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스페셜100선

99 기생 홍랑의 지독한 사랑

사랑의고향길 2013. 9. 28. 21:56

기생 홍랑의 지독한 사랑 
묏버들 가려 꺽어 보내노라, 임에게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나인줄 여기소서
- 홍랑 
1. 홍랑의 연시
2000년 11월, 조선 중엽의 대표적인 연시로 꼽히는 홍랑의 시 원본이 공개됐다. 이 서첩에는 가람 이병기 선생의 발문이 있는데 그는 이 시의 내용과 표현이 “보배”와 같다고 평가하고 있다. 또한 홍랑의 시조는 우리 문학사에서 아름다운 연시로 손꼽힌다.
2. 홍랑의 연인 최경창
홍랑이 사랑했던 연인 최경창은 조선 선조 때의 시인으로, 당대 문인이였던 송강 정철과 교류하면서 조선 중기 8대 문장으로 불렸던 인물이다. 또한 율곡 이이는 최경창의 시를 가르켜 '청신준일'하다고까지 평할 정도였다.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 확실치않은 홍랑과 그녀의 시가 조선 중기의 것으로 알려질 수 있었던 것도 빼어난 시인 최경창과의 사랑이야기가 전해져왔기 때문이다. 이들의 사랑에 대한 일화는 조선시대 기생들의 이야기를 담고있는 ‘조선 해어화사’에 소개되어 있다.
3. 만남과 첫 번째 이별
두 사람의 행로를 추적할 수 있는 기록은 최경창이 써 놓은 서첩의 서문이다. 최경창은 일찍이 탁월한 문장과 음악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과거 급제후 그는 함북 경성에 평사로 부임한다. 시와 풍류를 아는 젊은 관리 최경창과 재색을 겸비한 경성의 이름난 기생 홍랑. 정신적인 교감이 가능했던 그들은 사랑에 빠지지만 최경창의 경성에서의 임기가 끝나 이별을 하게 된다.
4. 사랑은 파직을 부르고
서울로 돌아온 최경창은 병으로 몸 져 눕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홍랑은 7일 밤낮을 걸어 한양에 도착한다. 그런데 이런 두 사람의 이야기가 조정에 들어가 최경창은 파직을 당한다. 때는 명종비의 죽음으로 국상기간, 더욱이 동서인으로 나뉘어 당쟁이 자리잡던 시절이라 이들의 행각이 구실이 되었던 것이다.
5. 죽음으로 인한 이별 그 후
홍랑의 일로 파직 당한 뒤, 최경창은 평생을 변방의 한직으로 떠돌다 마흔 다섯의 젊은 나이로 객사하고 만다. 이승에서 그들의 사랑은 신분의 차이와 죽음으로 계속될 수 없었다. 최경창이 죽은 뒤 홍랑은 스스로 얼굴을 상하게 하고 그의 무덤에서 시묘살이를 시작한다. 홍랑이 죽고 난 뒤 해주 최씨 문중은 그녀를 한 집안 사람으로 여겨 장사를 지냈다. 그리고 최경창 부부의 합장묘 바로 아래 홍랑의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6. 재색을 겸비했던 조선의 기생
조선시대 기생은 ‘여악’이라 불렸다. 그들은 주로 양반 계층과 어울려야 했던 만큼 각종 악기와 가무, 문장을 배웠다. 관동지방 기녀들은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을 잘 불렀고, 함흥의 기녀들은 용비어천가를 잘 읊었다고 한다. 비록 천민 신분이었지만 기생들은 예술보존자의 역할을 해온 것이다.
7. 홍랑의 후손을 찾다.
홍랑과 최경창의 사랑이야기를 소상히 적고있는 <회은집>에 따르면 유일자(有一子), 즉 아들 한 명을 두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그는 누구일까? 취재진의 추적결과 최경창의 서자 최즙을 찾을 수 있었다. 그 후손은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다. 서른 네살의 최경창이 홍랑을 만나 함께 지낸 것은 불과 6개월 남짓. 짧은 사랑이었지만 그 뜨거움은 400년의 세월에도 식지않고 후대의 가슴속에 남아있다. 

 

 

 

조선 선조 때의 함경남도 홍원 출신의 이름난 예기(藝妓)이자 재색을 겸비한 여류시인이었던 홍랑(洪娘)은 기생으로서는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위치까지 올라갔던 인물이다.

조선시대 최고의 명문가라고 할 수 있는 해주 최씨의 문중 산에 그녀의 무덤과 비석이 버젓이 있으며, 그 문중에서는 지금까지도 해마다 시제와 제사를 홍랑에게 지내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기생으로는 유일하게 사대부의 족보에까지 올라간 홍랑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유교적 질서가 엄격했던 조선시대에 시대적 질곡을 뛰어넘어 천민의 신분으로 양반집 선산에 그의 유골이 묻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것은 역사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파주에 있는 해주 최씨 문중 산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는 홍랑의 이 무덤을 근거로 그녀의 애틋한 삶을 추적해 들어가 보면 역사속의 엄연한 현실로 각인된 한 여인의 지고한 사랑과 정신을 만날 수 있어서 그 감동은 더욱 커진다.


함남 홍원 출신인 홍랑은 경성(鏡城) 관아의 관기였다. 기생의 출신으로 비록 신분은 비천했으나 문학적인 교양과 미모를 겸비했던 홍랑은 누구나 다 꺾을 수 있는 노류장화로 머물지 않았다.

 

홍랑과 최경창의 묘소를 함께 찍은 사진, 화면 위가 최경창의 묘소

 

교방(敎坊)에서 각종 악기와 가무를 단련하면서도 문장과 서화 등의 기예 익히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홍랑은 관아의 연회장에서 흥을 돋우고 미색을 흘리는 여느 기생과는 그 품성과 재주가 남달랐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 문학적 소양과 재주는 이미 양반 사대부나 유명한 시인가객들에 뒤지지 않았으며, 일부종사를 맹목으로 실천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기생이었지만 자신의 정절을 받쳐 사랑할 운명적 만남을 꿈꾸며 몸을 함부로 놀리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남자들의 유혹은 도를 더해갔으나 홍랑은 아무에게도 자신의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런 홍랑의 아름다운 재색과 지혜는 마침내 당시 삼당시인(三唐詩人) 또는 팔문장(八文章)으로 명성이 높았던 고죽(孤竹)최경창(崔慶昌)을 만나면서 세세생생에 변하지 않을 뜨거운 사랑으로 내뿜어지게 된다.

 

 최경창 묘비

 

  고죽 최경창은 탁월한 문장가인데다 음률을 잘 알고, 악기를 다루는 재주 또한 뛰어났던 인물인데, 과거에 합격한 5년 후인 1573년(선조 6년)에 함경북도 경성 지방의 북도평사(北道評事)로 부임하게 된다.


변방에 위치한 경성은 옛 부터 국방의 요지로 취급되는 대단히 중요한 군사 지역이었으므로 가족을 동반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최경창은 이미 처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홀로 부임하여 오지 중의 오지인 경성에 머물러야 했다.

 

당시 최고의 문장가로 손꼽히던 고죽 최경창과 경성의 최고 기생이었던 홍랑의 만남은 어쩌면 운명적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관기였기 때문에 관리와 만나는 일은 매우 자유로웠을 것인데, 홀로 생활을 하던 최경창에게 홍랑은 운명적 사랑에 불을 붙였던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의 농밀한 사랑은 날이 갈수록 더욱 뜨거워져 한 몸처럼 붙어서 떨어질 줄 몰랐다. 결국 홍랑은 최경창과 동행하여 군사작전 임무를 수행하는 막중(幕中)에서 함께 기거하며 부부처럼 정을 쌓아가게 된다. 그러나 이듬해 봄, 두 사람의 사랑에 이별이라는 엄청난 시련이 찾아온다.


  임기가 끝난 최경창이 서울로 돌아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노비와 비슷한 신분이었던 기생은 관아에 속해 있는 존재였기 때문에 법으로 강력히 구속당하고 있어서 해당 지역의 관청에서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했다.


  뜻밖의 이별 앞에 선 홍랑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것 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최경창의 상경은 홍랑에게 있어서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으니 이별을 눈앞에 둔 그녀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홍랑은 조금이라도 더 그와 함께 있기 위하여 서울로 가는 최경창을 배웅하며 경성에서 부터 멀리 떨어진 쌍성(雙城)까지 태산준령을 넘고 넘어서 며칠 길을 마다 않고 따라갔다.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두 사람의 발길은 이윽고 함관령(咸關嶺)고개에 이르렀고, 더 이상 경계를 넘을 수 없었던 홍랑은 사무치는 사모의 정을 뒤로 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 때 그녀의 눈에 띄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길 옆에 피어있는 산버들이었다.


울음을 삼키면서 버들가지에 다가간 홍랑은 그 가지를 꺾어 고죽에게 주며 구슬프게 시조 한 수를 읊었으니 우리가 지금도 외우고 있는 “묏버들 가려꺾어”이다.  이미 날은 저물고 비는 내리는데 피할 수 없는 이별 앞에서 홍랑도 최경창도 그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임의 손에

                                 주무시는 창 밖에 심어두고 보옵소서.

                                밤비에 새잎이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님에게 바치는 순정은 잎이 시들었다가도 심기만 하면 다시 싹을 틔우는 묏버들처럼 항상 그의 곁에 있겠다고 다짐한 이 연정가(戀情歌)처럼 그가 떠난 뒤 홍랑은 그리움으로 눈물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함관령에서 홍랑과 애끓는 이별을 뒤로 하고 떠나온 최경창 역시 서울에 돌아온 뒤 곧바로 병으로 자리에 누워 그해 봄부터 겨울까지 일 년 내내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최경창이 아파서 누워있다는 소식은 바람에 바람을 타고 멀고 먼 경성의 홍랑에게도 들렸으니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다는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그녀가 아니었다.


이 소식을 들은 홍랑은 곧바로 경성을 출발하여 서울을 향해 길을 나섰고, 밤낮으로 쉬지 않고 길을 재촉하여 7일 만에 서울에 이르렀고, 곧 바로 병석에 누워 신음하는 최경창을 찾아 갔다.


거의 2년만에 최경창을 다시 만난 홍랑은 그의 수척함에 마음이 아팠지만 잠시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조석으로 병수발을 들었다. 그 결과 최경창의 건강은 하루가 다르게 빠른 속도로 차츰 회복되어 갔다.호사다마라고 했던가! 두 사람의 재회는 뜻밖의 파란을 몰고 왔다.


 홍랑과 최경창이 함께 산다는 소문은 최경창이 홍랑을 첩으로 삼았다는 이야기로 까지 비화되었고, 이것이 문제가 되어 1576년(선조 9년) 봄에는 사헌부에서 양계(兩界)의 금(禁)을 어겼다는 이유로 그의 파직을 상소하기에 이른다. 결국 최경창은 당쟁의 세력다툼이 치열한 당시 사회의 표적이 되어 파직 당했고, 홍랑은 나라의 법을 원망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경성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양계의 금’이라고 하는 것은 함경도와 평안도 사람들의 서울 도성출입을 제한하는 제도를 말하는데, 함경남도의 홍원 출신인 홍랑이 서울에 들어와 있는 것을 문제로 삼은 것이었다.


거기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때는 마침 명종 왕비인 인순왕후가 돌아가신지 1년이 채 안 된 국상 중이라 홍랑의 일은 결국 최경창을 파직까지 몰고 가는 불씨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두 연인의 애틋한 재회는 파직과 이별로 막을 내렸지만 최경창은 자신을 향한 홍랑의 지극한 사랑을 가슴 깊이 새기게 되었는데, 안타깝고 가여운 자신의 마음을 ‘송별’이란 시에 담아 떠나는 홍랑에게 주었다고 한다.

 

 

 

  말없이 마주보며 유란을 주노라

                                오늘 하늘 끝으로 떠나고 나면 언제 돌아오리

                                    함관령에 올라서 옛노래를 부르지마라

                                     지금까지도 비구름에 청산이 어둡나니

 

  옛날, 함관령에서 이별할 때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보내며 이 가지를 자신처럼 여겨 달라 했던 그녀의 시에 최경창은 난초 한포기를 건네는 것으로 화답하며 자신의 애끓는 심정과 쓸쓸한 홍랑의 마음을 위로했던 것이다.


 아녀자의 몸으로 먼길을 걸어와 상경해 만난 지 7년 후 1582년 최경창은 다시 함경도로 부임했고 이듬해 선조로부터 성균관직강을 제수 받아 상경 중 객관에서 45세로 죽는다. 이때 홍랑은 고죽의 운구를 따라와 파주시 월롱면 영태리에 있는 묘소에서 삼년 간 시묘살이를 한다.


멀리 함경도 땅에서 사랑하는 임과 다시 만날 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홍랑에게 날아든 최경창의 사망소식은 그녀로 하여금 몸조차 가눌 수 없을 정도의 슬픔을 안겨주었다. 죽은 자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死者不可還生) 법이니 이제는 두 번 다시 그를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통한에 홍랑은 목을 놓아 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홍랑은 곧 바로 마음을 추슬러야만 했다. 객사를 했으니 무덤을 돌보는 사람이 마땅히 없을 것이란 사실에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최경창의 묘소와 묘비

 

  최경창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파주에 당도한 홍랑은 무덤 앞에 움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시묘살이를 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생각 끝에 방법을 생각해낸 홍랑은 몸을 씻거나 꾸미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특히 다른 남자의 접근을 막기 위해 천하일색인 자신의 얼굴을 훼손하여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추녀로 만들었다.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홍랑은 또한 얼굴에 숯검정칠을하여 아무도 곁에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런 그녀가 시묘살이 하는 것에는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으니 그 덕분에 홍랑은 최경창의 삼년상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3년간의 상을 마친 뒤에도 고죽의 무덤을 떠나지 않은 채 그의 영혼 앞에서 살다가 죽으려 했던 홍랑이었지만 하늘은 그녀에게 그런 작은 행복조차도 허락하지 않았으니 바로 임진왜란의 발발이 그것이었다.

 

고죽과 홍랑의 묘소 전경

 

홍랑 한 몸이야 사랑하는 임의 곁에서 그 즉시 죽더라도 여한이 없지만 그가 남긴 주옥같은 문장과 글씨들을 보존해야 했기 때문에 죽을 수도 없었던 것이다. 최경창이 남긴 유품을 챙겨서 품에 품은 홍랑은 다시 함경도의 고향으로 향했는데, 그로부터 7년의 전쟁 동안 그녀의 종적은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전국토가 황폐화할 정도로 잔혹했던 전쟁 중에서도 오늘날까지 고죽 최경창의 시와 문장이 전해지게 된 것은 지극한 사랑과 정성으로 그것을 지켜온 홍랑의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직 한 사람만을 향해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살랐던 홍랑은 전쟁이 끝난 뒤 해주 최씨 문중에 최경창의 유작을 전한 후 그의 무덤 앞에서 한 많은 일생을 마감하게 된다.


홍랑이 죽자 해주 최씨 문중은 그녀를 집안의 한 사람으로 받아들여 장사를 지냈다. 그리고 최경창 부부가 합장된 묘소 바로 아래 홍랑의 무덤을 마련해 주었으니 현재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다율리에 있는 해주 최씨의 문중 산에 그녀의 무덤이 있다.


죽음조차도 갈라놓을 수 없었던 두 사람의 애틋한 사랑은 양반 사대부 문중까지도 감동시켰으니, 비록 천민의 신분이었지만 최경창의 묘소 바로 아래에 그녀를 머물게 하였던 것이다.


숨 막히는 사랑과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절개로 홍랑이 지켜냈던 최경창의 유작은 그 후「고죽집」이라는 문집으로 만들어졌고, 그의 글은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연을 지니고 있는 홍랑의 무덤 옆에는 1980년대에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에서 세운 홍랑가비가 부끄러운 듯 다소곳이 서있는데, 그 시비가 매우 인상적이다. 돌로 만들어 세운 이 시비는 앞면이 고죽시비라 되어 있고, 뒷면이 홍랑가비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가비는 처음에는 마을 뒷편에 세워졌으나 나중에 묘역 옆으로 옮겨서 지금은 묘역 옆에 있다

 

이 비석은 살아서는 만남과 이별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던 두 사람의 사랑이 죽은 후에는 영원히 함께 있으라는 뜻을 지닌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을 세운 사람의 정성과 재치를 느끼게 하는 노래비가 아닐 수 없다.

◆ 홍랑의 후손을 찾다. ◆

홍랑과 최경창의 사랑이야기를 소상히 적고있는 <회은집>에 따르면 유일자(有一子), 즉 아들 한 명을 두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그는 누구일까? 취재진의 추적결과 최경창의 서자 최즙을 찾을 수 있었다. 그 후손은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다. 서른 네살의 최경창이 홍랑을 만나 함께 지낸 것은 불과 6개월 남짓. 짧은 사랑이었지만 그 뜨거움은 400년의 세월에도 식지않고 후대의 가슴속에 남아있다.

 

가람 이병기가 시조와 한시가 진품임을 확인한 글  

 

 

 

 

***기생 홍랑의 지독한 사랑 이야기***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의 해주 최씨 선산에는 뜻밖에도 조선 선조 시대의 기생 홍랑이 묻혀있다. 홍랑의 무덤 바로 위 편에 보이는 또 하나의 무덤이 한 사대부와 그 부인의 合葬墓이다. 기생 홍랑이 명문 사대부 집안의 선산에 묻혀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함께 있는 부부의 합장묘와는 어떤 사연이 얽혀있는 것일까? 사대부 집안의 선산에 묻혀있는 기생 홍랑, 뭔가 다른 느낌이 든다. 엄격한 신분제도가 존재했던 조선시대의 기생은 노비나 다름없는 천민 신분이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 속에서 기생 홍랑은 어떻게 명문 사대부 집안의 선산에 그것도 부부 합장묘의 바로 아래 묻힐 수 있었을까? 그 사연을 밝힐 수 있는 단서가 된 것은 무덤 근처 비석에 새겨져 있는 한편의 시조이다.

 

 

묏 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임에게.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나인가도 여기소서.

 

최경창의 후손들이 모여 살고 있는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에는 두 사람의 만남에 관한 또 다른 이야기가 전해오기도 한다. 고죽의 후손이 전하는 얘기는 이러하다. “고죽 할아버지는 오랑캐를 지키러 나가셨다가 그곳의 원님이 홍랑을 데리고 같이 약주를 대접하며 주거니 받거니 서로 시를 읊는데 홍랑이 우리 할아버지 시를 많이 읊더래요. 그래서 누구 시를 좋아하냐고 물어보니까 고죽의 시를 좋아한다고 하더래요. 그래서 웃으면서 내가 최경창이라고 고죽이라고 하셨나봐요.”

 

고죽 최경창은 당대의 문인이었던 송강 정철 등과 교류하면서 조선 중기 8문장으로 고죽집사로 불렸다. 특히 당시에 뛰어났는데 율곡 이이는 그의 시를 가리켜 “청신준일”하다고까지 평했을 정도였다. 시와 풍류를 아는 젊은 관리 최경창과 재색을 겸비한 경성의 이름난 기생 홍랑. 그들은 곧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고죽은 당시를 이렇게 적고 있다. 홍랑이 자신의 처소인 경성 병영에 따라와 함께 지냈다는 내용인데 관기의 신분이었던 홍랑이 최경창과 함께 사는 일이 과연 가능했을까. 이에 관해서 실록에는 조선시대 변방에서의 기녀 풍속을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세종 18년의 내용이다. 세종실록은 “군사들이 가정을 멀리 떠나서 추위와 더위를 두 번씩이나 지나므로 일상의 사소한 일도 어려울 것이니, 기녀를 두는 게 합당하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당시 변방의 부대에 기녀가 사는 게 일반적이었음을 명시한 것이다. “기생들이 제일 많았던 곳이 군사기지. 두 번째가 관아였다. 술과 노래를 제일 많이 제공하고 방직기는 바느질, 빨래, 이런 군대들의 수발을 맡아 주었고 심지어는 잠자리까지 드는 역할을 하여 변방 군대와 방직기는 현지에 있는 처라고 할 수 있다.” 변방에서 겨울을 보내야 했던 최경창에게 있어 홍랑은 어떤 존재였을까? 비록 기생 신분이지만 문학적인 교양과 미모를 겸비했던 홍랑이었다. 두 사람이 단순한 연인 사이를 넘어서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시와 풍류를 나눌 수 있는 관계로까지 발전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양반은 기녀들이 천한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재색을 겸비했기 때문에 그들을 사랑하며 시를 나눴고 이를 바탕으로 정신적인 교감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방 관리와 기생의 사랑에는 애초부터 한계가 있었다. 관리의 임기가 끝나면 사랑도 지속되기 어려웠던 것이다. 경성에서의 임기를 마친 최경창이 서울로 돌아가게 되면서 두 사람도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의 이별이다. 홍랑은 함경도 경성에서부터 한양까지 며칠 길을 마다 않고 따라온다. 그러나 이별을 피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조선시대 기생은 노비였기 때문에 해당지역을 벗어나서 다른 지역으로 갈 수도 없었다. 소유권이 해당지역 관청에 있었다. 기생과 관리의 사랑은 많았지만 지방을 벗어나면 사랑도 계속될 수 없는 게 현실이었다. 최경창의 경우에도 최경창이 북도평사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며 홍랑을 데려갈 수 없었던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최경창은 당시의 상황을 계속해서 적고 있다. ‘나와 이별한 뒤 홍랑이 함관령에 이르렀을 때 날이 저물고 비가 내렸다. 이곳에서 홍랑이 내게 시를 지어 보내왔다.’ 이별의 슬픔속에 홍랑은 혼자 경성으로 돌아가면서 마음이나마 고죽 곁에 머물기를 원했다. 서울로 떠나간 고죽에게 적어보낸 시 한 수. 여기에 홍랑이 담은 것은 그렇게 간절하고도 지극한 사랑, 바로 그것이었다. 조선시대에 기생은 공물, 혹은 관물이라고 불렀다. 다시 말해 공동의 물건으로 관아에 속해있는 존재란 뜻이다. 이것을 증명해주는 사료 가운데 하나가 바로 기생들의 명부인 기안(妓案)이다. 조선 후기 한 감영의 기안을 보면 40대에서부터 10대까지 관아에서 관리하는 기생들의 이름과 나이가 세세하게 기록돼 있다. 이들 기생은 모두 관아에 속해 있으면서 연회는 물론 각종 접대에 동원돼야하는 일종의 관노비였다. 때문에 이들의 삶은 그 지방의 관리들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조선시대 여염집 여성들에게는 一夫從事가 절대적인 도덕관념이었지만 기생만은 예외였고 누구도 기생에게 의리나 절개를 요구하지 않았다. 부임해왔던 관리가 머물다 떠나가면 또 다른 사람이 찾아들기 마련이었고 그러면 또다시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게 기생들의 보편적인 삶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경성에서 함께 겨울을 보낸 최경창이 서울로 떠난 뒤에 홀로 남겨진 홍랑. 그녀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사랑은 결국 파직을 불렀다. 선조 9년인 1576년 봄. 사헌부는 최경창의 파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린다. 선조 실록을 보면 “최경창은 식견이 있는 문관으로서 몸가짐을 삼가지 않고 북방의 관기(官妓)를 불시에 데리고 와 사니 이는 너무도 기탄 없는 일이니 파직을 명하소서.”하는 상소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는 최경창이 경성을 떠나 온지 벌써 2년이나 지났을 무렵이다. 그런데 이미 이별한 두 사람이 함께 살고 있다는 이 상소의 내용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최경창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을해년에 내가 병이 들어 봄부터 겨울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홍랑이 이 소식을 듣고 7일 밤낮을 걸어 한양에 도착했다.’ 단지 병석에 누운 고죽을 걱정해 찾아왔던 홍랑의 행동이 파직으로까지 비화된 이유는 당시의 시대 상황에 있었다. 최경창은 자신의 기록에서 ‘그때 양계의 금이 있었고 국상 때였다.’고 적고 있다. 양계의 금, 이것은 함경도와 평안도 사람들의 도성 출입을 제한하는 제도를 말한다. 당시 양계는 중국과 접경한 변방이었고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해서는 이 지역을 번성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양계인들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엄격하게 막았다. 다른 지방 사람과 결혼하는 것조차 금할 정도였다. 더구나 당시는 13대 명종비 인순왕후가 죽은지 1년이 채 안됐을 때였고 사회의 분위기도 평소와는 달랐다. 허균의 경우에도 국상 기간에 기녀와 관계해서 파직 당하기도 했다. 이것은 삼강오륜을 깨뜨리는 일이라고 봤던 것이다. 홍랑의 경우도 마침 국상기간이었고 심지어 동인과 서인의 당쟁기간이었기 때문에 정적의 좋은 표적거리가 됐던 것이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최경창을 찾아 서울로 온 홍랑의 일은 결국 ‘최경창이 홍랑을 첩으로 삼았다’고까지 비화되고 말았던 것이다. 조선시대 문헌에는 “관리들이 아름다운 기녀를 모두 빼가서 관아에는 못생긴 기녀만 남았다” 는 내용이 여러 차례 나온다. 당시에 성행했던 ‘대비정속’이란 풍습을 풍자한 것이다. 관아의 관물인 기녀를 빼내려면 다른 여자를 대신 채워놓아야 했다. 이것이 바로 ‘대비정속’인데, 조선시대에는 이와 관련한 문제가 끊이질 않았다. 그러나 실제로 기녀의 ‘대비정속’에 관련된 양반이 벌을 받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기녀의 경우에 대비정속은 불법이었다. 만약 허용했다면 양반들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빼돌렸을 것이다. 결국 최경창은 파직 당했고 홍랑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경성에서 이별한 뒤 2년만에 병석에 누운 최경창을 찾아왔던 홍랑. 그 짧은 재회는 최경창의 파직과 이별로 막을 내리고 말았던 것이다. 두 번째 이별이었다. 고죽 최경창. 그는 비록 당대에 똑똑한 관리였고 뛰어난 문장가로 꼽혔지만 그 벼슬길은 두 번이나 함경도로 좌천되는 등 순탄하지 못했다. 그러나 숙종 대에 이르러 이조판서로 추서 됨으로서 후대의 인정을 받는다. 최경창의 사후에 출간된 <고죽집>보자. 우암 송시열이 서문을 썼는데 “내가 젊었을 였때 고죽의 시사를 듣고 보니 과연 근세에 뛰어난 가락이었다” 는 말로 시작을 하고 있다. 이 서문에서 우암은 고죽의 시뿐 아니라 그 사람됨까지도 크게 평가하면서 율곡 이이의 표현을 인용하고 있는데 즉 “율곡선생이 말하기를 고죽은 그 성품이 깨끗하고 하는 일마다 선이 되는 사람이니 그 청고한 절조는 사람마다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렇게 당대의 학자, 문인들로부터 인정받을 정도로 고고한 성품을 지녔고 또 파직을 감수하면서까지 한 여인을 사랑한 고죽 최경창. 그리고 파직과 이별, 죽음으로 이어지는 시련 속에서도 오히려 더욱 꿋꿋했던 것이 고죽 최경창과 홍랑의 사랑이다. 홍랑의 일로 파직 당한 뒤 최경창은 평생을 변방의 한직으로 떠돌았고 선조 9년인 1583년 마흔 다섯 젊은 나이로 객사하고 만다. 명문가에 태어나 당대에 이름을 날린 문장가로서는 쓸쓸하기 이를 데 없는 죽음이었다. 그것은 홍랑과 최경창의 사랑 역시 이승에선 계속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홍랑은 고죽과의 이 마지막 이별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조선 중기의 학자 남학명은 문집 <회은집>에서 최경창이 죽은 후 홍랑의 행동을 이렇게 적고있다. “고죽몰후 자훼기용수묘” 즉, 고죽이 죽은 뒤 홍랑은 스스로 얼굴을 상하게 하고 그의 무덤에서 시묘살이를 했다는 것이다. 전해오는 얘기로는 3년이란 세월을 움막을 짓고 세수도 안하고 머리도 안 빗고 지냈다고 한다. <춘향전>에는 변사또의 수청을 거절한 춘향이 옥에 갇히는 대목이 나온다. 노류장화와 같이 누구나 꺾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기생이 주위의 협박과 유혹을 물리치고 수절한다는 것은 이처럼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상황속에서 고죽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 홍랑은 스스로 얼굴에 상처를 냄으로써 다른 남자의 접근을 막았던 것이다. 홍랑이 신분의 한계 속에서도 절개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지극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일부종사가 여성들의 큰 덕목이었나 기녀가 남편을 두는 것은 금기였고 수절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웠다. 그래서 강계지방 한 여인은 수절하기 위해서 허벅지에 쑥뜸질을 해서 얼굴을 훼손하면서까지 수절했다. <회은집>은 계속해서 이런 기록을 남겨놓고 있다. “난리가 일어나자 홍랑은 고죽의 시집(詩集)을 지고 피난하여 병화를 면하게 했다 3년상을 마치고도 무덤을 지키던 홍랑은 전쟁이 일어나자 어쩔 수없이 피난길에 오른다. 고죽이 남긴 시들을 모두 정리해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다. 조선시대 뛰어난 시인이었던 고죽의 시가 지금까지 전해지게 된 것은 이 같은 홍랑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홍랑이 죽고 난 뒤 해주 최씨 문중은 그녀가 비록 천한 신분의 관기였으나 집안 사람으로 여겨 장사를 지냈다. 그리고 최경창 부부의 합장묘 바로 아래 홍랑의 무덤을 만들어준다.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는 문중의 대를 이어 전해왔고 후손들은 지금까지도 예를 갖춰서 홍랑의 묘를 돌보고 있다. 후손들은 “얼마나 갸륵한가? 할아버지를 그렇게 사모하시고 그리워하고... 그래서 우리가 성묘할 때 꼭 여기 와서 음복을 한다” 고 말하고 있다. 기생 홍랑. 그녀가 신분의 차이와 죽음의 이별을 극복하고 이처럼 고죽의 곁에 머물게된 것은 후세의 마음까지도 감동시킨 그 지극한 사랑 때문이었다.

 

 

 

 

기생에 대해서 우리가 흔하게 갖고 있는 이미지는 어떤 걸까? 규방에 숨어 외출조차 자유롭지 못했던 여염집 여인들과 달리 비교적 자유롭고 미색을 갖췄기 때문에 여인을 소재로 한 풍속화에서 주로 모델이 됐던 기생. 하지만 그림 속에 나타난 그들의 모습은 홍랑의 삶과는 다른 부분이 많다. 당대 문장가였던 최경창의 사랑을 받을 만큼 시적 재능이 풍부했고, 사랑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예쁜 얼굴은 물론 일생을 희생함으로써 어느 열녀 못지 않은 절개를 보여준 기생 홍랑. 그녀는 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조선시대 기생의 풍속이나 그 일화를 다룬 책에는 홍랑과 최경창의 사랑 이야기가 어김없이 실려있다. 그러나 그 책들 어디서도 홍랑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홍원 태생 기생이란 한 마디뿐이다. 홍랑과 최경창의 이야기를 비교적 자세히 적고 있는 <회은집>. 여기서도 홍랑에 대한 설명은 “홍원기생 홍랑은 절개를 사랑하고 자색이 아름다웠다"는 한 구절에 불과하다. 현존하는 조선시대 문헌을 대부분 소장하고 있는 규장각에는 조선시대 노비들의 명부인 ‘노비안’이 일부 남아있다. 그러나 현재 규장각에 남아있는 기안(妓案)은 조선후기 그것도 몇몇 지방의 것에 불과하다. 홍랑의 이름은 결국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최경창과 만났을 당시 홍랑의 나이는 몇이었을까? 이를 짐작해보기 위해서는 당시 기생들의 일반적인 나이를 알 필요가 있다. 규장각에 있는 전라감영 기안의 일부를 보면 12, 3세 정도의 어린 기녀들이 상당수 눈에 띈다. 이들을 가리켜 ‘동기(童妓)’라고 불렀다. 그러나 기안에 올랐다고 해서 바로 기녀 역할을 하지는 않았다. 이들은 우선 관아에서 각종 잔신부름을 돕는 한편, 기생을 관리하는 기관이었던 교방에서 각종 소양을 배웠다. 기녀로서 본격적인 역할을 하게되는 것은 보통 열여섯살 정도. 이때부터는 관아에서 열리는 각종 행사나 연회에 불려 나가야했고 때로는 양반의 수청도 들어야했다. 30세가 넘으면 기녀에서 물러나는데 퇴기(退妓)라고 했다. 50이 되면 기역에서 면제된다. 홍랑은 소시적에 사랑을 받았다고 하는데 20대 이전의 나이. 16세 가량의 나이로 추정할 수 있겠다. 비록 많지 않은 나이였지만, 당대의 문장가였던 최경창과 시를 나눌 수 있었던 홍랑. 그녀가 이 같은 교양을 갖출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조선시대에 기생은 ‘여악’이라고도 불렸다. 이것은 기생의 본래 역할에서 나온 말인데 궁중이나 관아의 연회에서 흥을 돋구는 사람을 뜻한다. 때문에 서울의 기생들은 ‘장악원’에서, 그리고 지방 관아의 기생들은 교방을 통해서 각종 악기와 가무를 배웠다. 주로 양반 계층과 어울려야했던 만큼 문장과 서화를 익히는 것도 중요했다. 이 같은 소양을 바탕으로 사대부와 어울렸던 기생들은 우리 문학사에 중요한 자취를 남겼다. 현재까지 전해오는 조선시대 시조 3천수 가운데 여성이 지은 것은 90여편. 그 가운데 대부분은 기생의 작품이다. 조선남성의 시가는 임금을 사랑하는 연군가나 백성을 가르치겠다고 읊조리는 훈민가 일색이인데 기생의 시는 사랑스럽고 비극적이며 눈부신 아름다움이 있고 진정한 소양을 갖추고 있으며 격조도 있다. 아주 탁월한 문학성을 갖추고 있기도 하다. 당대 최고의 풍운아였던 허균이 부안 기생 매창을 사랑한 것이나 개성 명기 황진이가 수많은 학자 문인들과 교류했던 것은 기생들의 문학적 소양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보여준다. 양반가의 남자만이 유일한 문학계층이었던 조선시대에 기생들은 웬만한 시인가객 못지 않은 뛰어난 재주를 지녔던 것이다. 비록 천민 신분이지만 재색과 지혜를 갖추고 있었던 조선시대 기생. 그들은 사대부 문화의 한 축을 이루면서 양반과 풍류를 나눴고 이들과의 사랑을 통해 수많은 애정시가를 남기기도 했다. 사랑과 이별의 정한을 솔직하게 읊은 기생의 시는 우리 여류 문학사에 중요한 의미로 남아있다. 사대부와 당당하게 풍류를 나누고 자유롭게 사랑했던 조선시대의 기생. 그래서 선비의 말을 알아듣는 꽃, 해어화(解語花))라 불려왔다. 최경창의 연인 홍랑 역시 바로 그런 해어화의 한사람이었던 것이다. 선비의 말을 알아듣는 꽃, 그래서 꽃중의 꽃으로 불렸던 조선시대의 기생 해어화. 그 진정한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가를 홍랑의 삶은 보여주고 있다. 죽은 고죽을 위해 무덤을 지키고 일생을 수절한 홍랑. 그녀가 해주 최씨 집안에 받아들여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보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홍랑의 사랑은 이것으로 끝을 맺고 말았을까? 홍랑의 삶을 되짚어보면서 그녀가 고죽과의 사랑을 통해 세상에 남긴 또 하나의 흔적이 있다는 희미한 기록이 있다. 바로 두 사람 사이에 아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사실일까? 만약 사실이라면 그는 대체 누구일까? 홍랑과 최경창의 사랑 이야기를 비교적 소상하게 적고 있는 <회은집> 그 가운데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마지막 대목이다. 홍랑과 최경창이 ‘유일자’, 즉 아들 한 명을 두었다는 것이다. 이 기록이 과연 사실일까? 해주 최씨 대종회에는 지난 90년에 만들었다는 해주 최씨 대동보가 있다. 여기에는 최경창이 장남 집과 차남 즙. 두 아들을 둔 것으로 기록돼 있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어느 쪽이 홍랑의 아들인지는 확인하기는 어려웠다. 해주 최씨 5세손이 만들어 대물렸다는 족보를 보면 최경창의 부친은 수자 인자. 딸은 이성록에게 시집을 가고 차남은 즙. 이 족보에는 최경창의 둘째 아들 즙이 ‘서자’라고 표시돼 있어 다만 그가 홍랑의 아들이 아닐까 하고 짐작하고 있다. 또 다른 족보를 보아도 최경창의 둘째아들 즙이 서자임을 확인할 수 있지만 그 후손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었다. 며칠 전 일산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눈 내리는 홍랑의 무덤을 다녀왔다. 그녀는 재색을 겸비한 기녀였고 평생동안 한사람에 대한 절개를 한번도 잃지 않은 열녀이기도 했다. 한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을 위해 일생을 걸 줄 알았던 여인이었다. 짧은 만남과 오랜 헤어짐 속에서도 서로를 저버리지 않았던 기생 홍랑과 고죽 최경창. 그들이 詩속에 담아 보냈던 그 지극한 사랑은 400년의 긴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빛나고 있다. 겉으로 보면 짧은 시 몇 편과 한편의 글이 적혀있을 뿐인 낡은 서첩. 여기에는 기생 홍랑이 평생을 걸어 지켰던 사랑과 삶의 아름다움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이다. 쉽게 만나 쉽게 사랑하고 또 그렇게 헤어지는 지금의 세태에서 보면 홍랑의 그 지독한 사랑이 조금은 답답하고 바보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쩌면 ‘지독하다’고 까지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한 사람만을 가슴에 품었던 기생 홍랑의 한결같은 마음은 고죽의 포근한 사랑으로 보답 받았음은 물론 후손들에게까지 존경을 받게 되었다. 서른 네 살의 최경창이 홍랑을 만나 함께 지낸 것은 불과 꿈같은 6개월. 그리고 두 사람이 겪어야했던 것은 끝없는 기다림과 혹독한 시련의 세월이었다. 그러나 긴 이별과 죽음의 어둠 속에서도 사랑과 절개를 잃지 않았던 기생 홍랑. 그녀의 영혼은 400년의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도 내내 최경창과 함께 있었을 것이다.

 

 

 

      묏버들 가려 꺽어 보내노라 님의손에
      주무시는 창밖에 심거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닢 나거든 날인가도 녀기소서
      홍 랑 .
조선 선조 때 홍랑(洪浪)이란 기생이 있었습니다.

그 홍랑과 선비 최경창(崔慶昌)의 사랑은

처절하리만치 치열했습니다.

우리 나이에 무슨 사랑타령이냐고 하시겠지만

두 사람의 사랑이 너무나 지극해 소개하는 바입니다.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운명적인 만남

 

 

홍랑(洪娘)의 사랑은 처절하리만치 지독했다.

홍랑의 묘소가 경기도 파주군 교하면(交河面) 다율리(多栗里)에 있다는 것을 알고 산소를 참배하기로 했다.

도데체 어떤 여인이었기에 그토록 사랑에 치열했을까

그 얼굴(?)을 한 번 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첫날은 아무리 뒤져도 찾지 못했고

이튼 날 해주 최씨 종친회에 전화로 물어 가까스로 찾을 수 있었다.

먼  발치에서 홍랑의 묘가 눈에 들어오자 가슴은 뛰었다.

얕은 산등성이를 올라 홍랑의 묘를 마주했을 때는 전율과 같은 감동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두 번 절하고 엎드려 기원했다.

" 홍랑이시여. 저승에서 임을 뵈어 모든 한을 푸시고 영원한 사랑을 이어가십시오. 후생(後生)의 한 시인이 비옵니다."

홍랑의 묘 위쪽엔 홍랑의 연인(戀人)이었던 최경창(崔慶昌)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멀리서 본 홍랑 묘와 최경창 묘.  아래 것이 홍랑 묘다.

 

조선조(朝鮮朝) 관기(官妓)였던 홍랑의 기록은 아무데도 없다.

언제 어디서 태어났으며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알 길이 없다.

그의 연인 최경창은 1539년에 태어나 1583년 4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세조 때 인물이다.

이로 미루어 홍랑은 1556년 쯤 태어나 최경창과 비슷한 나이로 살다가

최경창의 묘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끓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홍랑과 최경창의 사랑은 극히 짧았다.

생애 동안 함께 산 기간이 6개월이었고 헤어진 뒤

오직 딱 한 번 더 만났을 뿐이다.

홍랑이 최경창에게 준 시조 한 수는 조선조 문학사 중 가장 애절한

 연정가(戀情歌)로 알려져 있다.

홍랑은 함경도 경성(鏡城) 관아에 소속된 기생이었다.

 

최경창은 호는 고죽(孤竹). 학문과 시에 뛰어나

이율곡과 함께 문장가로 알려졌다.

또 중국 당(唐) 나라의 시문(詩文)에도 능해 당시 삼당파(三唐派)의

 한 사람이기도 했다.

삼당파란 선조 때 최경창ㆍ백광훈ㆍ이 달 3명의 시인을

지칭하는 것으로 당나라 시문에 뛰어난 문장가들이었다.

최경창은 29살에 문과에 급제해 여러 벼슬을 거쳤다.

그러다가 34세가 되던 1573년(선조 6년)에

함경도 북도평사(北道評事)로 부임한다.

북도평사란 함경도 지역의 군사 관리ㆍ무기 제작과 정비ㆍ군사 시설

구축 등의 임무를 돌보는 문관이었다.

최경창이 경성에 부임하면서 홍랑과 최경창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홍랑은 비록 기생이란 비천한 신분이었지만

문학적인 교양과 미모를 겸비한 여성이었다.

또 악기와 가무를 익혔고 서화 등에 뛰어난 예기(藝妓)였다.

자신의 사랑을 바칠 사람을 기다리며 정절을 지켰다.

그래서 아무에게나 꺽이는 길가의 버들가지가 아니었다.

이런 홍랑 앞에 최경창이 나타났고

시와 풍류를 아는 젊은 관리 최경창에게도 재색

을 겸비한 홍랑이 예사 여인으로 보이질 않았을 것이다.

두 사람은 바로 정신적인 교감으로 이어졌고

그 교감은 어떤 것도 끼어들 수 없는

깊고 깊은 사랑으로 이어져갔다.

최경창은 홍랑을 군사 작전 지역인 막중(幕中)으로 불러들여 동거를 했다.

변방에 위치한 경성은 국방의 요지인 군사 지역이었기 때문에

최경창은 처자가 있었음에도 홀로 부임을 했다.  

 <계속>

         ◇사랑의 시련. 짧은 만남, 긴 헤어짐.

 

 두 사람이 동거에 들어갔으나

그러나 그 사랑은 영원히 이어질 수 없었다.

이듬해 봄 두 사람은 헤어져야했다.

최경창이 서울로 돌아가게 됐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꿈같았던 사랑은 겨우 6개월 만에 끝이 났다.

최경창의 상경은 홍랑에겐 청천벽력과 같았다.

이별을 앞에 둔 그녀의 심정은 오직 절망뿐이었다.

갑작스레 다가온 이별 앞에 홍랑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눈물로 밤낮을 지새우는 것 뿐이었다.

 

최경창이 경성을 떠나는 날

홍랑은 잠시라도 더 최경창과 함께 하고 싶어

서울을 향하는 최경창의 뒤를 따랐다.

함경도의 산세는 험하다.

험한 고개를 몇 구비를 며칠에 걸쳐 넘고 넘어 드디어

함관령(咸關嶺) 고개에 이르렀다.

당시의 기생은 관아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해당 지역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함관량에서 더 이상 경계를 넘을 수 없었던 홍랑은

사무치는 사모의 정을 가슴에 품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이 때 남긴 홍랑의 시조 한 수가 바로 그 유명한

조선조 문학사 중 가장 애절한

연정가(戀情歌)로 알려진 바로 그 시조다.

      

     묏 버들 가려 꺽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주무시는 창 밖에 심거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 닢 나거든 날인가도 녀기소서.

  

날은 저물고 비는 내리는데 피할 수 없는 이별 앞에

홍랑도 울고 최경창도 울었다.

홍랑은 눈물로 얼굴이 범벅이 된 체

길 가의 버들가지 하나를 꺽었다.

그리고는 연인에게 정표인양 전해주며 이 연정가를 읊었다.

버들가지는 잎이 시들었다가도 땅에 심으면 다시 싹이 나오는 나무다.

나무다.      
최경창과 헤어진 뒤 홍랑은 오직 연인을 향한

그리움의 세월을 눈물로 보냈다.

연인과는 다시 만날 기약이 없다.

한함관령에서 역시 연인과 애끓는 이별을 한 최경창은

서울에 온 2년 뒤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됐다.

풍문으로 최경창의 소식을 들은 홍랑은 만사를 제쳐놓고

서울로 떠났다.

밤낮 쉬지 않고 길을 재촉해 7일 만에 서울에 닿았다.

2년 만의 재회였다.

홍랑은 잠시도 최경창의 곁을 떠나지 않고

연인의 병수발을 들었고

이 정성으로 최경창은 가까스로 건강을 회복했다.

그러나 기쁨이 오기 전에 이들 앞엔 다시 불행이 다가왔다.

최경창이가 홍랑을 첩으로 삼았다는 소문과 함께 홍랑은

양계(兩界)의 금(禁)을 어겼다는 이유로 사헌부가

최경창의 파직을 상소했다.

당시 함경도와 평안도 사람들은 서울 도성 출입이

금해져 있는데 홍랑이 그걸 어겼다는 것이다.

여기다가 설상가상으로 명종 왕비인 인순 왕후의

국상 기간이라 최경창의

처신은 더욱 용서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홍랑은 다시 경성으로 옴겨 가고 최경창은 파직을 당했다.

두 사람의 두 번 째 이별이었다.

그러나 이 이별이 이승에서 두 사람의 마지막 이라곤 상상도 못했다.

최경창의 파직은 오래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시 복직은 되었으나 변방의 한직으로만 떠돌았다.

그러다가 1583년 최경창이 44세가 되던 해

지방의 근무지에서 객사를 했다.

홍랑과 서울서 헤어진 지 7년만이었다.

함경도에서 일편단심 최경창과 만날 날만 기다리고 있던

홍랑에겐 최경창의 죽음은 절망 그 자체였다.

몸 조차 가눌 수 없는 형편으로 홍랑은

통한의 한을 가슴에 품고 걷고 걸어서

다시 서울 최경창의 상가로 왔다.     

 <계속> 

                    ◇죽은 이와 함께 한 처절한 사랑.

 

 

     허겁지겁 서울로 달려온 홍랑은 최경창의 장례에 참석했다.

      그리고 장례가 끝한 뒤 

      홍랑은 최경창의 묘 앞에 움막을 짓고 시묘살이에 들어갔다.

      이것이 그녀가 최경창에

      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죽어서나마 임의 곁에 함께 있다는 것이 

      홍랑에겐 행복으로 여겼는지 모른다.

      그러나 30이 될까 말까 한 아름다운 여인이 혼자 시묘살이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녀는 스스로 얼굴에 칼로 여러 군데 상처를 낸다.

      흉한 모습의 얼굴을 만들고 몸도 가꾸지 않았다.

      그리고 오직 최경창의 묘를 돌보는 데만 일생을 걸었다.

      
     

 

      그녀는 시묘살이를 하는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 저녁으로 상식(上食. 산 사람

      에게처럼 밥상을 채려 바침)을 올렸다. 집념에 가까운 지독한 사랑이 아니고는 불가

      능한 일이다.

      최경창의 묘는 한강 하류 부근이라 겨울이면 살을 에는 찬바람이 홍랑을 괴롭혔다.

      시묘살이는 보통 3년이다. 그러나 3년을 지나고도 홍랑은 임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7년을 더 머물렀다. 어쩌면 그녀는 이곳에서 최경창의 혼령과 함께 살다가

      생을 마치려고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홍랑의 이러한 소망도 허락되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이다.

      홍랑은 최경창이 남긴 모든 글들을 챙겨 품에 안고 다시 함경도로 피난했다.

      임진왜란 7년 동안 홍랑은 어디서 어떻게 지냈는지 알 길이 없다. 오직 사랑을 위해

      자신의 온 생애를 바쳤던 홍랑은 전쟁이 끝나자 해주 최씨 문중을 찾아가 자신이 보

      관했던 최경창의 글들을 전해 주었다.

      참혹한 임진왜란으로 조선의 온 국토가 황폐화 된 전쟁 중에서도 최경창의 시와 문장

      들이 지금까지 남아 온전히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이같이 홍랑의 지극한 정성과 사랑

      때문에 가능했다.

 

      최씨 문중에 글을 전하고 홍랑은 다시 최경창의 묘소로 돌아와 결국 그 곳에서 스스

      로 목숨을 끓어 생을 마쳤다.

      홍랑이 죽자 해주 최씨 문중은 그녀를 문중의 한 사람으로 받아드려 후한 장례를 치

      렀다. 그리고 최경창 부부가 합장된 묘 아래에 홍랑의 무덤을 마련해 주었다.

      홍랑과 최경창 사이엔 아들 하나 있었고 최씨 문중에 올랐고 그 자손이 지금까지 이

      어져 오고 있다.

 

      큰길에서 멀지 않은 야산의 홍랑 묘는 가꾸지 않은 체 그냥 그대로 있는 듯 했다.

      주변에도 무덤 위에도 잡초가 가득했다.

      땀을 흘리고 올라가 홍랑 묘에 닿으니 감회가 컸다. 갑자기 싸늘한 기운이 스치는 듯

      한 느낌도 받았다.

      묘는 위에 최경창 부부 합장 묘가 있고 그 아래에 홍랑 묘가 있다. 이분들이 지금 지

      하에 누워 무슨 생각들을 하시는가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산소 앞에 시비(詩碑)가 있는데 앞면엔 최경창이 홍랑에게 준 한시(漢詩)가 새겨져

      있고 뒷면 홍랑가비(洪娘歌碑)엔 그 유명한 홍랑의 시조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

      옆엔 최경창과 홍랑의 관계를 밝히는 비석이 따로 하나 서 있다.

      비석 내용엔 두 사람이 만나게 된 사연과 최경창에 대한 홍랑의 지순한 사랑의 내용

      을 담고 있다.

 

홍랑의 시 2

 

    밤비에 난 새 잎이
    님의 가슴 메웠거든
    春光에 또 피는 꽃은
    어디로 가오리까
    丈夫의 넓은 가슴
    한구석은 비워 두오
    洪 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