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스페셜100선

23 신라인들도 원샷을 했다 - 삼잔일거

사랑의고향길 2013. 9. 28. 18:46

신라인들도 원샷을 했다 - 삼잔일거 
1975년에 경주의 안압지를 발굴할 당시 주사위 하나가 발견됐다. 이 주사위에는 갖가지 술자리 벌칙이 적혀있다. 그 중 하나가 삼잔일거. '일거'란 단숨에 술을 들이킨다는 뜻으로, 삼잔일거는 석 잔씩이나 연거푸 원샷을 한다는 말이다. 
1. 신라인의 놀이문화
1975년 안압지를 발굴할 당시, 각 면마다 흥미로운 내용이 적혀있는 참나무 주사위가 출토되었다. 정사각형 면이 6개, 육각형 면이 8개. 총 14면체인 이 주사위는 일반적인 6면체에 비해 만들기도 상당히 어려웠을 것이다. 게다가 각 면마다 흥미로운 내용들이 적혀 있다. 이 주사위는 신라인의 풍류의 한 단면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2. 안압지의 궁중건물
기록에 의하면 안압지에는 태자가 거처하는 동궁이 있었고, 그 동궁은 '월지궁'으로불렸다고 한다. 안압지에 태자가 거처하는 동궁이 있었다면, 당시 이곳에 있던 건물들은 상당히 화려하고 아름다웠을 것이다. 안압지 발굴당시에 서른 한 곳의 건물터와 8곳의 담장터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출토된 유물을 통해서 당시 건물을 추정해 볼 수 있었다.
3. 신라 귀족의 의복
신라 여성들은 긴머리를 땋아 틀어올린 머리모양을 했다고 한다. 그런 머리 모양은 상당한 시간과 손길이 필요하다. 머리를 높이 치켜올리기 위해서는 가체를 덧붙여야 하는데, 그 당시 벌써 가발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문헌과 토용을 토대로 신라인의 의복을 복원해 보았다. 당시 상류계급의 화려한 옷차림은 안압지의 연회가 얼마나 풍류가 가득차고 넘쳤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4. 물 위의 풍류-안압지의 놀이배
안압지의 동쪽 연못에서 나무로 만든 배가 엎어진 채로 발견되었다. 우리나라의 토양은 산성이기 때문에 목제유물은 거의 출토되지 않는데, 다행히 안압지에서 발견된 배는 뻘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원형에 가까운 상태로 발견될 수 있었다. 안압지의 목선은 국내에서 발견된 최초의 것으로 우리 배의 발달과정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5. 안압지 조경의 비밀
안압지는 일반적인 연못과는 달리 아주 독특하게 꾸며져 있다. 열 두개나 되는 낮은 봉우리들이 연속적으로 펼쳐져 있고, 연못 안에는 크기가 각각 다른 세 개의 섬이 있다. 하지만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키는 안압지는 단지 관상용으로만 아름답게 꾸민 것은 아니었다. 안압지의 조경에는 또 다른 비밀이 숨어있다.
6. 통일신라의 운명과 함께 한 안압지
674년 안압지를 조성할 당시 백제와 고구려는 멸망했지만, 신라는 당나라를 상대로 피나는 전쟁을 치르고 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시기에 문무왕은 정궁인 반월성이 있었는데도 안압지 건설이라는 대형공사를 시작한다. 안압지는 다가올 통일을 자신했던 문무왕의 전승기념물로 출발했던 것이다. 통일을 기념하기 위해 연못을 파고 화려한 동궁을 세웠던 안압지는 훗날에는 사신을 접대하고 연회를 즐겼던 공간이었다. 그리고 안압지는 통일신라의 마지막 장에서도 빠지지 않는다. 

 

 

신라인들도 원샷을 했다

 

삼잔일거 -

 

 

 

1975년에 경주의 안압지를 발굴할 당시 주사위 하나가 발견됐다.

 

이 주사위에는 갖가지 술자리 벌칙이 적혀있다.

 

그 중 하나가 삼잔일거.

 '일거'란 단숨에 술을 들이킨다는 뜻으로,

 

삼잔일거는 석 잔씩이나 연거푸 원샷을 한다는 말이다.

 

 

 

 

1. 신라인의 놀이문화

 

1975년 안압지를 발굴할 당시,

각 면마다 흥미로운 내용이 적혀있는 참나무 주사위가 출토되었다.

 

정사각형 면이 6, 육각형 면이 8.

14면체인 이 주사위는 일반적인 6면체에 비해

만들기도 상당히 어려웠을 것이다.

 

게다가 각 면마다 흥미로운 내용들이 적혀 있다.

 

이 주사위는

신라인의 풍류의 한 단면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2. 안압지의 궁중건물

 

기록에 의하면

안압지에는 태자가 거처하는 동궁이 있었고,

그 동궁은 '월지궁'으로불렸다고 한다.

 

안압지에 태자가 거처하는 동궁이 있었다면,

당시 이곳에 있던 건물들은

상당히 화려하고 아름다웠을 것이다.

 

안압지 발굴당시에

서른 한 곳의 건물터와 8곳의 담장터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출토된

유물을 통해서 당시 건물을 추정해 볼 수 있었다.

 

 

 

 

3. 신라 귀족의 의복

 

신라 여성들은

긴머리를 땋아 틀어올린 머리모양을 했다고 한다.

 

그런 머리 모양은 상당한 시간과 손길이 필요하다.

 

머리를 높이 치켜올리기 위해서는

 가체를 덧붙여야 하는데,

 

그 당시 벌써 가발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문헌과 토용을 토대로 신라인의 의복을 복원해 보았다.

 

당시 상류계급의 화려한 옷차림은

 

안압지의 연회가

 얼마나 풍류가 가득차고 넘쳤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4. 물 위의 풍류-안압지의 놀이배

 

안압지의 동쪽 연못에서

나무로 만든 배가 엎어진 채로 발견되었다.

 

우리나라의 토양은 산성이기 때문에

목제유물은 거의 출토되지 않는데,

 

다행히 안압지에서 발견된 배는

뻘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원형에 가까운 상태로 발견될 수 있었다.

 

안압지의 목선은

국내에서 발견된 최초의 것으로

우리 배의 발달과정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5. 안압지 조경의 비밀

 

안압지는

일반적인 연못과는 달리 아주 독특하게 꾸며져 있다.

 

열 두개나 되는

낮은 봉우리들이 연속적으로 펼쳐져 있고,

 

연못 안에는 크기가 각각 다른 세 개의 섬이 있다.

 

하지만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키는 안압지는

단지 관상용으로만 아름답게 꾸민 것은 아니었다.

 

안압지의 조경에는 또 다른 비밀이 숨어있다.

 

 

6. 통일신라의 운명과 함께 한 안압지

 

674년 안압지를 조성할 당시

백제와 고구려는 멸망했지만,

신라는 당나라를 상대로

피나는 전쟁을 치르고 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시기에

문무왕은 정궁인 반월성이 있었는데도

 안압지 건설이라는 대형공사를 시작한다.

 

 

 

 

안압지는 다가올 통일을 자신했던

문무왕의 전승기념물로 출발했던 것이다.

 

 통일을 기념하기 위해

연못을 파고

 

화려한 동궁을 세웠던 안압지는

훗날에는 사신을 접대하고 연회를 즐겼던 공간이었다.

 

그리고 안압지는

통일신라의 마지막 장에서도 빠지지 않는다.

 

 

 

 

 

신라인들도 원샷을 했다. 삼잔일거

 

 

70년대 안압지 발굴조사때 3만여점의 신라유물이 발견되었다.

이 유물들은 대부분 실생활에 쓰였던것이다. 그 중 참나무로 만들어진

14면체 주사위가 눈길을 끈다. 주사위 각면마다 글씨가 쓰여있는데

술자리에 쓰였던 별칙이 적혀있다. 벌칙엔 술석잔 단숨에 마시기같은

술자리를 흥겹게 하는 놀이들이 적혀있다. 안압지에서 이런 풍류를 즐긴 이들은

왕과 귀족들이었다. 이 주사위엔 음주와 가무를 즐겼다는 우리 민족의 원형이 담겨있다.

안압지란 이름은 조선시대때 붙여진것이다. 신라시대 원래 안압지 이름은 '월지'였다.

안압지엔 통일신라시대때 건축양식을 알수있는 유물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신라시대땐 건물 전체를 화장하듯이 단청을 해서 굉장히 화려했을것이다.

안압지에선 장식품도 많이 발견됬다. 신라시대 토용들을 보면 신라시대  사람들의 머리모양을

알수있는데 머리를 틀어올린것을 학인할수있다. 그 외 안압지엔 빗이나 머리장식이 많이 발견되어

가채등이 사용되었음을 알수있다. 남자도 머리를 틀어올려 복두를 썼다. 또 넓은 소매의 옷을 입었다. 여자는 저고리위에 치마를 입었고 표를 목에 둘렀다. 이것은 모두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것이었다. 안압지에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배가 발견되었다. 안압지의 목선은 우리나라의 배의 발전을 알수있는 중요한 단서이다.

안압지엔 나무배뿐아니라 노도 발견되었는데 연못에서 타고 즐긴것이다.

안압지에 조경을 분석하면 도가사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것을 알수있다.

안압지 동남쪽에 입수구는 물의 정화장치를 계산한것이다. 또 안압지에선 각종 동물뼈가 발견되었다.

삼국사기엔 안압지에 진귀한 동식물을 길렀다고 적혀있다. 안압지 어느 곳에서도 연못전체를

볼수없는데 이것은 무한한 바다를 상정하는 것이다. 안압지가 만들어진것은 나당전쟁중이었다.

안압지 조성은 통일을 자신했던 문무왕의 자신감을 나타내는것이었다. 또 안압지 공사에

고구려와 백제인을 참여시킴으로써 민족의 일치감을 나타내었다.

 

안압지에 있었던 세택은

왕을 보좌하던 기구에서 개혁의 상징으로까지 발전했다. 안압지는 통일후 연회성격이 강해지는데

통일신라의 안녕과 번영을 나타낸것이다. 안압지는 나라의 시작과 끝을 지켜본 역사적인 공간이다.

안압지는 삼국의 문화가 융합된 통일의 상징물이었다. 안압지에 담겨있는 신라인의

생활과 양식은 역사의 거울과도 같은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