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스페셜100선

8 조선판 사랑와 영혼 - 400년 전의 편지

사랑의고향길 2013. 9. 28. 18:38

조선판 사랑와 영혼 - 400년 전의 편지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남편을 보내며 아내가 썼던 이 한글 편지는 400년의 세월동안 어두운 무덤 속에서 망자와 함께 잠들어 있었다. 
1. 400년 전의 편지
남편이 죽은 후, 장례전까지의 짧은 시간에 씌여진 편지에는 지아비에 대한 아내의 그리움이 사무치게 드러나고 있다. 하고픈 말을 맺지 못한 채 종이가 다하자, 아내는 모서리를 돌려 다시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모서리를 채우고도 차마 끝을 맺지 못한 글은 편지의 처음으로 돌아와 거꾸로 씌여지고 있다.
2. 미투리의 정체
관에서는 아내가 쓴 편지 외에도 많은 유물들이 수습되었다. 그 가운데 부부의 애틋
한 사랑을 짐작케 하는 물건이 있었는데, 바로 남편의 머리맡에서 나온 미투리였다. 이 미투리의 재료는 사람의 머리카락이었다. 그리고 미투리를 싸고있던 한지에는 아내가 쓴 글이 적혀있었다.
3. 무덤의 주인은 누구인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비석마저 유실된 채 모든 사람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 이 무덤은 과연 누구의 무덤이었을까. 관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무덤의 주인이 고성 이씨 가문의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4. 젊은 아내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 앞에서 남편의 뒤를 따르고 싶다는 말로써 그 슬픔을 대신한 이응태의 젊은 아내, 그녀는 누구였을까. 그리고 지금 어디쯤에서 홀로 잠들어 있는 것일까.
5. 부부의 사랑과 결혼
‘어여삐 여기고 사랑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시대에는 남녀유별, 남녀칠세부동석 등의 유교이념이 지배하던 시기였다. 때문에 남녀간의 애정표현은 점잖치 못한 일로 여겨 터부시했을 것이다. 그런 조선시대에 사대부 집 여인이 어떻게 ‘사랑한다’는 글을 편지에 쓸 수 있었을까. 베일에 가려진 이응태 부부의 사랑과 결혼생활에 대해 알아본다.
6. ‘자내’ 라는 호칭의 의미
이응태의 처는 편지에서 남편을 가리켜 ‘자내’ 라는 말을 모두 열네번 사용하고 있다. 요즘의 부부라 하더라도 아내가 남편을 자내라고 부르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어떻게 이응태의 처는 남편에게 ‘자내’ 란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었던 것일까. 

 

 

 

 

 

 

5월 21일은‘부부의 날’입니다.

'가정의 달 5월에 둘(2)이 하나(1)가 된다'는 뜻으로 부부관계의 소중함을 일깨우자는 취지로 제정된 법정 기념일이죠.


아직도 서로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전해주지 못했다면 아래 편지글을 같이 읽어보는 것이 어떨까요?  


아주 오래된 400년 전의 편지 한통을 소개합니다.

1998년 봄 경상북도 안동에서 고성 이씨 가문의 묘를 이장하다가 두 구의 미라를 발견했습니다.

시신 곁에 배냇저고리와 미투리 한 켤레, 그리고 언문(한글)이 빼곡히 적힌 한지 한 장입니다.

후손들이 유물을 안동대학교 박물관으로 옮겨 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1586년 유월, 안동에서 이응태라는 젊은이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에겐 어린 아들과 뱃속의 아기, 머리 희어지도록 살자고 약속했던 아내가 있었습니다.


부장품들은 남편을 떠나보내는 슬픔 속에서 아내가 함께 묻은 것입니다.

자신의 머리채를 잘라 남편의 회생을 빌며 만들었던 미투리, 생전에 남편이 그토록 소중히 여겼던 뱃속 아기의 배냇저고리 한 벌 그리고 먼저 떠나는 사랑하는 남편에게 애틋하게 쓴 아내의 편지 입니다.

 

 


2008년 12월 <KBS역사 스페셜>에서는 ‘조선판 사랑과 영혼 - 400년전의 편지’를 아래와 같이 이야기를 풀어갔습니다.

『이 편지는 1998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묘를 이장하면서 유물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망자의 가슴을 덮은 한지가 발견되었는데, 한글로 쓰인 편지였다.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을 맞으며 아내가 한지에 붓으로 빼곡히 써내려간 한글 편지엔, 서럽고 쓸쓸하고 안타까운 아내의 심정이 잘 드러난다. 한지 오른쪽 끝에서부터 써내려간 편지는 왼쪽 끝까지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위 여백으로 이어진다. ‘하고 싶은 말, 끝이 없어 이만 적나이다’라는 마지막 문장은 다시 글 첫머리 쪽에 거꾸로 쓰여 있다.

게다가 삼과 머리카락을 함께 꼬아 삼은 미투리도 함께 출토되었다. 이 머리카락은 원이 엄마의 것으로, 남편이 병석에 누운 뒤 쾌유를 빌면서 미투리를 삼기 시작하였고 남편이 31살 나이로 끝내 세상을 뜨자 함께 무덤에 넣은 것이라 추정된다

남편의 급작스런 죽음을 애도하는 부인의 편지는 사랑하는 이와 함께 400년 동안 지하에서 같이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아래는 국립안동대학교박물관 홍보영상 머리말입니다.


450년 전 사랑이야기

- 그립고 그리워 부른는 사부곡(思夫曲)-


1998년 4월 안동시 정하동 일대의 택지개발 계획에 따라 2기의 무덤을 이장하던 도중 무덤 안에서 조선시대 미라와 함께 당시의 복식이 나왔다.

미라의 주인공은 고성이씨 이응태(1566~1586)와 그의 할머니 일선문씨였다.

시신은 모두 이중 목관에 들어있었고, 이 두 사람의 목관 내부는 조금도 상하지 않았으며 염습상태가 잘 유지되어 있었다.

특히 이응태 무덤에서 나온 '만시'와 '한문편지', 그리고 애절한 필치로 쓴 '원이 엄마의 한글 편지'와 '머리카락으로 삼은 미투리'는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다음은 본격적으로 편지 전문을 소개하겠습니다.

400년 전의 편지글을 안동대학교 사학과 임세권 교수가 현대어로 옮긴 것입니다. 자 이제 울음보 터뜨릴 준비가 되셨습니까?


원이 아버지에게

 병술년(1586년) 유월 초하룻날 아내가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의 어린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당신 나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왔고

 또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었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어찌 그런 일들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가요?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해도 나는 살 수 없어요.

 빨리 당신께 가고 싶어요.

 나를 데려가 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가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내 마음을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이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주세요.

 꿈속에서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써서 넣어 드립니다.


 자세히 보시고 나에게 말해 주세요.

 당신 내 뱃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이 있다하고 그렇게 가시니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시는 거지요?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겠습니까?

 이런 슬픈 일이 하늘 아래 또 있겠습니까?


 당신은 한갓 그곳에서 가 계실 뿐이지만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이 서럽겠습니까?


 한도 없고 끝도 없어 다 못 쓰고 대강만 적습니다.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당신 모습 자세히 보여 주시고 또 말해 주세요.


 나는 꿈에는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몰래 와서 보여주세요.

 하고 싶은 말 끝이 없어 이만 적습니다.

 

널리 알려진 대로, 10년 전 한 무덤에서 발굴돼 큰 감동을 주었던 ‘원이 엄마의 한글 편지’ 이야기다. 420년 동안 무덤 속에 들어 있다가 우연한 기회에 빛을 보게 된 이 편지는, 가볍고 얕은 사랑이 일상화한 우리 시대에, 잔잔하면서도 큰 울림으로 다가와 가슴을 친다. 무덤의 주인공은 고성 이씨(固城 李氏) 이응태(李應台1556~1586). 아이를 뱃속에 둔 젊은 아내와 어린 아들, 부모형제를 두고 서른 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이 무덤에서 나온 유물들이 안동대 박물관 3층에 상설 전시되고 있다. 내용을 알고 가도 직접 만나보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워늬 아바님께 샹백--병슐 뉴월 초하룬날 지비셔’(원이 아버님께 올림--병술년 유월 초하룻날, 집에서)라는 제목의 편지는 이렇게 시작된다(편의상 아래 아는 ㅏ로 표기해 옮겼음).


“자내 샹해 날다려 닐오대 둘히 머리 셰도록 사다가 함께 죽쟈 하시더니 엇디하야 나를 두고 자내 몬져 가시노. 날하고 자식하며 뉘 긔걸하야 엇디하야 살라하야 다 더디고 자내 몬져 가시난고.”(당신 늘 나에게 이르되, 둘이서 머리가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 하시더니,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자식은 누구한테 기대어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시나요.)

 

 

가로 58㎝, 세로 34㎝의 한지에 붓으로 빼곡히 써내려간 한글 편지엔, 서럽고 쓸쓸하고 황망하고 안타까운 한 아내의 심정이 강물처럼 굽이친다. 함께 누워 속삭이던 일에서부터 뱃속 아이를 생각하며 느끼는 서러운 심정, 꿈속에서 만나 이야기 나누고 싶다는 애절한 간청까지 절절하게 녹아 흐른다. “함께 누워서 당신에게 물었죠. 여보, 남도 우리 같이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도 우리 같은가 하여 물었죠. 당신은 그러한 일을 생각지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나요.”

 

 

가득 쓰고도 모자라 위 여백까지 빽빽이…남편 호칭은 ‘자내’

한지 오른쪽 끝에서부터 써내려간 편지는, 왼쪽 끝까지 가득 채우고 모자라 위 여백으로 이어진다. 그러고도 모자라 “하고 싶은 말 끝이 없어 이만 적나이다”라는 마지막 문장은 다시 글 첫머리 쪽 여백에 거꾸로 씌어 있다. 뭉클해져 편지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조규복 학예연구사가 냉정하게 설명했다. “여백을 활용해 쓰는 이런 편지 양식은 당시로선 일반적인 것이죠. 첫째 종이가 귀하던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고, 둘째 쓴 이의 마음, 즉 할 말이 이토록 많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여백까지 활용해 글을 꽉 채웠으면서도, 읽는 이에게 풍성한 느낌을 주면서 지루하지 않게 읽히도록 한 방식이기도 하지요.”


더 감동적인 건 함께 출토된 미투리다. 미투리란 삼껍질 등을 꼬아 삼은 신발이다. 여기서 나온 미투리는 삼과 머리카락을 함께 꼬아 삼은 것이다. 이 머리카락은 원이 엄마의 것으로 추정된다. 미투리는 한지에 싸여 있었는데, 한지엔 한글 편지가 적혀 있으나 훼손돼 “이 신 신어보지도 못하고…” 등 일부 글귀만 확인된다. 조 학예사는 “남편이 병석에 누운 뒤 쾌유를 빌면서 삼기 시작한 미투리”라며 “끝내 세상을 뜨자 함께 무덤에 넣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무덤에선 아들 원이가 입던 옷(저고리)과 원이 엄마의 치마도 나왔다. 형(이몽태)이 동생에게 쓴 한시 ‘울면서 아우를 보낸다’와 형이 쓰던 부채에 적은 ‘만시(輓時)’도 있었고, 이응태가 부친과 주고받은 편지도 여러 통 발견됐다. 발굴된 의복은 40여벌에 이른다. 부친과 나눈 편지엔 전염병 관련 내용이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무덤의 주인은 당시 전염병을 앓다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부친과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건 이응태가 처가살이를 하고 있었다는 걸 뜻한다고 조 학예사는 말했다. “당시(임진왜란 전)엔 결혼하면 시댁살이와 함께 처가에 가서 사는 것도 일반적이었습니다. 남녀가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는 걸 뜻하죠. 임란 전엔 재산 분할도 아들딸 차별이 없었습니다. 이런 인식은 편지에도 드러나 있어요.” 원이 엄마의 편지에 나오는 남편에 대한 호칭이 ‘자내’다. 지금은 아랫사람에게 쓰는 호칭(자네)으로 바뀌었지만, 임진왜란 전까지는 상대를 높이거나 최소한 동등하게 대우해 부르는 호칭이었다.

한지 오른쪽 끝에서부터 써내려간 편지는, 왼쪽 끝까지 가득 채우고 모자라 위 여백으로 이어진다. 그러고도 모자라 “하고 싶은 말 끝이 없어 이만 적나이다”라는 마지막 문장은 다시 글 첫머리 쪽 여백에 거꾸로 씌어 있다. 뭉클해져 편지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조규복 학예연구사가 냉정하게 설명했다. “여백을 활용해 쓰는 이런 편지 양식은 당시로선 일반적인 것이죠. 첫째 종이가 귀하던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고, 둘째 쓴 이의 마음, 즉 할 말이 이토록 많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여백까지 활용해 글을 꽉 채웠으면서도, 읽는 이에게 풍성한 느낌을 주면서 지루하지 않게 읽히도록 한 방식이기도 하지요.”


더 감동적인 건 함께 출토된 미투리다. 미투리란 삼껍질 등을 꼬아 삼은 신발이다. 여기서 나온 미투리는 삼과 머리카락을 함께 꼬아 삼은 것이다. 이 머리카락은 원이 엄마의 것으로 추정된다. 미투리는 한지에 싸여 있었는데, 한지엔 한글 편지가 적혀 있으나 훼손돼 “이 신 신어보지도 못하고…” 등 일부 글귀만 확인된다. 조 학예사는 “남편이 병석에 누운 뒤 쾌유를 빌면서 삼기 시작한 미투리”라며 “끝내 세상을 뜨자 함께 무덤에 넣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무덤에선 아들 원이가 입던 옷(저고리)과 원이 엄마의 치마도 나왔다. 형(이몽태)이 동생에게 쓴 한시 ‘울면서 아우를 보낸다’와 형이 쓰던 부채에 적은 ‘만시(輓時)’도 있었고, 이응태가 부친과 주고받은 편지도 여러 통 발견됐다. 발굴된 의복은 40여벌에 이른다. 부친과 나눈 편지엔 전염병 관련 내용이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무덤의 주인은 당시 전염병을 앓다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부친과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건 이응태가 처가살이를 하고 있었다는 걸 뜻한다고 조 학예사는 말했다. “당시(임진왜란 전)엔 결혼하면 시댁살이와 함께 처가에 가서 사는 것도 일반적이었습니다. 남녀가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는 걸 뜻하죠. 임란 전엔 재산 분할도 아들딸 차별이 없었습니다. 이런 인식은 편지에도 드러나 있어요.” 원이 엄마의 편지에 나오는 남편에 대한 호칭이 ‘자내’다. 지금은 아랫사람에게 쓰는 호칭(자네)으로 바뀌었지만, 임진왜란 전까지는 상대를 높이거나 최소한 동등하게 대우해 부르는 호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