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스페셜100선

19 진주대첩, 3천이 3만을 어떻게 이겼나

사랑의고향길 2013. 9. 28. 18:44

진주대첩, 3천이 3만을 어떻게 이겼나 
임진왜란 최초로 성을 지켜낸 전투-진주 대첩
진주대첩은 목사인 김시민의 뛰어난 전술과 민간인들의 합심 그리고 효율적인 무기 사용의 조화로 최신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이긴 전쟁이다. 진주전 당시 왜군의 사망자는 지휘관급이 삼백 명, 병사가 만 여 명에 달했다. 또한 병력 손실 외에도 패배가 주는 여파는 대단했다. 치열했던 6일 간의 전투 현장으로 들어간다. 
1. 패배자 일본의 분노와 치욕
일본은 진주전 참패에 분노하였다. 히데요시는 2차전을 지시하고, 진주대첩 승리의 주역인 김시민 목사의 목을 베어 오도록 명령하였다. 이후 일본에서는 김시민 목사를 빗댄 인물이 일본 문학에 등장시키면서 진주대첩에 패배한 그들의 치욕을 풀고 있다.
2. 조총과 승자총통
진주성 전투시 일본은 위력적인 신식 무기 조총을 사용했다. 이에 비해 조선군의 주무기는 창과 활이었다. 하지만 조선군에게는 조총에 대응할만한 승자총통이 있었다. 일본의 조총을 이긴 조선의 승자총통의 복원체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3. 진주성의 무기들
왜군은 전투 4일째부터 새로운 장비를 동원하여 진주성을 공격했다. 하지만 당시 진주성 안에는 왜군의 뛰어난 장비에 대응할만한 무기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대형 화포인 현자총통과 독창적인 시한 폭탄인 비격진천뢰도 등의 무기는 진주성을 지키는 일등 공신이었다.
4. 조선의 요새 진주성
진주성은 그 남쪽에는 남강이, 서쪽에는 깎아지른 절벽이 있었다. 그리고 성의 북쪽에는 적의 침입을 막는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진주대첩의 요새 진주성을 탐방한다.
5. 고도의 심리전
전쟁에는 전투 뿐만이 아니라 심리전도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왜군들은 다양한 심리전으로 조선군을 동요 시키려 했지만 먹히지 않았고, 오히려 김시민을 중심으로 한 조선군의 고도의 심리전은 왜군을 혼란시켰다. 김시민은 보잘 것 없을 것같은 피리소리도 동원하였다.
6. 승리의 주역 김시민과 민간인
전투의 마지막 날, 새벽에 위장퇴각을 한 왜군은 곧바로 돌아와 총공격을 가했다. 성안의 민간인들은 김시민의 지휘 하에 왜군을 향해 돌을 던지고 끓는 물을 쏟아 붓는 등 사력을 다했고, 성안의 기와나 돌, 우물까지도 거의 바닥이 났다고 한다. 

 

 

 

 

 

임진왜란 3대 대첩중 하나인 진주대첩은 일본에게 씻을수 없는 치욕으로 여겨지고있다.

진주성 치욕은 현재 일본에서 여러 희극으로 각색될 정도로 일본인들에겐 치욕으로 알려져있다.

이 진주대첩은 일본이 처음으로 육지에서 참패한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군은 신식무기인 조총이 주무기였던 반면 조선군은 활이나 창이었다.

승자총통같은 개인 화기가 있었으나 수동점화라는 점에서 조총과 차이가 났다.

승자총통은 사거리가 조총에 비해 3배가 길고 파괴력도 월등하나 점화하는데 오래걸려

왜군에 비해 화력에서 절대적으로 밀렸다.

왜는 조총뿐아니라 죽편,정루,산대등의  전쟁무기도 동원했다.

그러나 우리도 현자총통이나 비격진천뢰같은 무서운 화기들이 있었다.

비록 수량은 적었으나 성안에서 이러한 무기들을 사전에 잘 준비했고 효율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왜군과 팽팽한 싸움을 전개할수 있었다.

당시 왜군들은 진격을 하면서 의병들이 보급로를 차단할까 두려워 의병의 근거지인

진주성을 3만대군으로 밀어 닥친다.

일본군은 성을 완전히 포위하고 다 각도로 진주성을

공격했지만 성은 난공불낙이었다. 또 전쟁 둘째날 곽재우등의 의병들도 합세했다.

의병들은 왜군들의 후방에 머물며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또 의병들은 탈이나 가면을 쓰고

적을 교란했다, 전투 셋째날엔 악공에게 망루위에서 피리를 불게하여 적의 기세를 꺽었다.

김시민은 이처럼 심리전과 전술에 능한 장군이었다. 또 무엇보다 성안의 백성과 관민이

김시민을 중심으로 합심하였기 때문에 성을 지킬수 있었다.

김시민은 진주목사가 되자 우선 성안의 민간인들을 남장시켜 군세를 높이려하였다.

진주성의 둘레를 감안했을때 성을 지키려면 적어도 1만의 군사는 있어야 하는데 3800명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때문에 성안의 모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성을 지키고 나를 구해야한다는

신념으로 하나되어 싸웠던것이다. 왜군은 전투 6일만에 물러가고 진주성을 지키게 된다.

민관합심이 이뤄낸 우리 전쟁사의 쾌거였다. 김시민은 진주성 전투의 부상으로 2달뒤

죽고 만다. 나라에선 그에게 충무공의 시호를 주었다.

왜군은 이 전투로 만여명이 죽었다. 또 우리한텐 우리 의병들에 사기를 드높였고 전라도

곡창지대를 수호할수있었다는 의의가 있는것이다. 1차전투가 일본에게 치욕이었던 많큼

히데요시는 2차전투를 일으켜 1차전투의 보복을 하게된다. 성안의 6만여명의 민간인을

사살한다. 이처럼 진주성전투는 일본에게 치욕으로 남겨져있는것이다 .

진주성 전투는 목사 김시민을 중심으로 뭉친 관민과 백성들의  땅을 지키기위해

목숨을 받쳤던  정신이 남겨져있는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