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스페셜100선

14 신라산 양탄자는 일본최고의 인기상품이었다

사랑의고향길 2013. 9. 28. 18:42

신라산 양탄자는 일본최고의 인기상품이었다 
8세기 나라시대부터 천황이 쓰던 물품들을 소장하고 있는 일본의 정창원은 일본 황실의 유물 창고이다. 이곳에 1200년 전, 지배 계층들만이 사용할 수 있었던 모전, 즉 양탄자도 소중히 보관되어 있다. 이 모전이 신라에서 만들어졌음을 알려주는 것은 모전 모서리에 붙은 꼬리표이다. 
1. 양탄자의 꼬리표
현재 정창원에는 꼬리표가 붙은 양탄자 두 장이 있다. 이 꼬리표는 처음부터 붙어있던 것으로 구입 후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렇다면 당시 사람들은 왜 이 같은 꼬리표를 붙였던 것일까. 꼬리표를 붙인 양탄자들은 신라에서 만든 것임을 표시한 일종의 수출 상품이었다.
2. 신라의 수출상품
정창원의 양탄자들은 신라 진골 귀족가문의 공방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신라는 페르시아의 기술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켜 독자적인 양탄자를 생산해 냈다. 신라의 모직물 제작기술에 대해서 중국 <두양잡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교묘하고 아름답기가 일세의 최고였다. 춤추고 노래하며,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 벌과 나비가 춤추는 모습이 마치 실제와 흡사하여 진위를 구별할 수가 없다’
3. 신라 사절단의 행적
신라 사절단이 일본에 온 이유는 동대사의 대불 개안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일본 황실은 3년 여에 걸친 노력 끝에 노사나대불을 완성시켰다. 그리고 이를 자랑하기 위해 일본내의 귀족들은 물론 각국의 사절단을 개안식에 초청했던 것이다. 그런데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나라에 도착한 신라사절단은 370명 뿐으로 일본에 온 총 700명의 인원 중 330명이 도착하지 않은 것이다. 이들은 과연 어디에서 무엇을 했던 것일까.
4. 신라물건은 신분과시용?
정창원에 보관된 유기제품 중에는 신라에서 수출 될 당시의 포장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것도 있었다. 당시 일본 귀족들은 신라유기를 사용해 음식을 먹었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조개껍데기에 나무를 엮어 숟가락 대신 사용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당시 신라의 유기로 만든 숟가락세트는 대단한 자랑거리였다. 이처럼 신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물건들은 단순한 수입품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일본귀족 문화의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상층 귀족문화를 상징하는 중요한 요소였던 것이다.
5. 천평문화의 기반이 된 신라
화려하고 귀족적인 색채가 돋보이는 정창원의 보물들은 8세기 전후 세계각지에서 들어온 것들이다. 정창원의 보물로 상징되는 8세기 일본문화를 천평문화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천평문화를 당과의 직접 교류를 통해 이룬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7,8세기 당과 일본 사이의 교류 현황을 살펴보면 단지 네 차례에 불과하다. 반면 같은 기간동안 일본에서 신라로 24번. 그리고 신라에서 일본으로 총 39번의 사신을 보내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신라산 양탄자는 일본최고의 인기상품이었다 

 

신라산 양탄자는 일본 최고의 인기상품이었다 .

 

 

일본황실의 보물 창고인 정창원에는 만여점이 넘는 고대유물이 소장되어있다.

이중에는 신라산 양탄자인 모전이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다.

 

 

정창원에는 보관되어 있는 신라산 모전은 50여장으로 그 중 단색의 모전인 색전은 14장,

문양이 있는 화전은 30여장이 있다.

모전들은 아주 귀한것으로 왕족이나 귀족만 사용할수있다. 그중 꼬리표가 있는 모전이 2장이 있는데

만든날짜, 만든이의 관등, 만든 장소등이 적혀있어 신라의 것임을 알수있다.

또 꼬리표에 염물이란 단어가 남아있는데 신라의 이두로 표기되어있다.ㅣ

이것을 통해 양탄자가 신라의 것임은 물론, 제조업자, 브랜드명, 가격, 제품크기도

알수있다. 또 신라산양탄자가 우연이 아닌 수출상품이었음을 알수있다.

1200년전 신라인들이 양을 길렀을까? 고려사나 조선왕조실록에 기록이 남아있으나

그 이전의 기록은 우리측 자료는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해외기록이나 신라가 모직물을

많이 사용한것으로 추정해 볼때 양을 길렀던것같다.

 

 

신라시대 대표적인 범종인  상원사 동종엔 장인이 구족에 소속되어있다는 기록이 있다.

 정창원의 모전역시 신라 귀족가문의 공방에서 만들어졌던것이다.

 

 

신라산 양탄자는 당나라도 인정한 당시 최고의 기술이었다.

어떻게 신라 양탄자가 일본에 가게 됬을까?

 

정창원의 병풍엔 '매신라물해'란 문헌이 발견됬는데 당시 일본귀족들이 신라의 물품을

사고싶어한 것을 알수있다.

 

 

매신라물해는 8c의 것인데 8c의 일본기록을 찾아보니 신라가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한

기록이 있다. 즉, 모전을 비롯한 신라물품은 사절단을 통해 교역된것이다.

 

 

또 사절단은 외교활동이 끝나면 가지고 온 물건들로 상업활동을 했다.

당시 일본과 신라가 무역을 했던것이다.  신라산 양탄자를 비롯한 100여종의 신라물품은

이런 식으로 일본으로 건너간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신라산물품을 산 사람은 누구일까?

당시 일본은 신분이 높을 수록 더 많은 물건을 구입할수있었다.

즉, 귀족이나 유력자가 사고 싶은 물건을 써서 정부에 제출했는데 이것이 '매신라물해'이다.

정창원에 보관된 보물 대부분이 신라 유물이 많아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당시 신라인들이 가지고 온 물품은 국제적인 것이라 구매경쟁이 매우 심했고

이러한 문제를 줄이기 위해 일종의 구입희망리스트를 만든것이다.

이렇게 인기가 좋았던것은 귀족들이 신분을 과시하기 위해 신라 물품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일본귀족문화를 신라의 물품이 대표한것이다.

 

 

 

당시 일본은 고대국가 완성기인 천평문화기였는데 신라를 통해 중국의 문물을 수용했다.

중국과 직접교역하기엔 당시 조선술과 항해술이 미약했기 때문이다.

신라는 당시 뛰어난 해상력을 통해 동아시아의 무역을 주도하고있었다.

정창원에 보관되어 있는 신라의 물품들은 그처럼 뛰어났던 신라의 역량을 나타내고 있다.

 

 

신라는 강력한 해상능력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신라의 문화를 이룩했고

이러한 선진문물은 일본에 전해져 일본 고대문화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