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흥망의 블랙박스, 철갑옷 |
가야 지역에는 가야의 역사를 증명할 비문이나 문자기록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가야는 어떤 나라였고, 왜 이 땅에서 사라졌는지 알 수 있는 정확한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기록이 없는 나라 가야, 하지만 고대 철제 기술의 정수 철갑옷이 아득히 잊혀진 가야의 역사를 낱낱이 기억하고 있었다. 가야의 철갑옷은 신비의 나라 가야로 들어가는 열쇠이다. |
1. 세련된 철갑옷의 나라, 가야 |
가야 최고의 생산품이자 고도의 기술력을 요하는 제품인 철갑옷. 철갑옷이 본격적으로 출토된 것은 지난 1980년, 가야고분이 열리면서부터 였다. 육중한 돌문이 들리면서 가야의 유물들이 1600년 만에 세상으로 나왔다. 그것은 가야의 역사가 빛을 보는 순간이기도 했다. 가야 무덤에는 갑옷 한 벌이 고스란히 놓여있었다. 그 뒤에도 철갑옷들이 연이어 출토되었다. 또한 갑옷과 함께 철 투구가 출토되기도 했다. |
2. 철갑옷 제작방법 |
가야인들은 철갑옷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가야 지역에서 출토된 모든 갑옷들은 불에 달군 쇠덩이를 반복적으로 두드려 만든 단조품이다. 전문가들과 함께 갑옷을 제작해 보기로 했다. 입체디자인과 정결, 그리고 단조는 철갑옷으로 확인한 가야 철 기술의 핵심이었다. |
3. 철의 왕국 가야 |
다른 지역에서는 가죽갑옷이 대부분이던 시기에, 가야는 이미 철갑옷을 만들기 시작했다. 가죽 대신 철로 갑옷을 만든 가야의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중국 기록에 따르면 가야는 철 생산국과 수출국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고, 철을 화폐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철 교역으로 동아시아를 제패한 나라 가야는 철 생산력뿐만 아니라 그 분배권까지 장악했던 철의 왕국이었다. |
4. 신라를 물리친 가야 |
철창, 군사용 도끼, 쇠칼. 이런 많은 무기류들은 모두 가야 고분에서 나온 군사용 철제 무기이다. 이것은 가야가 강성한 고대국가로 성장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출토 유물을 볼 때 금관가야의 병력은 서기 4세기 대까지 신라보다 우세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야의 철제 갑주 때문이었다. 철갑으로 완전 무장했던 강력한 기마전단을 보유한 금관가야는 신라와 충돌을 일으키며 한반도 남부의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했다. |
5. 금관가야의 멸망 |
서기 400년. 한반도 남부에 일순 돌풍이 인다. 당시 동북아 최강 부대였던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5만 대군이 한반도 남부로 돌진해 온 것이다. 그리고 금관가야는 고구려 군에 대항하지 못하고 항복하게 된다. 이로써 한반도 사상 초유의 대전은 금관가야의 참패로 종결된다. |
6. 멸망이후의 금관가야 |
패전한 가야는 어떻게 되었을까. 서기 400년 무렵 일본열도에서는 주목할 만한 변화가 나타난다. 새로운 형태의 철갑옷이 급작스럽게 출현한 것이다. 획기적인 변화는 출토량에서도 나타난다. 400년을 경계로 일본 철갑옷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이다. 금관가야는 패망했지만 철갑옷이 상징하는 그들의 철 문화는 그 후에도 꺼지지 않고 계속 피어났던 것이다. |
가야무덤엔 화려한 금,은제 유물은 없지만 녹슨 철제들이 발견된다. 무덤에
왜 녹슨 철갑옷이 있을까? 한반도 철갑옷의 90%가 가야지역에서 발견된다.
기록이 없는 나라, 가야. 가야엔 유난이 철갑옷이 많이 출토된다.
이러한 판갑은 기병용과 보병용이 있었다. 비늘갑옷은 작은 철조각을 연결해 만든것으로
유동성이 뛰어나 기병용으로 사용됬을것이다. 투구도 세로로 긴 철판을 이어붙여 만들었고 목가리개,
팔뚝가리개등 모든 부분을 철로서 방어가 가능 하도록 했다. 고대 가야인들은 어떤 방법으로
철갑옷을 만들었을까? 불에 달군 쇠를 여러번 두들기는데 사용한 망치등이 출토되어
현대와 다르지 않았음을 유추할수있다. 또 철판과 철판에 못으로 구멍을 뚫어 두들겨 압축하여
만들었다. 현대의 리베팅과 같은 원리이다. 판갑은 입체적인 구조물이기때문에 곡선을
입체적으로 맞추는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이렇게 가야인들은 우수한 철 문화를 가지고있었다.
가야 옛 무덤에서는 여러가지 철기문화재가 발견된다.
가야인들은 덩이쇠를 화폐처럼 시용했을 정도로 철이 풍부했다.
이렇게 철이 많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가야 지역엔 우수한 재질의 철광석이 많이 생산되었다. 가야인들은 철을 정치적-경제적으로
이용했다. 철을 장악하면서 정권을 잡은것이다. 일본은 철을 자체적으로 생산할줄 몰라
가야로 부터 수입했을것이다. 가야연맹의 중심지인 금관가야는 농경국가로 알려져있으나
그 당시 김해는 평야가 없고 바다가 차있었다. 그 당시 김해는 해상무역 도시였다.
가야에 대한 기록을 보면 국제성을 뛴 발전된 항해술을 바탕으로 하는 교역 강대국이었다.
가야는 철생산권과 분배권을 장악하고 우수한 철문화를 바탕으로 군사력을 키웠다.
가야는 강한 고대국가였다. 경북 경산에서 발견된 단갑틀은 갑옷제작에 사용되었다.
단갑틀로 볼때 가야에서 직접 철갑옷을 다량 생산했음을 알수있다. 또 갑옷형태가 통일 되어있어
분리되지 않은 완비된 군사조직이 있었던 것이다. 가야엔 말의 갑옷도 만들어졌다.
1600년전 가야는 철로 중무장된 강력한 기마전단이 있었던 것이다.
4c 가야는 신라를 뛰어넘는 고대국가였다.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것은 철갑옷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강성했던 가야는 왜 몰락하게 된걸까?
서기 400년 광개토왕의 5만대군이 한반도 남부로 돌격한다. 가야와 왜 연합군과 신라,고구려
연합군이 충돌해 금관가야가 참패하고 만다. 이 대사건 이후 김해지역에선 대규모 왕릉이
발견돼지않고있다. 가야연맹의 맹주로 군림하던 금관가야는 신라의 세력권안에 들어가게된다.
부산에서 발견된 가야의 금관이 신라양식으로 변한 직접적인 이유인것이다.
군사 강국 가야도 고구려의 적수가 되진 못했다.
단, 이 사건 이후 일본 철갑옷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는데 가야인의 영향을 받은것이다.
가야인들은 몰락 이후 일본으로 대거 건너간것이다. 그 후 가야 연맹은 대가야지배틍이 주도하게된다.
금관가야는 패망했지만 그들의 철갑옷은 여기저기서 철문화를 꽃 피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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