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유리 2000년 전 신라에 오다 |
황남대총은 신라의 고분 가운데 가장 큰 무덤이다. 무덤의 주인공들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황금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많은 금제유물 가운데 눈길을 끄는 특이한 유물이 있었다. 투명한 색깔의 그릇 파편들, 그것은 유리였다. 황남대총에서 찾아낸 유리의 뿌리와 고대문화의 비밀을 밝힌다. |
1. 황남대총의 유리는 수입품이었다. |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유리용기는 모두 열점. 남자 주인공의 머리맡에서 출토된 유리컵에는 물결무늬가 장식되어 있었다. 유리는 당시 신라에서 생산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설령 가지고 있었더라도 세공할 수 있는 기술이 전혀 없었다. 아름답고 화려한 유리 유물들, 그 대부분은 외래에서 수입해 올 수밖에 없는 것들이었다. 고대인들이 유리들을 어디서 수입한 것일까? |
2. 유리는 로마로부터 왔다 |
경주 왕릉 지구에서 출토된 유리목걸이의 중심에 박혀있는 작은 유리구슬에는 상상하지 못한 그림이 숨어 있었다. 하얀 얼굴에 눈이 크고, 입술을 붉게 칠한 사람의 얼굴, 구슬 안에는 모두 네 명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이 목걸이를 통해 유리산지를 추적할 수 있었다. |
3. 이스라엘 현지 취재 |
꽃이 만발한 나무 위로 흰 새가 날고 있고, 그 아래 짙게 화장한 낯선 이들이 보인다. 마치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이 정교한 그림이 겨우 1.5cm밖에 되지 않는 유리 구슬에 그려져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그림이 그냥 붓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색깔의 가는 유리막대를 일일이 오려 붙여서 모자이크 기법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유리의 본산지 로마에서 유리유물을 둘러싼 의문들을 풀어본다. |
4. 초원의 길 |
로마는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 신라는 그 반대편, 동쪽의 끝에 있다. 이 두 나라 사이에 교류가 있었다는 사실은 그 어떤 문헌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로마에서 유행하던 유리병이 비슷한 시기에 경주에서 발견된 것을 보면, 그 전파속도가 얼마나 빨랐는지 짐작할 수 있다. 어떤 방법으로 로마에서 유리가 직수입될 수 있었던 것일까? |
5. 바다에서 이루어진 교류 |
이미 신라시대 이전 한나라시대부터 바닷길을 통하여 인도와 동남아의 구슬이 우리나라에 전해지게 되었다. 유리가 신라로 전해지기 훨씬 전인 한나라 시대부터 바닷길을 통해 세계를 잇는 해상 실크로드가 존재했던 것이다. 2000년 전, 한반도는 세계를 향해 한껏 열려있던 사회였다. |
로마유리, 2000년전 신라에 오다
담당 PD : 윤한용 / 작가 : 김경민
방송일: 2000. 5.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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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DEO A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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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황남대총 발군 영상 수천년간 잠자고 잇던 고대세계의 비밀들
거대한 무덤 속에는 수많은 유물들이 간직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는 뜻밖의 유물이 있었다
투명한 색깔의 그릇 파편들
그것은 유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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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 - TITLE 로마유리 ,2000년전 신라에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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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1
# 황남대총의 거대한 봉분 앞의 MC-
높이 23미터, 길이 120미터-
황남대총은 신라의 고분 가운데 가장 큰 무덤입니다.
두 개의 봉분이 연결되어 마치 표주박처럼 보이는 이 무덤은 왕이나 왕족의 부부묘라고 추
정되고 있습니다. 지난 73년, 황남대총의 흙이 걷히고 지하세계가 열리기 시작했을떄,
많은 이들은 숨죽이며 황남대총의 유물들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MC 뒤로 돌아 고분을 바라보며
너무나 화려한 금제 유물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고,
# 봉분으로 줌인 내부로 dis-
이전까지 한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유물들이 바로 이 황남대총에서 출토됐기 때문입니다.
# 고분 안, 무덤의 주인공 복원
무덤의 주인공들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황금으로 치장하고 있었습니다.
# 주인공 남녀 발끝에서 머리까지 틸업-
금으로 만든 신발, 허리띠, 목걸이 그리고 금관까지-
그것은 모두 최고의 신분을 상징하는 화려한 금 장신구들이었습니다.
무덤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몸을 금으로 장식할 뿐만 아니라, 마구나 각종 그릇들, 그리고 관
뚜껑까지도 금으로 장식하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황금의 무덤이었죠. 그런데 그 많은 금제
유물 가운데 눈길을 끄는 특이한 유물이 있었습니다.
#MC, 약간 풀샷에서 작은 테이블 위에 높여있는 유리잔들과 유리병들
바로 이 유리 용기들입니다. 아마도 무덤의 주인공들은 생전에 이 유리잔과 병으로 물이나
술을 따라 마셨을 겁니다. 그런데 당시 금은 경주에서 생산되고 있었고 세공할 수 있는 기
술도 충분히 갖추고 있었지만 유리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특히 이런 유리용기들은 당시 우
리나라에서 제작되지 않던 물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유리가 금제물과 같이 발
견될 수 있었을까요? 오늘 역사스페셜은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이 유리유물들을 통해 고대문
화의 비밀을 풀어보려고 합니다.
VCR.1 > 황남대총의 유리유물은 수입품이었다
# 대릉원 항공샷 15 ( 헬기로 대릉원 보일때가지 흘리다가 )
경주 대릉원
신라가 고대국가의 기틀을 잡아가던 4, 5세기
무덤이 이곳에 있었다.
# 대릉원 풀샷 7 무덤의 주인공들은 당대 최고의 기술로 만들어진
금제유물과 유리제품을 무덤속에 부장했다
# 황남 대총 5 ( 흘리고 )
# 유리유물들 7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유리용기는 모두 열점
# 파상문배 8 남자 주인공의 머리맡에서 출토된
이 유리컵에는 석줄의 물결무늬가 장식돼 있다.
# 목리문배 7 낮은 굽이 달린 갈색 나무결 무늬의 유리잔
# 원형커트 문배 7 표면을 원형모양으로 깎아 장식한
이 유리잔은 여자 주인공 주변에서 발견됐다
# 봉수형 수병 21 가장 독특한 외형을 하고 있는 것은
봉수형 수병 -
납작한 바닥 위로 몸체가 둥글게 퍼지다가
목부분에서는 다시 점점 좁아진다
가늘고 긴 목부분엔 감색의 유리띠가 여러줄 평행으로
돌려져 있다.
그런데 어떤 까닭인지
손잡이 부분에 금실이 감겨져 있다.
# 송의정 학예 연구원 당시에 거의 보석에 운 유리병을 사용하다 깨지니까
그것을 금실로 감아서 수리해서 사용했다.. 그렇다면 당시
신랏회에서 순금보다는 오히려 유리병이 훨씬 더 희소성이 있는
보석에 가까운 그런 재질 이었다고 짐작
# 천마총 구갑문배 줌인 20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유리용기는
대부분 황남대총이 있는 대릉원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수백여기의 무덤에 비해
유리용기는 이십여점에 불과하다
# 대릉원 출토 유리용기들 12 이하 흘리고
# 송의정 학예 연구원 대체로 신라고분 특히 큰 적석 목곽분 이라는 금관총, 천마총 또
황남대총 같은데서 유뮬이 전체 한 삼만점 전후가 출토돼
한무덤에서 . 근데 거기에서 대량으로 출토되는 것은
토기들인데 ... 유리는 상대적인 수량으로 가치 짐작
# 유리팔지 15 유리를 보석으로 여겼던 삼국시대
고대인들은 왜 유리를 그토록 귀한 물건으로 여겼던
것일까
# 금제유물에 장식된 유리 23 천마총에서 나온 금제 허리띠에는
곡옥모양과 병모양의 유리가 매달려 있다
특히 금실로 된 망안에 들어있는 병모양의 유리는
실제 사용되공 던 약병이나 향료병을 본따
만든 것으로 보인다
# 금제귀걸이 10 왕족의 장신구에는
유리가 금과 함꼐 중요한 재료로
사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 금제 귀면장식 교구 16 당시 신분의 상징이었던 마구 장식에서도
유리장식이 보인다
경주 계림로 14호분에서 출토된 이 금제 마구에는
귀면의 눈을 녹색의 작은 유리구슬로 표현하고 있다
# 운주 & 행엽 16 말띠를 꾸미는 운주는
유리로 둥글게 장식하고 있으며
또 다른 마구장식 행엽에도
감색의 얇은 유리판을 붙여 놓았다
# 유리구슬 보는 두사람 유리구슬이고 순금제 봉으로 사이에 장식하고 쭉 올라가면서
영락이 달린 금구슬들이 있는 모양이다
#출토상태 모양의 구슬들 25 황남대총 주인공의 가슴을 꾸미던 각종 구슬들
오랜 세월 속에 구슬을 엮고 있던 실은 사라졌지만
구슬은 원래의 모습 그대로
무덤의 주인공 가슴부위에서 출토되었다
금이나 은으로 만든 구슬들 사이로
다양한 모양과 색깔의 유리구슬들이 눈에 띈다
# 유리 구슬들 T.S 20 다양한 구슬로 사용됐던 유리구슬-
그 가운데는 금박을 씌운 후
다시 유리로 표면을 감싸만든 금박구슬도 눈에 띈다
세련된 색깔을 가지고 있는 작은 구슬들도 보인다
# 이인숙 박사 아주 작은 불투명 색깔의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이 있는가 하면
금박구슬도 있고 점박이 모양 구슬도 있다.... 고대의 전통을 가진
곳의 유리... 이것들은 외래품이 아닌가 생각이 된다
# 여러색깔의 유리목걸이들 17 아름답고 화려한 유리 유물들 -
그 대부분이 국내에서 제작할 수 없던 유리제품으로
외래에서 수입해 올 수밖에 없는 것들이었다.
# 유리용기들 20 다른 나라에서 어렵게 들어온 유리용기나 구슬들은
고대인들에게 금보다 귀한 고급품이었다
ST.2
#유리공방 한켠에서
여기 보이는 것은 옛날에 우리가 유리를 제작하던 모습을
재현해 놓은 유리공방입니다.
어떤 방법으로 유리를 제작해 왔는지 한 번 볼까요?
#유리공방 왼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제작방법 타이트한 모습 인서트-
자, 여기는 유리구슬을 만들고 있군요.
아래에 보이는 것은 흙으로 만든 구슬 모양의 거푸집으로
유리범이라고 부릅니다.
이 유리범에 뜨거운 유리액을 넣으면
구멍을 따라 유리가 아래로 흘러내리게 되는데,
그 때 적당한 크기로 특톡 잘라서 구슬을 만들게 됩니다.
또 이쪽을 한 번 볼까요?
긴 대롱을 입에 물고 유리를 만들고 있군요.
이런 방법으로 유리를 만드는 모습은
아마 한번쯤 다 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이 방법을 대롱불기법이라고 합니다.
긴 대롱에 묻힌 유리액을 틀에 넣어 불거나
공중에서 입김을 넣어 유리의 모양을 만드는 방법이죠.
이 제작기술을 익히게 되면 아무리 복잡한 형태의 유리도
자유자재로 만들 수 있게 되는데요,
매우 까다로운 작업이기 때문에 수십년간 경험을 쌓아야만
익힐 수 있는 고난도의 기술입니다.
#MC, 유리공방 풀샷 앞에서 정면으로 돌아서며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유리용기들은
바로 이 까다로운 제작방법으로 만들어진 유물들입니다.
하지만 황남대총이 축조되던 4,5세기 무렵에는
우리 유리장인들이 이 고난도의 기술을 익히지 못했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봉수형 수병같은 유리병을 가지기 위해서는
외국에서 수입해 오는 수밖에 없었던 거죠.
오늘날에도 수입품이라면 고가의 사치품으로 여겨지는 것처럼
국내에서 구할 수 없던 유리병들이나 화려한 모양의 구슬들은
그 희소성때문에 귀중한 보석으로 대접 받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라 고분에서 발견된 화려한 유리유물들은
과연 어디서 수입됐던 것일까요?
VCR.2 > 유리는 로마로부터 왔다
#미추왕릉 지구 출토 유리 8 경주 대릉원 미추 왕릉 지구에서 출토된
유리 목걸이 -
#목걸이 정밀 촬영하는 모습 14 목걸이의 중심에 박혀있는
지름 1.5 CM의 작은 유리구슬 -
그 속에서 상상하지 못한 그림이 숨어 있었다
# 사람 얼굴로 줌인 10 BGM
# 얼굴 T.S 12 하얀얼굴에 눈이 크고 입술을 붉게 칠한
사람의 얼굴 -
구슬 안에는 모두 네명의 얼굴이 있었다
# 네명 비교 그림 7 언뜻 보아서는 모두 같은 사람 같지만
얼굴 표정과 감정 표현이 조금씩 다르다
# 구슬을 돌리는 6 사람 얼굴 외에 또 어떤 그림이 있는지
구슬의 다른 면을 살펴봤다
# 흰새로 줌인 16 BGM
# 네 등분해서 새가 보이는 13 구슬의 다른 면에는 한그루의 꽃나무와
흰새가 그려져 있다.
새는 사람의 얼굴과 마찬가지로 네 마리였다
#그림 타이트하게 보여주고 15 유리구슬에 그려진 그림의 정체는 무엇일까?
( PAUSE )
오랫동안 사람의 얼굴을 연구하고 있는
조용진 교수 -
# 조용진 교수 인터뷰 가로세로의 비가 1:1:5 정도로 보이,네요..
이 얼굴로 봐서는 우리나라 얼굴이 아니군요 얼굴의 가로세로
비도 1:1:5 정도로써 한국에는 이렇게 얼굴이 긴 사람이 없어
중국도 그렇습니다. 일본도 이렇게 긴 얼굴은 없습니다. 그리고
눈썹도 이렇게 진하고 길게 표현되고 미간이 붙어서 일자로
표현된 이런 눈썹을 가진 사람은 우리나라에 없는 아주 찾아보기
가 힘들죠. 중국에서도 위 그루 지방 정도라면 모를까 거의 나오기
어려운 얼굴형입니다 그리고 눈도 동그랗구요. 중안도 길고
턱도 이렇게 좁고 입술은 두텁고 이런 얼굴은 한국, 중국, 이런 동양
지역에서는 나오지 않는 얼굴입니다. 그리고 그림 그린 수 유리제품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 유리 전시장 20 크리스탈이나 내열제로 사용하는 유리
그리고 광학유리같은
특수한 용도의 유리를 제외하고는
오늘날 만들어지는 대부분의 유리가
황남대총과 성분이 같은 소다유리계통 이다.
# 이인숙 박사 15 국내에서 우리 나라 고대유리를 독보적으로 연구해
오고있는 이인숙 박사
박사는 국내의 유리유물의 산지를 추적하기 위해
여러각도의 분석을 해오고 있다
# 황남대총 유리유물들 9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우리의 유리유물들 -
그것은 먼 나라 로마에서 들어 온 수입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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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3.
#기본세트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유리의 유리유물들이 로마에서 수입되었다,
그 옛날, 외국에서 수입됐다면 가까운 중국이나 일본같은
이웃나라를 떠올리게 마련인데,
로마에서, 그것도 1500년전에 로마에서 유리가 들어왔다니
쉽게 믿어지지 않는 일이군요.
하지만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유리 분석실험은
우리의 의구심을 확실하게 풀어주고 있습니다.
황남대총의 유리는 중국계 유리가 아니라
멀리 떨어진 로마계 유리라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입증하고 있는 것이죠.
#유리구슬 튀어나오고
그렇다면 황남대총과 비슷한 시기, 같은 대릉원에서 출토된
이 유리목걸이도 역시 로마에서 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구슬의 그림 펼쳐지면
어떻습니까?
꽃이 만발한 나무 위로 흰새가 날고 있고,
그 아래 짙게 화장한 낯선 이들이 보이는데
마치 큰 화폭에 그려진 수채화 같지 않습니까?
이 정교하고 풍부한 그림이
겨우 1.5cm밖에 되지 않는 유리 구슬에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 그림은 그냥 붓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색색깔의 가는 유리막대를 일일이 오려붙여서
모자이크 기법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마도 굉장히 오랫동안 유리를 다뤄온 장인이 만든 구슬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이 구슬에 그려진 낯선 이의 얼굴이 중앙아시아인이라는 점입니다.
로마에서 수입된 유리에 왜 중앙아시아 사람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 걸까요?
로마를 출발한 유리가 우리나라에 도달하기까지의 길을 추적히 보면
그 의문을 풀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황남대총 유리의 본산지, 로마로 떠나보겠습니다.
VCR3> 현장확인 ! 이스라엘 현지 취재
# 이스라엘 예루살렘 부감 20 4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잇는 도시
이스라엘 예루살렘 -
기원전 로마의 통치가 시작된 후
600년 가까이 로마제국의 영역이었다
# 킹 데이비드 박물관 10 로마통치 시대에 건립된 킹 데이비드 박물관
이곳에서는 특별한 행사가 열리고 있다
#동그란 유리작품 18 2000년 새로운 밀레니엄을 기념하는
최대규모의 유리설치 미술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유리아티스트 데일 치훌리는
세계 순회의 출발점으로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을
선택했다
# 분홍 유리 꽃나무 11 예루살렘이 바로 유리의 본고장이기 때문이다
# 예루살렘 시장 10 유리의 본고장답게 예루살렘의 번화가에는
유리제품만 파는 가게들이 많다
# 유리구슬 T.S 18 ( 흘리다가 )
그곳에서 우리는 눈에 익은 유리구슬을
만날 수 있었다.
신라 고분에서 출토됐던 점박이 모양의 구슬과
에루살렘에서는 아직까지 장신구로 사용하는
디자인이다.
#유리가게에 매달려 있는 병들 27 ( 매달린 병을 한 번 팬하고 나서 )
유리로 만든 식기와 생활용품들
술이나 물을 담는데 쓰이는 이 물건들은 신라고분
에서 나온 유리용품들을 연상케 한다
#가게 주인과 인터뷰 어디서 온 것들인가? 헤브론에서 왔다
그곳에 유리가 많은가? 공장이 두 개나 있다
# 차 트래킹 23 ( 풀샷 흘리다가 )
이곳은 무하마드 아부드 일가가
경영하고 있는 유리공장 이다.
이 지역에서 수천년 동안 이어져온 유리제조 기술을
4대째 가업으로 전수하고 있다
# 무하마드 아부드 33 ( 흘리다가 / 용광로 부이기 시작하면 - )
대롱에 묻은 유리액체를 입으로 불면서
여러 가지 모습을 자유자재로 만들어 내는 대롱불기법
수천년전부터 이스라엘에서 제작되던 방법 그대로다
신라 봉수형 수병이 재현되는 데는
채 20여분도 걸리지 않았다
사이 현장음 , 박수 소리
# 아부가드의 유리제품들 20 무하마드 아부드가에서 제작된 유리들
먼 옛날 로마유리와 같이
대롱불기법으로 만들어진 유리 공예품은
이스라엘에서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 단바닥 교수 인터뷰 초창기 유리병은 왕과 귀족만 사용
그러다가 대롱 불기법이 발명되고 전 로마제국으로 확산
# 로마제국 영역 22 이스라엘에서 대롱 불기법이
처음 발명된 것은 1세기 무렵
대롱 불기법은 당시 로마제국에 속하던
지중해 연안으로 급속하게 퍼져 나갔다
로마의 전지역에서 유리가 다량으로 생산되자
사람들은 이 곳에서 만들어진 유리를
로만 글라스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 박물관 외경 37 텔아비브의 예레쯔 이스라엘 박물관 -
기원전 12세기,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유적 위에
세워졌다
이곳은 로마유리의 역사를 한눈에 볼수 있는
유리전문 박물관 이다
무덤의 부장품으로 식기둥 생활용품으로 만들어졌던
다양한 로만글라스가 시대별로 전시돼 있다
# 큐레이터의 인터뷰 가장 뛰어난 품질의 고대 유리제품들이 전시...
기원전2000년부터 .. 유리제작의 본거지가 사라질때까지
유리제품 소장
#구갑문배 8 고대 유리유물의 보고인 이 곳에서
우리의 유리유물과 비슷한 형태를 만날 수 있었다.
#이인숙 박사 이것은 천마총에서 나온 귀갑문배와 똑같은 것
이런 유리잔은 특이하게도 이스라엘, 지중해 연안,
이스라엘에서 여러개 발견, 흑해연안에서도 나오고 있어
# 예루살렘 대학 19 신라 유리유물의 또 다른 원형은
예루살렘 대학 고고학 연구소에서 찾을 수 있었다.
( 이하 현장음 )
# 단 바락 교수 이것은 서방 유리 제품 , 특히 지중해 연안의 물건이라
는 것을 아무도 의심치 않으리라 생각한다
# 오이노코에 15 포도주를 따르는 주전자란 뜻으로
오이노코에라 불리는 유리병
잘록한 목과 풍성환 몸체
그것은 황남대총 붕소형 수병 그대로 이다.
#차 트래킹 9 로마시대부터 유리가 수출되던 항구도시 야포-
# 갤러리 들어가는 5 골동품 가게에서도 로만 글라스는 인기있는 상품이다
#유리조각들 만지는 ( 흘리고 )
이것은 깨어진 로마유리 조각들인데 은목걸이로 만들었다
세자리움, 에루살렘, 야포 등지에서 .. 조각들이어서 다
기억 못해...
# 유적지 14 지중해 연안에서 번영을 누리며
전세계로 보급되어간 로만 글라스
결국 대륙의 반대편에 위치한
신라로까지 로만글라스가 전해졌던 것이다
ST4.
#이스라엘 유적지 back 기본세트
유리는 철기보다 더 빠른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5000년전 메소포타미아에서 처음으로 유리가 발명됐을때,
사람들은 생전 처음 보는 이 가벽고 투명한 물질에 금방 매료당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기술로는 사람들이 가지고 싶어하는 만큼
유리를 생산해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BC 3,4세기경 로마의 영역이던
이스라엘, 시리아, 레바논 등지의 지중해 연안에서
대롱불기법이 발명되었습니다.
이 획기적인 방법으로는 다양한 모양의 유리를 다량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되었고,
유리를 가지고 싶어하던 각 지역의 사람들에게
상품으로 널리 전파되어 나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전세계에서 출토되는 중요한 유물, 로만글라스입니다.
우리는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봉수형 수병과
똑같이 생긴 오이노코에라는 유리병을
로만 글라스의 산지, 이스라엘에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모양이나 제작기법 등 조금도 차이나지 않는 점으로 보아
우리 유리 봉수병은 로마에서 만들어진 직수입품에 틀림없습니다.
#지구본을 돌리며
로마는 여기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
그리고 신라는 그 반대편, 동족의 끝에 있습니다.
이 두나라 사이에 교류가 있었다는 사실은
그 어던 문헌에도 기록돼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로마에서 유리가 직수입될 수 있었던 것일까요?
VCR4> 로마유리, 초원의 길로 오다
# 경주 대릉원 12 4,5 세기 신라 지배자급 무덤에서만 나타나는
특이한 묘제, 적석목곽분-
황남대총도 그런 무덤이었다
#적석 목곽분 C.G 15 큰 구덩이를 파고 목곽을 설치한 다음
그 안에서 시신을 안치한 목관과
부장품을 넣은 괴짝을 넣는다
그 위로 돌을 쌓고
흙으로 거대한 봉분을 만든다
#금제유물 56 황남대총의 수많은 금제유물들-
적석목곽분의 주인공들은
현재의 권력과 지위를 내세에도 이어가기 위해
당대 최고의 화려한 물건들을 무덤 속에 부장했다
( 이하 B.G.M )
#김병모 교수 인터뷰 신라 고분의 구조는 적석 목곽분이기 때문에 스키타이 민족
즉 기마민족들의 매장 풍습이다. 그속에서 나오는 유물들이
금이 주로 나오고 ...전부 기마민족들이 좋아하는 물건들이다
그러니까 신라인들의 조상 , 유전적인 조상은 말할것도 없고
정신적인 조상이 스키타이쪽에 있는 유목민족과 깊은 관계..
# 시베리아 TR 8 남러시아의 시베리아 초원지대-
고대 스키타이인의 활동무대다
# 사슴 달리는 16 말,양,소, 낙타 같은 가축을 방목하면서
풀을 찾아 다니던 유목민족들..
그들에게 나무와 사슴은
없어서는 안될 삶의 동반자였다
#사슴 암각화 8 스키타이인들에게 사슴과 나무는 신앙의 대상이었다
#사슴뿔 모양의 샤먼 모자 24 옛날 시베리아 샤먼들은 사슴과 비슷한 뿔모양을
머리에 달고 하늘의 신과 대화했다
그것은 사슴뿔이기도 했으며
때론 나무이기도 했다
#스키타이 황금실 29 ( 흘리다가 )
스키타이를 비롯한
수많은 유목민족들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러시아 에르미따주 박물관 -
1세기 흑해인근
스키타이의 뒤를 이어 활동했던
사르마트족의 금관이 그 곳에 소장돼 있다
# 사르마트 금관 20 한 그루의 나무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두 마리의 사슴들 -
( PAUSE )
나무 잎사귀 하나하나부터
사슴의 웅장한 뿔까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 신라 금관과 비교 8 그것은 신라 금관의 모습이었다.
# 김병모 교수 인터뷰 신라 금관은 금으로 만든 나무이다. 나무를 자연스럽게
만들다가 그것을 장식품으로 형상화 한다고 직각화 했죠
그래서 신라 금관이 나무모양을 한 이유는 그 모자를
쓴 사람의 마음 속에 자기네 조상이 나무밑에서 태어
났다고 생각... 그래서 나무가 모자로 된 것이다.
그 나무 모양이 신라 금관의 모델이 되었다
# 스키타이 전사 31 황금을 숭배했던 스키타이는 그들의 찬란했던
역사를 황금 위에 새겨 놓았다
기원전 8세기에 출현하여 유라시아 초원지대를
지배했던 스키타이 -
그들은 역사상 최초로 말타기를 터득한 민족가운데
하나였다.
오랫동안 유목생활을 해온 그들은
발달한 농경생활권과 교역의 필요성을 느꼈다
# 스키타이 전사 10 서쪽 그리스와 교류를 시작한 스키타이 -
그리스의 세련된 금세공기술을 받아들여
그들만의 화려한 황금문화를 이룩했다
# 흑해 연안 지도 10 스키타이는 흑해를 중심으로 그리스를 포함한
로마제국 영역까지 교류의 범위를 넓혀나갔다
# 동으로 향하는 화살표 9 그리고 또 다른 교역품을 찾아
스키타이들은 말을 타고 동쪽으로 대륙을 횡단해
갔다
# 권영필 교수 인터뷰 초원지대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대펴적인 종족으로 스키타
이와 흉노 등을 들수가 있는데 그들의 파급 범위는 우리가
상상할수 있는 것보다 훨씬 넓습니다. 그래서 흑해 연안
에서 발원햇던 스키타이의 경우에는 동쪽으로 오면 알타이
까지 파급이 돼죠
# 초원을 달리는 말 1'45 15 BC 2세기경 스키타이는 역사에서 사라지지만
초원지대를 장악한 새로운 유목세력에 의해
동과 서로 교역은 계속 되었다
#초원지대 지도 19 중앙아시아인이 그려져 있는 인면문 모자이크 구슬
로마 유리가 어떤 경로로
한반도에 전해졌는지
그 길을 확인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 이인숙박사 우리나라에서 나오고 잇는 인면문 구슬과 장식 보검이 있
습니다. 이 유물은 중앙아시아에서 발견된 아프로시압의
한국인 사신도와 더불어서 한국문화와 중앙아시아의 연결을
직접적으로 대변하는 물건들입니다. 이러한 물건들은 특히
인면문 구슬은 그 문화적인 뿌리는 서유럽, 그리스 로마문화
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로마문화가
페르시아를 거쳐서 중앙아시아까지 전달이 되고 또 중앙아시아에서
동쪽으로 와서 신라에까지 그 문화적인 요소가 들어와 있는 물건..
# 말 달리는 유라시아 평원 22 대륙의 서쪽과 동쪽을 연결해주는 전달자는
기동력이 뛰어난 유목민들
그 교통로는 초원의 길이었다
그래서 교역품은 부피가 적고 가볍지만
고 부가가치 상품인 금이나 유리가 그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 김병모 교수 인터뷰 그리스적인 중앙 아시아를 거쳐서 한국으로 신라쪽으로
이동할수 있는 개연성은 너무나 많습니다 .
그것도 빠른 시간내에 그것이 - 근데 우리는 지금 비행기를
타고도 10시간 이상 걸리는데 어떻게... 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옛날에는 천천히 경제적인 목적으로 이동한다면 무슨 상관이냐?
# 유리의 길 CG 55 우리의 유리 유물은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지중해
연안에서 만들어진 로만그라스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로만 글라스는 북방의 흑해 인근
에 있는 유목민들에게 수출되었다.
그리고 이들에 의해 유리는 중요한 교역품의 하나로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으로 나아갔다
그리하여 몽골 초원을 지나 만주 요녕성에 전해진 유
리는 한반도의 끝 신라에 도달했다
초원의 길은 유리의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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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5.
#지도배경
로마에서 유행하던 유리병이 비슷한 시기에 경주에서 발견되고 있다니,
그 전파 속도가 얼마나 빨랐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유리가 전해진 그 시대는
동서간에 동시패션시대였던 것입니다.
#지도로 줌인되고
여길 한 번 보시죠.
이곳은 중앙아시아 실크로드의 중심지였던
사마르칸트입니다.
#사신도 튀어나오면
이곳에서 아주 흥미로운 벽화가 출토됐습니다.
7세기 아프로시압 궁전의 벽을 장식하던 그림입니다.
당시 실크로드 인접국가 가운데,
가장 번영을 누리던 사마르칸트의 통치자가
각국에서 찾아온 사신들을 영접하는 모습을
매우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사신들 가운데,
우리는 낯익은 모습을 하고 있는 두사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두 사신은 긴 깃털로 장식한 모자를 쓰고 있는데,
이것은 바로 고굴 벽화에 흔히 등장하는 조우관입니다.
새깃을 곶아 장식하는 이 모자는
신라나 백제에서도 흔히 사용하던 것이죠.
그리고 복장을 살펴보면,
고름없이 검은 띠로 앞을 여민 저고리와
통이 좁은 바지를 입고 긴 장화를 신고 있습니다.
이 또한 우리에겐 너무나 익숙한 차림새입니다.
그리고 허리엔 긴 칼을 차고 있는데요,
칼의 손잡이 부분이 둥글게 장식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것도 고대 무사들이 착용하던 환두대도의 모습과 똑같이 생겼죠?
#사신도 없어지고 다시 지도 back
신라의 사신인지 고구려의 사신인지는 정확히 밝힐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7세기 무렵,
이미 우리나라의 사신이 중앙아시아 사마르칸트까지
직접 왕래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실크로드 위에서 이루어진 동서의 만남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고,
우리의 문화는 세계에 소개되고 있었던 것이죠.
그렇다면, 이런 동서의 만남은 초원의 길을 통해서만
가능했던 걸까요?
더 이른 시기에는 외부의 세계와 교류가 전혀 없었던 걸까요?
VCR5> 더 이른 시기 바다로도 왔다
# 양동리 팬 12 김해시 주촌면 양동리
마을 뒤 야산에는 3만명여평에 이르는
대규모 가야 고분 유적이 있다
# 양동리 유적 12 1990년부터 사차에 걸친 발굴 조사 결과
기원전 1세기부터의 가야 사회의 성격을
알 수 있는 유물들이 출토됐다
# 유물들 스케치 11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은 무려
5천여점
#체질하는 23 아직도 양동리 유적의 흙 속에는
2000년전의 유물들이 남아있다
흙더미 속에 숨어있는 작은 유리 구슬들
이렇게 일일이 체질을 해야만
놓치지 않고 건질 수 있다
# 금박 유리 목걸이 30 금박을 입힌 유리구슬
여러 가지 색깔의 크고 작은 구슬들은
가야 사회에서 구슬이 중요한 장신구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 임효택관장의 인터뷰 변한 가야족 사람들이 장신구로서는 구슬을 보물로 삼았다
출토되는 그 자리를 통해서 알수 있다
#수장고 14 유리구슬과 함꼐 양동리 유적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유물은 철기 유물이다
# 판상 철부 흙더미 판상철부 설명
.. 화폐 철소재
# 철기 유물들 19 각종 마구와 무기 농기구등
다량으로 출토되고 있는 철기 유물들
특히 당시 화폐로 사용된 철정과 판상철부는
철무역이 활발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 임효택 관장 철무역이 전성을 이뤘던 시기에 다양한 물건이 들어와
2세기에서 4세기 사이 철무역이 전성을 이뤘던 시기
# 가야 유적지 15 중국의 역사서 삼국지 위서엔
가야의 철 무역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삼한시대부터 김해 지역에서는
그 곳에서 풍부하게 생산되던 철을
중구고가 일본까지 해상으로 수출하고 있었다
# 김해에서 해상으로 나가는 10 철을 수출하던 바닷길은
유리가 수입되던 길이기도 했다
우리나라 서남해안에서 주로 출토되는 구슬들은
모두 해상교역의 산물이다
# 유리관옥 합송리 18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가장 이른 시기의 유리는
기원전 2세기 부여 합송리 유적에서 출토된 것이다
푸른빛이 나는 긴 대롱형으로 만들어진
이 유리구슬은 납 - 바리움 성분을 포함한 전형적
중국계유리다.
# 김해일대 유리구슬 6 하지만 중국계 유리와 다른 구슬들이 우리나라
서남해안에서 출토되고 있다.
#창원 삼동동 유리구슬들 15 기원전 1세기 무덤으로 추정되는
창원 삼동동의 유리구슬 -
지름이 1cm도 되지않는 적갈색의 작은 유리구슬
은 중국계 유리와는 달리 로마유리의 특징인
소다유리다.
# 무녕왕릉 23 백제 무녕왕릉에서도 붉은색, 파란색, 초록색등
갖가지 색깔의 구슬들이 다량으로 출토되고 있따
# 창원 삼동동 유리 구슬들
# 이인숙 박사 아주 작은 불투명 색깔의 노란색, 여러 가지 색의구슬은
인도 퍼시픽 구슬, 동남아 구슬..
# 중국 광주 27 중국 남부의 해안도시 광주
홍콩과 더불어 중국에서 가장 활발한 대외무역 항구다.
2000년전 한나라시대부터 무역항으로 개발되어
중국과 인근 동남아를 연결하는 바닷길이
오래전부터 열려 있었다.
#광동성 박물관 6 ( 흘리고 )
# 박물과 내부 12 광동성 박물관의 남해 해상 실크로드관 -
이곳에 동남아 해상을 통한
중국과 외부세계와의 교류사실을 말해주는
유물들이 따로 전시되어 있다
# 배 14 광주 한나라의 무덤에서 출토된
감색의 그릇과 작고 붉은 유리구슬들 -
전통적인 중국의 남유리와는 다른 소다 유리다
# 박물관장 광주에 있는 무덤에서 로마유리 3개 발견
# 후한서 19 한나라 시대의 역사서인 < 후한서 서역전 > 에는
베트남을 거쳐 중국으로 간 로마황제 안토니우스가
보낸 사신이 상아 , 코뿔소 뿔, 거북 등을 바쳤다 는
기록이 남아있다
로마와 중국과의 직접적인 교류를 증명하는 기록인
것이다
#도용 , 코뿔소 , 거북등 15 한나라 시대부터 바닷길을 통해
로마와 인도 , 동남아 , 그리고 중국을 잇는
해상 실크로드가 존재했던 것이다
# 중국 유리구슬 7 주로 해안지방에서 발견되는 중국의 유리제품들은
바닷길을 통해 들어온 것들이었다
# 페니키아 유리구슬 6 지중해를 출발한 로마 유리구슬은.
# 인도네시아 유리구슬 6 인도 , 인도네시아로 수출됐다.
# 신라구슬 1 0 그리고 중국과 한반도까지 해상 실크로드를 따라
유리가 들어온 것이다
# 바다 12 초원의 길보다 더 이른 시기
바다에도 유리가 전해지는 길이 있었다
ST.6
우리는 오늘 신라의 유리유물이 어디서부터, 또 어떤 경로를 따라 전해졌는지 그 길을 알아
봤습니다. 로마를 출발한 유리는 대륙을 동과 서로 횡단하던 유목민들에 의해 초원의 길 실
크로드를 따라 한반도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더 일찍부터 인도와 동남아싱아를 지나는 바
닷길을 따라서는 로마의 유리가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우리 고대 사회는 바다로 육
지로, 세계의 여러지역과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유독 황남대총의
유리유물에 주목했던 까닭은 이러한 사실을 직접적으로 말해주는 산증거가 바로 유리이기
때문입니다. 2000년전, 한반도는 닫혀있는 사회가 아니라 세계를 향해 한껏 열려있던 사회였
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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