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기획 제1편 - 고구려 비밀의 문, 광개토 대왕비 |
광개토대왕비는 현전하는 역사기록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삼국사기보다 무려 700여 년이나 앞선다. 그리고 이 광개토대왕비는 광개토대왕의 신하였던 고구려인들이 직접 보고 겪은 일을 적은 너무나도 소중한 당대의 기록이다. 그리고 화려했던 광개토대왕 시대를 증언하는 유일한 목격자이기도 하다. |
1. 고구려의 도읍지 '집안' |
중국 길림성 집안현은 400여 년 간 고구려의 도읍지였던 곳이다. 집안현은 그 자체가 커다란 고구려의 무덤이라고 할 정도로 장수왕의 무덤으로 알려진 장군총 등 수많은 무덤이 떼를 이루고 있다. 바로 여기에 광개토대왕비가 광개토대왕 사후부터 오늘날까지 수많은 고구려의 비밀을 간직한 채 1500년을 서 있다. |
2. 고구려의 영토 |
광개토대왕비는 광개토대왕이 몸소 대군을 이끌고 염수가에서 비려를 격파했다고 전하고 있다. 염수는 소금강이라는 뜻인데, 취재진은 국내성에 있는 집안에서 서북쪽으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시라무렌강가의 거대한 소금호수를 발견했다. 그리고 이 지역의 곳곳에서 고구려의 흔적들을 찾을 수 있었다. |
3. 광개토대왕과 백제 |
흔히 고구려 군대는 말을 타고 만주 벌판을 달리던 기마병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광개토대왕은 할아버지 고국원왕의 원수를 갚기 위해 수군을 이끌고 배를 타고 한강으로 들어와 최고의 용병술로 단숨에 백제를 굴복시켰다. 당시 참패 당한 백제의 모습을 고구려비문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백제왕은 할 수 없이 남녀 천 명과 세포 천 필을 헌납해 보내며 광개토대왕의 면전에 꿇어앉아 지금부터 영원히 당신의 노객이 되겠소 하고 맹세했다.’ |
4. 고구려와 신라 |
신라인이 기록한 역사 속에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왕으로 기록된 신라의 내물왕. 광개토대왕비에는 이 신라의 내물왕이 급하게 고구려에 사신을 파견한 내용이 있다. 광개토대왕은 그 이듬해 5만의 군사를 신라에 보낸다. 신라에 파견된 고구려 군대는 신라를 침공한 왜를 공격하여 가야지역까지 단숨에 진군한다. 그리고 강력한 철제무기로 무장한 철의 나라 금관가야를 역사 속에서 지워버렸다. |
5. 하늘의 자손 고구려 |
우리는 흔히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했다면 우리나라의 역사는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고구려에서 삼국통일이 가능해보이던 시기는 광개토대왕때이다. 하지만 백전백승의 부대를 이끄는 광개토대왕은 삼국통일을 이루지 않았다. 이 이유가 광개토대왕비문에 적혀있다. |
고구려 기획 제1편 고구려 비밀의 문, 광개토대왕릉비
우리나라 최초 고분발굴은 호우총발굴이었다. 이 고분은 신라 왕릉급 무덤으로 호우가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케 했다. 이 호우 밑바닥엔 광개토대왕이 언급되어있다. 광개토대왕비와 글씨체도
같다. 광개토대왕비는 이것의 비밀을 푸는 중요한 열쇠이다. 고구려 옛 수도 국내성이었던
집안엔 광개토대왕비와 태왕릉이 있다. 광개토대왕비엔 1700여글자가 적혀있다. 규모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비석이며 크게 3부분으로 내용이 나뉜다. 첫번째 부분은 고구려 건국신화가
두번째 부분은 광개토대왕의 생전업적, 세번째부분은 무덤관리부분이다 광개토대왕 즉위5년, 고구려는 비려와 전쟁을 벌였다. 비려를 격파한곳은 염수로 지금의 내몽고자치구주변이다.
북한 평안도 덕흥리고분군엔 태수의 그림들이 그려저있는데 지금의 북경일대를 다스리던 태수들이다.
고구려는 북경일대까지 영향력을 미쳤다.
광개토대왕 즉위 6년엔 원수국가인 백제를 공격했다.
임진강 주변에 성을 쌓고 주둔함으로서 백제를 압박했다. 안악3호분엔 고구려 군사조직을 알수있는 벽화가 있다. 광개토대왕은 수군을 이용해 적의 후방을 쳤다. 기습상륙작전이었다. 전방의
군사들은 임진강을 넘어 공동작전을 펼쳤다. 이 전쟁에서 백제 아신왕이 항복을 선언했다.
할아버지를 죽인 나라 백제의 항복을 받아낸 기념적인 전쟁이었다. 광개토대왕은 조공만 받고
백제를 고구려 지배하에 둘려했다. 고구려는 강력한 수군도 가지고 있었다.
광개토대왕은 신라에 침공한 왜와 가야를 쳐부수었다. 이 신라구원전쟁으로 금관가야는
몰락하고 만다. 이 전쟁을 계기로 신라왕은 고구려에 조공을 바치기 시작한다. 중원고구려비엔
신라왕이 친조를 하고 옷을 하사받았단 기록이 있어 신라가 고구려에 예속됬음을 알수있다.
일본서기에도 고구려군이 신라에 주둔했다는 기록이있다. 그 외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도 그런
기사가있다. 호우총에서 발견된 호우는 광개토대왕에게 제사를 지낼때 쓴것으로
신라가 고구려에 속국이나 다름없음을 알수있다. 이 호우는 당시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를 말해주는 중요한 자료다. 광개토대왕은 백제를 복속시키고 신라를 속국으로 삼았다.
광대토대왕은 삼국을 통일하려하지 않았다. 고구려는 스스로 하늘의 아들이라는 의식을
강조하는 독자적인 천하관을 갖고있었다. 고구려인들은 국동대혈에서 시조신과 조상을
숭배했다. 고구려는 주변국가를 고구려의 질서속에 편입시키려했다. 고구려는 황제국과
제후국의 관계를 맺으려 했던것이다. 광개토대왕이 추구한 통일은 이런것이다.
고구려 지배질서속에 삼한이 함께하는것이었다. 광개토대왕은 왕중의 왕이라 불려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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