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최초공개 - 탐라 순력도, 제주는 군사요새였다
최초공개 - 탐라 순력도, 제주는 군사요새였다 |
제주도는 오늘날 국내 최대의 관광지로 각광 받고 있지만 역사 속에서는 별로 주목 받지 못했다. 그런데 조선시대 제주를 그린 화첩 한 권이 있다. 바로 탐라 순력도 이다. 탐라 순력도에는 귤나무가 무성하고, 수십 마리의 말이 등장한다. 3백년 전 제주도의 생생한 역사가 41장의 그림 속에 담겨 있는 것이다. |
1. 탐라 순력도의 보존처리 |
탐라 순력도는 현재 문화재 보존 연구소에서 보존처리 중이다. 먼저 그림에 전분풀을 덧칠해서 원래의 물감이 잘 접착되도록 만든다. 그런 다음 그림 뒤에 붙은 낡은 종이를 여과수를 사용해서 조심스럽게 벗겨낸다. 얼룩을 말끔히 제거하기 위해서이다. 구겨지고 얼룩져있던 그림이 보존처리를 통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다. |
2. 제주목사 이형상 |
탐라 순력도를 통해서 제주의 특징뿐만 아니라 제주를 중심으로 한 주변국과의 관계를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다. 이 귀중한 사료를 남긴 인물은 바로 당시 제주목사였던 이형상. 유학자이며 관리였던 이형상은 ‘호연한 마음으로 거문고를 타며 책을 가까이하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의 발자취를 따라 경북 영천에 있는 호연정으로 찾아갔다. |
3. 제주의 군사상황 |
순력도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제주의 군사상황을 점검하는 그림이다. 12장의 그림이 모두 그런 그림들인데, 당시 제주는 군사적으로 어떤 땅이었을까. 이 12장의 그림에 주목해본다. |
4. 제주의 군사훈련 |
왜구의 잦은 약탈과 이양선의 출몰로 제주는 해안 방어가 절실했다. 그래서 그에 따른 군사훈련도 철저하게 이루어졌다. 순력도는 활쏘기, 활터, 사냥 등의 장면과 배경을 생동감 넘치게 그리고 있어 당시 군사훈련이 어떤 식으로 행해졌는지 한 눈에 볼 수 있다. |
5. 군마와 종마로서의 제주말 |
1663년 조선 현종때 만들어진 목장지도를 보면 전국 말의 반 이상을 제주 말이 차지한다. 제주는 군마의 최대 생산지였던 것이다. 지금도 제주에는 말 목장과 말이 많다. 300년 전 제주의 관영목장과 목마 기술, 말 관리와 한양 운송 등 말을 둘러싼 제주의 모습을 들여다본다. 제주에서는 당시 말을 얼마나 길렀고, 조선사회에서 그 위치는 어느 정도였을까. |
6. 제주의 진상품, 귤 |
제주의 진상품 중 귀하게 여기던 것이 귤이었다. 그림에는 진상을 위해 과원에서 귤을 수확해 선별하는 작업이 꼼꼼하게 묘사되어 있다. 주로 아낙네들이 귤을 골라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당시 제주 귤 농장과 품종, 저장방법, 진상된 귤의 용도 등 제주 귤의 모든 것이 탐라 순력도에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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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는 조선 숙종때인 1702년에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 1653∼1733)이 제주목사 겸 병마수군절제사에 부임하여 제주도내 각 고을을 순력하면서 당시 거행했던 여러 행사장면과 자연, 역사, 산물, 풍속 등을 제주목 소속 화공(畵工) 김남길(金南吉)로 하여금 40폭의 채색그림으로 그리게 한 화첩이다.
탐라순력도는 그 크기가 세로 55센티미터, 가로 35센티미터의 장지(壯紙) 위에 그린 그림이다. 분량은 모두 43면인데, 제주도 지도인 한라장촉 1면과 1702년의 행사기록도 39면, 그리고 호연금서 1면과 이형상이 적은 화기(畵記) 2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구성 형식은 제일 마지막인 호연금서를 제외하고는 화면을 붉은 선으로 3등분하였다. 제일 윗부분에는 해서체로 4자씩으로 된 제목을 써넣었고, 중단에는 김남길의 그림이 있으며, 밑부분에는 행사참가 인원을 기록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탐라순력도 가운데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은 1702년 10월 29일부터 11월 19일까지 21일간에 걸쳐 실시한 제주도 순력 장면이다. 순력이란 매년 봄, 가을로 지방관이 관할 방어지와 군민풍속을 친히 살피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 탐라순력도에는 모두 22장면이 그려져 있다. 순력지는 제주목을 출발하여 화북, 조천, 별방, 수산, 정의, 서귀, 대정, 모슬, 차귀, 명월, 애월을 돌아 귀환한 후, 네 차례의 행사장면을 포함하고 있다.
또한 탐라순력도에는 제주, 정의, 대정 등지에서 양노회(養老會) 광경을 그린 것이 3장면이 있고, 명승지를 그린 것이 5장면, 감귤 봉진과 과거 등을 그린 9장면이 추가되어 있다.
서귀포지역은 모두 5장면이 있다.
정방탐승(正方探勝) - 11월 5일, 정방폭포를 탐승함.
천연사후(天淵射帿) - 11월 6일, 천지연폭포에서 활쏘기 시합.
서귀조점(西歸操點) - 11월 5일, 서귀진에서 군사훈련과 군기, 우마를 점검함.
현폭사후(懸瀑射帿) - 11월 6일, 중문의 천제연폭포에서 활쏘기 시합.
고원조점(羔園訪古) - 11월 6일, 고원이라는 과수원에서 풍악을 즐김.
탐라순력도는 여러가지 측면에서 독특한 가치를 갖는 작품이다.
먼저, 회화사적인 측면에서 접근하면, 탐라순력도는 의궤반차도식(儀軌班次圖式)의 기록화로 분류된다. 우리나라 회화사상 많은 기록화 가운데에서 탐라순력도만큼 생생하고 자세하고 정밀한 기록화는 보기 드물 정도이다. 저자, 화공, 제작동기, 연대 또한 확실하다. 기록화로서 충실성을 높이 평가할만한 작품이다. 그림으로 설명이 부족한 부분은 글로써 표현하고, 글로서 부족한 부분은 그림으로 표현하여 18세기 초 제주의 실상과 문물을 명쾌하게 기록해냈다. 그리고 탐라순력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실경을 정확하게 사생하고자 하는 화가의 노력이 절실함을 읽을 수 있다.
둘째, 기록화로서 탐라순력도는 민족지(民族誌)의 성격을 갖는다. 조선 숙종때 제주의 지리, 풍속, 성곽, 군사병력, 조점제도, 공물세제, 지방관 행차, 경제생산, 비축미곡, 건축배치, 연례행사, 군기집물, 목장규모, 병적현황, 풍류연악, 감귤생산 등등의 모습이 생생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 지역의 민족지를 글과 그림으로 체계 있게 정리한 기록은 없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더욱 높게 평가할 수 있다. 탐라순력도가 민족지적인 기록이 풍부하기 때문에 오늘날 다양한 분야에 귀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우선 도첩의 배접지로 사용한 당시 제주목의 병적부에는 병정들의 자세한 기록들이 나와 있어서 조선후기 지방군사제도 연구에 기여한 바가 클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 마정(馬政)에 대한 정확한 내용과 기록 또한 그 방면 연구에 보익될 바가 막대할 것이며, 감귤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당시의 제주도의 건물과 고적이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에 그 복원과 재현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형상의 탐라순력도는 남환박물(南宦博物)과 함께 제주의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탐라순력도는 국가지정 보물 제652-6호(1979.2.8)로 보호되고 있으며, 현재 제주시가 관리하고 있다.
역사스페셜 - 탐라순력도 2000.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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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 서 TIME V I D E O A U D I 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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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백년전에 그려진 화첩 한 권이 되살아나고 있다. 그림은 모두 41장, 보존처리를 거치
면서 하나씩 제모습이 드러나고 있다. 그림 속엔 귤나무가 무성하고, 수십마리의 말이
등장하기도한다. 그것은 바로 3백년전의 제주도,그 생생한 역사를 담고 있었다.
SUB-TITLE 최초공개, 탐라순력도 제주는 군사요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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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1. 오프닝
제가 서있는 이곳은 제주도입니다.제주는 오늘날 국내 최대의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지만,
역사 속에선 어떤 땅이었는지,그에 대해선 별로 주목받지 못했습니다.그런데 조선시대
제주를 그린 화첩 한권이 있습니다.바로 이 탐라순력도입니다.탐라는 잘 아시다시피
제주의 옛이름입니다. 그리고 순력이란 봄 가을로 지방관이 직접 군민의 풍속과 방어
실태를 살피는 것을 말합니다. 일종의 지방순시 같은 것이죠. 이 화첩 맨 뒤엔 날짜가
기록돼 있습니다. 임오년 10월 그믐부터 한달동안 순력을 했다고 돼있군요. 여기서
임오년은 숙종 28년인 1702년에 해당합니다.당시 제주목사가 제주 전 지역을 순력했고,
그것을 이렇게 그림으로 남긴 것인데, 무려 41장이나 됩니다. 그림을 보면, 맨 위에
어디서 무엇을 했다는 것이 제목으로 쓰여있고, 그 아래엔 이곳에서 했던 일이 한 장의
그림 속에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맨 밑엔 관련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조선시대 순력에
대해선 기록이 남아있지만, 이렇게 그림으로 발견된건 지금까지 이 탐라순력도 단 하나
뿐입니다. 이것을 통해 조선시대 순력의 내용과 함께 3백년전 제주는 어떤 곳이었나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귀중한 사료이기 때문에 보물로 지정되기도 했죠. 이 탐라
순력도는 현재 보존처리 중인데, 그 현장으로 가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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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1
서울 시내에 있는 문화재 보존 연구소. 그동안 많이 손상된 탐라순력도를 제주시청의
의뢰에 따라 보존 처리한 건 올해 7월부터였다. 이 일은 용인대 박지선 교수가 맡았다...
작업은 먼저 그림에 전분풀을 덧칠하는 것이다. 원래의 물감이 잘 접착되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그림뒤에 붙은 낡은 종이를 여과수를 사용해서 조심스럽게
벗겨낸다. 얼룩을 말끔히 제거하기 위해서다. 그림은 이렇듯 구겨지고, 얼룩이 졌었다.
그것이 보존처리를 통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다. 순력도엔 먼저 제주의 특징이
눈에 띈다. 일출로 유명한 성산봉을 비롯, 제주의 명승지가 한 폭의 산수화처럼 펼쳐져
있다.양로잔치를 묘사한 그림도 있다.모두 3군데서 치러졌는데,이곳은 지금의 제주시인
제주목 관아다. 춤을 추고, 음악이 연주되고, 주안상도 마련돼 있다.그림 아래쪽 기록엔
참석자들의 나이가 적혀있다.당시 제주엔 장수한 사람이 비교적 많은 편이다. 제주목
관아에서 말을 점검하고 있다. 귤을 선별하기도 한다. 조정에 진상하기 위해서다.이렇듯
진상과 관련된 그림은 5장이 있다.진상은 목사의 중요한 일이었다.순력도엔 제주의
성(城)을 그린 그림이 가장 많다.모두 12장이다. 목사가 성의 전반적인 시설과 군대를
점검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것이다. 순력도 맨 뒤엔 그림을 그린 사람의 이름이
있다. 화공 김남길이다. 제주 관아에 소속된 화공으로 추정될 뿐, 밝혀진 바는 없다.
그가 그린 순력도엔 어떤 특징이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그림엔 다양한 표현이 보인다.
수평선이 아닌 바다 속에서 해가 떠오르는 표현은 재미있다. 풍경엔 짜임새가 있고,
사람 하나, 화살 하나까지 치밀하게 그려 기록화의 맛을 살렸다. 이렇듯 탐라순력도엔
3백년전 제주의 모습과 그곳에서 벌어졌던 일, 그 다양한 내용이 상세히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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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2.
이것은 탐라순력도 첫 장에 있는 제주지도입니다. 한라장촉이라고 하는 것인데, 위는
남쪽 아래가 북쪽입니다.여기 가운데 한라산이 있고, 그 주위로 지형 묘사가 아주 세밀
하게 돼있습니다. 또한 당시 제주엔 12개의 진성이 있었는데,그 모두를 붉은 색으로 눈에
띄게 표시를 했습니다.그리고 제주도 주위엔 24방위를 배치하고,주변 지역을 그려 넣고,
거리도 따로 기록을 해두었습니다. 이쪽엔 일본이 있는데, 거리는 2천여리라고 합니다.
이곳은 지금의 오끼나와인 유구국, 여기는 베트남인 안남, 그리고 중국의 영파와 소주,
항주 그밖에 중국의 다른 도시들도 눈에 띕니다. 이 지도는 이처럼 제주를 중심으로 한
주변국과의 관계를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다는 특징을 지녔습니다. 또한 현존하는 제주도
지도중 가장 오래된 것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귀중한 사료인 탐라순력도를 남긴 인물은
누구였을까요?바로 이 사람, 당시 제주목사였던 이형상입니다.이 그림은 그가 79세때
그린 자화상으로 추정됩니다. 그는 유학자이면서 관리였습니다. 순력도의 이 그림은
보길도에서 본 제주의 북쪽 전경인데,제목은 호연금서입니다. 호연한 마음으로 거문고를
타며 책을 가까이한다는 뜻이죠.이형상이 바로 이런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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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2
경북 영천에 있는 호연정.이형상이 말년을 보내며,책을 쓰고,후학을 양성했던 곳이다.
호연정 옆엔 그의 유품을 모아놓은 유고각이 있다. 이곳은 대대로 이형상의 후손이
관리해오고 있다. 탐라순력도도 거의 3백년간 이곳에 보관돼 있었다.그러다가 지난해
말 제주시청이 건네 받았다.이형상의 유품은 후손들에 의해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소중히
간직되고 있었다..이형상은 세종대왕의 형인 효령대군의 10대손으로,인천에서 태어났다.
나이 28세에 문과에 급제했고, 벼슬길에 올랐다.중앙에서보다는 대부분 지방수령으로
관직생활을 했다.그는 경주시장격인 경주부윤을 비롯해,나주목사 등 아홉지방의 수령을
거쳤다.제주목사가 된건 나이 50이던 숙종 28년, 하지만 이듬해 귀양온 자를 옹호했다고
해서 파직됐다. 이후 그는 생을 마칠 때까지 30년간 호연정에 머물며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중 일부분은 영조때 그의 호를 따서 병와문집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이 문집을
포함해 이형상이 남긴 저서는 모두 60여종 2백여권에 달한다. 다산 정약용에 버금가는
것이다. 분야도 성리학과 국학, 군사, 지리 등 다양하다. 이러한 저술에서 그는 인습을
탈피하고, 현실에 맞는 개혁을 주장했다. 이형상은 실질적인 학문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래서 실학파의 한 사람으로 분류되기도 한다.특히 그는 국방과 지리에 관심이 많았다.
강도지는 대표적인 책이다.강화도의 방위와 풍속을 종합적으로 다뤄,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임을 밝혔다.제주에 관한 지리서도 남겼는데, 바로 이 남환박물이다. 제주의 지리적
환경과 풍속을 담은 것으로, 직접 답사를 통해 저술된 것이다. 유물 중엔 제주와 관련된
것도 있다. 이형상이 제주에서 나올 때 가져온 거문고다. 한라산 향나무로 만들었다.
이형상은 이 거문고를 즐겨 연주했다.그만큼 음악에도 관심이 많았다.그의 음악에 대한
관심은 저서로도 남겨져 있다.악학에 관한 이론서인 악학편고, 우리의 옛가사를 모은
악학습령이 있다.여기엔 천 편이 넘는 가사가 수록돼 있다. 이미 학계에 소개돼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이형상이 음악을 중시한 데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유학자인
이형상은 제주에서 많은 일을 했다. 그중 하나가 탐라순력도에서 보이듯, 신당을 불사
르고, 무속을 혁파한 것이다. 기록엔 신당 129곳을 불태우고, 사찰 5곳을 없애고, 무당
285명을 귀농시켰다고 한다. 그밖에도 이형상은 민생에 힘써 과중한 세금을 줄이는 데
노력했다. 또한 근친혼을 금지시키고, 부녀자의 노출도 금했다..당시까지만해도 제주엔
부녀자들의 노출이 심했다. 17세기 중엽 이건이 쓴 제주풍토기를 보면, 해녀들이 바다
에서 작업할 때 옷을 입지않았다고 한다.그런데 탐라순력도의 그림에 해녀가 옷을 입고
있다. 이때부터 해녀복을 입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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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3.
이것은 제주목 관아에서 과거시험을 보고 있는 장면입니다. 위쪽엔 시험관인 목사와
다른 2명의 부시험관이 있고,그 아래 뜰에선 유생들이 시험을 치르고 있습니다.기록엔
입장한 사람이 12명, 최종적으로 시에 한 명,부, 즉 산문 형식에 한 명이 합격했다고
돼있습니다. 승보시는 원래 성균관 유생들에게 치러진 초시,즉 과거의 1차 시험인데
제주는 내륙과 동떨어져 있어서, 특별히 이곳에서 시험을 치르고,중앙 정부에 등용
자격을 줬던 것입니다. 유학을 장려하고,제주를 조선의 통치에 포함시키기 위해 섭니다.
이렇듯 <탐라순력도>의 그림을 보면,당시의 제주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순력도
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건, 제주의 군사상황을 점검하는 그림입니다.
여기 펼쳐진 12장이 모두 그런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제주는 군사적으로 어떤
땅이었을까요? 이제 이 12장의 그림에 주목해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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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3
이것은 제주조점이다. 조점이란 군사 훈련과 점검을 뜻한다.순력의 가장 중요한 사항
이다.목사의 행렬엔 수많은 병사가 대동했다. 병사들은 조총과 활 등 무기도 갖췄다.
목사는 성 안의 제반 시설과 방어 태세를 살핀다. 그리고 성벽 위엔 군사들이 정렬해
있다. 목사의 행차를 맞이하기 위해 사열하고 있는 것이다. 제주엔 제주목성을 비롯,
행정구역상 3개의 성이 있었다. 그리고 해안엔 군사 주둔지인 진성이 9군데 있었다.
진성의 하나인 별방진성. 성벽 위에 역시 군사들이 있는데, 이곳엔 마당에도 도열해
있다. 제식훈련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순력때면 목사는 이렇듯 진성의 실태도 모두
살폈다. 제주에서 적의 침입루트는 바다다. 따라서 진성은 모두 포구에 설치돼 있었다.
이곳 별방진성은 제주의 동쪽 끝에 있다. 가까운 우도로 왜구가 침범해오자,1500년
경에 세워졌다.진성 가운데서 가장 크다. 이곳은 현재 성벽이 복원돼있다.그중 일부는
옛성벽 그대로다.제주에 흔한 현무암을 깎아서 축조했는데,꽤 정교하고 튼튼해 보인다.
그런데 그림엔 성문을 옹성으로 둘렀다.당시엔 성문 자리인 이곳에 이렇듯 옹성을 둘러
성문을 보호했던 것이다. 옹성뿐 아니라 다른 성벽을 쌓을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가운데 큰 돌을 놓아 중심을 만들었던 것이다. 정기적인 군사훈련과 견고하게 쌓은 성.
해안을 빙 둘러 이런 진성이 아홉 개나 있을 정도로 제주는 해안방어를 철저히 했다..
해안방어와 관련해 눈길을 끄는 그림이 있다. 성산봉의 성곽이다. 임진왜란때 쌓은
것으로, 꼭대기까지 돌계단도 나있다.그후 성으로 활용되진 않았지만, 제주가 얼마나
해안 방어에 주력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제주의 군사편제는 어땠을까?
순력도엔 단편적인 기록이 있다. 조방장은 해안 진성의 지휘관급이다. 그리고 성정군은
성을 지키는 일반 병사를 말한다. 그런데 순력도를 보존처리하는 과정에서 중요문서가
발견됐다. 그림 뒷부분에 덧대는 종이로 사용된 군적부가 그것이다. 이것은 군적부로
밝혀졌다. 모두 84장에 천여명이 기록돼있다. 속오군의 명단으로 추정된다. 속오군은
당시 지방군 편제의 하나로, 예비병력에 해당한다. 군적부엔 인적사항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관등성명과 나이를 비롯해 아버지의 이름, 거주지, 신체 특징, 주특기까지
망라됐다.그중 한 사람을 보면 이렇다.제1정병 소속,이름은 허득성.나이는 스물 아홉 살.
아버지의 이름은 척일이다. 소속 지역은 제주 정의현, 호촌이라는 마을에 살고 있다.
키는 4척 3촌이다. 1미터40센티미터쯤 된다. 얼굴 특징은 마, 즉 곰보를 뜻한다. 수염은
나기 시작했다. 왼손에 흉터가 있다. 주특기는 활쏘기다. 군적부엔 이렇듯 군사에 대한
파악이 아주 상세히 돼있다.군역회피를 막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제주에서 군사를
얼마나 체계적이고 철저하게 관리했는지 잘 보여주는 자료다. 자체 방어를 위해 감시소도
여럿 있었다.산 위엔 불로 신호하는 봉수대가,해안엔 연기로 신호하는 연대가 설치됐다.
제주 남쪽, 성산포에서 가까운 협재해변엔 현재 협재연대가 남아있다. 연대의 규모는
작다.하지만 늘 해안을 감시해야 하기 때문에 병사들이 2명씩 3교대로 24시간 경계근무를
섰다. 이곳에선 해안 가까이에 다가온 선박의 정체를 확인, 이웃 연대에 연기를 피워
알렸다. 당시 제주엔 연대가 38개, 봉수대가 25개 있었다. 이것을 지도에 표시해보면
이렇다.한눈에 물샐틈없는 방어체계가 구축돼 있음을 알 수 있다.봉수대가 잘 남아있는
독자봉, 봉수대는 산 높은 데서 50리 밖을 감시한다. 불은 평상시엔 하나, 낯선 배가
나타나면 둘,해안을 향해오면 셋, 상륙하면 넷, 접전때엔 다섯 개를 피운다. 적이 나타
나면 봉수대와 연대의 신호를 시작으로 제주는 전투 태세에 돌입한다...3개의 읍성,
9개의 해안진성, 63개의 감시소, 제주는 군사요새였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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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4.
이처럼 당시 제주는 철저한 방어체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왜 그랬을까요?무엇보다도
큰 이유는 왜구 때문이었습니다.고려말부터 출몰하기 시작한 왜구는 남해안을 비롯,
이 연안항로를 따라 서해안과 중국에까지 진출했습니다. 제주는 보시다시피 그 길목에
위치해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고려말부터 조선조 숙종때까지 제주에 왜구가 침범한
횟수는 무려 50여차례나 됩니다.1552년의 천미포왜란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명종
7년 5월조엔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왜선 1척이 천미포에 정박해 포구에 사는 백성
들을 살해했다. 이에 항전했으나, 왜구들은 모두 상륙해 점거하고,수백명이 이틀동안
버티었다.' 이 사건으로 천미포 마을은 아예 없어지게 됩니다. 이렇듯 왜구의 약탈과
살인 외에 또다른 이유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제주에 있는 하멜 기념비입니다. 하멜
하면 언뜻 하멜표류기가 생각나시죠?하멜은 네덜란드 사람인데,그가 탄 상선이 1653년
제주에 표류했고, 그는 조선에서의 생활을 기록으로 남겼던 것입니다.이 하멜뿐 아니라
제주엔 표류해온 다른 나라의 선박, 즉 이양선들이 많았습니다.탐라순력도가 제작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수십차례나 됐고, 국적도 중국과 일본, 베트남 등 다양했습니다.
표류선의 정체를 확인하고, 처리를 하는 문제 때문에 조정에선 골머리를 앓기도 했습
니다. 그리고 제주는 해안 방어가 더욱 절실했던 것입니다.물론 그에 따른 군사훈련도
철저하게 이루어졌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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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4
순력도엔 활쏘기 하는 장면이 여러차례 등장한다.목사가 순력때 했던 군사훈련을 보면,
성 안 마당에 궁수들이 도열해 있다. 특별히 궁수를 대상으로,활쏘기 훈련이 강도 높게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활쏘기 대회도 여러 군데서 치러졌다. 제주목성에 있는 관덕정
에선 가장 큰 규모의 시합을 벌였다.1등에겐 포상도 했다.관덕정은 현재 옛모습 그대로
복원돼 있다. 관덕은 '활을 쏘는 것은 높은 덕을 보는 것'이란 뜻이다. 제주엔 또한 마을
마다 활터가 있었다.솔대왓이 그것이다.솔대왓은 제주말(語)로 활을 쏘는 장소,즉 활터를
말한다. 이 현폭사후는 천제연 폭포에서 활쏘기를 하는 그림이다. 목사 일행이 풍류도
즐기면서 더불어 활쏘기도 벌인 것이다. 이런 그림은 또 한 장 있다. 제주에선 간혹
행해진 일인듯 하다. 줄에 매달린 이것은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다. 추인이라고 부른다.
오늘날에도 활터에선 추인과 비슷한 방법으로 화살을 회수한다. 과녁 쪽에 떨어진
화살을 거둘때 도르레를 돌린다. 그러면 화살 운반통이 움직이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제주에서 특별히 활쏘기에 집중했던건 왜일까? 활은 기병의 주무기였고, 당시 제주엔
기병이 많았다. 조선시대 보병 대 기병의 비율은 3대1 정도, 하지만 제주는 거의 1대1
이었다. 교래대렵은 사냥을 그린 것이다. 주목적은 군사훈련이었는데, 과정은 이렇다.
전날, 보병과 기병이 사냥터 주위에 진을 친다. 당일, 대장이 지휘대에 등장해 신호포를
쏘면, 각 진영에서도 보병들 움직이는 포를 쏜다.이어 보병이 짐승몰이를 한다. 여기
저기서 사냥이 시작됐다. 그렇지만 사냥의 주역은 기병이다.. 사냥을 통해 기병을 훈련
시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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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5.
사냥도 일종의 군사훈련이었군요.. 여기 기록을 보면, 이날 멧돼지와 노루, 꿩을 여러
마리 잡았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조정에 공물로 바쳐졌습니다. 하지만 제주에서 가장
중요한 공물은 바로 말이었습니다. 이것은 명월진성의 순력을 그린 것입니다.여기 성
밖에 여러 필의 말이 보이는데, 명월에 있던 말목장입니다.그리고 이것은 순력에 때맞춰
말들을 성 안으로 몰고가, 그 숫자를 세고 말 상태를 점검하는 장면입니다. 기록을
볼까요? 이곳에 있는 말은 1064필, 말을 돌보는 목자와 보인은 185명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순력때면 목사는 반드시 말을 점검했고,그것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이죠.이 그림 말고도 순력도엔 말이 16군데나 등장
합니다. 제주에선 당시 말을 얼마나 길렀고,조선사회에서 그 위치는 어느 정도였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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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5
국립중앙도서관엔 조선시대 말에 관한 귀중한 자료가 보관돼 있다.현종때인 1663년에
만들어진 목장지도다. 이것은 국가 차원에서 목장을 확보하고 말을 관리하기 위해 제작
됐다. 당시 말은 그 정도로 중시됐었다. 여기엔 전국에 있는 목장의 현황과 말의 숫자가
자세히 기록돼 있다. 이에 따르면, 전국의 말은 2만 3천여필, 그중 제주말은 만2천필이
넘는다. 제주말이 반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그렇다면 제주말은 주로 어디에 쓰였을까?
중앙의 말관리 부서인 사복시에서 말의 사용처를 기록한 문서다. 진상된 제주말의
종류가 보이고,그 아래 용도가 기록돼 있다. 군사용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이 문서는
군마의 절반이 제주말이었음을 증명해 준다. 제주엔 지금도 말목장이 여럿있어, 말이
쉽게 눈에 띈다. 제주가 말산지로 유명해진건 고려말, 몽고가 이곳에 목장을 건설하면서
부터였다. 그때부터 제주는 국내 최대의 말산지가 됐다. 탐라순력도의 한라장촉엔
당시의 관영 목장이 표시돼 있다. 한라산중턱을 빙 돌아 1소장부터 10소장까지 있다.
이 열개의 소장은 다시 소규모 목장인 자장으로 나뉘는데, 모두 63곳이었다. 자장은
천자문 순서대로 불렀고, 말에도 해당 글자를 낙인했다. 이것은 산장에 있는 말을 점검
하는 그림이다. 한라산정상에 따로 산장이 있었는데, 수백명의 병사가 동원돼 목책을
만들고 말을 한 곳으로 몬다.말은 동그란 이 목책에 모여 들었다가,다시 비좁은 목책을
통과한다.이때 말 숫자를 세고, 조정에 보낼 말을 추려낸다.뛰어난 목마 기술로 벼슬을
했던 사람이 순력도의 기록에 보인다.감목관 김진혁.감목관은 종6품의 관직이다.그의
후손을 만나보기로 했다.이 집안에서 말을 기르기 시작한건 450년전인 선조때부터,
김만일에 의해서였다.그는 한필의 말로 출발해서 수천필의 말을 키워 국가에 헌납했다.
그후 김만일의 아들이 최초로 산마감목관직에 임명됐다. 그리고 이 관직은 고종때까지
대대로 세습됐다.당시 무인도였던 우도에도 말목장이 있었다.목사는 이곳의 말도 점검
했다. 말 관리가 중요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한 조정에 말을 보내기 전엔 반드시
제주목성에 모아놓고 최종적으로 확인했다.이 일도 목사가 직접 맡아 했다. 제주에서
말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던 만큼, 목장에서 말을 기르는 목자들은 고역에 시달렸다.
말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목자에게 있었고,그래서 폐단이 생겨나기도 했다.말은 배로
운반했다.배에 실을땐 움직이지 못하도록 머리 방향을 교차시켰다.말은 전라도 해안에
상륙한 다음,거기서부터 한양까지는 육로로 이동했다. 조선시대 최대의 말산지였던
제주는 또한 군마의 최대 생산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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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6.
여긴 별방진성입니다. 이곳에도 말 목장이 있는데,그 옆에 또다른 목장도 보입니다.
흑우둔이라고 적혀 있군요.검은 소를 기르는 목장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흑우입니다.
지금은 제주에서도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고, 50여마리가 육종 보존 차원에서 길러지고
있는 정도입니다.하지만 조선시대에 흑우는 제주 특산품으로,해마다 20마리씩 진상됐었
습니다. 진상이란 지방의 특산품을 임금에게 바치는 것입니다.그런데 제주의 진상품
가운데 특히 귀하게 여기는 것이 있었습니다.바로 귤입니다.이것은 순력도에 있는 '감귤
봉진'이란 그림입니다.귤 진상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죠. 진상때면 과원에서 귤을 수확해
이렇게 성으로 가지고 옵니다. 그리고 마당에선 귤을 선별하는 작업이 이루어집니다. 이
일은 아낙네들이 맡고 있군요.여기에서 선별된 귤은 목사에게로 가져갑니다.진상품으로
품질과 수량은 적당한지 목사가 직접 일일이 확인을 하는 것입니다.이렇게 확인이 끝나면
나무 상자에 담습니다.그리곤 한양으로 운반하는 것이죠.여기 기록엔 진상한 귤의 종류와
숫자도 보입니다.당금귤,금귤,동정귤.종류만도 10가지가 넘습니다.제주 귤은 언제부터
진상됐고, 진상을 위해 관리는 어떻게 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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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6
제주시 애월읍엔 아주 오래된 귤나무가 한 그루 있다. 이곳도 옛날엔 귤을 진상하는
과원이었다고한다.그렇다면 이 나무에서 열린 귤도 이형상목사시절에 진상됐을 것이다.
이 나무의 종류는 진귤, 이 역시 당시 진상한 귤 종류의 하나였다.그밖에 진상된 귤은
무엇이고, 어떻게 생겼을까?서귀포에 있는 감귤시험장을 찾았다.이곳엔 현재 제주에서
생산되는 귤나무가 모두 갖춰져 있다. 그 종류는 12종, 하지만 개량을 거듭했기 때문에
12종이 다 옛품종은 아니었다. "....6품종의 이름이 동일시된다." 이 여섯 품종가운데
일부는 순력도에 묘사돼 있다. 귤의 색깔이 다른건 종류를 표현한 것이다. 남아있는
품종은 이렇다. 여름에 익는 청귤을 비롯, 약용으로 쓰이는 유자도 있다.그런데 조정에
진상된 귤은 어떤 용도로 쓰였을까? 한약재용으론 따로 귤껍질을 진상했다. 그것이
기록에 보인다.진피는 진귤의 껍질, 청피는 청귤의 껍질이다. 귤껍질은 어떤 약효를
지녔을까? 서울대 천연물과학연구소에서 이에 대한 해답을 얻을수 있었다. 진피와
청피의 약효는 서로 다르다. 귤에 대한 가장 오랜 기록은 고려때인 1052년의 것이다.
이 때 진상 수량을 개정했다. 그 이전에 이미 귤이 진상됐음을 알 수 있다. 처음엔 민가
에서 부담했지만, 조선 중종때부터 공과원이 설치됐다.이형상의 남환박물엔 모두 42곳
이라고 돼있다. 당시 공과원이었던 곳을 한군데 찾아가 봤다.이곳 용동과원엔 한때 44
그루의 귤나무가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8그루 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과원은 옛
자리 그대로였다. 과원의 형태도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대나무 숲은 방풍림이자
귤 저장에도 유용했다. 대나무 잎의 찬 성질을 이용해, 상자에 귤을 담을 때 대잎을
깔기도 하고, 아예 대나무 숲에 귤을 저장하기도 했다.이렇듯 당시 제주에선 귤 진상을
위해 공과원을 운영하고,과학적으로 관리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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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7.
3백년전에 만들어진 탐라순력도. 여기 있는 41장의 그림들을 통해 우리는 당시 제주가
어떤 땅이었는지를 알수 있었습니다. 제주는 해안 방어를 철저히 한 군사 요새였습니다.
그리고 최대의 말 산지로, 조선의 국방에 있어 중요한 부분이었던 군마의 공급지이기도
했습니다.또한 우리는 국내 유일의 순력화인 이 탐라순력도를 통해 조선시대 지방관이
했던 순력의 내용도 알 수 있었습니다. 순력의 가장 막중한 업무는 군사 시설의 점검과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것이었습니다.진상품을 관리하고, 진상 업무를 수행하는 것 또한
중요했습니다.이런 역사를 알 수 있었던 건, 기록을 소중히 생각하고, 그것을 후대에
남겼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 탐라순력도의 41장 그림엔 지금까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우리의 또 다른 역사가 숨어있을지도 모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