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도 자유부인이 있었다 |
성은 유씨요 이름은 감동인 여인.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 조선 세종시대를 살았던 이 여인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높은 벼슬을 하는 남자와 혼인을 했다. 편안한 여생을 지낼 수 있었을 것 같던 유감동은 세종 9년, 음란하고 도리를 어긴 여인이라는 ‘음부’의 칭호를 받으며 국가의 심판을 받게 된다. |
1. 남편과의 이혼 |
감동은 남편을 따라 무안에 내려와 살고 있었다. 당시 남편 최중기는 무안군수로 그 지방에서는 상당한 권력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병을 핑계 삼아 한양으로 올라온 감동은 당시 사대부 집 여인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자유연애를 누리게 되고, 그 결과 그녀는 남편에게 일방적인 이혼을 당하게 된다. |
2. 조선시대의 이혼제도 |
조선시대에도 이혼제도가 있었고, 그 종류도 다양했다. 하지만 국가가 개인의 이혼문제까지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었으며, 불가피한 상황 외에는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
3. 이혼이 성행했던 세종시대 |
이혼을 하려고 해도 임금의 허락을 받아야 했던 조선시대. 그런데 감동이 살았던 세종시대에는 유독 이혼과 간통 사건이 많았다. 정치적 안정기일 뿐 아니라, 사회가 안정되고 유교 체제를 갖춰가던 세종 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
4. 뒤바뀐 삶 |
유감동은 철저한 정절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사람의 첩으로 행세하기도 하고, 창기로 행세하기도 하면서 문란한 생활을 일삼는다. 감동이 스스로 신분을 속인 이유는 이렇다. 사대부 집 여자라는 사실일 밝혀지면 자신에게도 피해가 미칠 뿐 아니라 감동과 관계를 한 남자들에게도 큰 벌이 내려지기 때문이다. 유감동은 단순히 자신의 욕정을 다스리지 못해 이런 일을 저질렀을까. |
5. 용서 받지 못할 간통죄 |
감동의 경우. 분명 이혼 당한 여성, 즉 남편이 없는 데다가 스스로 창기라 칭했음에도 불구하고 간통죄가 성립했다. 간통죄는 다른 죄와는 달리 시대의 흐름이나 국가마다 문화의 차이에 따라서 죄의 성립 조건이 매우 다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의 간통은 어떤 기준으로 정해졌으며, 현재의 간통과의 어떤 차이점이 있고, 그에 따른 형벌은 어떤 것이었는지 알아보자. |
6. 조선 여인들의 명예 - 열녀 |
조선 전기 사회가 안정되어 가면서 이혼녀보다는 유교 사상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열녀들의 숫자가 급증하기 시작한다. 죽음에까지 이르는 극단적인 희생을 치루면서까지, 조선 여인들의 열녀가 되기 위한 노력은 계속된다. |
7. 어우동 |
지난 천 년 최고의 스캔들 메이커로 손꼽히기도 했던 어우동. 어우동은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의 손자며느리였다. 하지만 그녀는 은 그릇을 만드는 공인과 노래 부르고 춤을 추었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버림받는다. 친정 집에서 슬픈 세월을 보내고 있던 어우동. 마침내 어우동은 자유로운 여자의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이름을 현비로 개명한다. |
조선시대에도 자유부인이 있었다
방송일: 2000. 4. 29
<< 프롤로그 >>
(여자 모습 보이면)
성은 유씨요, 이름은 감동인 이 여인.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 조선 세종
시대를 살았던 이 여인은 대우 한상판윤 유귀수의 딸이었으며, 무안군수와
평강현감을 지낸 최중기의 부인이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높은 벼슬을
하는 남자와 혼인을 해서 살아갔던 이 때까지만 해도, 여인 감동의 인생에는
특별한 시련이 없었다. 그러나.
(발부터 보이고 틸 업)
세종 9년 8월. 감동은 이렇게 초췌한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E. "... 낱낱이 아
뢰어라"
감동은 음부라 불리고 있다. 음부란 음란하고 도리를 어긴 여인이라는 수치
스러운 칭호다. 따라서 감동은 음란한 행위를 한 여성으로서 국가의 심판을
받고 있는 것이다.
E. "... 장지"
당시 감동이 공식적으로 밝힌 남자들의 숫자는 서른 아홉명이었고, 그 외에
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고 전한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더욱
큰 충격적으로 받아였던 것은 감동이 관계했던 남자들의 숫자보다는 그들의
신상이었다. 공조판서 등의 관리와 공신의 자제 등 대부분이 높은 지위의 사
람들이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과연 이같은 일이 가능했을까.
ST.1
예는 부부간에 서로 삼가는 데서 시작된다.
집을 지을 때 내외를 구분하여 여자는 안쪽에 거처하고
(사랑채와 안채 사이 지나 나오며)
이 곳과는 별도로
남자는 바깥에 거처하며 문단속을 철저히 한다.
(예기 글자 떨어지고)
유교 5경 중 하나인 예기. 예의 이론과 실제를 기록한
예기라는 책에 나오는 글귀입니다. 예기에서 이른대로
조선시대 사람들은 안채와 사랑채를 엄격하게 구분해서
부부간에도 서로 격리된 장소에 살았는데요.
이 곳은 남편이 거처하던 사랑챕니다. 부인이 기거하는
안채는 이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데요.
이렇게 부부가 각각 다른 공간에서 생활을 하기 때문에
바로 이런 장치가 필요했습니다.
(종 줄 만들어지고 종 쳐보는)
이렇게 둘만이 아는 암호를 정하고 종소리를 통해서 안채에 있는 부인과 의사소통
을 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종소리 한번은 손님이 왔다는 신호,
두 번은 식사를 준비하라는 신호인 식입니다.
(비밀 통로 만들어지고)
또 부부만 아는 이런 비밀 통로도 있었습니다.
(비밀 통로 통과해 보는)
사랑채에서 안채로 드나들 수 있게 만들어 놓은
비밀 통로ㄴ데요.
남편만이 유일하게 이 곳을 드나들 수 있었습니다.
(안방) 부모가 정해준 합방일이 아닌 날에
부인이 보고 싶은 남편은 한밤중 몰래
안채에 있는 아내를 만나러 왔습니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내외담 놓여지고)
한편 부인이 있는 안채가 외부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중문과
안채 사이에 내외담이라는 것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내외담 사라지고 화단 우거지면)
내외담 대신 미관을 고려해서 이렇게 큰 상록수가 있는
화단을 꾸미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화단이 내외담
구실을 했던 셈인데요.
(전면이동)
집안의 구조만 봐도 당시 남녀의 구별이 분명했고 또한
접촉을 매우 조심스럽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조선 여인 감동은 수많은 남자들과의
애정행각으로 사회에 파문을 일으키는데요.
오늘 우리는 감동의 사건을 통해 조선시대 여성 정책과
유교 사상이 지배했던 사회 구조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
<< VCR 1 >>
(집 정경 나오면)
먼저 세종시대. 대형 간통 사건으로 온 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은 여인, 감동
의 생을 살펴보자.
(종 장난 치는 모습 보이다가 감동 원샷 잡히면)
감동은 남편을 따라 무안에 내려와 살고 있었다.
(남편 잡히면) 당시 남편 최중기는 무안군수로 그 지방에선 상당한 권력을
갖고 있었다.
E. "... 감사합니다"
(종과 함께 걷는)
이 때는 사대부집 아녀자들의 외출이 금기시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아
주 큰 이유가 아니고서는 여자 혼자 이렇게 먼 길을 떠날 수 없었다.
(구경하는) 병을 핑계삼아 한양으로 올라온 감동. 그녀는 오랜만에 맛보는
자유를 만끽했을 것이다.
실록은 그녀가 한양에 올라와서부터 음행한 짓을 일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시 말해 감동이 음부로서의 길을 걷게 된 것도 이 때부터이고, 여인 감동
의 삶은 이전과는 180도 달라지게 되는 것도 이 때부터다.
그런데 철저하게 정절 관념을 교육받고 자랐을 감동은 왜 한양에까지 올라
와서 그런 행실을 일삼았을까. 당시 사대부집 여인이 혼외의 음란한 행동을
한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 없었다. 이 일로 인해서 감동은 남편에게 버
림을 받게 된다.
ST.2
그림 '월하정인' (달밤 담벼락에 기대 서 있는 두 남녀의 모습)
MC, 그림을 감상하듯 잠시 보다가
앞으로 나오면 그림 사라지고 그 자리에 서가가 만들어진다
MC 책 한 권 빼들고 읽듯이
세종 9년 8월 17일 기록입니다.
'감동의 본 남편은 지금 평강현감 최중기입니다.
중기가 무안 군수 되었을 때 거느리고 가서 부임했는데
여자가 병을 핑계하고 먼저 서울에 와서는
음란한 행실을 마구 하므로 중기가 이를 버렸습니다'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실록은 남편 중기가 부인 감동을 '버렸다'고 기록하는데요.
여기서 버렸다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사전적인 의미로는 일방적인 이혼을 의미하는데...
그렇다면 이는 오늘날의 이혼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조선시대에는 어떻게 이혼이 이뤄졌는지 살펴보겠습니다 *
<< VCR 2 >>
(세종실록 펼쳐지면)
조선시대에는 사사로운 이혼 사건도 매우 비중있게 다뤄서 문제가 되는 것
은 일일이 실록에 기록했다.
조선시대의 이혼제도는 어떤 형태로 이루어졌을까.
- INT.
(대명률)
명나라에서 쓰이던 법전 대명률. 조선시대의 모든 형률은 바로 이 대명률에
의해 결정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혼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이혼의 종류)
대명률에 명시된 이혼의 종류는 이이, 휴기, 출처, 그리고
종부가매 이렇게 네 가지로 볼 수 있다. 보통 남편이 부인을 버린다는 의미
의 용어로는 휴기를 썼던 예를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이이라는 용어는 국
가가 강제로 부부에게 이혼을 요구하거나 혼인 당사자 또는 부모가 국가에
이혼을 요구할 때 쓰여졌다. 당시에는 국가가 개인의 혼인이나 이혼문제에
도 적극적으로 개입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부분이다.
(출처 글자)
그렇다면 출처의 의미는 무엇일까. 출처는 말 그대로 처를 내보낸다, 즉 처
를 쫓아낸다는 뜻으로 사용됐는데.
이는 부인을 쫓아낼 수 있는 일곱가지 이유, 즉 흔하게 알려진 칠거지악의
조건을 논의할 때 많이 거론됐던 용어다.
(종부가매)
종부가매는 부인을 매매한다는 의미로서, 중국법전 대명률에는 기록돼 있지
만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이 행해졌다는 예는 찾아볼 수 없다.
(신행)
혼인의 마지막을 가리키는 이혼. 이혼을 뜻하는 용어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
듯이 당시 혼인제도는 여자를 남자에게 예속시키는 절차의 하나였다.
(경국대전)
당시 국가에서는 여자가 서른 살이 되도록 노처녀로 있으면 그 아버지를 엄
중하게 문책했다. 아버지가 죽은 후에도 여자가 처녀로 있게 되면 유녀화될
확률이 높다고 봤기 때문이다. 국가는 혼인 뿐 아니라 이혼 문제에도 적극적
으로 개입한다. 당시 사대부가 이혼을 하기 위해서는 왕의 허락을 받아야 했
던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국가의 입장은 매우 보수적이어서 불가피한 상황 외에는
쉽게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혼에 있어서의 남녀 차
별적인 구조는 존재하고 있었다.
-INT.
ST.3
(MC, 책 덮으며 앞으로 나오고)
조선 시대 이혼의 형태에 대해서 살펴봤는데요.
특이한 것은 이혼을 하려면 임금님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이혼하는 것이 어려웠다는 얘긴데요.
이처럼 조선이 이혼억제정책을 썼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글씨 발현되면)우리 나라의 풍속에 여자는 곧고 신의가 있어
한번 시집가면 개가하지 않고 비록 내쫓긴다 하더라도
종신토록 스스로 수절하기 때문에 국법이 쉽게 절연함을 허락치 않는다 (글씨 읽
고)
여성의 절개를 숭상했던 조선시대.
이 때는 여자의 개가가 금기시 되고 있었는데요.
만약 여자가 일방적으로 쫓겨난다면
경제력 없는 여자들이 혼자 살아가는 일이 많아질 것이고 이것 역시 사회적인 문제
가 되기 때문입니다.
(글씨 사라지고) 이렇게 국가가 부부관계에 직접 간여한 것은
비단 이혼 문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국가가 사사로운 부부관계에 대해 간여했던
명분은 무엇이었을까요?
(경복궁)
건국 초기.
국가의 안정을 추구했던 조선은 국가안정의 기초로
가정을 가장 먼저 꼽았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다른 일각 세종대왕 어진)
정치적 안정기로 알려진 세종대왕 시대.
세종대의 실록을 살펴보면 유독 이혼이나 간통 사건이
많이 기록돼 있는 것입니다.
(세종대왕 어진 위로 통계 CG 뜨고)
통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조선실록에 기록된
간통 사건 중 약 40%에 해당하는 사건이 세종실록에
기록돼 있습니다. 유감동 사건과 같은 대형 사건도 이 시기에 일어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세종 시대에 유달리 간통 사건이 많이
일어났던 것일까요?
아니면 세종실록에 이런 사건들이 기록될 수밖에 없는
어떤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요? *
<< VCR 3 >>
세종대왕 시대에는 유난히 부부간의 이혼 문제, 또는 간통 사건에 대한 논의
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시기다.
(실록)
세종 실록을 보면 부부간의 이혼 문제에 대한 논의나 간통 사건의 진위를
가리기 위한 논란, 또 그 처벌 문제에 대한 논쟁 등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개인의 사사로운 문제로 치부해 버릴 수도 있는 이런 문제에 국가가 이렇게
적극적인 관심을 나타냈던 이유는 무엇일까. 문제의 해답을 얻기 위해서 먼
저 고려 때의 풍속을 살펴보자. 고려말 국교였던 불교계가 타락하면서 사회
를 이끌어갈 지배개념이 사라졌고 성도덕은 급격히 추락했다.
(궁궐 의식)
새로운 왕조가 세워지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가정의 풍속을 바로잡는 일이
었다. 유교이념을 바탕으로 세워진 조선왕조는 가정이 평안하고 가부장적인
체제가 정비돼 있을 때 국가의 안정도 이뤄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태조 실록)
그러나 풍속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건국 초기에는 고려 말기의 풍속과 생활
모습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 이어지는 경향이 짙었다. 법제 체제는 정비돼 가
고 있지만 백성들의 생활에까지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그림자 이펙트)
태조 실록은 이렇게 말한다. 고려말기에 풍속이 퇴패해져 사대부의 아내들이
권세 있는 집안에 찾아가 알현하면서도 태연히 부끄러이 여기지 않으니 식
견 있는 사람들은 이를 수치스럽게 여깁니다.
태조는 풍속을 바로잡기 위해서 여자들의 외출을 금지하기 시작한다. 3촌 이
내의 친척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들의 집에 가는 것을 금지하게 되는 것이
다.
그리고 집권 초기부터 나라 안팎으로 본격적인 정비를 시작하던 세종시대.
이 때는 유교이념이 생활 풍속으로 직접 쓰이기 시작하던 시기다.
-INT.
세종실록에 간통 사건이 유독 많이 기록된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서 먼저 당시 나라 안팎의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CG)
국내에서의 안정이 국외적으로도 나타나 명나라와 외교관계를 수립했으며
또한 4군 6진을 개척해서 영토를 확장했다. 이는 국토를 확장하는 데에도 의
미가 있지만, 국경의 선을 확실히 하여 불안한 백성들의 마음을 추스릴 수
있게 했다는 데에도 큰 의미를 둘 수 있는 일이다.
(중앙집권화)
이처럼 체제가 안정적으로 정비되고 국가에 대한 백성들의 신뢰가 쌓여가자,
왕권은 점차 강화되기 시작한다. 뿔뿔이 흩어졌던 지방 세력들이 중앙집권화
를 통해서 하나로 모이게 되는 것이다. 세종대왕은 국내외적으로 이렇게 안
정적인 기틀을 만든 후에 (유교보급) 백성들에게 유교적인 윤리를 보급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한다. 국가의 기반이 되는 유교 이념이 바로 서야 진정
한 국가 성장이 이뤄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종은 이를 위해 가정의 기
반을 다지는 일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삼강행실도)
삼강행실도가 완성된 것도 이 때다. 유교 윤리를 생활에 쉽게 적용할 수 있
도록 만든 삼강행실도는 백성의 생활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INT.
(삼강행실열녀도)
이 때부터 남녀 관계에 대한 여러 종류의 규제가 단순한 윤리적 덕목이 아
닌 법으로 성립하게 된다. 따라서 간통죄는 단순히 도덕적인 지탄을 받는 대
상이 아니라 법률적으로도 엄격하게 규제를 받는 죄가 되었다.
(실록)
동시에 실록에도 이에 대한 많은 기록들이 남게 된다. 가정에 대한 풍속을
강화함에 따라, 간통죄를 그저 사사로운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지 않고 국가
의 안정과 긴밀한 연관이 있는 중대사로 보았기 때문이다.
세종은 이런 문제들을 은밀한 곳에서 끄집어 내어 교화시키고 순화시키고자
하였다.
-INT.
풍속을 순화하는 한 방안으로 이혼이나 간통 사건과 같은 개인적인 문제까
지 고민했던 세종. 이 때부터 조선은 진정한 유교국가로 거듭나게 된다.
ST.4
사회가 안정되면서 유교 체제를 갖춰가던 세종대.
이 때 세종 실록에 간통죄로 인한 사건이 많이
기록된 것 역시 가정에서 일어나는 범죄를 국가가
관리하겠다는 강력한 왕의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감동의 모습 스틸)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유감동 사건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격적으로 성범죄에 대한
강력한 통제가 시작되는 이 시기에
감동은 왜 그런 큰 죄를 저질렀을까요?
(사이 두고) 여기 중요한 자료가 하나 있습니다.
(책상 위에 상소문 하나 생기고. MC, 그것을 펼쳐보며)
세종실록.
김학지가 올린 상소문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유감동 여인의 추악함도 처음에는 이렇게 심하지 않았는데
김여달에게 강포한 짓을 당하여 이렇게 된 것입니다.
여달이라는 자는 어두운 밤을 타서 무뢰배와 결당하여
거리와 마을을 쓸고 다니다가 유감동 여인을 만나
순찰한다고 속이고 위협과 공갈을 가하여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가서 밤새도록 희롱
했으니 이것을 보더라도 유감동이 처음에는 순종하지 않는 것을 강제로 포악한 짓
을 행한
것이 명백합니다.
(상소문 내려놓고 앞으로 나오면서)
'감동이 처음에는 순종하지 않는 것을 강제로 포악한 짓을 행한 것이 명백합니다'
이 상소문은 감동이 처음부터 단순한 욕정 때문에
여러 사람과 관계를 맺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단서가 되고 있는데요. 그렇다면 그녀의 삶이 180도
뒤바뀐 이유는 무엇인지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
<< VCR 4 >>
(실록)
김여달에게 강포한 짓을 당한 감동. 그 후 감동은 어떻게 살게 될까. 김여달
은 감동을 강제로 성폭행한 후, 대담하게도 감동의 남편인 최중기의 집에까
지 드나든다.
(서울 가는 감동)
감동이 굳이 병을 핑계삼아 집을 떠나 한양으로 간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
는 부분이다. 그 후 감동은 남편에게 가차없이 버림을 당한다. 정절을 잃은
여자들 중에는 남편에게 버림을 당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는데. 이런 여자들
은 과연 어떻게 됐을까.
-INT.
정절을 잃고 남편에게 버림을 받은 여성들의 선택은 자살과 같이 극단적인
것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감동은 이와는 또다른 선택을 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과는 완전히 다른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역
시 극단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감동은 스스로를 창기라 칭하기 시작한다.
-E. "... 놓도록 해라"
(남자 들어오면)
감동은 여러 사람의 첩으로 행세하기도 하고 창기로 행세하기도 하면서 문
란한 생활을 일삼는다. 감동이 스스로 신분을 속인 이유는 이렇다. 사대부집
여자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된다면 감동 그 자신에게 피해가 미칠 뿐 아니라
감동과 관계를 한 남자들에게도 큰 벌이 내려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신분
이 가장 큰 재산이던 이 시기에 자신의 신분을 격하시켰던 행동은 매우 자
학적인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겠다. 감동이 이렇게까지 된 이유는 과연 무
엇일까.
- INT.
ST.5
(옛서가에서 책 빼서 걸어나오는 MC)
이 책은 자녀안입니다.
고려 때부터 전해 내려오던 명분데요.
음란한 행동을 했거나 3번 시집 간 여자의 이름을
기록해 놓은 일종의 실행녀 명부입니다.
(책을 펼치면 그 안에서 조선시대 여성의 캐릭터 3개정도 튀어나와 MC 옆으로 서
고)
이 곳에 이름이 기재되면
(첫 번째 캐릭터 고개 숙인 채 앞으로 돌출)
평생 간음녀로 낙인찍혀 온갖 수모를 감수해야 하고
(두 번째 캐릭터 양반 옷에서 종의 옷으로 변하며 앞으로 돌출)
관비로 신분이 격하되는 경우도 있었고
(세 번째 캐릭터 보따리를 싸서 울면서 앞으로 돌출)
결혼 이전에는 이 일이 파혼의 사유가,
그리고 결혼 이후에는 이혼의 사유가 되었습니다.
(캐릭터 사라지고 MC 책을 덮으며)
자녀안에 이름이 기록되면 그 자신에게 피해가 돌아옴은 물론 자손들의 벼슬길까지
막게 되는 결과가 생겼습니다.
이처럼 조선사회는 절개를 지키지 못한 여성에게
무척이나 엄중한 처벌을 내렸는데요.
그렇다면 이런 조선사회에서 용서받지 못할 죄인
간통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요즘 우리가 말하는 간통과 차이점은 없었을까요?
조선시대 간통죄를 저질렀을 때의 처벌은 어떻게
이뤄졌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 VCR 5 >>
감동의 경우. 분명 이혼 당한 여성, 즉 남편이 없는 여자였으며 스스로 창기
라 칭했음에도 불구하고 간통죄가 성립했다.
간통죄는 다른 죄와는 달리 시대의 흐름이나 국가마다 문화의 차이에 따라
서 죄의 성립 조건이 매우 다르다.
(법원)
조선시대의 간통죄의 개념 역시 오늘날의 그것과는 많이 달랐다. 요즘의 간
통죄의 의미는 무엇인가.
-INT.
세종 9년, 동자와 임견수는 결혼을 하지 않은 미혼 남녀였는데 혼인을 치루
지 않고 관계를 맺었다 하여 간통죄로 처벌됐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남녀
모두 혼인 관계가 성립하지 않은 상태에서 관계를 갖는 것은 모두 간통으로
취급했다.
또한 중매는 혼인 관계에 있어 필수 요건으로 보았는데.
(집)
이 때문에 일어난 웃지 못할 사건도 있었다. 성종 7년에 발생한 일이다.
(근비, 차경남)
여종 근비는 차경남과 서로 정을 통하는 사이였다. 차경남은 친척을 통해 근
비와 중매를 서게 하기도 했다.
(담벼락 훔쳐보는)
그런데 근비와 정을 통하는 남자는 차경남 하나가 아니었다.
(담벼락에 얼굴 나오면)
이들을 몰래 훔쳐보고 있는 바로 이 남자.
박종손이라는 이 남자는 근비와 관계를 맺은 또다른 간부다.
(회상)
박종손은 차경남과 근비의 관계를 알면서도 근비와 남몰래 정을 통했다.
(눈빛)
박종손은 근비가 자신과 관계를 맺은 연후에도 계속해서 차경남과도 정을
통하자 질투심에 눈이 멀게 된다.
(뛰어가 삽 들고 나와 근비 놀라면)
그리고 끔찍한 일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STOP 화면)
(자막 나오면)
근비의 간부였던 박종손은 살해죄로 사형에 처해지게 된다.
(자막 나오면)
그런데 문제는 죽은 차경남과 현장에 함께 있었던 근비의 처벌이 어떻게 되
어야 하느냐에 대한 것이었다.
(성종/신하들)
처음에는 근비를 그냥 곤장형에 처하도록 했다. 그러나.
죽은 차경남은 근비의 남편격이므로 그의 죽음을 방관한 근비 또한 사형을
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강하게 대두됐기 때문이다. 핵심은 이것이다. 죽은 차
경남이 과연 근비의 남편에 해당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근비와 중매가 있었
던 차경남은 마땅히 남편으로 봐야 한다는 의견. 또 근비가 부모에게 고하지
않고 스스로의 정으로 간통했으니 죽은 차경남은 남편이 아니라 간부에 해
당한다는 의견. 이 두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게 되는 것이다.
(박종손 일하는 것 조금 보고)
차경남을 죽인 박종손은 근비와 중매가 없었고 혼인도 치루지 않았기 때문
에 당연히 간부에 해당한다.
(차경남 나오면)
그런데 죽은 차경남은 친척을 통해 근비와 중매를 서게 한다. 천한 계급이었
던 근비의 경우, 중매만 선 것도 결혼으로 봐야 한다는 얘기. 따라서 차경남
은 보는 시각에 따라 남편으로도 간부로도 볼 수가 있다.
(화면 나누어지면)
차경남을 박종손과 같이 간부로 보느냐, 그렇지 않고 남편으로 보느냐에 따
라서 운명이 좌우되는 것은 바로 근비라는 여인. 간부로 본다면 곤장형에 그
치겠지만 남편으로 본다면 그녀는 사형감이다.
(왕 앞의 3 남녀)
오랜 논란 끝에 성종은 차경남을 남편으로 결정한다. 결국 근비는 자신이 저
지른 죄보다 훨씬 무거운 처벌을 받고 죽음을 당한다.
(혼인의 단계)
혼인은 먼저 중매인이 의견을 알아보는 의혼의 단계. 그리고 신랑이 사주단
자를 보내는 납채, 함을 보내는 납폐, 마지막으로 사실상의 혼례식인 초례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
(형정도첩)
사실상 중매만 오갔던 근비에게는 억울한 처벌인 셈이다.
그렇다면 간통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어떤 구성 요건을 갖추어야 했을까.
(남자 잡아가는)
조선시대 간통죄는 적발 즉시 처벌 대상이 되었다. 간통 현장을 눈으로 확인
했을 때만 처벌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렇지만 점차 간통 자체가 은밀한 곳
에서 이뤄졌으므로 현장에서 발각된 간통이 아니라도 간통을 했다는 상황만
명백하면 처벌을 하기도 했다. 세종실록에도 간황만 명백하다면 죄를 주어야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대명률)
대명률에 의거하면 간통죄는 그 형태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세분화될 수 있
다. 화간은 가장 포괄적인 의미의 간통으로 남녀가 합의하에 관계를 갖는 것
을 의미하고, 조간은 상대방을 유혹해서 집으로 유인해 관계를 맺는 것을 의
미한다. 또한 강간까지도 폭력이 아닌 간통의 한 종류로 취급했다는 것이 특
징이다.
(형정도첩)
간통을 저질렀을 경우 화간은 장형 100대를 맞아야 했고 조간의 경우는 장
100대의 형을 받았다. 그런데 여인이 유부녀일 경우 각각 10대씩이 더 추가
돼 결혼한 여성들의 간통을 더욱 큰 죄로 다뤘음을 알 수 있다. 벌을 줄 때
도 여성의 경우는 옷을 모두 벗고 맨살로 형벌을 받게 해 고통과 수치심을
더하도록 만들었다.
(성황당 서성이는)
정절 이데올로기를 중요시했던 조선왕조. 이 때는 여성들의 간통죄를 엄중히
처벌하고 여성들의 재가 역시 금기시했는데. 그래서 남편에게 버림을 받은
서민층 여성들은 탈출구를 모색해야 했다. 동이 터오르기 시작하는 어스름한
새벽 무렵. 성황당 앞 길목을 서성이고 있는 이 여인도 그들 중 한 사람이
다.
(깃 저고리)
이 세모꼴의 깃저고리 조각을 보물처럼 꼭 쥐고 있는 여인.
한참을 기다린 후. 이윽고 한 남자가 이 길목을 지난다.
이 남자가 성황당을 지나는 첫 번째 남자인 것이다.
(깃저고리 조각 내밀면)
여인이 깃저고리 조각을 내밀자 남자는 무슨 의미인지 알았다는 듯이 여인
을 보쌈해 간다. 여인이 반항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가는 모습)
새벽녘 성황당 앞길에선 이런 상황이 종종 발생하곤 했다고 전해진다.
ST.6
성황당 돌 무더기 위에 남아 있는 세모꼴 깃저고리 조각.
바람에 휙 날려 스튜디오로 떨어진다.
MC, 나타나 깃저고리 조각을 주워든다.
이것은 깃저고리 조각입니다.
이 깃저고리 조각은 바로 할급휴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이혼하는 부인에게 깃저고리 조각을 주는 것을
속칭 수세 준다고 하는데요,
수세란 고어로 이혼증서란 뜻입니다.
이혼 증서를 가지고 있는 여자를 최초로 만난 남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 여자를 데리고 살아야 하는
관습적인 의무를 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명 습첩제도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깃저고리 조각은
남편이 부인에게 주는 이혼증서로서
말하자면 재혼허가증입니다.
말하자면 이 휴서는 탈출구가 없는 이혼녀들에게는
그야말로 숨쉴구멍이었던 셈입니다.
(MC. 걸어나오며)
그러나 조선 전기 사회가 점차 안정돼 가면서
이혼녀보다는 유교 사상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열녀들의 숫자가
급증하기 시작합니다. 열녀의 숫자가 늘어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조선시대를 살았던 열녀들의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열녀비 여기 저기 세워지며 MC 있는 자리를 에워싼다) *
<< VCR 6 >>
경상북도 달성군 현풍리 12정녀비. 현풍곽씨 가문에서 배출된 효자, 충신, 그
리고 열녀를 기념하기 위해서 세워진 이것. 특히 조상 중에 가장 명예로운
것으로 전해지는 열녀각과 열녀비를 받게 된 여인들이 여섯 명이나 있다는
사실은 수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후손들에게 큰 자랑거리다.
- INT.
죽음에까지 이르는 극단적인 희생을 치루면서까지, 조선 여인들의 열녀가 되
기 위한 노력은 계속된다. 물론 남편에 대한 사랑과 의리에서 비롯된 노력도
있었겠지만, 당시 열녀가 된다는 것은 본인 자신에게 있어서나 가문에 있어
서 큰 도움이 됐기 때문에 이런 이유도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INT.
현풍곽씨에서 배출된 여섯명의 열녀 중 지금까지도 가장 추앙받고 있는 여
인은 전이 이씨 부인. 전이 이씨는 후손들에게 가장 큰 귀감이 되는 행적을
남겼다 하여, 현재까지도 다른 가문에서도 그 정신을 배우기 위해서 올 정도
라고 한다. 전이 이씨가 열녀가 된 사연을 들어보자.
-INT.
전이 이씨가 목숨을 끊기 전에 이불 밑에 감춰 두었던 절명사, 다시 말해 유
서다. 자신을 두고 세상을 떠난 남편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절절하게 배어
들어 있는 내용이다. 다른 세상에서 만날 것을 기약하며 남편을 따르겠다는
글귀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켰다고 한다. 조선전기에서 후기로 갈수
록 열녀가 되기 위한 방법은 극단적으로 변했간다. 또한 그 숫자도 크게 늘
어가기 시작한다.
-INT.
정절을 목숨보다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교육이 강화되면서
지금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 발생한다. 단지 옷깃을 잡았다는 이
유로 자살을 하는 사건. 또 낯선 남자가 손목을 잡고 희롱했다고 해서, 여자
가 고민하다가 자신의 손목을 잘라내 버린 매우 끔찍한 사건도 일어난다.
(물)
딸이 강간당했다 하여 어머니가 딸을 물에 빠뜨려 죽이는 사건까지 일어난
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조선의 실학자들은 새로운 열녀관을 정립해야 한
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죽음만이 열녀가 되는 조건이 되어선 안 된다는 얘기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꿋꿋하게 정절을 지키고 어린 자식들을 키우며 살아가는 것이 진정
한 열녀상이라는 논리다.
(실록)
그러나 제도권은 여성들에게 끊임없이 정절관념을 강요해 마침내는 재가금
지라는 가혹한 족쇄를 채우고 만다. 성종 8년에 제정된 이 법제는 재가녀 자
손은 벼슬할 수 없다는 규제를 만들어 과부들의 발목을 잡는다. 재가가 금지
되다 보니 과부들은 경제적으로 먹고 살 길이 막막해져 굶어죽을 위기에 처
하는 여자들도 많았다. 이런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재가금지법은 이후 4백년
동안 준수되어 서민들까지도 과부의 수절을 실천하도록 만들다가 갑오개혁
때 폐지된다.
(바느질 그림자)
조선시대 연암 박지원이 지은 열녀 함양박씨전에서는 과부들의 애처로운 삶
을 잘 표현하고 있다.
(호롱불)
외로운 호롱불이 그림자를 비추면 혼자 지새는 밤이라 시간이 잘 가지 않는
데, 비라도 쓸쓸히 내리거나 창에 달빛이 희거나 짝지은 기러기가 하늘을 날
아가는 소리가 들려
마음이 적적해지면 동전을 꺼내서 굴리고 다시 찾아와 또 굴리는 일을 되풀
이 한다. 동전에 윤곽이 없어질 때까지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덧 동창이 밝
아온다. 혼자 사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과부들의 슬픈 이야기는 소설이나
민담으로도 전해내려오는 것이 많다.
(사이) 이름 없는 과부들은 평생 정조를 지키기 위해 이처럼 애달픈 삶을 살
아야 했던 것이다.
ST.7
(삼강행실열녀도 앞에 MC 서 있고)
열녀가 되기 위해 여인들이 겪어야 했던 아픔은
참으로 컸지만 이런 아픔을 겪으면서도 열녀가 되기 위한
여인들의 노력은 계속됐는데요.
어려서부터 여자들에게 행해졌던
열녀 교육이 이에 큰 몫을 했습니다.
(뒤에 서가 나오며 MC, 서가에서 태교신기 책 뽑아들고)
여성들이 받았던 또다른 교육은 성교육입니다.
그러나 이 성교육은 단지 어떤 날 남녀가 합방을
하면 임신할 가능성이 큰가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서당' 그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하지만 남성은 서당에서 논어를 뗀 뒤,
보정이라는 성교육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절도 있고 지혜로운 성생활을 위한
체계적인 성교육이었습니다.
이러한 차이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는
철저하게 남녀유별에 의해 운용된 사회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회에 정면으로 반기라도 들 듯이
화려한 남성편력을 자랑했던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감동과 어우동의 스틸 사진 걸리고)
바로 앞에서 소개해 드린 여인 감동,
그리고 지난 천년 최고의 염문설의 주인공으로도
잘 알려진 어우동입니다.
100년 정도의 차이를 두고 태어난 이 여인들에게
조선 왕조는 각기 다른 처벌을 내리는데요.
감동에게는 변방의 관비가 되는 형벌이 내려지지만
어우동은 사형에 처해집니다.
이 여인들에게 왜 각각 다른 처벌이 내려질 수밖에
없었을까요.
감동과 어우동의 생의 마지막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 VCR 7 >>
(끌려오는 남자들)
당시 감동이 관계를 맺은 것으로 발설한 남자는 공식적으로 서른 아홉명. 더
군다나 그 상간자들이 대부분 높은 벼슬에 있는 사람이거나 나라에 공을 세
운 사람의 자식이어서 나라 안은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감동 말하는 것 잠깐 보고)
법에 의거하자면 사대부집 출신의 여자와 간통을 한 남자들 역시 중벌에 처
해지게 돼 있기 때문이다.
(세종)
이에 대한 세종의 입장은 이렇다. 감동은 음란하고 도리를 어긴 여자인 음부
이므로 관계를 맺었던 남자들의 죄보다는 여자의 죄가 더 크다. (사이) 여자
인 감동에게 더 큰 책임을 두었던 것이다.
(감동 고개 드는)
김학지의 상소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맨 처음 감동은 김여달이란 자에게 강
제로 성폭행을 당한다. 그 후 남편에게 이혼 당하고 음란한 짓을 일삼게 되
는 것이다.
(왔다 갔다하는)
그렇다면 근본적인 사건의 빌미를 만든 김여달에게 더 큰 죄를 물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 시대에는 여자가 강간을 당했다 하더라도 그 후의 행실이
정숙하지 못할 때는 남자에게 죄를 돌리지 않았다. 따라서 감동을 강간했던
김여달은 물론 나머지 상간자들도 장형이나 파직 정도의 가벼운 처벌만이
내려졌다. 그 중에는 다시 벼슬에 오른 사람도 있다.
그러나. (관비가 된 감동)
감동에게는 변방의 관비로 가게 되는 형이 내려진다. 뿐만 아니라 감동은 후
세에까지 음욕이 많아서 수많은 남자들을 상대하고 사회에 파장을 일으킨
요부로 전해지는 불명예를 안았다.
(어우동)
지난 천년 최고의 스캔들 메이커로 손꼽히기도 했던 어우동.
성종대의 인물인 어우동은 승문원 지사 박윤창의 딸이었으며,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령 대군의 손자며느리이기도 했다. 어우동은 왕실의 종친녀라는 귀
한 신분의 여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은그릇을 만드는 공인과 노래와
춤을 췄다는 남편으로부터 쫓겨나게 된다. 친정집에서 슬픈 세월을 보내고
있던 어우동.
(웃는)
마침내 어우동은 한 지아비에게 속하지 않는 자유로운 여자의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이름을 현비로 개명한다. 그리고 감동과 같이 창기로 행세하여 아
무도 그녀가 귀한 신분의 여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남자들 발)
어우동이 음행을 좋아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녀와 간통하려는 남자들의 발
길은 끊이지 않았고. 어우동에 대한 이야기는 장안의 화제가 된다. 성종실록
은 그녀가 정욕이 남달랐던 여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끌려오는 어우동)
성종 11년 9월. 어우동의 음행은 의금부의 탄핵으로 종지부를 찍게 된다. 어
우동이 의금부에 체포되고나자 조정은 또 한번 그녀에 대한 처벌 문제로 들
끓게 된다. 어우동은 귀한 신분의 여자였기 때문에 처벌에 대한 논의가 조심
스러웠던 반면, 또한 그녀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하고나 간통을 했다는
사실은 신분제 사회인 조선왕조에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큰 문제였던 것이
다.
(일어나서 얘기듣는)
그녀가 의금부에 끌려가게 되자 그녀의 정부였던 방산수는 사형을 면할 비
책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방산수는 감동의 예를 들면서 간통한 사람의 이름
을 모두 대면 사형을 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얘기했다.
(방산수 가면)
잠시 어우동은 생에 대한 희망을 발견하고 안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방산수가 일러준대로 간통한 사람들의 이름을 모조리 댔다. 그러나
어우동은 운이 나빴다.
어우동은 감동의 경우와는 달랐던 것이다. 감동이 지체 높은 사대부들과만
간통을 했던 반면, 어우동은 사대부에서부터 근친, 그리고 노비에 이르기까
지 여러 신분을 가리지 않고 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이것이 그녀의 형을 결
정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INT.
대명률에 의거하면, 종으로써 양인 부녀자를 간통한 죄는 일반 간통죄보다 1
등을 가중한다. 또 양인으로서 다른 사람의 계집종을 간통한 사람은 일반 간
통죄보다 1등을 감한다.
이는 다른 신분끼리의 간통은 용인하지 못하는 조선사회의 면모를 보여준다.
(성종)
대신들 간의 의견은 매우 분분했다. 그러나 성종은 단호하게 어우동에게 사
형을 내린다. 어우동을 처벌하지 않는다면 후세에도 또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을 것이라는 뜻에서였다. 어우동에게 사형이 내려진 것은 원래 그녀가 받
아야 할 형보다 훨씬 무거운 것으로, 형률에도 없는 이례적인 형벌이었다.
(어우동 끌려가는)
다시 말해 성종 임금은 어우동 사건을 계기로 해서 그 때까디 정착하지 못
하고 있던 유교적 성도덕을 민간의 풍습에 뿌리 깊게 정착시키고자 했던 것
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어우동의 경우는 사대부 부녀자들의 문란한 행실을
엄벌하고자 하는 정부의 의지에 희생양이 된 점도 있다.
시대의 요녀라 불리던 어우동은
그렇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INT.
(얼굴 원샷)
만약, 감동이 성종대에 태어났다면 어떤 처벌을 받았을까.
그녀에게는 관비로 영속되는 것이 아닌 사형이 내려졌을 것이다.
(얼굴 원샷)
어우동 역시 세종대왕대에 태어났다면 죽음을 면할 수 있었을지 모를 일이
다. 마찬가지로, 만약 감동과 어우동이 지금 이 시대에 태어난 여인이었다면
그녀들은 극단적인 선택 외의 또다른 삶의 탈출구를 찾았을지도 모른다.
ST.8
(감동과 어우동의 사진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MC
(감동 스틸/ 어우동 스틸 사진 나란히 있고.
(앞으로 걸어나오는 MC
조선사회에서 정절을 잃고 남편에게 버림 받은
감동과 같은 여인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았습니다.
죽음 또는 굴욕적인 삶.
어우동과 감동 흑백에서 컬러로,
현대의 옷차림으로 변해가며
인파로 가득찬 거리 안에 선다
인파 사이로 섞여서 사라진다.
역사 속에서 요부 중 요부로 심판받아 온 여인 유감동.
우리가 굳이 이 여인에게 새로운 평가를 내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녀는 당시의 제도권과 지배 사상에 의해
극단적인 선택을 강요받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남성들의 물리적인 힘과 철저한 정절 사상이 지배했던
조선시대는 여인들의 가혹한 희생으로 이뤄졌던 것입니다.
'역사스페셜100선' 카테고리의 다른 글
69 로마유리 2000년 전 신라에 오다 (0) | 2013.09.28 |
---|---|
68 원효는 왜 파계승이 되었나? (0) | 2013.09.28 |
66 고구려비가 중원에 서 있는 까닭은? (0) | 2013.09.28 |
65 신라 최후의 미스터리, 마의태자 (0) | 2013.09.28 |
64 조선시대 우리는 하늘을 날았다 (0) | 2013.09.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