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스페셜100선

81 발굴! 스티코프의 비밀수첩, 김구는 왜 북으로 갔나?

사랑의고향길 2013. 9. 28. 21:49

발굴! 스티코프의 비밀수첩, 김구는 왜 북으로 갔나? 
“북조선의 헌법에 대해, 1947년 북조선 경제계획 달성, 한반도 상황. 그리고 스탈린 동지가 한국에 대한 문제를 전면 검토하고 싶어한다 ….” 김구의 사후 50년 뒤 한 소련군 장교의 비밀수첩이 발견되었다. 우리는 분단 직전 한반도의 상황을 담고 있는 이 수첩에서 김구를 만날 수 있었다. 
1. 쩨렌찌히 스티코프
스탈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스티코프는 39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한반도 문제에 개입하게 된다. 그는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성된 미소공동위원회의 소련측 대표였고, 초대 북한주재 소련대사였다. 취재팀은 러시아 방문을 통해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한 권의 수첩을 발견했다. 북한의 실권을 쥐고 있던 스티코프가 직접 기록한 가상 통일정부 내각 명단이었다.
2.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한 김구
스티코프의 수첩 속에 유독 많이 등장하는 이름이 김구이다. 당시 38선 이남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김구는 민족지도자로서 명성이 높았지만 소련으로서는 무척 껄끄러운 정치인 중에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스티코프는 왜 백범 김구에게 주목했을까. 1948년 4월 평양에서는 남북연석회의라는 이름으로 회담이 열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 회담에 김구가 참석했던 것이다. 시기적으로는 남과 북이 분단되기 이전인데, 백범 김구가 참석한 남북연석회의는 과연 어떤 회담이었을까.
3. 한반도 상황
일제시대, 김구는 일본군을 물리치기 위해 독립운동 세력을 통합하는 좌우합작운동을 벌인다. 그리고 임시정부 2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좌우 대통합을 이룬다. 김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연안에서 활동중인 또다른 좌파의 독립운동세력과의 합작을 추진했다. 하지만 서로 다른 이념을 가진 독립운동 세력이 하나로 힘을 모았지만 그 힘을 발휘할 기회를 갖지 못한 채 갑작스러운 해방을 맞게 된다. 김구는 예상치 못한 해방을 두고두고 안타까워 했고, 한반도의 운명은 해방의 감격에 젖어있는 동안 또 다른 비극 속으로 향하고 있었다.
4. 북행 길에 오르는 김구
조국의 위기상황에는 공감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타결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준비과정이 부족하다고 판단한 김구는 사전준비를 위해 측근들을 북으로 먼저 보낸다. 그리고 통일을 위해 북행 길에 오르지만 결코 쉽지 않은 출발이었다. 학생들과 시민 4-500명이 김구의 북행 길을 막기위해 몰려들었고, 출발은 계속 지연되었다. 김구는 탈출을 시도한다.
5. 남북연석회와 4김 회의
불투명했던 김구의 입북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남북회담은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이 참석한 4김 회담은 남북의 정치 지도자들이 만난 실질적인 회담이었다. 그리고 서로 다른 입장과 이념을 가진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인 회담이었다. 그리고 4개항 공동성명을 발표한다.
6. 약속의 결렬
북으로 올라갈 때와 마찬가지로 민족통일에 대한 희망을 품고 돌아온 김구. 그러나 5.10총선으로 1948년 남한 단독 정부인 이승만 정권이 들어선다. 결과적으로 남북연석회의는 실패한 것이다. 그리고 김구가 북한정부에게 이용당했다는 의견과 함께 남북연석회의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렇다면 남북연석회의가 남긴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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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의 연석회의 참가


스티코프, 미소공위의 소련측 대표이자 스탈린의 심복으로서 조선주재 소련민정청의 책임자 레베제프의 아래서 주요사업을 총괄하던 이. 2000년 그의 개인수첩이 발견됐다.


기록된 때는 48년. 남북연석회의가 열린 해이다. 이 회담에는 남로당의 박헌영, 허헌을 비롯하여 한독당의 김구, 조소앙, 엄항섭, 조완구 등과 민족자주연맹의 김규식, 김붕준 등 또 민주독립당 홍명희, 전봉하 등 그외에도 인민공화당, 신진당, 사회미주당, 전평, 여맹 등 56개 정당 사회단체를 통털어 남측인사 695여명이 참가했다.


48년 2월 김구는 "인형(어질인, 형님형)"이라고 부르는 김두봉에게 남북지도자회담을 제안하는 편지를 보낸다.
김두봉은 1924년, 김구의 부인 최준례가 죽었을 때 묘비명(자음으로 숫자를 표시한 특이한 묘비명으로 한글학자이기도한 그의 면모를 보여준다)을 써줄 정도로 김구와 각별한 사이였다. 그는 김구와 함께 상해에 있다가 후에 화북으로 가 화북조선독립동맹을 이끌게 된다. 42년 임정의 좌우합작 시도로 김원봉이 임정과 함께 하고 있었고 45년이 가까워지며 김두봉 계열과의 통합이 가속화 됐었다. 이 모든 과정에 김구가 있었고 김두봉이 있었다.


김구일행은 북한으로 가기 전에 최용건, 김두봉 등 북한의 지도부와 안면이 있던 안경근(안경근은 안중근의 사촌동생이자 김구의 신임을 받던 인물이다. 안경근은 최용건과 군관학교 동창이고 김두봉은 그의 2년 선배였다.)과 권태양(김규식의 비서)을 밀사로 북에 보내 5개 기본 사항을 제시한다.


1. 어떠한 형태의 독재도 반대하는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
2. 독점자본주의를 배제하는 경제체채를 건설할것
3. 민족의 총선거를 통해 전민족적 정부를 선출
4. 국가가 어떤 어려움에 처하더라도 무력에 호소하지 말 것
5. 외국군 철수에 관한 문제는 소련, 미국측과 협의하에 할 것.


소련은 이에 동의했고 이는 레베제프의 비망록(대구 매일 신문사 소장)을 통해 확인 된다. 즉 3월 김구를 '통일을 방해하는 사람'으로 신문 사설에 쓰라고 하던 것이 4월 김구를 연석회의에 반드시 참석시키라는 것으로 바꿔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남의 하지는 김구 등의 노력에 대해 바보같은 짓이라는 식의 냉소적인 성명을 발표한다.


김구가 북으로 떠나기로 한 날. 현재 강북삼성병원의 일부인 경교장을 400-500여명의 학생이 막아섰다. 김구는 이들을 피해 건물 뒷편 석탄을 넣는 구멍을 통해 빠져나와 임진나루를 건너 38선으로 간다. 김구가 38선을 도착한 당시의 사진은 수행비서 김선우가 김구의 우측에 있고 왼쪽으로 아들 김신이 있는 것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이들 3인은 단 한명의 기자가 바라보는 가운데 북으로 간다.


김구가 모란봉 극장에서 열리는 연석회의에 도착한 때에 스티코프의 수첩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있다.
"김구가 나에게 이 자리에서 나가라고 호통을 쳤다. 그래서 나는 어쩔수 없이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이는 연석회의에 소련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김구가 민족문제에 외국이 참견하는 것을 용납치 않는 인물이었음을 알수 있다. 또 연석회의에 좌익이 다수였다는 사실도 더불어 증명해 준다.


연석회의 전체회의가 끝나며 노동신문에는 "남북조선제정당사회단체련석회의에서/전조선동포에게격함"이라는 글이 발표됐다.
'단독선거를 파탄시켜야 할 것이며... 외국군대를 즉시 철거하고... 통일적 민주주의 자주독립국가 수립..."
(원래 이 결정서의 원문에는 남한의 우익을 매국노로 표현<이승만, 김성수 도당이 미군과 결탁하여 단독정부를 수립한다는 등>이 있었는데 4김회의를 통해 삭제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는 후기할 공동성명에 들어가려 한 것이 빠졌다고 이해되기도 한다.)


전체회의 이후 김규식 등 4인 회담을 2차례 열고 이를 15인 협의회로 확대하여 4월 30일 4개항 공동성명을 발표한다.


1. 미소양군 철수 

2. 양군 철수후 통일에 반대되는 어떠한 무질서의 발생도 허용하지 않을 것

3. 전국 총선에 의한 통일 국가 수립

4. 남한의 단선단정 반대

 

이는 자주/평화/통일/단정반대 라고 볼 수 있으며 그 맥은 7/4남북공동성명에도 이어진다.


4.19-4.30 까지 통일을 위한 평화적인 마지막 몸부림은 그러나 5월 5일 김구 등 남측 대표들은 비교적 환영 속에 남으로 들어온 지 몇 일만에 현실 앞에 무력화돼 버렸다. 단독선거는 예정대로 닷새후인 5월 10일 치러졌고 8월 15일 정부가 섰다. 8월 25일에는 북에서도 최고인민회의 선거가 치뤄지고 김일성이 내각 수상에 임명되었으며 9월9일 정부가 선다.


김구 등의 연석회의 참석에 대해 당시고 지금이고 하지의 말속에 담긴 생각처럼 강대국이 결정한 구도 속에 쓸데없고 소용없는 짓이었다거나 북한에게 이용당했다는 부정적이 평가가 많이 있다.


조동걸 국민대 명예교수는, 북한이 명분을 위해 연석회의를 열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김구가 그럼에도 참가한 것은 그 과정을 통해 남한의 단정뿐 아니라 북한의 단정도 막아보려는 노력이었으며 그런 노력이 이후 그리고 지금까지의 통일운동의 뿌리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역사의 운동이란 눈앞의 당장에 가능한 전망을 보고 전개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인천대 김학준 총장은, 아무리 강대국의 정치의 틀에 의해 우리의 운명, 분단이 결정되었다고 해서 우리민족으로부터 어떠한 통일의 노력도 없었다면 우리 역사가 얼마나 부끄러운 역사가 되었겠는가 라고 반문한다. 그는 우리의 역사를 부끄럽지 않도록 해준 데는 그들의 가시밭길 같은 고통과 노력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하며, 강대국의 강요된 규정에 굴하지 않는 우리 민족적 정신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커다란 민족적 자산이 아닐 수 없다고 역설한다.


김구가 남긴 글 중에 눈 오는 벌판을 가로질러 걸어갈 때 오늘 내가 남긴 발자국은 뒷사람의 길이 될 것이라는 글이 있다. 김구의 행보가 역사의 엄격함의 평가대상이라 하더라도, '통일이 없으면 독립은 없다'는 그의 자세는 현재의 우리에게 민족통일의 뜨거운 신념을 상징한다 할 것이다.

 

 

김구는 왜 북으로 갔나?


방송일: 2000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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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유리창 총탄 자국 5 1949년 6월 26일
누워 있는 김구 10 김구가 암살되었다. 한결같이 민족통일을 부르
짖던 정치인. 그의 죽음과 함께 통일을 위한
손 5 노력도 사라지는 듯 했다.

길 트래킹 7 (3-4 초 보고)
그로부터 50여 년
집안으로 들어가고 4 한 소련군 장교의 비밀수첩이 발견됐다.
수첩 넘기고 7 분단직전 한반도의 상황을 담고 있는 이 한
수첩 글씨 7 권의 수첩에서, 김구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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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틀: 발굴! 스티코프의 비밀수첩. 김구는 왜 북으로 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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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1-오프닝]

역사스페셜은 최근 우리 현대사의 한 단면을 밝혀줄 수 있는 중요한 사료를 입수했습니
다. 바로 이 한 권의 수첩입니다.

(수첩 들고)
자그마한 크기에 빨간 가죽으로 포장돼 있는 꽤 고급스런 수첩인데요
수첩 안에는 글씨가 빼곡하게 적혀있습니다. 그 내용을 볼까요.
"4월 25일부터 담배를 끊기로 맹세한다."
"빨래를 잘 안해서 ,사실은 해도 더럽다. 세탁기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보면 그저 평범한 사람의 일상적인 기록처럼 보이지만 전혀 다른 내용도 있습
니다.
"북조선의 헌법에 대해, 47년 북조선 경제계획 달성, 한반도 상황
그리고 스탈린 동지가 한국에 대한 문제를 전면 검토하고 싶어한다고 했다"
는 대목도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도 뭔가 심각한 내용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실제로 이 수첩 속엔 남북한이 분단되기 이전 ,북한의 정치 경제 상황을 알려주
는 아주 중요한 기록들이 담겨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과연 이런 기록을 남겼을까요?
이 수첩의 주인은 스티코프라는 소련군장교입니다.
(VCR 소개)------------------------------------------------
소련 연해주 군관구 정치 담당 부사령관이었던 스티코프는
스탈린의 심복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성된 미소공동위원회
소련측 대표였고
48년엔 초대 북한주재 소련대사로 임명되기도 하는데요.
소련군의 북한진주 후 북한사회를 움직였던 실질적인 실력자가
바로 이 스티코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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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한반도에서 스티코프가 무척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지만
오늘 이 시점에서 우리가 스티코프의 수첩에 주목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현대사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띄고 있는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1948년 백범 김구가 38선 이북으로 올라가 남북협상을 시도한 것입니다.
이 수첩 속에 바로 그 역사적인 사건의 실마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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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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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 달리고 16 (3-4초 후)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러시아의 고도, 상트
페테르부르그로 찾아간 것은 지난 3월이었다.
낡은 아파트 전경 4 교외에 있는 낡은 아파트에서 한 사람을 만나기
주소 3 로 했다.
스티코프 따라 들어가고 12 (3-4초 후)
취재팀을 맞이한 사람은 빅토르 스티코프, 그는
쩨렌찌히 스티코프의 아들이었다.

물건 내리는 스티코프 7 그는 취재팀에게 오랫동안 간직해 온 아버지의
유품부터 꺼내 보여주기 시작했다
자그만 상에서 줌 아웃 6 (보고)

동그란 자개상 3 좁은 거실을 채우고 있는 이 자개상은
글씨 줌 아웃 상 풀 13 48년 8월 15일, 북조선 인민위원회가 해방 3주
년을 기념하여 스티코프에게 준 선물이다.

화병 줌 아웃 15 또 북조선노동당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있는 화병
도 눈에 띄었다. 그의 유품들은 하나같이 북한
사회와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빅토르 스티코프 12 (2-3 초 후)
빅토르의 어린 시절 기억 속에서도 아버지는 북
한과는 특별한 관계가 있는 사람이었다.

(INT)-----------------------------------
빅토르 스티모프 인터뷰 아버지는 가끔 나에게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 주로 평양에
머물렀지만 아버지를 따라 서울과 제물포에도
가 본적이 있다. 아마 47년이나 48년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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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 풀 샷 8 사회주의 몰락과 함께 가세가 기울자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빅토르씨는 노동으로 생계
며느리 사진 꺼내고 9 를 꾸려나갔다고 했다. 이런 그들에게 소련군 최
고위급 장성이었던 아버지와 함께 했던 시절은
며느리 6 자랑스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INT)-----------------------------------
빅토르 스티코프 인터뷰 아버지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철저히 준
비하는 스타일이었다. 천성적으로 없는 일도
만들어 하는 분이셨고 어디서 어떤 일을 하든
건설적으로 업무에 임하였다고 기억한다. 북한
에서도 아버지는 쉬지 않고 농촌을 순시하였
고 나도 북한에 있을 때는 아버지를 따라 농
촌에 가본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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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코프 사진 6 스티코프 ,그가 북한에서 한 일은 무엇일까?
(INT)-----------------------------------
전현수 인터뷰 북한주재 소련 민정청이라는 기구가 있었습니
정부기록보존소 학예연구관 다. 실질적으로 민정을 총괄하던 그런 기구였
는데 이 민정청의 최고 지도자가 레베제프라는
사람인데 이 레베제프라는 사람이 남긴 활자화
된 회상기에 의하면 '당시 북한에서 이루어진
모든 일들이 스티코프를 경유하지 않고 이루어
지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하고 회상할 정도였
어요. 그만큼 스티코프는 소련의 대북한정책
그리고 실제 점령지역에서 대북한 정책을 실천
해 나가는데 있어서 정책을 기안하고 집행하고
그 결과에 의거해서 다시 새로운 정책들을 수
립하고 추진해나가는데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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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장 18 (3-4초 후)
스탈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스티코프는 서른
아홉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한반도 문제에 개입
하게 된다. 그는 주도면밀하고 꼼꼼한 성격으로
만년필 4 많은 일기와 메모를 남겼다고 한다.

수첩 줌인 11 그런데 취재팀은 이번 방문에서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한 권의 수첩을 발견했다

수첩 넘기고 3 수첩은 스티코프가 북한에 머물고 있던 1948년
자막 발생 8 기록이었다. 금연을 결심하는 내용처럼 무척 개
인적이고 사소한 일에서부터

수첩 넘기고 5 미코얀이라는 사람에게 인사청탁을 받았다는 비
자막발생 18 밀스런 내용까지 스티코프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꼼꼼히 기록하고 있다.
특히 북한의 정치 경제상황 등 한반도 관련내용
은 이 수첩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스티코프 사진 4 북한의 실권을 쥔 스티코프가 직접 기록했다는
개각명단 26 점에서 더욱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통일정부
를 가상한 내각명단이다.

(5-6초 보고)

하지만 이 명단이 언제 어떤 경위로 작성된 것인
지에 대한 기록은 없었다.
(INT)-----------------------------------
전현수 인터뷰 대단히 내용이 소략하고 압축적이고 또 뭐랄까
추상적인 측면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일기라고
하는 것이 대부분 보면은 집필자에게는 사태
전개가 분명하니까 압축적이고 집약적이면서
다분히 추상적인 자신만이 아는 이런 언어 그
런 컨텍스트로 구성이 돼 있는데 48년 초에
47년 말에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로 돌
아가면서 남북한에서 독자적으로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당시 소련군정 지도부의 정치적 태도
대한정책의 어떤 그런 태도를 이해하는데 일
정정도 시사점을 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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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8 비록 간략하지만 이 수첩은 그 동안 알려지지 않
았던 해방이후 북한사회를 말해주고 있었다.
김구부분 10 그런데 수첩의 기록 중에서 한 정치인의
이름이 눈길을 끌었다. 백범 김구....
노트 6 왜 스티코프의 수첩에 김구의 이름이 나온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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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2]

(스티코프 화면 Z.O)
해방이후 북한사회에서 소련의 영향력은 막대한 것이었습니다.
북한사회를 어떻게 이끌어갈 것인지 정책을 만들고 그 정책을 실행에 옮기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이 바로 스티코프입니다.

(김구 화면 보면서)
그런데 스티코프의 수첩 속에 유독 많이 등장하는 이름이 있습니다.
바로 김구입니다.
당시 38선 이남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김구는 민족지도자로서 명성이 높았지만
소련으로서는 무척 껄끄러운 정치인중의 한사람이었습니다.

(김구, 스티코프 화면 사이에서)
그런데 스티코프는 왜 백범 김구에게 주목했을까요.
48년 4월 당시 평양에서는 남북연석회의라는 이름으로
남북회담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이 회담에 바로 김구가 참석했던 것입니다.
시기적으로는 남과 북이 분단되기 이전인데요.
백범 김구가 참석한 남북연석회의는 과연 어떤 회담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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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2]

도서관 내부 들어가고 11 (4-5초 후)
48 평양에서 열린 남북회담은 공개회담이었다.
그렇다면 당시 신문에 관련기사가 실렸을 것이다
서랍 열고 2 (보고)
필름상자 틸 다운 11 (4-초 보고)
회담이 열린 시기는 48년 4월.

검색하는 여자 2 (보고)
필름 돌아가고 3 당시 신문기사를 통해 남북협상은 4월 19일에
신문 탈다운 6 작됐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환영대회 사진 13 남북회담의 장소는 38선 이북의 평양.
38선 이남에서 올라오는 대표들을 위해 대대적
인 환영대회가 개최되기도 했다.
모란봉극장 사진 4 19일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시작된 남북회담은
김일성 김두봉 사진 4 4월 30일까지 계속됐다.

신문 5 (보고)
박헌영 3 이 회담에는 남로당의 박헌영,
마이크 팬 김구 16 (2-3 초 후 )
그리고 한국독립당의 김구 등 38선 이남지역
에서 모두 365명이 참석했다 .
(INT)-----------------------------------
김광운 인터뷰 한독당에서 김구, 조소앙 , 엄항섭, 조완구 등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이 있겠구요. 민족자주연맹에 김규식, 김붕준
선생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민족 독립당에 홍
명희 전봉하 등이 있습니다. 다음에 남한에 극
좌적인 세력으로 남로당의 박헌영과 허헌이 참
석을 했습니다. 이외에도 인민공화당 신진당
사회민주당 사회단체로는 전평 여맹 등등이 참
가했습니다 따라서 참가한 정당과 단체의 대표
들의 면면을 살펴볼 때 이 과거 이들의 경력에
서 알 수 있듯이 극좌부터 중도우파까지 망라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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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첩 2 스티코프의 수첩엔 이런 메모가 있다.
자막발생 35 이것은 48년 3월 김일성이 작성한 남북회의 초
청자 명단이다
(보고)
스티코프는 당시 북조선 정치인들이 스탈린에게
대규모 남북회담을 열 것을 요청했다고 적고 있
다.

신문 4 그리고 48년 3월 25일
글 틸다운 19 (3-4초 후)
북측은 남북한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를 4월 14일 평양에서 열자고 공식적으로 제의
했다. 남북회담이 세상에 알려진 것도 이때부터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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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사업회 전경 4 (보고)
피디 걸어가고 7 당시 북측의 제안에 대한 김구의 반응을 알기 위
해 백범 기념사업회를 찾았다.
전시자료 6 (3-4 초 후) 주로 백범에 대한 자료수집과 연구
사진 14 활동을 벌이고 있는 이곳엔 백범일지를 비롯해
수많은 어록과 관련사진 등 백범의 유품이 소장
되어 있다.

선우진 보이고 6 당시 백범의 수행비서였던 선우 진 선생, 그는
자료 넘기고 7 취재팀에게 48년 남북회담과 관련해 중요한
문서를 보여주었다.
("여기 이 이건데요" )

편지 28 (4-5초 보고)
그것은 백범 김구가 인형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
였다. 인형은 임시정부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김두봉이라는 사람이었는데 당시 김두봉은 38선
이북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은 단
순한 안부편지가 아니었다.

(INT)-----------------------------------
선우진 인터뷰 48년 2월 16일 날짜예요. 그때 처음으로 이북
에 있는 김두봉 선생한테 편지를 하면서 우리
가 어떻게 하든지 통합을 이룩해야 되지 않느
냐 그러시면서 편지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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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넘기고 8 북측이 연석회의를 제안하기 한달 보름 전.
김구는 김두봉에게 띄운 편지를 통해
김구 도장 8 이미 남북 지도자 회담을 제의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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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3]

(MC 1S, 뒤에 편지 걸려있고)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흔히 남북연석회의라고 부릅니다만
북쪽은 이 남북연석회의를 공개적으로 제안하며 초청자 명단까지 보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 회의가 북쪽이 먼저 제안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 남북회담을 먼저 제안한 사람은 김구와 김규식이었습니다.

(MC 읽을 대목으로 움직이고)
그 회담을 제안한 서신이 바로 여기에 있는데요.
김구는 이렇게 편지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仁兄이여 ,이리해서야 되겠니있가.
남이 일시적으로 분할해 논 조국을 우리가 우리의 관념이라 행동으로써
영원히 분할해 놓을 필요야 있겠습니가.
仁兄이여
우리가 우리의 몸을 반쪽에 낼지언정 허리가 끊어진 조국이야 엇지 참아
더 보겠나있가. 가련한 동포들의 유리개걸하는 모습을 엇지 참아 더 보겠나있가.
(MC 1S)
당시 김구의 심정이 얼마나 절실했는지 그대로 느껴지는 듯한데요.
김구는 이렇게 절실한 심정으로 남북지도자 회담을 제안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김구가 편지를 보냈던 이 인형이라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리고 김구는 왜 남북지도자 회담을 제안했을까요?

남북회담을 제안해야 했던 그 시기는 우리 역사상 아주 중대한 시점이었습니다.
당시 한반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그 시간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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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3]

흙탕물 6 (보고)
사람들 보이고 6 일제시대, 김구는 상해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지도 14 전개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탄압이 점점 심해지
자 임시정부는 독립운동기지를 중경으로 옮겨야
했다.

임정청사 전경 4 (보고)
글씨에서 계단으로 18 새로운 곳에 터전을 잡은 임시정부에서는 김구의
주도로 뜻깊은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문안으로 들어가고 13 그것은 공동의 적 즉 일본군을 물리치기 위해 독
립운동 세력을 통합하는 좌우합작운동이었다.

탁자위의 잔 18 일단 임시정부에서부터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
동세력이 가담해 민족주의 계열과 함께 연합전선
을 형성했다. 김구의 노력이 결실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기념사진 5 42년 10월 25일, 새로 구성된 임시정부 의정원
김원봉 팬 임정요인들 18 엔 민족혁명당의 김원봉을 포함해 좌파계열이 포
함 돼 있었다. 임시정부 20여 년만에 처음으로
이룩한 좌우 대통합이었다.

길 4 김구의 좌우합작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지도 CG 9 김구는 다시 연안에서 활동중인 또 다른 좌파의
독립운동세력과 합작을 추진했다.
김두봉 14 당시 그곳엔 화북조선독립동맹의 주석 김두봉이
있었다. 김두봉은 연안으로 오기 전 상해에서
김구와 동고동락했던 사이였다.

최준례 묻엄 비석사진 5 1924년 백범의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묘비명 17 김두봉은 그 묘비명을 직접 써주는데
(보고)
자음으로 숫자를 표시한 이 독특한 묘비명은
한글학자이기도 한 김두봉의 면모를 보여준다.

김두봉 6 그런 김두봉에게 김구는 연합전선을 제의한 것이

(INT)-----------------------------------
조동걸 인터뷰 그리고 42년에 임시정부에 통합의회를 구성할
국민대 명예교수 그때 김원봉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 제1지대
로 오죠 또 44년에 연립내각을 구성할 때나
그 전부 통일전선 혹은 통합운동의 일환으로서
이루어진 거거든요. 그러니까 특히 44년 3월
에 연안의 김두봉과 통합을 추진해 가지고서
김두봉이 그때 동의를 했습니다. 그래서 45년
에는 장건상이가 임시정부 대표로 연안에 파견
돼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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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건상 7 좌우합작을 위해 연안에 파견된 장건상은
책 디졸브 5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회고했다.

자막발생 13 "김두봉을 만나 좌우통일전선 결성을 제의했다
김두봉은 찬성하고 본인이 직접 중경으로 가겠
다고 했다.이번에야말로 좌우합작이 성공하는
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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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들 23 (4-5초 후)
해방이 찾아왔다. 서로 다른 이념을 가진 독립운
동 세력이 하나로 힘을 모았지만 그 힘을 발휘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김구는 갑작스런 해방
을 두고두고 안타까워했다.
노인과 태극기 12 (4-5초 후)
해방의 감격에 젖어있는 동안 한반도의 운명은
또 다른 비극 속으로 향해가고 있었다.

38선 14 한반도는 세계질서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미국
과 소련에 의해 38선으로 분할, 점령됐다.
(3-4초 보고)


경비서는 소련군 12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에서 자국의 이익을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점령지에서 각각 자국에
유리한 정부를 세우기 위해 고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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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 9 (2-3 초후)
김일성 초상화찬탁시위 9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담의 결정이
신탁통치로 알려지면서 한반도는 논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반탁시위 5 38선 이남에서는 거센 반탁운동이 일었다.
연설하는 김구 8 그 선두에 선 이가 백범 김구였다. 그는 반탁
운동을 제2의 독립운동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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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들어오고 3 사실 모스크바 결정은 신탁통치 이전에 미소공동
하지 6 위원회를 구성하여 통일정부를 구성한다는 것이
스티코프 었다.
태극기 5 하지만 미소는 결국 타협에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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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한국임시위원단 16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엔 한국임시위원
단이 서울에 도착했다. 하지만 38선 이북지역은
이들의 방문을 거부했다. 유엔은 감시가 가능한
차 지나가고 3 지역에서의 총선거를 결의했는데 이것은 남한만
벽보 붙이고 6 의 단독선거를 의미했다.
5 10총선 포스터 5 총선날짜는 48년 5월 10일로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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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들어가고 2 (보고)
김일성 보이고 6 북한도 48년 초 헌법 기초작업에 들어갔다.
군중 팬 10 사회전반에 걸친 급속한 사회개혁이 성공하면서
북한은 이미 남한과는 다른 사회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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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 이남 표지판 3 남과 북은 서로 다른 길로 향해 가고 있었다
38선 이북 표지판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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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13 하지만 김구는 단독정부수립을 원하지 않았다.
48년 초부터 그는 본격적인 단정반대 운동을 벌
여 나갔다.

글 올라가고 44 48년 2월 김구는 삼천만 동포를 향해 이렇게
절규했다.

" 한국사람이 있고야 민주주의도 있고 공산주
의도 있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안위를 위
하여 단정수립에는 참여하지 않겠다."


김구 3
(INT)-----------------------------------
김학준 인터뷰 1945년 8월 5일에 우리겨레가 일본 제국주의
인천대 총장 로부터 해방되었던 당시 우리 민족지도자들은
그리고 우리민중은 거의 모두가 남북한의 분
단이 오래가리라고 내다보지 못했습니다 .현실
적으로는 연합국에 의하여 남북으로 분할 점
령되었지만 그러나 종국적으로는 반드시 통일
정부가 서리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가지고 있
었던 것이죠. 그러했기 때문에 이념적인 투쟁
도 벌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1938년 초에
들어서면 통일정부가 서리라고 하는 것만이
무참하게도 깨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이제는
이념적인 대결보다도 통일정부의 수립이라는
과제가 더욱 중요하다는 판단에 이르게 되었
고 그러한 판단이 백범 우사 그리고 그 밖의
지도자들로 하여금 북행을 결심하도록 만들었
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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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 지역 5 남북한 단정을 막고 통일정부를 이루기 위해
38선 표지판 5 김구는 남북회담에 기대를 걸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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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4]

해방이 되면 통일정부가 들어설 것이라는 것은 우리민족에겐 너무도 당연한
바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냉전이라는 세계정세와 좌우익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한반도
의 상황은 그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조국이 두 조각으로
나뉘어질 위기에 처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김구는 이념의 차이를 넘어 통일을 이루어보자고
남북 지도자 회담을 제의했던 것입니다.

사실 김구가 좌우합작을 시도했던 것은 비단 이때 뿐만은 아니었습니다
백범일지에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글씨 나타나고)
"동삼성 방면에 우리 독립군은 벌써 자취를 감추었을 터이나 30여 년 된
오늘까지 김일성 등 무장부대가 산악지대에 엄존해 있다"

(글자 대신 김일성 스크린 생기고)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 김구는 이미 김일성의 존재를 알고 있었습니다.
태평양전쟁 이후 김구는 중국각지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세력을 통일하기 위한 좌우합
작을 시도했는데 그 일환으로 김구는 만주에서 무장항일투쟁을 벌이고 있던 김일성 부
대와도
연합을 추진하려 했던 것입니다.
(김일성과 김구 스크린 사이에서)
자. 분단이 눈앞에 다가와 있는 상황에서 김구가 제안했던 남북회담,
과연 이 회담은 순조롭게 성사될 수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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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4]

스티코프 수첩 12 (2-3초 후)
스티코프 수첩에는 남북회담이 시작되기 이전,
에 있었던 무척 흥미로운 사실이 기록돼 있다.

자막 34 "어제 두 명의 연락원이 날 찾아왔다
자신들을 김구와 김규식이 보낸 사람들이라고
소개하면서 김구와 김규식의 도착이 지연될 거
라며 그런 내용을 라디오를 통해 발표해 달라
고 부탁했다 "

스티코프를 찾아온 두 명의 연락원 그들은 누구
일까?

(INT)-----------------------------------
김광운 인터뷰 조국의 위기상황에는 공감을 하지만 그것을 어
떻게 타결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준
비과정이 없었던 것이죠. 여기서 김구와 김규
식 선생은 직접 자신들이 가장 믿는 사람을 특
사로 파견해서 사전에 몇 가지 문제들을 해결
한 후에 그것을 조직적으로 준비한 후 북한에
들어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김구선생은
자신이 가장 믿었던 측근이었던 안중근 선생의
사촌동생이었던 안경근을 북으로 보내기로 합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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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트래킹 7 (보고)
수소문 끝에 경기도 양주에 살고 있는 안경근의
집 전경 4 후손을 찾을 수 있었다.
사진보는 안+피디 4 취재팀이 만난 사람은 안경근의 아들 안철생
옹이 였다.
안철생 4
안경근 사진 6 아버지 안경근은 지난 78년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안중근 줌 아웃 11 집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안중근
의사의 사진이였다. 안경근은 안중근의 사촌
동생이다

사진 설명하는 아들 6 집안 대대로 독립운동을 벌였다는 안철생옹의 설
흑백사진 9 명을 통해 역사 속에 묻혀버린 안경근의 행적을
알 수 있었다.
꼬마 안경근 팬 6 일제시대 안경근도 중국에서 독립운동가의 길을
걷는데 그 과정에서 북한의 실력자인 최용건
노인 안경근 7 김두봉과 각별한 인연을 맺게 된다.
(INT)-----------------------------------
안철생 인터뷰 최용건이는 아버지하고 군관학교 동기동창이
고 김두봉씨는 2년인가 선배고 그러니까 이북
에 가게되면 김두봉이 군부의 총수 최용건이
하고 안면이 있고 같은 동기들 끼리니까 제일
적임자라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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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근 젊은 시절 사진 3 그가 밀사로 선택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사진 틸업 권태양 11 안경근과 함께 38선 이북에 파견된 또 한사람의
밀사는 김규식의 비서, 권태양이었다.

스티코프 수첩 2 그들이 북측에 제시했던 5개항의 조건이
자막발생 38 스티코프의 수첩에 나와있다.
첫째 어떠한 형태의 독재도 반대하는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할 것, 둘째, 독점자본주의를 배제
하는 경제체제 건설 할 것. 셋째, 민족의 총선
거를 통해 전민족적 정부 선출할 것. 넷째, 국
가가 어떤 어려움에 처하더라도 무력에 호소하
지 말 것 다섯째, 외국군 철수에 관한 문제는
소련 미국 측과 협의하에 할 것이 그 내용이
다.
북측은 이 제안에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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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베제프 사진 7 남북회담에 대한 소련의 입장은
어떠했을까? 당시 소련 민정청 책임자,
매일신문사 자료실 팬 13 레베제프의 비망록이 소장돼 있는 대구매일 신문
사를 찾았다.
(보고)

레베제프 비망록 10 레베제프의 비망록은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전
해준다.
자막 10 3월 10일 소련은 김구를 신문사설에서 통일을
방해한 사람으로 쓰라고 지시하고 있다

자막 20 그런데 4월8일 ,스티코프는 김구를 대화에 꼭
참석시킬 것과 남북연석회의의 합의사항으로 유
엔 한국임시위원단 추방, 군대 철수, 총선 실시
를 지시하고 있다. 소련이 입장을 바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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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 오고 5 (보고)
벽보 보는 사람들 5 38선 이남지역에서도 남북연석회의에 대한 찬반
연석회의 벽보 4 양론이 분분했다.
하지 11 특히 당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미군
정이 어떠한 입장을 나타낼지는 커다란 관심사였
다.
(INT)----------------------------------
김학준 인터뷰 미군정도 단독정부 수립쪽으로 방향을 틀게 되
었고 따라서 백범을 중심으로 하는 남북협상을
통한 통일정부의 수립 여기에 쐐기를 박게 됩
니다. 그래서 백범이 북행을 결정하게 되었을
때 미군정은 아주 냉소적인 성명을 발표합니
다. 정신병자가 아니라면 지금 남북협상을 통
하여 통일정부를 세우겠다는 발상이 얼마나 우
스꽝스러운 것인가 누구나 깨달을 수 있을 것
이다 그러한 취지로 담화를 발표할 정도였으니
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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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감 팬 10 (4-5 초후)
지금은 병원의 일부가 되어버렸지만 경교장은
경교장 7 김구가 총탄에 쓰러지기까지 숙소와 집무실로
사용했던 곳이다.

거리 틸업 건물 12 50여 년 전,
김구는 이곳을 떠나 북행길에 올랐다.
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출발이었다

몰려있는 사람들 6 1948년 4월 19일, 4-500명의 학생과 시민들
사람들 7 이 북행길을 막기 위해 경교장에 몰려들었다. 김
연설하는 김구 2 구는 그들을 설득해 보려 했다.
(INT)-----------------------------------
선우진 인터뷰 우리가 독립 운동할 때 전체 한반도 전체를 독
립시키자고 한 거지 어딜 일방적으로 한곳에
만 단독정부를 세우려고 한 것은 아니지 않느
냐 그러니까 이번에 내가 가는 길은 이 나라
의 통일을 위해서 마지막 독립운동을 하러 가
는 것이니까 너희들이 내 길을 열어달라 그래
도 학생들이 무관하고 드러누워 가지고선 안
일어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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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뒷편 12 출발이 계속 지연됐지만 김구는 포기하지 않았다
김구는 탈출을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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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진 인터뷰 그때 여기 정면으로는 도저히 나갈 수가 없고
요. 그래서 김구선생님께서 어떤 방법이 없겠
느냐. 그때는 보일러를 기름으로 떼는 것이 아
니고 석탄으로 땠습니다. 바로 저 뒤에서 이만
한 구멍을 내서 뚜껑을 덮었지만 그것을 열고
서 석탄을 거기다 부으면 밑으로 내려오지 않
습니까 그 문으로 나가서 뒤로 가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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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 트래킹 4 김구 일행은 임진강으로 향했다
마을길 트래킹 6 지금은 민통선 지역으로 출입이 통제되고 있지
임진강 팬 9 만 그때까지만 해도 비교적 왕래가 자유로웠다고
한다. 김구일행은 임진강을 건너는 유일한 통로
나룻배 4 임진나루에 도착했다.
(INT)-----------------------------------
선우진 인터뷰 일단 승용차나 사람은 여기서 나룻배를 타고서
건너곤 했습니다. 그때 백범 선생도 여기에 오
셔 가지고서 차를 나루에 싣고서 저희들도 차
안에 타고 앉아있었죠. 저쪽을 건너가서 저쪽
에서 바로 개성으로 향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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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룻배 틸업 산 7 (2-3초 후)
그렇게 나룻배에 몸을 싣고 김구는 38선으로 향
했다
강물 벗겨지고 4 (보고)
사진 풀 4 38선에 도착한 김구 일행은 단 3사람.
선우진 팬 24 (3-4초 후)
수행비서 선우진씨와 김구 그리고 아들 김신씨였
다. 급하게 경교장을 빠져나오느라 일행은 손수
건 하나 변변히 챙기지 못했다
백범 줌인 7 그리고 김구는 38선을 넘어 북으로 갔다

38선 표지판 줌 아웃 17 (4-5 초 후)
저녁 6시,
김구가 38선 너머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본 사
사람은 단 한 명의 기자였다. 사람들은 신문에
표지판 지나 10 실린 특종기사를 통해 김구의 북행을 알게 됐다
그날 김구의 북행을 기자는 이렇게 쓰고 있다

길 달리고 (자막) 22 "고요한 38선에 스미는 듯 어둠의 장막이 내려
왔다. 이북 마을에 등불이 반짝인다.
달이 뜨고 하늘에 별도 반짝인다.
기어코 이루어질지어다. 남북회담 성공을 상징
하는 희망의 별인가. 김구씨가 떠난 하늘 아래
로 별은 반짝인다."

길 6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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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5]

이렇게 해서 김구는 드디어 38선을 넘어, 북으로 갔습니다.
참으로 힘겨운 북행 길이었습니다.
시위대를 피해 몰래 경교장을 빠져나가야 했을 만큼 남북연석회담에 참여해야겠다는
김구의 의지는 확고했던 것입니다.

(레베데프, 스티코프, 김구, 김일성 스크린 뒤에 있고)
불투명했던 김구의 입북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남북회담은 본격적으로 진행됩니
다. 남북연석회의는 그야말로 서로 다른 입장과 이념을 가진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인
회담이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김구와 김일성 등 남북의 정치지도자들의 회의였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 소련도 이 회의에 개입하고 있었습니다.
과연 이 남북연석회의에선 어떤 얘기들이 오고 갔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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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5]

을밀대 4 (보고)
여자들 3 김구가 평양에 도착하기 전
부감 팬 모란봉 극장 13 이미 평양 모란봉극장에서는 남북회의가 진행
되고 있었다

김일성 올라오고 5 4월 19일부터 시작된 남북연석회의는 형식적
참석자 서있고 10 으로는 남북대표 전체가 참여하는 회담이었지
만,실제 참석자는 대부분 좌익계열이었다.
태극기 걸려있는 외경 4 (보고)

김구 내리고 11 (2-3 초 후)
김구가 평양에 도착한 것은 20일 저녁.
김구는 도착하자마자 김일성 김두봉을 만나는데
김일성과 사람들 4 이 자리에서 작은 소란이 일어난다.

스티코프 수첩 틸 다운 6 스티코프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자막발생 24 김구가 나에게 이 자리에서 나가라고 호통을
쳤다. 그래서 나는 할 수 없이 뒷문으로 빠져
나왔다

민족문제에 외국인이 간섭하는 것을 김구
는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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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8 김구가 북행을 결행한 후 남측대표들도 속속들이
38선을 넘어왔다.
김규식 10 마지막으로 회담에 참석한 이는 김규식. 줄곧
통일 운동과 좌우합작을 추진해 온 인물이었다

김일성 김구 가고 3 연석회의 3일째
박수치는 사람들 6 회의장에 참석한 김구는 간단한 축사를 했다

(현장음 듣고)----------------------------
연설하는 김구 47 친애하는 의장단과 각 정당 단체 대표 여러분
고국 분열의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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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치는 사람들 6 하지만 김구는 전체회의에 큰 기대를 걸지 않았
기록하는 사람 3 다, 그와 김규식은 지도자 회담을 요청했다

노동신문 줌인 3 23일 막을 내린 연석회의에서는 다음과 같은 결
자막 15 정서가 채택된다.
(3-4초 후)
그런데 이 결정서는 남한의 우익을 매국노라
고 표현하고 있었다.

(INT)-----------------------------------
신창균 인터뷰 호텔로 와 가지고 김구선생 만나니까 이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내가 자결할 수
있는 문제다. 이북에 와서 이남의 민족진영을
욕을 했다는 것은 얘기가 안된다. 그 욕했다는
것은 이승만 김성수 도당들이 책동을 해 가지
고 미군과 결탁을 해 가지고 단독정부 수립한
다는 것. 그래서 회의가 끝난 후에 김두봉씨하
고 김일성씨하고 접촉을 했습니다. 나는 주영
하한테 접촉을 하고 또 엄항섭씨는 김두봉씨
한테 접촉을 하고 그래서 4김 회의를 열어서
그것을 삭제하기로 그렇게 결정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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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5 연석회의가 끝난 후 남북지도자 15인 협의회와
김일성 4 함께 두 차례의 4김 회담이 개최된다.
김구,김규식 16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이 참석한 4김회담은
남북에서 각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정
치 지도자들이 만난 가장 실질적인 회담이었다.
(INT)-----------------------------------
도진순 인터뷰 실제 회의자체에 형식적인 면에서 보면은 대표
창원대 사학과 자 연석회의가 가장 비중 있지만 실질적인 합
작의 의미 ,남북의 허심탄회한 합작의 의미에
서 보면은 4김 회담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
서 결국은 4김 회담에서 중요한 문제를 다 결
정을 하고 이것을 15인 지도자 회의로 확대해
서 발표한 것이 4월 31 중요한 4개항 공동성
명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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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서 3 4김 회담에서는 이루어진 합의는
자막발생 28 첫째,미소양군 철수
둘째,양군 철수 후 통일에 반대되는 어떠한 무질
서의 발생도 허용하지 않을 것.
셋째.전국 총선에 의한 통 일국가 수립.
넷째 남한의 단선단정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8 이 성명서가 지켜진다면 단정수립은 막을 수 있
을 것이었다
(INT)-----------------------------------
도진순 인터뷰 남북연석회의 48년 남북연석회의의 최대의의
라고 한다면 바로 4개항 4월 31일 4개항 공
동 성명서이고 그 내용은 첫 번째가 자주 두
번째가 평화 세 번째 조항이 통일 네 번째 조
항이 분단반대 이렇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통일강령으로 이야기하는 7.4남북공동성
명서의 기본정신의 씨앗이 바로 48년 4월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