀던 조선 시대 여인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놀이의 이유는 악귀를 물리치고자 하는 액땜의 뜻이 있다고 합니다.
멀리서 목욕하는 여인들을 훔쳐보고 있는 소년들은 절간의 젊은 스님들 같은 데요,
그 모습이 익살스럽습니다.
![]() [ 무녀신무(巫女神舞) (1805)] 일반 집에서 굿을 하고 있는 풍경입니다. 갓을 쓰고 부채를 들고 춤을 추는 무당 앞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빌고 있는 아낙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혜원은 이렇게 흥미롭고 이색적인 생활의 풍경을 화폭에 담길 즐겨하였지요.
그래서 자주 등장하는 인물들이 기녀, 무녀 들입니다.
여기서도 기녀의 붉은 의상은 우리의 시선을 기녀에게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 [ 쌍검대무(雙劍對舞) (1805)] 한 가운데서 긴 칼을 들고 춤을 추는 무녀를 중심으로 악단과 양반, 기녀들이 둘러 앉아 있습니다. 주변의 푸른 빛들과는 대조적으로 무녀의 치마는 붉은 색이네요.
덕분에 시선이 무녀들에게로 집중되고 있습니다. 역동적으로 펄럭이는 치맛자락을 보니
얼마나 현란하게 춤을 추는 지 알 것 같아요.
![]() [ 연당의 여인 (1805)] 평론가들에게 신윤복 회화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평을 듣고 있는 작품입니다. 연꽃이 활짝 핀 연못 을 바라보며 여인의 모습을 시원하면서도 운치있게 그려내었습니다.
생황을 불려는 듯 한손에 들고, 다른 손에는 담뱃대를 든 채 툇마루에 앉아 있는 이 여인은
은퇴한 기생인 퇴기인 듯 합니다.
순간의 모습을 잘 포착하여 깔끔하게 화면에 담아낸 혜원의 솜씨가 놀랍습니다.
![]() [ 월야밀회(月夜密會) (1805)] 달빛만 고요한 한 밤중에 인적 드문 길의 후미진 담장 밑에서 한상의 남녀가 깊은 정을 나누고 있습니다. 남자는 차림새로 보아 관청의 무관인 듯 하고, 그 남자의 여인은 기생인 것 같습니다.
그들의 만남을 한 켠에서 지켜보고 있는 또 다른 여인은 이들의 만남을 주선해준 사람인 듯 하구요.
담장 밖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화가의 시선이 재미있습니다.
![]() [ 월하정인(月下情人) (1805)] 어스름한 달빛 아래서 양반인 듯 잘 차려 입은 남자가 초롱불을 들고 길을 재촉하는 것 같네요. 여자는 쓰개치마를 둘러쓰고 다소곳한 모습으로 조금은 주저하는 듯한 모습이구요.
배경은 간략히 묘사되어 있지만 대신 이들의 표정과 행동에서 미루어 짐작되는
그네들의 감정은 온 화폭이 모자라는 듯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왼쪽 담에는 "달은 기울어 밤 깊은 삼경인데,
두 사람 마음은 두 사람이 안다(月沈沈夜三更 兩人心事兩人知)."
라고 씌여 있습니다.
![]() [ 주사거배(酒肆擧盃) (1805)] 주막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취객들과 주모의 모습을 그려내었습니다. 그러나 여느 주막과는 다르게 주변의 기와집과 마당 안의 매화도
보이는 것이 양반들을 상대하기에도 손색없는 꽤 반듯한 집 같아 보입니다.
술자리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손님들도 선비와 양반들인 듯 하구요.
매우 일상적인 조선시대의 한 생활상입니다.
![]() [ 주유청강(舟遊淸江) (1805)] 특별히 하는 일없이 유희나 즐기며 세월을 죽이고 있는 선비들을 한량이라고 하죠. 그 한량들이 기녀들을 데리고 뱃놀이를 나왔습니다. 조선 시대에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입니다.
면 위쪽에는 “피리 소리는 바람을 타서 아니 들리는 데 흰 갈매기가 물결 앞에 날아든다” 라고 적혀 있습니다.
![]() [ 청금상련(聽琴賞蓮) (1805) ]
연못가에서 세 남자가 기생을 데리고 유희를 즐기고 있는 모습입니다. 옛 선비들은 기생들과 즐기는 놀이도 양반들이 지녀야 할 풍류로 생각하였기에,
당당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모습들이 보입니다.
기녀들의 옷맵시나 선비들의 옷매무새, 가야금, 우아한 정원의 나무들이
매우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어 당시의 생활상을 잘 알게 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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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안에서 남녀가 무슨 일을 하고 있다가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에 당황한 듯 하죠?
[ 단오풍정(端午風情) (1805)]
신윤복의 작품 중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작품이죠.
[ 무녀신무(巫女神舞) (1805)]
일반 집에서 굿을 하고 있는 풍경입니다.
[ 쌍검대무(雙劍對舞) (1805)]
한 가운데서 긴 칼을 들고 춤을 추는 무녀를 중심으로 악단과 양반, 기녀들이 둘러 앉아 있습니다.
[ 연당의 여인 (1805)]
평론가들에게 신윤복 회화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평을 듣고 있는 작품입니다.
[ 월야밀회(月夜密會) (1805)]
달빛만 고요한 한 밤중에 인적 드문 길의 후미진 담장 밑에서 한상의 남녀가 깊은 정을 나누고 있습니다.
[ 월하정인(月下情人) (1805)]
어스름한 달빛 아래서 양반인 듯 잘 차려 입은 남자가 초롱불을 들고 길을 재촉하는 것 같네요.
[ 주사거배(酒肆擧盃) (1805)]
주막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취객들과 주모의 모습을 그려내었습니다.
[ 주유청강(舟遊淸江) (1805)]
특별히 하는 일없이 유희나 즐기며 세월을 죽이고 있는 선비들을 한량이라고 하죠.
연못가에서 세 남자가 기생을 데리고 유희를 즐기고 있는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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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윤복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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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김홍도와 신윤복은 도화서 출신인가요? |
1) 김홍도는 도화서 화원으로서 정조의 어진화사에도 참여를 하였고, 정조가 가보지 못하는 금강산이 보고 싶다고 하여 직접 금강산의 실경을 보고나서, 금강산 그림을 그려서 올릴 만큼 정조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나중에는 현감이라는 벼슬도 하였죠. 김홍도는 정조의 각별한 사랑과 문사관료 및 여항 부호들의 후원을 받으며 이 시기의 풍속화를 주도했습니다.
김홍도는 이미 20대 초반에 당대 최고의 풍속화가로 꼽혔으며, 당시 감정평가의 일인자였던 강세황은 그를 "우리나라 400만의 파천황적 솜씨로, 풍속에 더욱 뛰어나 한 번 붓이 떨어지면 손뼉을 치며 신기하다고 부르짖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절륜하다,"고 했습니다. 그는 각 계층사람들의 일상사의 모든 것과 생업의 장면, 세시풍속과 통과의례 광경, 그리고 시정의 유희 잡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소재를 풍류적 정감과 흥취가 넘치는 모습으로 탁월하게 그려내는 예술적 업적을 남겼습니다.
2) 신윤복은 한 때 어진화사로 발탁되었으나, 왕실납품의 책가도를 잘못 그려 도화서에서 퇴출당하고 귀양까지 갑니다. 아비인 신한평의 풍속화아 김홍도 화풍의 영향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도 소재와 구성방식, 인물화법, 설체법 등에서 독창성을 발휘하고 풍속화의 새로운 조류를 보여주었습니다. 신윤복의 풍속화는 섬세하고 유연한 필묵법과 곱고 화사한 청홍색의 대비효과와 등장이물들의 풍부한 표정을 통해 사실감있게 묘사되어 있어 조선후기 사람들의 낭만적인 시정생활과 멋스러움을 예술적 감동과 더불어 실감나게 보여줍니다 |
<아래> 그림을 클릭하시면 확대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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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윤복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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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김홍도와 신윤복은 도화서 출신인가요? |
1) 김홍도는 도화서 화원으로서 정조의 어진화사에도 참여를 하였고, 정조가 가보지 못하는 금강산이 보고 싶다고 하여 직접 금강산의 실경을 보고나서, 금강산 그림을 그려서 올릴 만큼 정조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나중에는 현감이라는 벼슬도 하였죠. 김홍도는 정조의 각별한 사랑과 문사관료 및 여항 부호들의 후원을 받으며 이 시기의 풍속화를 주도했습니다.
김홍도는 이미 20대 초반에 당대 최고의 풍속화가로 꼽혔으며, 당시 감정평가의 일인자였던 강세황은 그를 "우리나라 400만의 파천황적 솜씨로, 풍속에 더욱 뛰어나 한 번 붓이 떨어지면 손뼉을 치며 신기하다고 부르짖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절륜하다,"고 했습니다. 그는 각 계층사람들의 일상사의 모든 것과 생업의 장면, 세시풍속과 통과의례 광경, 그리고 시정의 유희 잡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소재를 풍류적 정감과 흥취가 넘치는 모습으로 탁월하게 그려내는 예술적 업적을 남겼습니다.
2) 신윤복은 한 때 어진화사로 발탁되었으나, 왕실납품의 책가도를 잘못 그려 도화서에서 퇴출당하고 귀양까지 갑니다. 아비인 신한평의 풍속화아 김홍도 화풍의 영향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도 소재와 구성방식, 인물화법, 설체법 등에서 독창성을 발휘하고 풍속화의 새로운 조류를 보여주었습니다. 신윤복의 풍속화는 섬세하고 유연한 필묵법과 곱고 화사한 청홍색의 대비효과와 등장이물들의 풍부한 표정을 통해 사실감있게 묘사되어 있어 조선후기 사람들의 낭만적인 시정생활과 멋스러움을 예술적 감동과 더불어 실감나게 보여줍니다 |
<아래> 그림을 클릭하시면 확대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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