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궁예
궁예 |
왕건이 세운 고려의 기반을 마련해준 궁예. 하지만 통치자로서 궁예의 면모는 패자라는 이유로 그늘에 가려졌고 미치광이라는 극단적인 평가만이 남게 되었다. 정치가로서 궁예의 모습, 그리고 후삼국 시대 역사의 주역으로서의 궁예를 재평가 해야 할 것이다. |
1. 궁예가 살아있는 철원 땅 |
철원은 궁예가 세운 나라 ‘태봉’의 수도였다. 지금도 철원에서는 궁예를 이 지역을 다스린 왕으로 추앙하며 ‘태봉제’라는 축제를 연다. 궁예가 살았던 궁궐과 궁예도성 터는 현재 비무장지대 안에 있다. 그 누구의 접근도 허락하지 않는 궁예도성, 천년이 지난 지금도 궁예의 꿈은 그곳에 묻혀 있다. |
2. 몰려드는 사람들 |
궁예는 현실에 불만을 가진 농민을 흡수해 독자적인 세력을 확보한다. 전쟁터에서 궁예는 병사들과 동고동락하며, 뛰어난 지도력으로 세력을 키우기 시작해서 강원도 일대를 점령해 나간다. 강원도는 현실개혁 성향이 강한 미륵신앙이 퍼져있던 지역이었다. |
3. 철원을 택한 이유 |
골이 깊고 산이 높은 강원도에서 가장 넓고 시원하게 트인 곳이 철원평야이다. 이 곳 철원을 궁예는 나라를 건설하는 중심지역으로 정한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궁예의 눈으로 철원을 바라본다. |
4. 송악으로 떠나다 |
궁예는 철원에 도읍을 정한지 1년 만에 송악으로 도읍을 옮겼다. 송악으로 옮긴 후 궁예는 한강유역을 장악한다. 그리고 청주와 공주일대까지 빠른 속도로 세력을 확장한다. 그러면서 국호를 ‘고려’라 명하며 고구려 계통의 호족들 사이에 큰 호응을 얻는다. |
5. 철원으로 돌아온 궁예 |
고려라고 정한지 3년 만에 궁예는 대 동방국을 뜻하는 ‘마진’으로 국호를 바꾼다. 그리고 그 이듬해, 다시 도읍을 철원으로 옮긴다. 이곳에서 궁예는 자신의 꿈인 대 동방국을 이루려고 했다. 하지만 강력한 왕권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호족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친다. |
6. 궁예의 미륵신앙 |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바꾸면서 민심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통치수단이 필요했던 궁예는 미륵신앙을 이용했다. 미륵신앙은 미륵이 나타나서 현실을 개혁해 주고 모두가 잘 사는 이상사회로 만들어준다는 신앙이다. 이 미륵신앙을 바탕으로 궁예는 반 신라세력을 규합하고 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집권후반기가 되면서 궁예는 자신이 살아있는 미륵이라고 자칭한다.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신비한 힘을 가졌다고 하는데... |
7. 부인과 두 아들을 죽이다 |
삼국사기는 궁예가 부인 강씨의 부정한 행동을 신통력으로 알아보고 부인과 두 아들을 잔인하게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궁예의 포악함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사건d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것이 과연 사실이었을까. |
8. 궁예의 마지막 |
궁예는 왕이 된지 18년 만에 종말을 고한다. 왕건의 쿠데타가 발생한 것이다. 철원에는 궁예 최후의 은거지로 알려진 명성산이 있다. 궁예의 마지막 모습이 전설로 내려오는 곳이다. |
"궁예는 신라 헌안왕의 아들이었다"
궁예 영정
미륵불을 자처하며 사회 변혁을 꿈꿨던 궁예. 후삼국 시대 견훤, 왕건과 각축을 벌였던 궁예의 출신에 대해서는 몰락한 진골 귀족의 후예, 신라 제45대 신무왕의 숨겨진 아들이자 장보고의 외손이라는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철원 명성산
궁예가 지었다는 보개산성
'삼국사기' 궁예전에는 궁예의 아버지가 신라 제47대 왕 헌안왕(재위 857-860) 또는 제48대 왕 경문왕(재위 861-875)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전남대 이순신해양문화연구소 연구실장인 송은일 박사는 연구논문 '궁예의 출자(出子)에 대한 재론'에서 궁예가 헌안왕의 아들이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송 박사는 '삼국사기' 등 사료를 토대로 궁예의 출신과 가문을 추적했다.
그는 궁예가 태어나자마자 나라에 해를 끼칠 인물로 낙인찍혀 왕으로부터 죽음을 당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주목했다.
'삼국사기'에는 "왕은 중사(中使)를 시켜 그 집에 가서 아이를 죽이게 하였다"라는 구절이 있다.
송 박사는, 왕의 명령을 받고 궁예를 죽이러 간 '중사'는 중사성(中使省)의 관리로, 중사성이란 관부가 존재한 시기는 경문왕 즉위 초기였다면서 "궁예를 죽이려 했던 왕은 경문왕이었고 그러므로 경문왕은 궁예의 아버지가 될 수 없다"고 분석했다.
당시 신라의 왕족들이 재상 등 주요 관직을 독점해 왕권을 강화했던 점에 비춰볼 때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되는 아들을 왕이 죽일 이유가 없다는 게 송 박사의 분석이다.
그는 "경문왕의 혼인 과정과 가족 사항을 살펴보았는데 거기서도 궁예가 경문왕의 아들이라는 혐의는 드러나지 않았다"면서 "결국 궁예는 헌안왕의 아들이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결론내렸다.
헌안왕은 조카인 제46대 문성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문성왕에게 아들이 있었음에도 헌안왕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정계 주도권을 쥐고 있던 시중 계명의 지원 때문이었다.
송 박사는 "계명이 헌안왕의 왕위계승을 지원한 것은 다음 왕위를 자신에게 물려주겠다는 암묵적 합의가 있었기 때문"이라면서 그러나 헌안왕은 즉위 후 계명과의 합의를 무시하고 자신의 직계로 왕통을 이으려 했고 지방 진골 귀족 김인문 가문의 여식을 아내로 맞아 궁예를 낳았다고 주장했다.
이 연구논문은 13일 전남대에서 열리는 한국고대사학회 정기발표회에서 발표된다
********************************************<연합뉴스/ 황윤정 기자 2012.10.11>
궁예가 도성으로 삼았던 궁터에 남아있는 석등(신라말 또는 고려초 작품)
※ 삼국사기 인물열전-궁예조
궁예는 신라인이니 성은 김씨이다. 아버지는 제 47대 헌안왕이요, 어머니는 헌안왕의 후궁이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혹자는 궁예가 48대 경문왕 응렴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그는 5월 5일 외가에서 태어 났는데, 그 때 지붕에 긴 무지개와 같은 흰빛이 있어서 위로는 하늘에 닿았었다. 일관이 아뢰기를 "이 아이가 오(午)자가 거듭 들어있는 날[重午]에 났고, 나면서 이가 있으며 또한 광염이 이상하였으니, 장래 나라에 이롭지 못할 듯합니다. 기르지 마셔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중사로 하여금 그 집에 가서 그를 죽이도록 하였다. 사자는 아이를 포대기 속에서 꺼내어 다락 밑으로 던졌는데, 젖 먹이던 종이 그 아이를 몰래 받아 들다가 잘못하여 손으로 눈을 찔렀다. 이리하여 그는 한 쪽 눈이 멀었다. 종은 아이를 안고 도망하여 숨어서 고생스럽게 양육하였다.
그의 나이 10여 세가 되어도 장난을 그만두지 않자 종이 그에게 말했다. "네가 태어났을 때 나라의 버림을 받았다. 나는 이를 차마 보지 못하여 오늘까지 몰래 너를 길러 왔다. 그러나 너의 미친 행동이 이와 같으니 반드시 남들에게 알려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와 너는 함께 화를 면치 못 할 것이니 이를 어찌 하랴?"
궁예가 울면서 말했다. "만일 그렇다면 내가 이곳을 떠나 어머니의 근심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말을 마치고 곧 세달사로 갔다. 지금의 흥교사가 바로 그 절이다. 그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스스로 선종이라고 불렀다.
*****************************************************<삼국사기 열전 궁예열전 중에서>
당시의 신라왕실은 극도로 쇠약해져,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일어났다. 국고가 바닥이 나 889년(진성여왕 3)에 과도하게 세금을 독촉하자 전국적으로 백성들의 항쟁이 심해지고 초적(草賊)이 발생했다.
그들 가운데 두각을 나타낸 인물로 기훤(箕萱)과 양길(梁吉)이 있었는데, 궁예는 891년 기훤에게 몸을 의탁했다가 이듬해 양길의 부하로 들어갔다.
궁예는 원주 치악산 석남사(石南寺)를 거쳐 동쪽으로 진출하여, 주천(酒泉:지금의 예천)·내성(奈城:영월)·울오(鬱烏:평창)·어진(御珍:울진) 등 여러 현과 성을 정복했다. 894년에는 명주(溟州:지금의 강릉)·저족(猪足:인제)·금성(金城)·철원(鐵原)을 점령한 뒤, 양길과 결별하고 장군을 자처하며 독자적 세력을 이루었다.
896년경 송악(松嶽:지금의 개성)의 왕건(王建) 부자가 투항을 했다.
898년 평안도와 한산주(漢山州)의 30여 성을 공략하는 한편, 양길군을 격파했다. 899년(효공왕 3) 왕건을 시켜 양주(楊州)·견주(見州)를 복속케 하고, 이듬해에는 광주·춘주(春州)·당성(塘城:지금의 화성시 남양)·청주(靑州)·괴양(槐壤:괴산)을 평정함으로써 소백산맥 이북의 한강유역 전체를 지배했다.
궁예도성의 모형(철원군청)
901년 스스로 왕위에 올라 국호를 후고구려라 했다. 904년에는 국호를 마진(摩震), 연호를 무태(武泰)라 했다. 이때 비로소 광평성(廣評省)을 설치하고 관원을 갖추었다.
이듬해 청주사람 1,000호를 철원으로 옮겨 그곳을 서울로 정하고 연호를 성책(聖冊)으로 고쳤다.
911년에는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로 고쳤다. 이해에 왕건에게 바닷길로 금성(錦城:지금의 나주)을 점령케 하여 서해상권을 장악하고 견훤(甄萱)을 견제했다. 914년에는 연호를 다시 정개(政開)로 고쳤다.
이처럼 강성한 세력을 이루어가면서 궁예는 신라를 멸도(滅都)라 부르고, 신라 조정에 반발하는 세력을 포섭하는 등 신라에 대한 강한 적의를 보이고 신라 사회를 파괴시켜갔다.
그러나 나라를 이끌어갈 정치이념이 뚜렷하지 못했고 요역과 세금을 무겁게 하고 궁궐을 크게 짓는 등 가혹한 수탈을 자행했다. 이때문에 민심을 잃게 되자, 918년(정개 5)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知謙) 등이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고, 궁예를 왕위에서 축출하였다.
궁예는 옷을 바꿔입고 도망가다가 부양(斧壤:지금의 평강)에서 백성들에게 피살되었다.
'고려사'는 왕이 된 뒤 궁예의 행적을 부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왕건의 혁명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궁예를 폭군으로 기술하고, 고려 500년을 거치면서 그에 대한 평가절하가 이루어진 까닭이다.
궁예는 신라의 멸망을 촉진하고 새로운 국가를 세워 왕권강화를 시도하는 등의 정치적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호족세력의 포섭에 실패하고 신라말의 상황에 대한 역사적 이해와 사회모순에 대한 개혁의지가 부족했기 때문에 완전한 국가체제를 갖추기 전에 제거되었던 것이다
궁예 (?~918, 재위 901~918)
궁예 (?~918, 재위 901~918)는 신라 진골의 집안에서 태어나
‘나라를 망칠 놈’이라는 예언과 함께 모진 인생역정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타고난 힘과 재주로 사람들을 모아 후고구려를 세우는 왕이 되었다.
그는 살아있는 미륵으로 자처했으며 미륵 관심법이라는 특유의 술책으로 사람들을 휘어잡았다.
그는 과연 난세의 영웅일까, 악한 군주의 표상일까.
기구하게 태어난 영웅 궁예는 제가 받은 힘으로 난관을 헤쳐나갔다.
사실 그는 일개 승려로 살아갈 사람이 아니었다.
궁예에 대한 일화 중 그가 어느 날 재를 올리러 가는 길에 까마귀가 점치는 산가지를 물고 와서
궁예의 바릿대에 떨어뜨렸는데 거기에는 왕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고 한다.
어린시절을 보낸 절을 나선 궁예는 처음에 기훤의 휘하로 들어갔다.
그러나 기훤은 오만무례하고 주군의 자질이 없어 이듬해 양길을 찾아갔다.
양길은 궁예를 우대하고 일을 맡겼으며 군사를 주어 동쪽으로 신라의 영토를 공략하게 하였다.
아직 경험과 힘이 모자란 궁예로서는 전장터에서 한 수 배울 필요가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궁예가 출중한 솜씨를 발휘하여
우두머리로 올라서는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절을 나선 지 3년 만인 894년에 궁예는 강릉을 거점으로 삼아
당시 대군이었던 3천 5백 명 이상의 군병력을 편성하였다.
[삼국사기]
‘궁예는 사졸과 함께 고생하며 주거나 빼앗는 일에 이르기까지도 공평무사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마음속으로 존경하고 사랑하여 장군으로 추대하였다.
궁예는 곤궁한 신라 말기의 백성들에게 그야말로 미륵과도 같은 존재였다.
세력이 커지자 태백산맥을 넘어 철원으로 그 거점을 옮겼다.
게다가 거기서 천군만마와도 같은 왕건이라는 뛰어난 부하를 얻었다.
본디 개성 출신인 왕건은 철원으로 와 896년부터 궁예의 휘하에서 혁혁한 전공을 올렸다.
궁예의 거침없는 기세 앞에 불편해진 이가 양길이었다.
제 밑에서 싸움질을 배운 피라미가 이제는 자신을 향해 칼날을 곧추세우고 있음을 알았다.
양길은 궁예의 힘을 꺾어 놓아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선수를 친 것은 오히려 궁예였다.
양길을 물리친 후 궁예는 901년에 왕을 자칭하며 나라를 세웠다.
[삼국사기]
궁예 - “이전에 신라가 당나라에 청병하여 고구려를 격파하였기 때문에
평양의 옛 서울이 황폐하여 풀만 성하게 되었으니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
궁예의 일생 최전성기에 후고구려는 이렇게 세워졌다.
하지만 엄청난 성공 끝의 피로감을 궁예는 끝내 이겨내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모든 국사를 혼자 짊어지고 가야할 압박감을 견디지 못한 것일까.
904년에 국호를 마진(摩震)이라 하고 연호를 무태(武泰)라 하였으며
사람들에게 신라를 멸도(滅道)라고 부르게 하였고 신라에서 오는 사람은 모조리 죽여 버렸다.
911년에는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 국호를 태봉(泰封)이라 고쳤다.
변덕에 가까운 그의 통치 스타일은
처음 그가 지녔던 동고동락과 공평무사의 이념과는 거리가 멀었다.
포악한 군주가 백성의 신임을 잃어가고 엉뚱한 관심법으로
사람목숨을 파리목숨 취급하는 시대가 계속 되면서
지방호족들은 충성심을 잃어갔고 백성들은 제 살길 찾기에 바빴다.
연회장에서는 석총이 궁예의 율법에 요사스럽고 괴이한 이야기라
독설을 퍼붓다가 궁예의 철퇴에 맞아죽었다.
무력으로 입을 막았으나 이로 말미암아
자신의 주요한 배후세력인 승려들이 등을 돌리고 말았다.
915년에는 궁예의 부인 강씨가 왕이 옳지 못한 일을 많이 한다 하여 충언을 올렸다.
그러자 궁예는 부인더러, “네가 다른 사람과 간통하니 웬일이냐?”라고 응수하였다.
부인이 어처구니없어 하자, “나는 신통력으로 보고 있다.”라며
뜨거운 불로 쇠공이를 달구어 음부를 쑤셔 죽였다.
미치광이 같은 이런 짓으로 그는 자신의 두 아이 목숨마저 빼앗았다.
심지어 궁예는 자신이 가장 신뢰하던 왕건(王建)에게도 예의 관심법을 들이댔다.
반역을 모의하였다고 다짜고짜 윽박지르며 “관심법으로 이 일을 말하겠다.”라고 하였다.
왕건을 아끼던 최응이 일부러 붓대를 바닥에 떨어뜨려 줍는 척하며
귓속말로 "인정하는 길밖에 없다" 고 알려줘 왕건은 모든걸 인정하고
이에 궁예는 왕건이 매우 정직하다며 크게 기뻐하였다.
세월이 흘러 왕건은 자신의 군주가 저지르는 실수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지방호족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군주의 도덕심과 자비로움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그에게는 궁예가 반면교사였던 셈이다.
918년 6월에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이 왕건을 찾아가
어지러운 임금을 내리고 밝은 임금을 세우는 것이 천하의 큰 의리라며 설득하였다.
왕건은 혁명이라는 말 앞에 망설이며 두려워했지만 때는 두 번 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늘이 주어도 받지 않으면 도리어 재앙이 될 것이라는 말에 선봉에 서기로 하였다.
[삼국사기] 왕건의 혁명 때 궁궐 앞에서 왕건을 기다리는 이가 1만여 명이 넘었다.
궁예의 최후는 어땠을까.
그는 누추한 차림으로 산 속 깊이 도망치다 얼마가지 못해
보리이삭을 주워 먹다 백성들에게 붙잡혀 맞아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는 왕이 된 뒤 궁예의 행적을 부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왕건의 혁명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궁예를 폭군으로 기술하고
고려 500년을 거치면서 그에 대한 평가절하가 이루어진 까닭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궁예는 신라의 멸망을 촉진하고 새로운 국가를 세워
왕권강화를 시도하는 등의 정치적 노력을 기울였으나 호족세력의 포섭에 실패하고
신라말의 상황에 대한 역사적 이해와 사회모순에 대한 개혁의지가 부족했기 때문에
완전한 국가체제를 갖추기 전에 제거되었다는 설도 유력하다.
하지만 역사는 승자의 것이라 실제 역사에 서술된 그대로 백성들에게 맞아 죽었는지
아니면 왕건의 군대와 전투 중 죽었는지 그 사실은 누구도 알 수 없는 가정일뿐이다.
이것 또한 난세의 패자가 감수해야 할 숙명이기도 하다.
후삼국 중 유일하게 자주통일을 외치며 외세와 손잡지 않고 북벌을 외쳤던 궁예.
대한민국의 오랜 역사속에 항상 재평가가 거론되는 인물들 중 하나인 궁예.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후삼국시대의 궁예는
역사적재평가에 가장 많이 그 이름이 오르내리는 인물들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