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2000년 전, 늑도는 국제무역항이었다
2000년 전, 늑도는 국제무역항이었다 |
남해안의 아주 작은 섬 늑도. 이곳에서는 얼마 전 놀랄만한 발굴이 있었다. 늑도에서 발굴된 국제적 성격의 유물들은 이 작은 섬에서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졌고 그 범위 또한 한반도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늑도는 주변의 조류를 이용해 방어와 교역을 동시에 이루어낸 2천년 전 고대 동아시아인들의 국제 무역항이었다. |
1. 늑도에서 발견된 다양한 인골 |
옆으로 구부려 잘 때의 모습을 한 시신, 일부러 치아를 뽑아낸 흔적, 시신을 엎어서 묻은 무덤, 개의 뼈가 같이 있는 무덤 등 다양한 매장법과 풍습이 늑도라는 작은 섬에 모여있다. |
2. 다국적 문화를 지닌 주거지 |
작은 섬 늑도에서 가장 넓게 퍼져있는 것은 집자리다. 이는 인구가 과밀하고 밀집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늑도의 주거지 형태를 조사해보면 서북지방, 중국등과 교류하며 선진문물과의 접촉이 활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3. 가장 오래된 중국화폐 발견 |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중국화폐가 늑도에서 출토됐다. 바로 한무제 5년에 만들어진 반량전이다. 이 화폐는 물물교환에서 화폐경제로 발전했다는 것을 알려 주는 자료로, 늑도가 국제 무역항이었음을 말해준다. |
4. 동양의 다양한 토기들 |
늑도에서 출토되는 유물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것은 토기이다. 한반도 청동기 시대의 점토대 토기와 무문토기,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은 낙랑토기, 일본의 야요이계 토기 등이 이 작은 섬 늑도에 고루 분포되어 있다. |
5. 2천년 전 중국과 일본과의 해상교류 |
고대에는 육로보다는 수로를 통한 교역이 활발했다. 중국에서 수입된 여성용 장신구, 기하학 무늬의 박리품 등 당시 사치품으로 쓰였던 물건들이 출토되는 지역을 연결해 보면 한반도의 해상 네트웍이 그려진다. 이 해상 네트웍 상에 늑도가 있다. |
6. 교역활동과 제사유적의 관계 |
고대 항로상의 제사유적은 교역활동과 깊은 연관이 있다. 상인들이 여행중의 안전을 위해 제사를 지내기 때문이다. 서해에 죽망동이 있었다면 남해안에는 해상루트를 드나들던 상인들의 제사유적지로 늑도가 있다. 기나긴 항해를 앞두고 중국과 일본의 상인들은 이곳에서 좀 더 특별한 의미의 제례를 치루었을 것이다. |
7. 늑도는 변진 철의 수출 창구 |
철이 아주 귀하던 시절, 이미 늑도에서는 일상생활에서 쓰이던 다양한 철제품이 등장했다. 하지만 늑도는 철이 생산되지 않는 지역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귀한 철제품들이 늑도까지 전해졌을까. |
8. 늑도의 배후세력 |
중국과 한반도, 그리고 일본을 잇는 중개무역지인 늑도의 교역권을 쥐고 있는 세력은 막대한 이익을 챙기게 된다. 하지만 늑도에서는 지배세력의 흔적으로 볼 수 있는 고분이나 고급 유물들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늑도의 지배세력은 어디에 있었을까. |
경남 사천의 늑도는 삼천포와 남해군 창선도 사이 작은 섬으로, 삼한시대 중기(초기 철기시대)의 집자리, 패총, 분묘 유적이 밀집해 있는 고고학적 보고다.
섬의 규모는 46㏊ 정도로 작아 웬만한 지도에는 나타나 있지도 않지만, 1985~1986년, 1998~2001년 발굴조사 결과, 2천년전의 국제무역항이란 놀라운 사실이 확인됐다.
늑도에서는 150여기의 집자리와 많은 인골이 나왔다. 이곳의 인골은 복장(復葬)과 개를 함께 묻는 등의 특이한 장법을 보여 주목됐다.
이곳 패총에서는 또 엄청난 양의 토기조각과 함께 중국의 반량전까지 나왔다. 네모난 구멍 양쪽에 ‘반(半)’ ‘량(兩)’이란 글씨가 새겨진 반량전은 중국 한무제 5년(BC 175년)에 제작된 화폐로, 국내에서 발견된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늑도에서는 낙랑토기(BC 1세기∼AD 1세기) 파편과 일본 야요이계 토기(BC 2세기∼AD 1세기)까지 출토됐다. 이같은 유물은 중국 전한(前漢) 시기에 이미 중국~남해안(늑도)~일본 규슈를 잇는 해상교역루트가 형성됐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곳을 발굴한 부산대 박물관 이재현 조교는 “늑도는 섬 전체가 고고학 박물관을 방불케 한다”면서 “늑도인들의 문화 및 사회구조, 국제교역, 인근 소가야와의 관계 등은 앞으로 밝혀야 할 과제”라고 말했다. 늑도 유적 B지구를 조사한 부산대 박물관측은 현재 약 30톤(빵박스로 3천개)의 유물을 수습해 정리중이다.
늑도 유적의 성격에 대해 공동 발굴자인 동아대 박물관측은 ‘삼국사기’ 등에 등장하는 포상팔국 중 하나인 ‘사물국(史勿國)’의 중심지일 것으로 추정한다.
한편 사천시는 지난 85년 1월 경남도 기념물 75호로 지정된 늑도 패총을 국가지정 사적지로 승격해줄 것과 현지에 유물전시관(예산 1백억원)을 건립해줄 것을 정부에 건의해 놓고 있다.
학자들은 “삼천포~늑도~창선간 교량(3차선)이 내년 4월 개통되면 늑도 유적이 훼손될 수 있어 그 전에 체계적인 보존방안이 수립돼야 한다”고 말한다.
천년 전 늑도는 국제무역항이었다
남해안의 작은 섬 늑도. 이곳에서는 얼마 전 놀랄 만한 발굴이 있었다. 늑도에서 발굴된 국제적 성격의 유물들은 이 작은 섬에서 활발한 교역이 이뤄졌고 그 범위 또한 한반도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패총 부감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 늑도는 고대 동아시아인들의 국제무역항이었다.
우리나라 남해안은 리아스식 해안으로 해안선이 복잡하고 섬들이 빽빽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남해안에서 동서로 중간쯤 보면 고흥반도, 여수반도. 그리고 남해도와 창선도.. 여러 섬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창선도와 사천 사이를 자세히 보면. 늑도라는, 아주 작은 섬이 있는데요. 웬만큼 자세한 지도가 아니면 나오지도 않는 이 늑도에서 무려 2천년 전의 유물, 유적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늑도에서 발굴된 30여기의 무덤에서는, 인골이 빠짐없이 출토됐다. 인골들은 현재, 수장고에 보관중이다. 인골이 출토된 곳은 주거지역의 무덤 터와 패총지역. 상태가 가장 좋은 것은 4m 깊이의 패총, 가장 아래쪽에서 발견된 것이다.
매장되서 썩을 당시에 대체적으로 산성의 토양에서는 몸에서 나오는 산과 같이 전체 뼈를 빨리 삭게 하는 그러한 성질을 가진 것에 비해서 패총이 가진 것은 조개 껍데기, 즉 패각에서 패각의 알칼리 성분은 산성토양을 중화시켜 인골의 부식을 막을 뿐 아니라, 오히려 뼈가 더 단단해지게 한다. 덕분에, 늑도의 인골은 2천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완벽에 가까운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늑도의 정체가 정말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다국적 문화를 지닌 주거지
늑도에서는 거의 전 지역에서 유물과 유적이 발굴됐다. 이 중에서 가장 넓은 범위를 차지하는 건 집 자리다.
늑도는 국제 무역항이다
패총은 당시 사람들이 조개껍질을 내버리면서 만들어진 쓰레기장이지만 우리에겐 당시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유물의 보고다. 늑도의 패총에서는 엄청난 양의 토기 조각과 짐승의 뼈가 출토됐다. 이것은 중국의 화폐로 밝혀졌다. 늑도에서 발견된 화폐는 반량전으로 한무제 5년, 즉 기원전 175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2,175년 전에 만들어진 반량전.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중국화폐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늑도에서 중국화폐가 발견된 것은 당시, 늑도가 교역의 거점이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늑도에서의 교역활동을 입증하는 또다른 유물은 바로, 토기들이다. 늑도에서 출토되는 유물 중에 90% 이상을 차지하는 토기. 이 토기를 통해서도 유적 형성 당시의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데. 세세한 작업을 통해 복원된 토기들은 입구에 띠를 두른 점토대 토기로 밝혀졌다.한반도 청동기부터 나타나는 토기다. 크기와 색깔, 모양에서 한식 토기와 현저하게 다른 이것은,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은 낙랑토기다. 낙랑토기는 한반도에서는 극히 드물게 발견되는 것으로 2천년 전에도 상당한 가치를 지닌 교역품이었다. 낙랑토기 외에도 복원작업을 마친 토기들 속에서는 몇 개의 이형 토기가 더 발견된다.
반량전, 낙랑 토기, 야요이 토기들 튀어나오는 남해안 끝의 작은 섬에서 나온 유물들이 아주 대단합니다. 일본의 야요이 토기, 중국의 낙랑 토기, 그리고 반량전..이 동아시아 3국의 문물이 집중출토된 늑도는 그야말로 교역이 활발한 경제특구였습니다. 그러고보니, 주거와 매장방식에서 다양한 형태가 나온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늑도에는 중국, 일본의 상인들이 드나들고. 그들은 또, 물때를 기다리거나 다른 나라 상인을 기다리며 몇날, 며칠을 묵어가기도 했겠죠. 지금의 국제무역항 풍경과 별로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일간의 고대항로를 추적하기 위해 뗏목 항해를 시도한 적이 있다. 실험의 목적은 아무런 동력 없이 조류에만 의지하던 고대항해술로 과연 일본까지 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연안을 따라 중간기착지를 확보하기만 하면 한일간의 항해는 얼마든지 가능한 것으로 밝혀졌다. 2천년 전, 한반도 주변에는 이미 교역선이 드나드는 국제 항로가 존재했던 것이다.
늑도를 둘러싼 해상 루트는 해남 군곡리 유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해남 군곡리의 유물은 기원 전 1세기에서 3세기, 늑도와 비슷한 시기에 사용된 것이다.
군곡리에서도 중국 화폐 화천 등 교역을 입증하는 유물들이 많이 출토됐다. 군곡리 패총은 경작지를 개간하는 과정에서 발견됐다. 그런데, 해안선에 가까운 곳에 자리잡기 마련인 패총이 해남 군곡리에선 어떻게 경작지 한가운데에 형성된 것일까. 이유는 해안선의 변화에 있다. 2천년 전 해남의 앞바다는 지금보다 수심이 높아 군곡리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던 것이다.
늑도에는 외국상인들의 출입을 짐작할 수 있는 또 다른 유적이 있다. 바로, 제사유적이다.
고대 항로상의 제사유적은 교역활동과 깊은 연관이 있다. 부안의 죽막동 제사유적지. 이곳은 조선시대까지도 바다에 제사를 지내는 사랑으로 쓰였다. 기나긴 항해를 앞두고, 중국과 일본의 상인들은 이곳에서 좀 더 특별한 의미의 제례를 치뤘을 것이다. 늑도는 남해안의 대표적인 제사유적지 였다. 서해에 죽막동이 있었다면 해상루트를 드나들던 상인들의 안전을 벌기 위해 남해안엔 늑도가 있었다.
청동기를 쓰던 고대인들에게 있어 철기는 매우 귀한 도구였다. 그런데, 늑도에서 출토된 철제품은 부분 소도자와 같은 생활용품이다.
한반도에 철기문화가 유입된 시기는 대략 기원전 3세기 전후로 추정된다. 한반도 중부를 거쳐 남부에까지 도달한 것이 기원 전, 약 2세기. 고분의 부장품으로 쓰일 만큼 철이 귀했던 시기. 늑도에서는 이미 생활 철제품이 등장한 것이다.
교역이 활발했던 늑도는, 남부지역과 거의 동시에 철기 문화를 접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철의 원료는 어디서 구했을까. 늑도에서는 철이 생산되지 않았다.
늑도에 철을 공급했을 만한 철 생산지를 찾아보기로 했다. 대규모 철 생산의 흔적이 남아있는 경상남도 함안. 슬래그가 많이 나와.. 철 생산 때 나오는 슬래그로 이뤄져. 만 평 정도가.. 굉장히 철 생산을 많이 했다는 얘기겠지 이곳에는 철광석에서 철을 뽑아내는 과정에서 나온 찌꺼기 즉 슬래그가 아직도 남아있다.
당시 남해안의 철 생산 규모는 자체 공급을 하고도 남을 정도였으며 제련 기술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해상 교통로에 위치하면서 양질의 철 생산지를 배후에 둔 늑도. 늑도는 경상남도 일대의 철을 해상으로 연결하는, 수출창구였다.
지금으로 말하면 늑도는 육지의 문물, 특히 철제품을 모아뒀다가 해상으로 연결하는 물류센터이자 중국과 한반도, 그리고 일본을 잇는 중개무역지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육지쪽을 바라봐도 늑도는 교통 요지에 놓여 있습니다.
늑도의 교역을 주도한 세력은 어디에 누구였을까. 당시의 경제력으로 봤을 때 교역을 담당할 수 있으려면 벼농사 기술을 가진, 이른바 잉여생산이 가능한 세력이어야 한다.
1998년, 사천 기능대학 건립 예정지에서는 고대인들의 대규모 주거지와 지석묘 등, 상당한 정치세력의 흔적이 발견됐다. 그런데, 지석묘 행렬과 10여채의 주거지 사이에서는 또 하나의 독특한 시설이 발견됐다. 폭 5m, 너비 29m에 달하는 기둥 구멍들의 흔적이다. 이곳에 대형 고상가옥이 세워져 있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금동의 세력은 어떤 방법으로 늑도에서의 교역권을 독점했을까.
그런데, 취재과정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사천 앞바다에서 5,6노트를 넘던 유속이 늑도쪽으로 오면 2노트 수준으로 현저히 떨어지는 것이다.
늑도는 교역선이 지날 수 밖에 없는 고대항로의 길목이었다. 또한 빠른 조류를 피해 배를지나가기만 하면 안정적으로 정박해서 다음 항해를 준비할 수 있는 풍요로운 포구였다. 2천년 전의 늑도는 주변의 조류를 이용해 방어와 교역을 동시에 이뤄낸 천혜의 국제무역항이었다.
2천년 전, 늑도에서는 한중일간의 교역이 활발했습니다. 그러나, 항해술이 점차 발달하고 교역의 규모가 커지면서 늑도는 국제무역항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됩니다. 더 큰 배들이 드나들 수 있는 큰 항구가 그 역할을 이어받게 된 거죠. 한반도의 철기문화가 본격적으로 발전하면서 정치경제의 중심이 낙동강 일대로 옮겨간 것도 늑도가 수명을 다한 원인이 됩니다.
늑도를 통해 우리는 중국에서 일본에 이르는 고대항로를 확인했고 한중일의 문물을 고루 갖춘 국제성을 또한 확인했습니다. 남해안 다도해 속에 묻혀 찾아보기도 힘들만큼 작은 섬이지만 늑도는 우리에게 많은 걸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건 바로, 2천년 전 한반도엔 이미 국제적인 무역항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삼국시대가 열리고 그 화려한 역사가 기록되기 전부터이 땅의 선조들은 동아시아 교역의 중심에 우뚝 서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