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납토성 지하 4미터의 비밀 |
고구려 장수왕에 의해 백제의 첫 번째 수도 위례성은 폐허가 되었고, 백제의 초기 500년의 역사도 함께 묻혀버려 전해지는 기록이나 흔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난 1997년, 풍납동 한 아파트 공사현장에서 지금까지 정확한 위치와 기록조차 모른 채 잊혀질 뻔한 위례성이 풍납토성이라는 이름으로 1500년 동안 간직한 비밀을 우리에게 털어놓고 있다. |
1. 풍납토성의 말의 뼈 유물 |
풍납토성 성벽 내 한 아파트 공사현장. 이곳에서 이제까지 발굴이 흔치 않았던 백제초기의 유물과 유적들이 다량으로 발굴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 가장 이목을 끈 것은 10마리 가량의 말 뼈였다. 그 당시 가장 귀하게 여겨지던 말의 뼈가 10구나 발견된 이곳은 과연 어떤 유적지일까. |
2. 토기에 새겨진 대부 |
발견된 유물 중 당시로서는 상당히 고급스러운 토기가 발견되었는데 그 유물에는 대부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백제에는 대부가 없다. 그것은 고구려나 신라, 중국에서 쓰던 관직의 명칭이었다. 이 백제토기편의 발견은 기록에서 누락된 백제의 실체에 한발 더 다가가는 단서를 제공해 주었다. |
3. 백제초기의 모습 재현 |
지난 1997년 풍납동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발견된 백제의 유물은 이제까지 좀처럼 발굴 할 수 없었던 백제초기의 유물이었다. 그 중에 기와의 발견이 가장 학계의 관심을 끌었는데 그 문양으로 보아 불교가 들어오기 전의 백제초기의 기와였기 때문이다. 당시 기와는 오직 왕궁과 관청, 절에서만 사용되는 것이었다. 이는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의 중심성이었음을 말해준다. |
4. 왜 석성이 아니라 토성일까? |
풍납토성은 석성이 아니라 토성으로 지어졌는데 그 의문에 대한 단서는 중국에 있다. 중국의 축성술이 백제에 그대로 전해진 것이다. 중국 하북성에는 기원전 3세기 무렵 지어진 연나라 토성이 비교적 잘 남아있는데 풍납토성의 건축술에서도 이와 같이 흙을 한 층씩 다져나간 판축기법의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
5. 풍납토성, 비밀을 벗다. |
유적지와 유물을 통해 복원해 본 풍납토성의 결과는 실로 놀라웠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 규모였기 때문이다. 이런 규모로 성을 지으려면 105만 명의 노동력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오고 이는 백제가 초기에 변변한 성곽조차 없었다는 기록을 뒤엎고 강력한 고대 국가였음을 증명해준다. 숨겨졌던 풍납토성 유적지의 발굴은 한국초기의 역사를 긍정적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온 것이다. |
6. 지하 4m의 비밀 |
고구려에 의해 폐허가 된 채 버려졌던 위례성. 이번에 발굴된 유적들은 지한 4미터의 땅 속에 있었다. 한때는 분명히 한 도시의 번성했던 도읍지로 사람들이 붐볐을 지표면이 어떻게 지하 4미터의 땅속에 묻히게 된 것일까. 1500년 동안 백제의 초기역사가 완전히 잊혀졌던 이유는 한강으로 인해 쌓인 4미터 높이의 퇴적층에 있었다. |
풍납토성은 한성백제시대(B.C.18 ~ A.D.475)에 백제의 왕성으로 기능했던 성곽으로, 일반적으로 시조 온조왕이 처음 도읍을 정했다는 하남위례성으로 비정된다. 삼국사기에는 성곽의 축조 사실은 따로 언급하지 않고, 단지 온조가 한수(漢水:한강) 남쪽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였다는 식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정황상 정도(定都)와 함께 축성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풍납토성이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 한 때는 극히 최근의 일이며, 9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성벽과 성곽 내부에 대한 몇차례의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성곽 내부에선 수많은 대형 건물지와 토기, 기와, 전돌 등의 유물이 쏟아져나와 이곳이 한성백제의 왕성이었음을 알려주고 있으며, 성곽 단면 조사 결과 토성 자체는 기원전 1세기 무렵 축조되기 시작하여 몇차례의 증축 과정을 거쳐 늦어도 3세기 무렵에 공정이 완료된 것으로 드러났다.
사실 90년대 후반 본격적으로 풍납토성의 발굴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백제의 왕성이었던 위례성이 어디었는가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의 논란이 있었다. 보통 위례성은 하남 춘궁리나 이성산성, 인근의 몽촌토성 등으로 비정되었는데, 이 중에서 80년대 대대적인 발굴이 행해졌던 몽촌토성을 위례성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몽촌토성은 축조 연대가 3세기 중후반 이상으로 올라가지 않기 때문에,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믿을 수 있느냐의 문제와 함께 백제가 마한에 속한 소국에서 강력한 고대왕국으로 성장한 시기 또한 이쯤이 되지 않을까 하는 시각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풍납토성의 발굴을 토대로 백제가 삼국사기의 건국년도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이미 주변지역에 상당히 강한 통제력을 행사하던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백제'하면 으레 공주나 부여를 떠올리고, 사실상 백제 문화 콘텐츠 사업을 주도하는 곳 역시 충청권역이다. 하지만 사실 충청권역이 백제의 중심지가 되었던 적은 180년 남짓에 불과하며 온조왕의 건국 이래 500여년 동안 백제의 중심지로 기능하였던 곳은 한강 하류 현재의 강남지역 일대였다. 그러나 소위 '한성백제'는 위례성의 위치에 대한 오랜 논란에서 볼 수 있듯이 그동안 그 수도의 위치조차 모호할 정도로 실체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으며, 해방후 한국 사학계의 경향-사실상의 백제 건국을 3세기 중후반으로 보는 시각-역시 한성백제에 대한 세간의 무관심한 풍조를 이끄는데 공헌(?)하였다. 하지만 백제는 여기 이곳 위례성에 자리잡고 한반도 서남부지역을 석권하는 대왕의 나라로 성장했다.
하지만 영광의 시절은 영원하지 않았다. 475년, 고구려는 백제를 공격하여 수도인 위례성을 떨어뜨리고 백제의 왕과 왕후, 왕자를 살해한다. 이 후, 백제의 왕성으로서 500년의 영화를 구가하던 하남위례성은 고구려군에 의해 완전히 초토화되어 다시는 역사의 전면으로 떠오르지 못하게 된다. 실제로 풍납토성에서는 한성백제 멸망 이후의 유물이 전혀 확인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고구려군에 의해 백제의 수도가 얼마나 철저히 파괴되었는지를 증명해주고 있다.

:::::그림을 클릭하시면 원본 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백제 수도 위성사진. 북쪽 한강변에 붙어있는 6각형의 평지성이 풍납토성이고, 남쪽에 좀 떨어진 부정형의 산성이 몽촌토성이다. 풍납토성은 규모 3.5km정도이고 몽촌토성은 2.7km이다. 두 성 다 보존상태가 썩 좋지는 않다고 하는데, 남아있는 성벽은 모두 복원 정비된 상태다. 한강변에 붙어있던 풍납토성의 경우 훼손이 특히 심해서 서쪽 성곽 대부분(위성사진의 연두색 부분)이 강물에 쓸려 사라진 상태다.
삼국사기는 고구려가 위례성을 떨어뜨릴 당시 백제 수도에는 북성(北城)과 남성(南城)의 2개의 성이 있었던 것으로 전하고 있다. 여러 정황으로 볼때 북성을 현재의 풍납토성으로, 남성을 현재의 몽촌토성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당시 전투는 주로 북성에서 벌어졌고 백제의 왕인 개로왕은 몽촌토성으로 피신해 있었던 것 같은데, 고구려군이 북성을 전방위로 포위하고 집중 공격하여 7일만에 떨어뜨리자 남성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고 한다. 패색이 짙어지자 개로왕은 서쪽 바닷가로 탈출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고, 한강 건너 아차산성으로 끌려가 살해되었다.
답사는 풍납토성 북동쪽 모서리부터 경당지구~동쪽성벽~남쪽성벽을 거쳐, 몽촌토성 서쪽성벽을 둘러보는 것으로 진행하였다.
풍납토성 북동쪽 모서리(위성사진의 '가'부분). 공원으로 조성되어서 시민들의 쉼터로 사용되고 있다. 나무 뒤로 육중하게 자리한 둔덕이 토성이다.
풍납토성의 성벽. 깔끔하게 복원정비 되어있다. 표면을 잔디로 덮어놔서 마치 큰길과 주택가 사이에 만들어 놓는 방음벽 같은데, 원래는 흙을 딴딴하게 다져 풀한포기 못자라도록 매끈하게 만든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흙을 쪄서 성을 쌓았다는 대목도 보이는데, 토벽에다 불을 질러서 옹기처럼 딴딴하게 구워버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위성사진의 '나'부분에서 성벽 내측을 바라본 모습. 이렇게 보니 진짜 방음벽같다.
풍납토성 방문은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 된 것이 아이었던지라 사전 정보도 부족했고 지리도 잘 몰라서 성곽 내부에서 꽤 헤맸는데, 우연히 공원같은걸 발견해서 찾아들어갔다. 알고 보니 이곳은 '경당지구'라는 곳으로 풍납토성 내에서 행해진 발굴 중에서 가장 획기적인 유물이 쏟아져 나왔던 곳이다. 1999~2000년과 2008년 2차례에 걸쳐 발굴이 진행되었고 현재는 깔끔하게 복토된 상태다. 사진은 경당지구 우물터 위에 만들어놓은 식수대이다. 역사공원..정도의 성격으로 꾸며놓은 것 같기는 한데, 여기쯤 이런 유구가 있었습니다~ 정도로 표시만 해놓은 그냥 공원이다.-_-;;
풍납토성 발굴 사상 가장 유명한 건물이 있었던 자리(라기 보다는 땅밑에 있겠지만..). 전실과 후실을 갖춘 呂모양 건물터로 후실은 도랑을 갖춘 동서 18m, 남북 13m이상의 초대형이다. 일반적으로 제사건물로 추정되는 곳으로 무려 동명왕의 신전@.@!!일 수도 있다. 어쨋든 위성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이곳은 풍납토성의 거의 한가운데 지점이기 때문에 궁전을 비롯한 각종 중요 관청들이 밀집되어 있던 곳일 것이다.
경당지구 역사공원 풍경. 여기가 왕궁자리??
경당지구 역사공원 전체도. 맨 우측의 네모 안에 있는 것이 우물이고, 아까 봤던 초대형 제사 건물지는 맨 좌측에 있는 네모다. 공원은 2010년도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경당지구를 빠져나와 어~풍납토성 다봤다~고 큰길로 나오다가 토벽이 끝도없이 이어진 곳을 발견하고 들어가 보았다. 알고보니 이곳은 풍납토성의 동쪽 성벽이었다. 성벽 좌측을 따라 오솔길이 나있기 때문에 산책을 하면서 성벽을 감상 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달성토성에서처럼 성벽 위로 기어올라가고 싶기도 했지만 따로 올라갈수 있는 길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오솔길이 워낙 잘 닦여 있어서 옆에서만 구경만 하기로 했다.
지금 현재 지상에 드러난 부분은 높이 5~6m정도로 조선시대 읍성보다 약간 높은 수준인데, 오랜 세월 깎이고 뭍혀서 그렇지 실제로는 크기가 휠씬 컸다고 한다. 99년도에 북쪽 성벽을 조사한 결과, 성벽 밑단 너비가 40m에 높이는 최소 9m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체성이 확인되었다. 성곽은 먼저 중심을 만들고 성곽 안팎으로 흙을 계속 덧붙이는 방식으로 쌓았는데, 고운 흙과 모래를 10cm 너비로 층층이 다져서 쌓는 판축공법으로 축조되었다고 한다. 사진 우측의 성벽 안쪽으로 현대 아파트가 보이는데, 저 자리가 97년도에 최초의 본격적인 풍납토성 발굴이 이루어진 곳이다.
성벽 멀리 끝부분에 철판으로 막아놓은 곳은 위성사진의 '다'부분으로 작년에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실시했던 성벽 발굴 현장이다.
지금은 발굴이 끝났 것 같다. 여기서 채취한(?) 토성의 단면을 얼마전에 개관한 한성백제박물관 로비 벽에다 붙여놨다.
성벽의 동남쪽 모서리부분으로, 위성사진의 '라'부분. 모서리니까 옛날에는 누각이 있었겠지?
모서리에서 바로 이어지는 풍납토성 남쪽성곽.
풍납토성 남동쪽 모서리에서 이어지는 큰 길을 10분정도 따라가면 몽촌토성이 나온다. 사진은 위성사진의 '마'지점에서 바라본 몽촌토성의 성벽.
위성사진의 '바'지점에 있는 다리 위에서 바라본 몽촌토성의 성벽과 해자역할을 하는 성내천.
일단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말하자면, 몽촌토성이 풍납토성보다 훨씬 웅장하다. 그 이유는 풍납토성은 평지성인데다 성벽의 상당부분이 지하에 묻혀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부분이 작은데 비해, 몽촌토성은 야트막한 구릉을 이용한 산성이라 산의 높이+성곽의 높이가 대략 20~30m에 달하고, 성벽 바깥으로 성내천의 물을 끌어들인 거대한 해자까지 둘러져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느껴지는 위압감은 대단한데, 순수한 군사요새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는 확실히 몽촌토성이 풍납토성보다 우월하다고 할 수 있다.
88올림픽 공원이 조성되면서 연못처럼 꾸며진 탓도 있지만, 우리나라 성곽중에 이처럼 거대한 인공 해자를 갖춘 성이 어디 있겠는가?
성벽에 올라 서남쪽 시내를 바라본 모습. 멀리 올림픽공원 평화의문이 보인다. 위성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몽촌토성의 해자는 주로 북서쪽으로 둘러져 있는데, 북방에서 내려오는 적을 염두에 두고 축조한 것이 분명한 것 같다. 몽촌토성이 축조된 시기는 3세기 중후반 고이왕때 쯤인 것 같은데, 왕성인 풍납토성이 평지성이라 방어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이보다 좀 더 군사적으로 강하고 요새화된 성을 축조하여 풍납토성을 보조하도록 한 것이 아닐까 한다. 한성백제 최후의 날에 개로왕이 왕궁이 있는 풍납토성이 아닌 몽촌토성에 있었던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몽촌토성의 성벽은 자연 구릉을 이용하여 쌓았기 때문에 높이가 상당하다. 여기는 대략 위성사진의 '사'부분으로 완만하게 이어지던 성벽이 한번 크게 굽이치는 부분이다. 우측으로는 해자의 역할을 하는 몽촌호수의 모습이 보인다.
여기도 대략 '사'부분. 평지의 야트막한 구릉을 이용해 성곽을 축조했다는 점에서 대구의 달성토성과 유사한데, 달성토성의 성곽은 수풀이 우거지고 낙엽정리도 안돼서 완전한 능선의 사면-등산로처럼 변해버린 것에 반해, 몽촌토성은 나무가 적고 잔디로 말끔하게 꾸며졌기 때문에 확실히 토성이라는 느낌을 주고 있다. 아마도 올림픽공원을 조성하면서 성벽에 대한 정비가 이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성벽 아래를 내려다 본 모습. 성벽의 높이 또한 달성토성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하다.
성벽 위쪽으로는 달성토성처럼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집에서 사진을 정리하면서 정말 굉장한 사실을 발견했는데, 사진에 찍힌 성벽 규모가 실제보다 훨씬 작아보인다는 것이다. 이 사진도 무슨 텔레토비 동산처럼 나왔지만, 원래는 성곽의 규모에 감탄하면서 찍은 사진이다.
산책로를 따라가다 남쪽을 보고 찍은 사진. 멀리 올해 4월에 개관한 한성백제박물관이 보인다.
.(終)
부록 : 삼국사기에 전하는 한성백제 최후의 날
위례성 함락 기사
21년 9월에 고구려왕(高句麗王) 거련[巨璉:장수왕(長壽王)]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왕도(王都) 한성[漢城:남한산성(南漢山城)과 그 북측(北側)의 춘궁리(春宮里)]을 포위하였다. 왕은 성문(城門)을 닫고 능히 나가 싸우지 못하였다. 고구려인(高句麗人)이 군사를 네 길로 나누어 협공(挾攻)하고, 또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질러 성문을 태우니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나아가 항복하려는 자도 있었다. 왕은 궁박(窮迫)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수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문(門)을 나서 서쪽으로 달아났으나, 고구려인이 쫓아가 살해하였다.
개로왕과 도림의 이야기
이 앞서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이 몰래 백제(百濟)를 도모하려 하여 간첩(間諜)으로 갈 수 있는 자를 구하였다. 이 때에 승(僧) 도림(道琳)이 응모(應募)하여 말하기를, "우승(愚僧)이 아직 도(道)를 알 지 못하였으므로 (돌이켜) 국은(國恩)에 보답(報答)하고자 생각합니다. 원컨대 대왕(大王)은 신(臣)을 어리석다 마시고 쓰시면 기약코 왕명(王命)을 욕되게 하지 않겠습니다"고 하였다. 왕이 기뻐하여 비밀리에 보내어 백제(百濟)를 속이게 하였다. 이에 도림(道琳)은 거짓 죄(罪)를 짓고 도망하여 온 것같이 하고 백제로 들어왔다. 이 때에 백제왕(百濟王) 근개루[近蓋婁:개로(蓋鹵)]가 바둑을 좋아하였는데, 도림(道琳)이 궐문(闕門)에 나아가 고(告)하기를, "신(臣)은 어려서 바둑을 배워 자못 묘경(妙境)에 들어갔사온데, 왕께 알려드리기를 원합니다"고 하였다. 왕이 불러들여 바둑을 두었더니 과연 국수(國手)였다. 드디어 상객(上客)으로 받들어 매우 친근히 하고, 늦게 만난 것을 한(恨)하였다. 도림(道琳)이 하루는 왕을 모시고 앉았다가 조용히 말하기를, "신(臣)은 이국인(異國人)이지만, 상[上:왕(王)]께서 [신(臣)을] 소외시(疏外視) 않으시고 은총이 매우 두터운데 오직 한 가지 기술(技術)로써 보답할 뿐, 일찍이 털끝만한 도움도 드린 일이 없습니다. 지금 한 말씀을 드리려 하옵는데, 상(上)의 뜻이 어떠신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자, 왕이 이르기를 "말해 보라. 만일 나라에 이(利)가 된다면 이는 그대에게 바라는 바이다" 하였다. 도림(道琳)이 말하기를 "대왕(大王)의 나라는 사방(四方)이 모두 산악(山岳)과 하해(河海)이니 이는 하늘이 베푼 험요(險要)요, 인위적인 형세(形勢)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주위의 나라들이 감히 엿볼 생각을 품지 못하고 오직 받들어 섬기기를 원하여 마지않습니다. 그런즉 왕께서는 마땅히 숭고(崇高)한 위세(威勢)와 부유(富有)한 실적(實績)으로써 남의 이목을 놀라게 해야 할 것이온데, 성곽(城郭)과 궁실(宮室)은 수리되지 아니하고, 선왕(先王)의 해골(骸骨)은 노지[露地:빈 들판]에 가장(假葬)되어 있고, 백성(百姓)의 가옥(家屋)은 자주 하류(河流)에 무너지니 신(臣)은 대왕(大王)을 위하여 좋게 여기지 않습니다"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옳다. 내가 그렇게 하리라" 하고 이에 나라 사람을 징발하여 흙을 쪄서[蒸(증)]성(城)을 쌓고 안에는 궁실(宮室)·누각(樓閣)·대사[臺榭대사:돈대와 그 위의 건물(建物)]등을 지었는데, 모두가 장려(壯麗)하였다. 또 욱리하[郁里河:지금 한강(漢江)의 일컬음]에서 큰 돌을 캐다가 곽(槨)을 만들어 부왕(父王)의 뼈를 [改(개)]장(葬)하고 강(江:한강(漢江) 연변(沿邊)에 따라 둑을 쌓되 사성[蛇城:風納里(풍납리) 土城(토성)] 동쪽에서 시작하여 숭산북[崇山北:검단산(黔丹山) 후려(後麓)의 창우리(倉隅里)]에까지 이르렀다. 이로 인하여 창름이 비고 인민(人民)이 곤궁하니 나라의 위태로움이 알[卵(란)]을 쌓아 놓음보다 더하였다. 도림(道琳)이 도망해 돌아와서 이 사실를 고하니, 장수왕(長壽王)이 기뻐하여 [백제(百濟)를 치려고] 곧 군사를 장수(將帥)에게 내주었다. 근개루왕[近蓋婁王:蓋鹵王(개로왕)]이 이를 듣고 아들 문주(文周)에게 이르기를, "내가 어리석고 밝지 못하여 간인(姦人)의 말을 신용하고 이 지경에 이르렀다. 백성은 쇠잔하고 군대는 약하니 비록 위태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누가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기를 즐겨하겠는가. 나는 마땅히 사직(社稷)을 위하여 죽겠지만 너도 여기서 함께 죽는 것은 무익(無益)한 일이다. 너는 [難(난)을] 피하여 나라의 계통을 잇도록 하라"고 하였다. 문주(文周)는 이에 목협만치(木劦滿致)·조미걸취(祖彌桀) [목협(木劦)과 조미(祖彌)는 모두 복성(複姓)이다. 수서(隋書)에는 목협(木劦)이 두 개의 성(姓)으로 되어 있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와 함께 남(南)으로 갔다. 이 때 고구려(高句麗)의 대로(對盧:관직명(官職名)]인 제우(齊于)·재증걸루(再曾桀婁)·고이만년(古尒萬年) [재증(再曾)·고이(古尒)는 모두 복성(複姓)이다]등이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성[北城:서울 창의문(彰義門) 밖]을 쳐 7일 만에 함락하고, 옮겨 남성[南城:남한산성(南漢山城)과 춘궁리(春宮里)]을 치니 성중(城中)이 흉흉하였다. 왕이 도망해 나갔는데, 고구려의 장수(將帥) 걸루(桀婁) 등이 왕을 보고 말[馬(마)]에서 내려 절을 하고, 조금 있다가 왕의 얼굴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 그 죄(罪)를 세어 책망하면서 아단성[阿旦城:서울 광장리(廣壯里) 아차산성(峨嵯山城)] 밑으로 박송(縛送)하여 살해하였다. 걸루(桀婁)와 만년(萬年)은 본국[本國:백제(百濟)] 사람이었는데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한 것이었다.
- 삼국사기(이병도 譯)
::: 참고 : 이병도는 백제의 수도를 지금의 하남 춘궁리 일대로, 북성을 북한산성으로, 남성을 남한산성으로 비정하였음. 또한 풍납토성을 백제의 사성으로 보았음.
'역사스페셜100선' 카테고리의 다른 글
62 역사 버라이어티, 왕건 코리아 (0) | 2013.09.28 |
---|---|
61 순장, 과연 생매장이었나 (0) | 2013.09.28 |
59 조선왕가 최초의 의문사 - 누가 소현세자를 죽였는가 (0) | 2013.09.28 |
58 온천궁궐, 온양행궁의 비밀 (0) | 2013.09.28 |
57 제주에 천년 왕국이 있었다 (0) | 2013.09.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