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흑치상지 묘지석 - 1604자의 비밀
흑치상지 묘지석 - 1604자의 비밀 |
중국 낙양의 북망산에서 백제인 흑치상지의 묘지석이 발견되었다. 북망산은 중국 제일의 명당으로, ‘살아서는 소주, 항주, 죽어서는 낙양의 북망’이라고 할 정도로 중국인들이 죽어서 묻히길 바라는 곳이다. 따라서 황제나 고관대작이 아니면 묻히기 어려웠던 묘지터가 북망산이다. 백제인 흑치상지의 알려지지 않은 삶을 추적한다. |
1. 중국 황제들이 묻히던 곳, 북망산 |
역대 중국의 황제묘는 모두 북망산에 있다. 그래서 이 곳은 무덤의 부장품들을 노리는 도굴꾼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다. 북망산의 도굴꾼들에 의해 흑치상지의 묘지석도 도굴되면서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북망산에 있을 흑치상치의 무덤을 찾아 나섰다. |
2. 도굴된 묘지석 |
묘지석은 그 사람의 일대기를 돌에다 적어 무덤 속에 넣어두는 것을 말한다. 도굴된 흑치상지의 묘지석은 골동품상을 통해 중국의 한 금석문 수집가에게 넘겨진 이후, 우여곡절 끝에 중국 남경 박물원에 소장되어 있었다. 흑치상지 묘지석은 박물관의 외진 복도 끝에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있었다. |
3. 백제의 귀족 흑치상지 |
1929년에 발견된 흑치상지의 묘지석이 국내에 알려진 것은, 1990년 북경 도서관에서 역대 지석의 탁본들을 엮어 한 권의 책으로 펴내면서이다. 이 묘지석을 통해 흑치라는 성씨가 원래 백제의 왕족성인 부여씨와 같은 성씨라는 것이 밝혀졌다. 전형적인 백제의 귀족으로 성장한 흑치상지는 31살에 조국의 멸망을 맞게 된다. |
4. 정림사지 5층 석탑과 당 식민지 |
부여에 있는 정림사지 5층 석탑. 아름다운 이 백제의 탑에는 백제 멸망의 아픈 역사가 새겨져 있다.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의 정복을 기념하면서 이 정림사지 석탑에 글을 남긴 것이다. |
5. 당나라의 명장수 흑치상지 |
백제의 부흥운동 실패 이후 당으로 건너간 흑치상지는 당나라의 무장으로서 맹활약을 한다. 607년 통일 왕국을 이룬 토번이 영토확장을 목적으로 당을 위협하자 당은 흑치상지를 내보낸다. 토번은 당시 당을 위협하는 가장 강력한 적이었다. 이때 흑치상지는 3천의 군사를 이끌고 3만 여명의 토번 군사와 싸워 승리한다. |
6. 태평성대 |
흑치상지는 전투뿐 아니라 전쟁방어에 있어서도 누구보다 뛰어난 장수였다. 흑치상지는 자신의 관할지역에 방어를 위한 봉화대를 70여 개 설치했고, 1500만평에 이르는 땅을 개간해 군사들의 생활을 풍요롭게 했다. |
7. 불패 신화 |
변방의 돌궐이 매년 혼란을 일으키고 재물과 사람을 약탈해가자 당 조정은 흑치상지를 변방으로 보내고, 흑치상지는 돌궐과의 전투에서 승승장구하며 돌궐족을 거의 전멸시킨다. 당나라에 건너간 이후 30여 년동안 흑치상지는 단 한차례의 전투에서도 진 적이 없었다. |
8. 흑치상지의 죽음 |
흑치상지는 당나라의 군부서열 12위안에 드는 높은 자리에 올랐지만, 죄를 입어 죽임을 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형에 처해진 흑치상지가 특별한 사람들의 무덤자리 북망산에 묻히게 된 것은 그의 아들 덕분이었다. |
--------------------------------------------------------------------------------
黑齒常之 墓誌銘
大周의 故人 左武威衛大將軍 檢校左羽林軍 贈左玉鈐衛大將軍 燕國公 黑齒府君 墓誌文 및 序文
하늘을 위로 이고 있으면서 天道에 순응하는 것은 땅이고, 높은 지위에 있지 않은 자라도 쓰여질 수 있는 것은 軍律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뛰어난 인재가 아니라면 어찌 이러한 운수에 따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아름다운 옥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密山 위에서 노닐어야 하고, 지혜와 덕을 쌓은 사람이 공자의 문하에 들어가면 한탄하지 않을 것이다.
府君은 이름은 常之이고 字는 恒元으로 百濟人이다. 그 조상은 夫餘氏로부터 나왔는데 黑齒에 봉해졌기 때문에 자손들이 이를 氏로 삼았다. 그 가문은 대대로 達率을 역임하였으니, 달솔이란 직책은 지금의 兵部尙書와 같으며, 본국에서는 2품 관등에 해당한다. 증조부는 이름이 文大이고, 할아버지는 德顯이며, 아버지는 沙次로서, 모두 관등이 달솔에 이르렀다.
부군은 어려서부터 고상하였고, 기질과 정기가 민첩하고 뛰어났으니, 가벼이 여기는 것은 기호와 욕망이었고, 중하게 여기는 것은 명예와 가르침이었다. 가슴 속에는 길은 마음을 가졌으니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맑았고, 정감의 폭은 너무나 넓었으니 그 거리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원대하였다. 여기에 신중함과 성실함을 더하였고, 온화함과 선량함을 포개었다. 이런 까닭으로 친족들이 그를 존경하였으며, 스승과 어른들이 그를 두려워하였다.
나이 어려 小學에서 공부할 적에 『春秋左氏傳』 및 班固의 『漢書』와 司馬遷의 『史記』를 읽었다. 이에 탄식하여 “左丘明이 이를 부끄럽다고 하였고, 공자도 역시 부끄럽다 하였으니, 진실로 나의 스승들이다. 이보다 더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 어찌 많을 것인가?”라고 말하였다. 20세가 안되어 家門의 신분에 따라 達率을 받았다. 唐 顯慶(656~660) 중에 당나라에서 邢國公 蘇定方을 보내어 그 나라를 평정하자, 그 임금(실제는 태자) 夫餘隆과 함께 천자를 알현하였으니, 당에서는 이들을 萬年縣人에 소속시켰다.
麟德(664~665) 초년에 人望을 얻어 折衝都尉를 제수받고 熊津城에 鎭守하니 수많은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咸亨 3년(672)에는 공적에 따라 忠武將軍, 行帶方州長史를 더하였다. 얼마 안 있어 使持節, 沙泮州諸軍事, 沙泮州刺史로 관직을 옮기고 上柱國을 제수받았다. 이에 지극히 공평한 것을 자기의 소임으로 삼았고, 사사로움을 잊어버리는 것을 커다란 강령으로 삼았다.
천자가 이를 가상히 여겨 左領軍將軍 겸 熊津都督府司馬로 직책을 옮기게 하였고, 浮陽郡 開國公과 食邑 2천 戶를 더하여 봉하였다. 이 때에 좋은 평판으로 物望에 오르내렸고, 조정의 인망이 날로 높아졌다. 마침 蒲海에서 재앙이 일어나고 蘭河에서 사변이 벌어져 부군으로 하여금 洮河道經略副使로 삼았으니, 실로 그에게 의지하는 바가 컸다. 부군은 품성이 빼어나고 굳셌으며, 자질이 뛰어나 사리에 통달하였다. 힘으로는 능히 무거운 문 빗장을 들어올릴 수 있었으나 힘센 것을 자랑하지 않았고, 지혜로는 능히 외적을 방비할 수 있었으나 지혜있는 것을 떠벌리지 않았다.
매번 자신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드러나게 하였고, 어리석은 듯이 함으로써 인격을 도야하였다. 그러므로 그 때에 행실이 산처럼 똑바로 서게 되어 모든 사람들이 그를 우러러보게 되었다. 어질되 간사함을 가르지 않았고, 위엄을 갖추되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았으니, 상주고 벌주는 것은 반드시 원칙에 따랐고, 선을 권하고 악을 말리는 데에는 어긋남이 없었다.
또한 5倫의 커다란 본보기를 이루었고, 3軍의 크나큰 복이 되었으니, 이에 병사들은 감히 그 명령을 어기지 못하였고, 아랫 사람들은 그 잘못을 용납받을 수 없었다. 高宗이 매번 그의 선함을 칭찬하여 그를 지조와 학식있는 士君子로서 대우하였다. 西道(靑海 지방)에 있을 때에는 크게 공훈을 세웠다. 이 때에 中書令 李敬玄이 河源道經略大使가 되자 군사들이 그의 지휘권을 빼앗았고, 역시 水軍大使, 尙書 劉審禮가 이미 패하여 죽자 장수들 중에 근심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런 중에 부군이 홀로 높은 산마루와 같은 공훈을 세우면서 그 곤경을 극복함에 따라, 左武衛將軍으로 직책을 옮기고 이경현을 대신하여 大使가 되었으니, 이것은 그에 대한 풍문에 따른 것이다. 부군은 곁에 음악과 女色을 두지 않았고, 평상시에 노리개를 가지고 즐기지 않았다. 經書를 베개삼았으니 祭遵과 같이 예의를 중시하였고, 뛰어난 지략을 품었으니 杜預가 깃발을 많이 세워 적을 혼란에 빠뜨린 것과 같은 꾀를 지녔다.
오랑캐의 티끌이 깨끗하게 치워지니 변방의 말이 살찌고, 중원의 달이 훤하게 비치게 되니 하늘의 여우 기운이 사라졌다. 전쟁터에 출정하면 칭송이 뒤따랐고, 전쟁터에서 개선하면 노래가 절로 나왔다. 이리하여 左鷹提衛大將軍 燕然道副大摠管으로 벼슬을 옮겼다. 垂拱(685~688) 말년에 天命이 장차 바뀌려 하였는데, 突厥의 骨卒祿은 미친 도적으로 이미 자신의 미미함을 살피지 못하였고, 徐敬業은 반역자로서 또한 자신의 역량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남쪽으로 淮陰과 海陵을 평정하고 북쪽으로 오랑캐 군사를 섬멸하는 데에 모두 큰 힘이 되었으니, 그의 위세와 명성이 크게 떨치게 되었다. 이에 천자가 制를 내려 이르기를 “재간과 도량이 온화하고 우아하며, 기질과 정기가 고상하고 밝았으며, 일찍부터 어질고 의로운 길을 밟았고, 마침내 깨끗하고 곧은 곳을 밟았구나. 말한 것은 분명히 행하고 배운 것으로 자신을 윤택하게 하였으며, 여러 차례 군사를 통솔하여 매번 충성스러움을 드러냈도다.
그러므로 兼國公(燕國公)과 食邑 3천 호를 봉할 만하다. 그리고 다시 右武威衛大將軍 神武道經略大使를 내리고 나머지는 그 전대로 하노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이곳의 포효하는 용감한 병사들을 통솔하여 저곳의 흉악하고 미친 무리들을 전멸시킴으로써, 오랑캐의 말이 남쪽에서 목축될 기회를 얻지 못하였고, 중국의 사신들이 북쪽으로 가는 원망이 사라지게 되었다. 靈州와 夏州는 요충지로서 요사스런 오랑캐들이 가득하였으나, 부군의 위세와 명성은 이를 대신할 자가 없었다.
다시 懷遠軍經略大使로 자리를 옮겨 떠도는 요기를 막기도 하였다. 마침 재앙이 악한 무리로부터 흘러나와 고고한 품격을 가진 부군에게 거듭 미치니, 의심이 마치 명백한 사실인 양 되어버려 옥과 돌이 섞여 구분하지 못하기에 이르렀다. 이미 옥에 갇혀 이윽고 하늘을 등지게 되니, 의로움은 목을 끊어 죽는 것과 같았고, 애처러움은 독약을 마셔 자살하는 것과 같았다. 이 때 나이 60세였다.
맏아들 俊은 어려서 집안이 재난을 당하자 아버지의 분함을 풀어드리려는 뜻을 세웠다. 오랑캐의 조정에서 목숨바칠 것을 맹세하다가 천자가 보낸 사신에게 몸을 맡기니, 여러 차례 충성스러움을 드러냈고 누차 공명을 떨쳤다. 聖曆 원년(698)에 원한이 쌓여 풀지 못함을 천자가 바르게 살피시고 制를 내려 이르기를, “고인이 된 左武威衛大將軍 檢校左羽林衛 上柱國 燕國公 黑齒常之는 일찍이 가문의 지위에 따라 벼슬을 이어받아 軍陳에서의 영예를 두루 거쳤으며, 누차 軍律을 담당하여 공훈을 받들어 떨쳤도다.
지난 번에 사실 무근의 유언비어에 연루되어 옥에 갇혀 심문을 받았더니, 분함을 품고서 세상을 떠났지만 의심받았던 죄는 판별되지 못하였었다. 근래에 이를 검토하여 살펴보니 일찍이 모반하였던 증거가 없고, 오로지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니 실로 한탄스럽기 그지 없도다. 마땅히 분함을 씻고 죄를 면하게 하여 무덤 속의 영혼을 위로할 수 있기를 바라노니, 총애하는 표시로 관작을 더하여 삼가 죽은 이를 영광스럽게 만드노라.
따라서 左玉鈐衛大將軍으로 추증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勳封은 옛날 그대로 복구하라. 그 아들 渤擊將軍 行蘭州廣武鎭將 上柱國 俊은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명성을 날렸고(?), 누차 진실된 정성을 드러냈으며, 아주 위급한 상황에도 이를 피하지 않았고, 몸을 던져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도다. 마땅히 이를 포상하여 기록해둠으로써 크게 칭송함을 보이고자 하노니, 右豹韜衛翊府左郞將에 봉할 만하다. 勳封은 옛날 그대로 하노라.”고 하였다.
아아, 聖曆 2년(699) 1월 22일에 천자가 칙을 내려 이르기를, “燕國公의 아들 俊이 아버지를 移葬하겠다고 요청하였으니, 물건 100 가지를 내리고, 그 장례 일에 필요한 휘장, 일꾼 등 일체를 관청에서 공급하라. 그리고 6품에 해당하는 京官 1명으로 하여금 가서 살피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런즉 그 해 2월 17일에 邙山의 남쪽, 官道의 북쪽에 해당하는 곳에 받들어 이장하였으니, 이것은 예에 맞는 것이다.
생각건대, 부군은 외따로 우뚝 솟은 산봉우리처럼 뛰어나기 이를 데 없었으니 재간있는 사람들 사이에 표상이 되었고, 거울을 걸어 놓은 것처럼 허상과 융화되었으니 선인의 도리와 합치되는 사람들 사이에 우러름의 대상이 되었다. 말은 곧고 뜻은 넓었으니 지엽적인 일들이 근본적인 것을 가리는 일이 없었고, 계획을 세우면 일이 이루어졌으니 처음의 일들이 마지막과 일치하는 진정한 아름다움을 지녔다. 밤낮으로 나태하지 않았고 마음은 항상 윗사람을 섬기는 데에 두었으며, 곤경에 처하여도 지조를 바꾸지 않았고 뜻은 항상 아랫사람을 생각하는 데에 두었다.
군자가 관여할 바가 아니면 그 생각은 아예 고려도 하지 않았고, 선왕이 물려준 바가 아니면 그 교훈은 아예 마음 속에 두지 않았다. 軍門에서 스스로 수레를 밀어 변방에서 절개를 이루었다. 그러니 남을 헐뜯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더 이상 나쁜 말을 하지 못하였고, 아무리 칭찬을 잘 하는 사람이라도 더 이상 좋은 말을 찾지 못하였다. 지혜있는 사람이 그를 보면 지혜롭다 하였고, 어진 사람이 그릇 보면 어질다 하였다.
재물을 멀리하고 자신을 잊어버렸으며, 의를 중시하고 다른 사람을 우선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목이 달아날지라도 이해를 따지지 않았고, 몸이 위태롭게 될지라도 올바른 길을 버리지 않았다. 이런 까닭으로 겁많은 사람도 그로 이해 용감하게 되었고, 탐욕스런 사람도 그로 인해 청렴하게 되었다. 이것은 굳이 저울을 논하지 않아도 잘못된 무게를 바로잡는 것과 같았고, 준족을 가진 빠른 말로 인하여 느린 말이 원대함을 알게 되는 것과 같았다.
관리로서 마음이 곧고 재간이 있었으니, 글을 쓰매 쌍벽을 이룰 정도로 재주가 뛰어난 사람들이 스스로 자책하였고, 인륜의 옳고 그름을 판별할 능력을 갖추었으니, 잠자코 있더라도 천금이 그 값어치를 발휘하였다. 진실로 지금의 시대에만 본받을 바가 아니었고, 대체로 뭇사람으로부터 우뚝 솟은 인물의 표준이 되었다. 영예와 굴욕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고 삶과 죽음은 타고난 것인데, 어차피 귀착하는 바가 동일하다면 어찌 부인의 손 안에서 목숨을 마치겠는가? 내가 일찍이 군대에 있을 때 參義所에 있었는데, 그의 도리에 감복하였고 그의 공훈을 칭송하였었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문을 짓는다.
5嶽을 말하는 사람은 天台山이 병풍처럼 첩첩이 서 있는 모습을 알지 못하고, 4瀆을 바라보는 사람은 雲洲에 핀 붉은 꽃을 깨닫지 못하네. 삼가 듣건대 金日磾는 한나라의 칼집이 되었고, 百里奚는 진나라의 사다리가 되었도다. 참으로 사리에 밝다 말할 수 있으니 뭇사람을 즐겁게 할 정도로 뛰어났고, 가는 곳마다 보배가 되었으니 어디에 간들 명석하다 아니할 것인가. 공이 동쪽으로부터 왔도다.
마치 봄바람 불어 오듯이. 禮樂 제도가 그로 인해 본색을 드러냈고, 소리와 광채가 그를 기다려 뜻을 이루었도다. 끝이 없구나 군사들의 깃발이여, 가지런하구나 수레들의 덮개여. 커다란 종을 치니 북이 울고 퉁소가 화답하는구나. 이는 누구의 영화인가 나를 두고 덕이 있다 하는 소리도다. 사방에 걸쳐 오랑캐의 근심을 없앴고, 천 리에 걸쳐 公과 侯들의 성을 지켰도다. 공훈을 이미 펼치니 충성과 의로움이 벌써 드러났도다.
그러나 만물에는 곧고 굳건한 것을 꺼리는 일도 있고, 행실이 높으면 도리어 해를 당하는 일도 있구나. 가운데 높은 봉우리가 그 높이를 잃게 되었고, 어두운 무덤 속에는 빛이 사라지게 되었구나. 천하가 그를 위해 애통해 하였고, 4海가 그의 賢良함을 애처롭게 여겼도다. 천자가 이를 깊이 헤아리니, 살아있을 때만 아니라 죽은 뒤에도 포상이 미쳤도다. 내가 실로 감모하여 그를 기리는 글을 짓노라. 그에게 바쳐진 말들이 영원할 것이며, 그의 명성은 끝이 없을 것이로다.
--------------------------------------------------------------------------------
삶을 택한 흑치상지
“일본서기”에는 백제부흥군이 처음에는 몽둥이로 신라군을 격파한 후 신라군의 무기를 탈취했다고 기록할 정도로 이들은 계백의 군사처럼 두려움 없이 싸웠다.
사비성이 위험에 빠지자 신라의 무열왕은 세자 김법민과 직접 군사를 이끌고 부흥군을 공격해 지금의 논산군 연산면의 이례성(爾禮城)을 함락시켰다. 그러자 주변의 20여개 성이 항복하는 바람에 백제부흥군의 위세는 한풀 꺾였다.
그러나 ‘답설인귀서’에 웅진도독부에 주둔했던 당군 1천여명이 백제부흥군을 공격하다 전원 전사했다는 기록이 있는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부흥군은 계속 기세를 떨쳤고 복신의 요청을 받은 의자왕의 아들 풍(豊)이 662년 5월 왜국에서 귀국하여 즉위하면서 부흥군은 명실상부한 국가체제를 갖추게 됐다.
무왕 32년(631) 일본에 파견됐다. 30여년만에 귀국하는 왕자 풍은 갈 때와는 달리 망국의 왕자가 돼 왕조를 다시 살려야 한다는 무거운 책무를 안고 왔다.
그러나 663년 6월 부흥군 지도부가 분열됐다. 복신이 도침을 살해하고 풍왕이 복신을 사형시키는 내분이 발생하면서 백제부흥군은 결정적으로 약화됐다.
이때 당나라로 끌려갔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이 투항을 권유하자 흑치상지는 당의 유인궤(劉仁軌)에게 투항하면서 백제부흥군의 전력은 결정적으로 약화된다. 흑치상지가 당의 편에 서자 백제부흥군은 당해내지 못하고 임존성을 내주고 말았다. 흑치상지는 이 공로로 당나라가 옛 백제 땅에 설치한 웅진도독부의 관인이 되었다가 다시 당으로 돌아갔는데 그때부터 국제적인 인생유전이 시작된다.
그는 중국 서부의 토번(티베트) 공략에 공을 세워 좌무위대장군이 됐다가 서기 687년 58세의 나이로 회원군 경략대사(懷遠軍經略大使)의 직책으로 북쪽의 돌궐 토벌에 나섰다. 그러나 같이 출정한 좌감문위중랑장 찬보벽이 홀로 공을 세우기 위해 독자적으로 작전에 나섰다가 전멸한 후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우응양장군 조회절(趙懷節)의 모반사건과 관련됐다는 주흥(周興)의 무고를 받고 투옥됐다가 60세 되는 689년 교형(絞刑)에 처해져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다.
흑치상지는 중국 뤄양(洛陽)의 북망산(北邙山)에 묻혔는데 이곳은 의자왕의 아들로서 백제부흥운동 당시 그에게 투항을 권유했던 부여융이 묻힌 곳이다.
“조상의 무덤에 다시는 못가게 됐구나”
흑치상지의 생애는 이처럼 모순으로 점철된 것이었다. 백제부흥운동에 나섰다가 투항한 후에는 임존성 함락에 공을 세우고 당의 벼슬아치가 돼 서로 동으로 이민족 토벌에 나섰다가 결국 모반사건에 무고돼 사형을 당한 그의 생애는 계백처럼 충절이란 한가지 잣대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가 부여융의 권유로 투항하고 임존성 함락에 협력한 것은 합리화될 수 없는 행적이지만 백제부흥군의 지배층이 내분에 쌓인 상황에서 그는 백제라는 부흥운동의 무대를 떠나 보다 넓은 무대로 옮기기로 작정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토번과 돌궐이라는 광활한 지역을 무대로 활동하다가 세상을 떠난 그는 단순한 국가에 대한 충절을 떠난 세계인이었는지도 모른다. 고구려의 유장 고선지가 그러했듯이….
일본의 고대 역사서인 “일본서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주유(州柔·주류성)가 항복했으니 어쩔 수 없다. 백제라는 이름도 사라지고 말았구나. 이제 우리 조상들의 무덤이 있는 그곳을 두번 다시 못가게 됐구나. 이제는 궁예성(弓禮城)에 가서 일본의 장군들과 필요한 대책을 세워야 할 뿐이다.”
“삼국사기”에는 보이지 않지만 “일본서기”에는 백촌강(白村江·금강 하구) 전투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663년 8월 백촌강에서 2만7천여명의 일본 구원군이 당군에 맞붙었다가 패전했다는 것이다. 임나일본부설 등 과장된 승리의 기록이 다수인 “일본서기”에서는 예외적인 패전기사이므로 신빙성이 있는 기록이다. 이 패전을 기록하면서 “우리 조상들의 무덤이 있는 그곳을 두번 다시 못가게 됐구나”라고 한탄한 것은 고대 백제와 일본 관계에 대해 많은 시사를 준다. ‘그곳’이란 두말할 것 없이 백제를 뜻하는데 백제란 이처럼 당시 일본의 지배층들에게 조상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었다.
따라서 백제가 멸망하자 백제부흥군이 일본에 구원군을 요청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660년 10월 복신은 좌평 귀지(貴智)를 보내 전투에서 생포한 당군 포로 1백명을 보내면서 군사적 지원을 요청한 것은 그중 하나였다. 그후 백제부흥군의 임금 풍이 구원군을 요청하자 일본의 사이메이(齊明) 여제(女帝)와 나카노오에(中大兄) 황자(皇子)는 대규모 구원군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당시 백제와 일본은 단순한 선린관계를 뛰어넘는 혈연관계로서 공존공생의 관계였다.
일본이 백제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는 구원군의 규모 및 그 파견 방법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사이메이 여제가 직접 백제구원군을 인솔하고 규슈(九州)까지 갔던 것이다. 사이메이 여제는 그러나 백제구원군의 출병을 보지 못하고 아사쿠라궁(朝倉宮)에서 병사하고 말았고 여제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잡은 나카노오에 황자가 텐지천황(天智天皇)으로 즉위해 구원군 파병문제를 처리하게 된다. 텐지천황은 백제부흥의 꿈을 담은 백제구원군을 출병시켰으나 금강 하구에서 나·당연합군에게 패배했던 것이다.
일본구원군이 참패하고 백제부흥군까지 괴멸하자 텐지천황은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나·당연합군이 일본까지 쳐들어올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이 배후에 있는 한 백제 유민들은 언제든지 꿈틀거릴 수 있었기 때문에 나·당연합군이 여세를 몰아 일본까지 침략할 가능성은 충분했다. 텐지천황이 한반도와 가까운 쓰시마 섬(對馬島)과 이키 섬(壹岐島)에 병력을 주둔시킨 것은 물론 나·당연합군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일본의 위기의식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는 이 시기 집중적으로 쌓은 한식 산성(韓式山城)이다. 한반도와 가까운 사가현(佐賀縣)과 후쿠오카현(福岡縣), 그리고 에이메현(愛媛縣)에 그 형태가 남아 있는 한식 산성은 그 이름대로 한반도에서만 발견되는 고유한 형태의 산성이다.
일본에 건너가 구원병 요청
한식 산성은 산 능선을 따라 축조되며 산성 안에 계류가 흐르는 계곡과 우물이 있다는 특징을 지닌다. 계곡과 우물이 존재했던 이유는 한식 산성이 유사시에 군사들과 백성들의 농성장소로 쓰였기 때문이다. 산성을 근거삼아 농성하는 전투기법은 한반도에서만 존재했던 특유의 전법이었다.
바로 이러한 산성을 쌓은 주인공이 백제에서 건너간 유이민들이었다. 당시 일본의 한식 산성에는 가공 석재와 판축(版築) 기술이 사용됐는데 이는 당시 일본에는 존재하지 않던 축성기술이란 점에서 이 산성의 축조자들이 백제 유민들임을 보여준다. 임존성과 주류성이 함락되자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했던 많은 백제 유민들은 일본으로 대거 건너왔고 나·당연합군이 일본까지 침략해올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한식 산성을 쌓아 항전하려 했던 것이다.
서기 815년에 완성된 일본의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 수록된 1천1백82개 씨족 중 대다수가 백제계 성씨인 것도 한반도인, 특히 백제인들이 일본 역사에 미친 영향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증거다.
백제가 멸망한 후 백제부흥운동에 나섰던 이들은 부흥운동이 좌절되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또다른 지배층을 형성했다. 이들이 일본 역사와 문화 발전에 끼친 영향은 앞으로 계속 연구해야 할 과제일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백제가 망했을 때 세가지 유형의 대응양식이 있었다. 첫번째는 계백처럼 나라와 운명을 함께 한 경우고, 두번째는 흑치상지처럼 백제부흥운동에 가담했다가 당나라의 벼슬아치가 된 경우다. 세번째는 부흥운동이 실패한 후 백제의 혈연국가였던 일본으로 가 일본의 지배층을 형성한 경우다.
한 나라의 멸망이 이처럼 다양한 대응방식을 보이는 것은 그 유례를 찾기가 쉽지 않다. 그만큼 7세기 후반 한반도와 중국, 그리고 일본을 둘러싼 동북아의 국제정세가 복잡했다는 하나의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