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스페셜100선

86 금관은 죽은 자의 것이었다

사랑의고향길 2013. 9. 28. 21:51

금관은 죽은 자의 것이었다 
1973년, 경주 대릉원에 있는 천마총에서 역사적인 발굴이 이루어졌다. 1500년 동안 땅속에서 침묵하고 있던 유물들 속에서 신라 황금 문화의 정수라 할 수 있는 금관이 발견된 것이다. 그런데, 발굴될 당시 금관은 우리의 상식과는 다른 모습을 띠고 있었다. 고깔모양의 금관이 얼굴을 덮고 있었던 것이다. 
1. 황금의 나라, 신라
1921년 경주의 노서동 신라고분의 발굴이 이루어졌다. 무덤은 황금의 지하 궁전이었다. 비취옥돌과 금장식을 단 화려한 금관뿐 아니라 황금팔찌, 금귀걸이, 말에 쓰이는 마구장식까지도 황금으로 치장을 했다.
2. 금관의 무게
금관의 무게를 따져보면 1Kg이 넘는다. 평상시에 이런 금관을 쓰고 다닐 수 있었을까. 또 허리띠는 무게가 4Kg에 이른다. 금동신발도 평소 신고 다니기에는 굉장히 크다.
3. 금관의 주인
귀한 금관과 함께 무덤에 묻힌 이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두개골과 치아를 이용해 성별과 나이를 추정할 수 있었다. 또 허리띠의 글자에서 그 주인을 확인할 수 있는 단서를 발견했다.
4. 금관의 의미
금관의 관 테두리 위로 솟아있는 장식은 사슴 뿔을, 가운데의 세움 장식은 나뭇가지를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달린 비취 옥과 금장식은 바로 나무열매와 나뭇잎이다. 신라금관의 이런 장식은 무엇을 상징하려고 한 것인가.
5. 평소에 쓴 모자
금관과 함께 출토된 유물 중에 고깔형의 모자와 새 날개 모양의 장식이 있다. 이 모자는 고구려 무용총 벽화의 사냥하는 고구려인들이 쓰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백제의 무덤에도 같은 형태의 모자가 나온다. 삼국시대에는 모자를 쓰는 것이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고 한다.
6. 지방에서 발견된 금동관
금동관은 금관처럼 지위와 권능의 상징이었다. 이 금동관이 경주 인근이 아닌 다른 지방에서도 발견된다. 그리고 금동관이 발견된 무덤은 경주의 무덤과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다. 

 

 

 

 

 

금관은 죽은 자의 것이었다

 

 

 

 

1973,

경주 대릉원에 있는 천마총에서 역사적인 발굴이 이루어졌다.

 

1500년 동안 땅속에서 침묵하고 있던 유물들 속에서

신라 황금 문화의 정수라 할 수 있는 금관이 발견된 것이다.

 

그런데,

발굴될 당시 금관은 우리의 상식과는 다른 모습을 띠고 있었다.

고깔모양의 금관이 얼굴을 덮고 있었던 것이다.

 

 

 

 

 

1. 황금의 나라, 신라

 

1921

경주의 노서동 신라고분의 발굴이 이루어졌다.

 

무덤은 황금의 지하 궁전이었다.

 

비취옥돌과 금장식을 단 화려한 금관뿐 아니라

황금팔찌, 금귀걸이, 말에 쓰이는 마구장식까지도

황금으로 치장을 했다.

 

 

 

 

2. 금관의 무게

 

금관의 무게를 따져보면 1Kg이 넘는다.

평상시에 이런 금관을 쓰고 다닐 수 있었을까.

 

또 허리띠는 무게가 4Kg에 이른다.

금동신발도 평소 신고 다니기에는 굉장히 크다.

 

 

 

 

3. 금관의 주인

 

귀한 금관과 함께

무덤에 묻힌 이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두개골과 치아를 이용해 성별과 나이를 추정할 수 있었다.

 

또 허리띠의 글자에서

그 주인을 확인할 수 있는 단서를 발견했다.

 

 

 

 

4. 금관의 의미

 

금관의 관 테두리 위로 솟아있는 장식은 사슴 뿔을,

가운데의 세움 장식은 나뭇가지를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달린 비취 옥과 금장식은 바로 나무열매와 나뭇잎이다.

 

신라금관의 이런 장식은 무엇을 상징하려고 한 것인가.

 

 

 

 

5. 평소에 쓴 모자

 

금관과 함께 출토된 유물 중에

고깔형의 모자와 새 날개 모양의 장식이 있다.

 

이 모자는 고구려 무용총 벽화의

사냥하는 고구려인들이 쓰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백제의 무덤에도 같은 형태의 모자가 나온다.

 

삼국시대에는

모자를 쓰는 것이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고 한다.

 

 

 

 

6. 지방에서 발견된 금동관

 

금동관은 금관처럼 지위와 권능의 상징이었다.

 

이 금동관이

경주 인근이 아닌 다른 지방에서도 발견된다.

 

그리고 금동관이 발견된 무덤은

경주의 무덤과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다

 

 

 

 

 

 

금관은 죽은 자의 것이었다.


 1973년, 천 년이 넘도록 땅속에 고이 잠들어 있던 신라의 천마총이 발굴되었다. 천마총에는 외에도 거대한 고분들이 잇달아 발굴되었는데 이들은 4~6세기의 김씨 왕위 세습시기의 것들이었다. 특이한 것은 이 고분들에서 화려한 금관이 공통적으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금관은 발견 당시 고깔 모양으로 접혀서 시신의 얼굴을 덮고 있었다는 것이다. 금관들은 모두 무덤에서 출토되었지만 어떤 문헌에도 이에 관한 언급은 없었다. 현재까지 모두 6점이 발굴되었고, 아직 발굴하지 않은 고분들 중 4~6세기의 것에서 추가로 발굴될 가능성이 지배적이라고 한다. 금관 외에도 황금 팔찌, 귀고리, 술잔, 마구장식 등 황금으로 세공된 화려한 장신구들이 함께 출토되었다. 금관은 전 세계적으로 보았을 때 전무, 후무, 최대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다. 이는 고대 신라만의 독특하고 유일무이한 것으로 옛 가야 지역에서 일부 금관이 발견되었지만 세공기법과 장식, 문양이 매우 단순하여 신라의 화려하고 섬세한 금관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금관은 후대에 와서 재현을 해보아도 평소에 쓰고 다니기 매우 불편했다. 이로 미루어 고대 신라에서도 왕족들이 실제 일상에서 쓰고 다니지는 않았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금관은 죽은 자의 것이었다.’라는 가설을 세우고 여러 가지 사실들로 검증을 해보았다.

 금관은 출토 당시 고깔 모양으로 얼굴에 덮여져 있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가상인물화 하여 구현해 보았을 때 금관은 머리에 씌워진 것이 아니라 얼굴 전체를 덮고 있는 형태였다. 천마총 외에도 2년 여간 발굴된 황남대총, 서봉총, 금령총 등에서 역시 금관은 고깔 모양으로 접혀서 얼굴 부분에 씌워져있었다.

 또한 황남대총에서 금관과 함께 발굴된 황금장식들 역시 실용적이지 못한 것들이었다. 황금신발은 신발크기가 342mm에 달했고 바닥에 세밀한 연꽃무늬가 세공되어진 점으로 미루어 동시대의 내세사상을 비추었을 때 연꽃이 갖는 의미상 역시 죽은 자를 위한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황금허리띠도 무게가 3kg에 달하고 여기에 달린 장신 중 80cm가 넘는 것도 있었다. 금관은 죽은 자를 위한 것이었다.

 황남대총은 남분과 북분으로 되어 있는데 남분은 60대 남자의 무덤으로 두개골 일부와 치아가 발견되었고 북분은 발견된 허리띠에 부인대라고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왕비의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금령총에서 발견된 금관은 직경이 16.4cm이고 허리띠도 짧아 어린아이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 미루어 금관은 비단 왕뿐만 아니라 왕과 가까운 왕족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 금관이 왜 4~6세기 김씨 왕위세습기 연대에서만 발굴이 되는 것인가? 많은 학설이 있지만 김(金)씨는 곧 금을 가진 세력이었다는 학설이 지배적이다. 금관은 마립간 시대 김씨 왕족의 표상이라는 것이다.

 왕의 호칭이 이사금(연장자)에서 마립간(우두머리의 우두머리)으로 바뀐 것은 왕권이 더욱 강력해졌다는 뜻이다. 금관을 자세히 보면 깃 모양은 사슴뿔을 상징하는 것이고 주렁주렁 달린 장식은 나무열매와 나무줄기를 의미한다. 고대사회에서 사슴과 나무는 신성한 존재였다. 고대 샤먼의 장식이 사슴뿔 모양인데 이를 통해서 고대신라 사회 역시 신정정치(재정정치)가 이루어 졌음을 알 수 있었다. 금관 맨 위를 장식한 새는 곧 고대의 신앙으로서 중요한 지도자의 탄생에 연관되어 있음을 상징한다. 김알지 탄생신화와 계림고사도 지도자들이 새와 나무를 통해서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나와 있다. 김씨 일족이 천손임을 표방하기 위한 것이다. 일설에 금관의 새는 죽은 자들이 사후에 새들의 인도를 받아 다시 하늘로 날아가기를 기원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임당 지역과 같이 경주가 아닌 지방에서 금동으로 만들어진 관이 발견되기도 한다. 이것은 4세기부터 신라가 영토 확장을 하면서 지방 세력에게 위세품으로 지급하고 간접적인 지배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 6세기 중엽에 이르러 왕권이 절정에 달하고 전지역에 주군현을 설치하고 지방관을 파견하여 직접지배를 실시한다. 동시에 금관을 부장품으로 하는 무덤도 발견되지 않게 된다.

 금관은 신라가 고대국가로서 기틀을 잡아 갈 때 자국의 권위를 위해 사용한 것이었다. 자신들의 강력한 힘을 과시하고 천손의식을 고취시킴 역시 동일한 의미다. 죽은 후에도 천손의식의 전승을 바랐고 또 그 권위가 계속 되길 바라는 염원이었다. 금관은 강력한 왕권의 확립기 이전, 잠시 거쳐 간 신라만의 시대의 유물이었다. 죽은 자의 것임과 동시에 한 시대를 살다간 신라 왕족의 의식과 권위의 결정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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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의 출토는 신라 고분만의 독특한 현상이다. 신라를 제외하고 금관이 발견된 것은 가야가

유일하지만 가야금관은 신라금관에 비해 기법이나 장식, 모양이 아주 단순하다.

금관은 금관총, 천마총, 서봉총, 금령총, 황남대총 등에서 여섯 점의 금관이 발견되었다

신라금관은 장례용품이다

금 100여 돈 가량이 들어가는 금관의 전체 무게는 1kg 정도, 평상시 쓰고 다니기에는 버거운

무게다.

금관 복제전문가 김진배 씨가 천마총 금관을 재현해 보았다. 하지만 완성된 금관은 수많은 장식의 무게 때문에 흔들리고 불안정해보였다. 김진배 씨도 전체 무게를 받는 가지 부분하고 테와

연결되는 부분이 몇 발짝만 움직여도 흔들려서 꺾일것 같다고 한다.(금관의 두께는 1mm도 채

안됩니다.)

평소 쓰고 다니기엔 아무래도 불편한 구조다. 신라 왕들은 이런 금관을 어떻게 썼을까?

현재 경주의 천마총(天馬塚)의 관의 위치를 컴퓨터 그래픽으로 실제 모습을 복원해보면 피장자(무덤에 묻힌 사람)는 유물을 착용한 채 무덤 속에 누워 있었다. 다른 유물들은 제 위치에서

발견된 반면 금관이 가슴걸이의 어깨선 까지 내려와 있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금관이 고깔 모양으로 올려져 있던 사실로 보아 원래부터 피장자의 울굴 내지 머리 전체를 덮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무덤의 내부구조를 보아도 목관의 거의 끝부분에 금관이 놓여 있어 더이상 위로 올라갈 수 없는 구조다.

 

금관총, 황남대총, 천마총에서 발굴된 금관들은 얇은 금판에다 입식(솟은 장식)이 매우 높고 수백 개의 곡옥까지 달려있어 구조가 약하다. 그래서 평소 왕이나 왕족이 쓰던 것이 아니라 장례용품이 아닌가 추정된다.

피장자(무덤에 묻힌 사람)의 발 위치에서 발견된 금동신발도 구리에 금도금을 한것으로 신발

크기가 무려 342mm(34.2cm) 나 된다. 딱딱해서 안에 천 같은것을 깔고 덧대어 신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렇더라도 상당히 큰 편이다. 게다가 바깥쪽 바닥에는 연꽃무늬의 장식도 있다. 과연

이걸 신고 한 발짝이라도 움직일 수 있었을까?

이렇게 피장자가 지닌 금제 유물들은 실용품이 아니라 장례용으로 특별히 만든 것처럼 보이는데 금관 역시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신라금관은 왜 사슴뿔2개에 나무3그루에요?

사실 옛 유물에 대해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그 이유에 대해 그 당시 사람들이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면 후세 사람들이 추정해야 하는 경우가 많죠.

사실 옛 유물에 대해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그 이유에 대해 그 당시 사람들이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면 후세 사람들이 추정해야 하는 경우가 많죠.

사슴 뿔 모양의 장식이 두 개인 건 쉽게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실제 사슴 뿔이 두 개지요.

우리나라 선사시대나 시베리아, 만주, 멀리는 아메리카 인디언들도 특정 동물을 숭배하여

자기 부족의 상징으로 삼았습니다.

또 초자연적 존재, 쉽게 하늘이나 신을 대신하는 존재를 샤먼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무당과

비슷하기도 하고 더 큰 권력을 갖기도 했습니다.

선사시대-먼 옛날이란 뜻입니다. 쉽게 신석기 시대나 청동기시대 정도라고 보세요.-에 그려진

바위그림이나 유물을 보면 실제로 샤먼들이 동물 가죽을 뒤집어 쓴 것들이 발견됩니다.

그리고 농사를 짓기 전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주로 사슴이나 순록 등을 사냥하여 먹고 살았습니다.

때문에 이들에게 사슴은 아주 귀중한 존재였지요.

그래서 오히려 사슴을 숭배하였겠지요?

이것을 모방해서 나중에 정착해서 농사를 짓게 되었어도 그 흔적이 남은 것이 신라시대

금관이 아닐까 학자들이 추정을 한답니다.

 

그럼 나무는?

우리 조상들이 한반도에 오기 전에 주로 시베리아의 울창한 숲에서 살았기 때문에(순록 등이 주로 그런 곳에 살지요?) 나무를 숭배하는 경향이 있었을 거예요.

사실 유럽 신화를 보아도 나무 숭배 사상이 있답니다.(반지의 제왕에서도 보면 나무가 그냥 나무가 아니라 엄청난 능력을 가진 존재로 나오지요.)

결국 신라시대 금관은 그보다 먼 옛날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지요.

그럼 왜 나무가 세 그루일까...

이건 정말 추정인데 첫번째는 옛날 사람들은 3이라는 숫자를 굉장히 신성시했습니다.

학자들은 그 이유를 여러가지로 설명하고 또 복잡합니다.

지금도 3이라는 숫자가 사람들이 좋아하는 숫자 중에 하나지요.

두번째 이유는 좀 어설픈데, 뒷면에 사슴 뿔 두 개가 있고 앞면과 옆면을 장식하려면 세 개가

적당하지 않을까요?

한 마디로 보기에 좋아서... ^^

 @@@@@

익선관 근무, 면류관 즉위

노서동 고분 앞마당 넓히기 위해 모습 들어냄. 금관총 1921년 발굴

고곡 비치옥 금장식의 화려한 모습 보주형 직선 곡선 영락과 흔ㄴ들리는 관계

마부장식도 황금으로 치장함. 가야금관-비법 장식 모양 단순하다.

지구상에 신라 뿐이다. 세계최대

1926년 서봉총

죽은 후에 왕의 얼굴을 덥어주기 위해 만듬

3k 허리띠 길이 밑으로 80cm 무겁고 불편하다

금동신발 342cm 바닥연꽃 모양장식 걸을수 있을까 장례용 아닐까 4-6세기

남분 환두대두, 두개골, 치아, 60대 남자

북군 금관, 순금제관, 은제 허리띠 부인대 왕비 추정

금령총 금관 16.4cm 소녀 추정 허리띠 71cm

교동금관 14cm 관테길이 (성인둘레 18.3cm )

계림 김알지 나뭇가지에 금괴 나무와 닭

4세기말 내물왕대 17대

이사금(치), 마립간 칭호 (머리두 족장의미)관주의 유일한 힘의 존재

155개 무덤 왕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왕의 친척들

시베리아 샤만 사슴뿔 상징 99년 세계문화 엑스포

사르마트 금관 =사슴, 나무 열매 잎 풍성함

비치옷금 나무열매 나뭇잎 사슴과 나무의 표현

북방민족은 신성한 신라 인간 연결 신의 의지를 전하는 동물

샤먼 머리위 사슴 뿔 보양의 관을 쓰고 있다.

서봉총 3마리의 새 민속신앙 위대한 지도자 새로 통해 내려옴 삼국지 사람이 죽으면 하늘로 날아가도록 새털로 장래를 지낸다. 새의 인도를 받아 하늘로 돌아가기 바람

김알지 새 나무 통해 내려온 하늘의 자손 죽어서도 하늘로 다시 가는 의미에서 만듬

금제관모 고깔모양 금제 머리에 전통을 쓰는데

끈을 연결해서 턱에 고정 새모양 관모 신분을 표현하는 장식품

왕은 금꽃 신하는 은꽃 쓴다.

황남대총 주관 부곽 나무곽 돌 흙 봉분

15톤으로 140대. 흙 15톤 2648대 물량

인원 37000명 동원 유물의 양 금장식 무기류 농기류 토기 23000점

금동관 구리에 금도금 했음 지배자 상징

임당고분 은제관 장식, 은 허리띠, 금동신발 환두대두

사기 인당 압독국 있었다, 경주에 표섭된다.

의성 탑리, 대구, 경산, 부산 복천동, 단양, 성주, 영토 확장 금동관

진평왕 503년 지증마립간 상호신라 국왕 왕 절대적인 권력

지증왕 6년 왕 친자주군현

주 군 현 관리 파견함 정치적 종교적 상징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