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스페셜100선

27 고구려기획 제2편 - 동방의 피라미드, 장군총

사랑의고향길 2013. 9. 28. 18:48

고구려기획 제2편 - 동방의 피라미드, 장군총 
1500년 전 고구려 무덤 장군총.
피라미드 모양의 그 당당한 위용은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약 12미터 높이의 이 무덤을 일컬어 중국인들은 동방의 피라미드라 불렀다. 중국과 대등한 위치에서 동아시아를 지배했던 나라, 독자적인 세계관과 문화를 갖고 있던 나라, 그리고 우리 민족사상 가장 광활한 영토를 경영했던 제국, 고구려. 장수왕 시대의 고구려를 이야기 한다. 
1. 장군총을 찾아서
고구려는 압록강변에 도읍을 정했다. 바로 국내성, 오늘날의 중국 길림성 집안시 일대이다. 집안시 어디에서든지 맞닥뜨리게 되는 것은 만 3천여 기의 거대한 무덤 떼들이다. 산으로 착각할 만큼 큰 무덤만도 천여 기, 작다고 해도 집한 채 크기인 고구려의 무덤들이다. 그런데 이 고구려무덤 떼 중에 사람들의 눈길을 가장 많이 끄는 것이 있다. 마치 1500년의 세월을 비껴온 것처럼 완벽한 형태를 드러내고 있는 거대한 돌무덤, 장군총이다.
2. 놀라운 건축기법
장군총을 쌓아올린 돌들은 모두 화강암으로 전체 무게가 적어도 6천 톤 이상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철근을 박아 넣었다거나 따로 기둥을 세운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돌로 쌓아올린 무덤이다. 그런데 이 엄청난 무게의 돌무덤이 어떻게 1500년이란 세월을 버텨왔을까. 그 의문을 풀어줄 실마리의 하나가 바닥에 숨어있었다.
3. 장군총을 쌓아라
5m가 넘는 돌들을 무려 천백 개나 쌓아올린 장군총. 그 시대에 이 많은 돌들을 어디서 구했을까. 장군총 주변에는 엄청난 크기의 화강암 암벽지대가 있었다. 하지만 1500년 전 그 단단한 화강암을 어떻게 떼어냈을까. 그리고 기중기나 파워크레인도 없었던 시대에 어떻게 저렇게 높게 쌓을 수 있었을까. 거대한 건축물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은 단순히 기술만 가지고 있다고 해서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4. 전각과 호석의 수수께끼
장군총 정상에는 가장자리를 쭉 둘러가며 구멍이 나있다. 그리고 무덤 주위에는 울퉁불퉁한 커다란 자연석을 기대어 놓았다. 장군총 꼭대기의 구멍과 거대한 바위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5. 장군총의 주인은?
장군총은 그 이름 때문에 어떤 장군의 무덤이라고 추측되기도 하고, 광개토대왕비 근처에 있기 때문에 광개토대왕의 무덤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장수왕릉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장군총의 주인은 누구일까. 무덤의 주인을 추적하는 첫 번째 방법은 무덤의 형식이다.
6. 장수왕의 국제적 위치
장수왕. 그에 관한 우리의 상식은 간단하다. 광개토대왕의 아들, 고구려 최대의 영토와 최고의 전성기를 이룩한 사람. 사실 고구려의 전성기는 광개토대왕의 영토확장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졌다는 점 때문에 장수왕은 광개토대왕에 비해 강하게 기억되고 있지 않다. 하지만 5세기 장수왕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존재였다. 그가 죽었을 때 중국의 황제가 베옷을 입고 통곡을 했다고 한다.
7. 장수왕 시대
우리에게 화려했던 고구려의 문화를 말해주는 고분 벽화는 장수왕 시대의 풍요와 평화 속에서 탄생하기 시작했다. 고구려벽화에는 고구려의 힘을 말해주는 흥미로운 단서가 숨어있었다. 그 동안 우리가 미처 눈 여겨 보지 못했던 그 단서는 바로 수레이다. 수레, 고구려인들과 수레는 어떤 관계가 있었던 것일까. 

 

 

고구려 기획 제2편 동방의  피라미드, 장군총

 

장군총은 중국 집안에 있는 1500여년전의 고구려 무덤이다. 옛 수도인 국내성 주변엔

12000여기의 고구려 무덤이 있다. 세계최대고분규모이다.

그 중 가장 큰 것은 장군총이다. 7m높이의 장군총은 동방의 피라미드라 불린다.

장군총 밑바닥엔 돌을 층층히 깔아 지반을 튼튼히 하여 무덤이 무너지지 않게 했다.

돌과 돌이 맞닿이는 곳에 홈을 파서 윗돌을 맞물리게 했다.

들여쌓기를 한것이다. 이 기법은 축성의 방식인데 무덤에 쓰인것이다.

장군총이 1500년이 지나도록 완벽하게 보존될수있었던 이유는 축성의 방식인 들여쌓기를 했기때문이다. 그외 윗돌과 아랫돌을 짜서 맞추는 그랭이공법도 사용됬다.

장군총은 5m가 넘는 1100여개의 돌을 쌓아올렸다. 사용된 돌은 모두 우산(山)에서 채석한 돌들이다.

장군총은 약7만명 가량의 인력이 동원된것으로 알려저있다. 고구려의 국력을 짐작해볼수있다.

장군총 발굴당시 상당수의 고구려기와가 발견됬는데 장군총무덤 꼭대기에 건물이 있었을것이다.

또 꼭대기엔 작은 구멍이 있는데 기둥자리가 아닌 난간자리인것이 추측이다.

장군총의 정상엔 전각이 있었다. 기단부엔 거대한 자연석을 둘러놓았는데

물리적인 버팀목이라 생각되어왔으나 무덤을 웅장하게 하기 위한 상징물이라 보여진다.

태왕릉 주변에도 자연석이 둘러저있다. 버팀목이나 12지신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사용함으로써 무덤의 신성성을 더했다.

장군총의 주인은 분명하지 않으나 장수왕이란 설이 유력하다. 5c엔 여러무덤이 만들어졌으나

적석총으로 쌓은 사실이나 태왕릉과 가까운 위치인것으로 봐서 장수왕릉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고구려시대엔 태어날때부터 무덤을 준비했기 때문에 평양으로 천도한 장수왕이 국대성에

묻힌것이 이상한것은 아니다. 장수왕이 죽자 위나라에서 매우 애도했다. 이것은 고구려의

국제적위상이 높았음을 의미한다. 장수왕의 평양천도는 고구려인이 유목생활에서

해상농업국가로 변하는 계기가되었다. 장수왕은 또한 탁월한 외교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고구려 고분벽화엔 수례가 많이 등장한다. 이것은 도로망이 발달되었음을 알수있다.

고대국가에선 매우 발달된 문화에 속한다. 5c 고구려는 동아시아 경제대국이었고 중국과

대등한 위치에서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지고 있었다.

고구려인들의 힘과 진취적인 기상은 우리가 보전해야 할 또 하나의 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