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 추적, 신라의 소정방 피살사건 |
1300여년 전, 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시체는 다리 밑에 매장되었다. 피살자는 당나라 장군 소정방으로 한때 당나라 최고의 지위에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죽음에 관한 기록은 중국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역사스페셜이 소정방의 죽음과 그를 둘러싼 역사적 배경을 밝힌다. |
1. 소정방의 피살 |
소정방의 시체가 묻혔다는 당교. 과연 실재했던 다리였는지 확인에 나섰다. 당교는 상주와 문경을 잇는 경계지점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당교의 원래 모습은 어떠했을까. 이곳은 김유신 장군이 당나라 군사와 소정방을 살해하고 묻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전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소정방 피살의 단서를 제공해 주는 또 하나의 사실이 있었다 |
2. 베일에 가린 소정방의 죽음 |
당나라의 수도였던 장안. 당의 천하통일의 꿈이 출발한 곳이다. 당의 대규모 영토팽창시기에 맞춰 장군으로 발탁된 소정방은 백제까지 정복하여 최고의 전공을 기록하게 된다. 이 업적으로 소정방은 왕 다음으로 높은 작위를 받는다. 그런데 당대 최고의 지위까지 오른 소정방의 죽음은 중국땅 어디에도 기억되고 있지 않았다 |
3. 김유신과 소정방 |
소정방과 김유신을 주축으로 하는 나당연합군은 백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소정방의 당군은 서해안에서 백마강으로 진입하고 신라군도 황산벌을 거쳐 진격한다. 그리고 사비성 앞의 웅진구에서 합류한 양군. 하지만 합류하자마자 소정방과 김유신 사이에서 갈등이 시작된다. |
4. 당의 신라점령 음모 |
백제를 점령한 후에 소정방 군대는 바로 철수하지 않았다. 내친김에 신라까지 치려 한 것이다. 백제를 차지하고 신라마저 자신의 식민지로 만들려고 했던 당의 음모 앞에 삼국통일의 위엄을 이루려던 신라는 자칫하면 자신마저 식민지로 전락할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
5. 소정방 살해 이유 |
소정방이 피살됐다는 당교 마을 부근에는 당나라군의 주둔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당시 전장지도 아니었던 이 지역에 왜 당군이 주둔하고 있었던 것일까. 김유신은 이 당교 근처에서 소정방을 살해하고 그의 머리를 다리 밑에 묻었다. |
6. 신라의 대당전쟁의 승리 |
신라와 손을 잡고 이땅에 왔던 소정방의 당나라 군대는 기벌포를 통해 백제군을 공격하고 백제왕국을 점령했다. 하지만 이 기벌포에서 그들이 멸망시켰던 백제, 고구려의 도움을 받은 신라에 패배를 당하게 된다. 이 싸움이 당나라 군대가 한반도에서 벌인 마지막 전쟁이었다. |
당나라 장군 소정방의 숨겨진 죽음!~
1,300여 년전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시체는 다리밑에 매장됐다.
피살자는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었다.
"소정방, 여러분 소정방이란 이름 알고 계시죠.
신라와 손을 잡고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의 장군 소정방!
그런데 바로 그 소정방이 신라에서 피살됐다?
아마 이 사실은 처음 들으시는 분들도 많을 겁니다.
하지만 이 피살사건은 떠도는 전설이 아니라, 분명히 우리 역사서에 기록이 되어있는 사건입니다.
일연스님이 쓴 <삼국유사>입니다.
'태종 춘추공편'에 실린 내용을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신라고전>에 말하기를
'소정방이 이미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토벌하고, 또 신라 정벌을 모의하며 머물러 있었다.
이에 김유신이 당나라 병사들에게 주연을 베풀면서 짐새의 독을 먹여 모두 죽이고 구덩이에 묻었다'고 한다.
지금 상주 경계의 당교가 바로 그들을 묻은 장소이다."
사건에 대한 내용이 아주 구체적입니다.
소정방을 누가 죽였는지,
그리고 죽인 후 시체를 어디에 유기했는지까지,
게다가 살해할 때 사용한 독의 종류까지 언급이 되어있는데요.
이렇게 구체적인 기록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이 사건이 다른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을까?
그것은 우리나라의 다른 역사서에는 전혀 이 기록이 나와 있지 않아서입니다.
당나라의 장군 소정방이 신라에서 피살되었다면 분명히 엄청난 정치적 사건이었을텐데
왜 유독 삼국유사에만 기록되어 있을까요?
오늘 역사스페셜에서 소정방 피살사건을 굳이 추적해보려고 하는 것은
이 피살사건이 당시 신라와 당의 관계와 삼국통일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실마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소정방의 피살 기록이 사실인지 당시의 현장을 찾아서 떠나보도록 하겠습니다."
2. 소정방 피살의 증거들 - 당교(뙤다리), 사당터, 이규보 제문
소정방의 시체가 묻혔다는 당교.
과연 실재 했던 다리였는지 확인해보러 나섰다.
경북 상주시 함창읍 윤직2리
"실례합니다. 이곳에 혹시 당교라는 데가 있습니까?"
"예. 이 동네 이름이 당교입니다."
"동네 이름이 당교라구요? 이 근처에 다리가 있다고 들었는데요?"
"요 너머에 있잖습니까.
당나라 뙤놈들이 여기 사방에 복병을 하고 있어가지고 '뙤다리'라고 하기도 하지요."
마을 노인들의 안내로 당교가 있다는 곳으로 향했다.
"여기가 당교입니까?"
"예. 당교라고도 하지만 뙤다리입니다."
"근데 다리 모양이 아닌데요?"
"옛날에 여기에 뙤다리가 있었는데, 여기에 도로확장공사를 하면서 그 자체가 하나도 없어져 버렸습니다.
작년도부터 시작해서 지금은 완공이 거의 되었지요."
- 홍국흠, 상주시 함창읍 윤직2리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당교는 상주와 문경를 잇는 경계 지점에 존재하고 있었다.
지난해까지만해도 이 지역 주민들이 수시로 이용했던 다리는
도로확장공사로 인해 땅속에 묻히게 된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지역이
삼국통일때 당나라 군사들을 몰살시킨 바로 그곳이기 때문에 당교라고 하고,
우리말로 뙤다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은 삼국유사 뿐만 아니고
이 지역 사람들은 전설로 듣고 듣고 해서 모두가 다 알고 있습니다."
- 신동철, 문경 향토사 연구소장
그렇다면 당교의 원래 모습은 어떠했을까?
문경시청에는 당교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다리가 묻히게 되자 시청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비문엔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 장군이 소정방을 물리친 역사적 다리'라고 씌여져 있다.
시청에 남아있는 자료를 통해 당교의 원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지역 사람들이 '뙤다리'라 부르는 당교.
김유신 장군이 당나라 군사와 소정방을 살해해 묻었다는 사실이
지명과 함께 1,300여 년 동안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소정방 피살의 단서를 제공해주는 또 하나의 사실이 있다.
고려사엔 지금의 충남 예산군에 속하는 대흥현 대잠도에 소정방 사당이 있고
해마다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지낸다고 기록되어 있다.
"소정방의 사당이 대흥군 대잠도에 있고, 봄 가을에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 지낸다."
충남 예산군 대흥면 봉서산 기슭.
기록상에 나타난 소정방 사당터로 추정되는 곳이다.
"기왓장이 굉장히 많아요.
그런데 기왓장의 종류도 다양하거든요.
여기 어골문 기와가 있는데, 이런 어골문 기와가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기와 문양이 됩니다.
바로 이러한 어골문 기와들이 여기에 고려시대 건물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 이도학 박사, 한양대 사학과
지금은 밭으로 변해버린 사당터.
그러나 개간을 하며 쌓아둔 덤불속엔
주춧돌과 함께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기와문양이 발견된다.
고려시대 세운 소정방의 사당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1531년에 씌여진 이악수선생의 시문집을 보면 '봉령산의 동쪽에 소정방의 사당이 있다' 써 있습니다.
바로 그 봉령산은 저기 뒷편 봉수산을 말하는 것이고, 이곳은 봉수산의 동쪽에 해당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선 말기에 편찬된 <여지도서>에 보면 '대흥현의 서쪽 3리 지점에 소정방 사당이 있다'고 되어있습니다.
바로 현아가 지금 앞쪽에 있는데, 그로부터 여기 3리 지점에 소정방 사당이 있었다는 것과도 부합이 됩니다."
- 이도학 박사, 한양대 사학과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가 쓴 <동국이상국집>엔 '제소정방장군문'이 실려 있다.
당시 경주민란을 진압하면서 소정방에 제사지내며 쓴 제문이다.
"장군은 불행히도 우리나라를 떠나지 못하고,
수레가 서쪽으로 떠나지 못했음으로 사당이 이곳에 남게 되었습니다."
(未西轅- 미서원, 서쪽(중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원= 수레
遺祠 - 유사, 그래서 사당이 남게 되었다.
客魂 - 객혼, 떠도는 영혼이 되었다.)
"이규보 선생은 고려 무신집권기의 문인으로서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스님보다도 70~80년 앞선 시기에 이 제문을 작성했습니다.
이 제문의 내용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 당시에는 소정방 장군이 신라에서 정벌했다는 것이 널리 유포되어 있었고
모두 인지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있는 것입니다."
소정방이 신라에서 피살되었다는 증거는 여러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세월이 지나 사람들은 객혼으로 떠도는 그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저 멀리 서쪽 중국땅이 바라보이는 이곳에 사당을 세운 것이다.
3. 당대 최고 장수 소정방!~
그러나 황제릉에도, 그의 고향에도, 무덤은 없었다!~
"사체 유기 장소가 올봄까지 문경지역에 남아있었다!
소정방의 객혼을 달래주기 위해 소정방의 사당터가 이 땅에 존재하고 있었다!
이런 명확한 피살 흔적으로 봐서 삼국유사에 담겨있는 그 기록은 신빙성이 있는 것인데요,
그런데 당의 역사서인 구당서에는 소정방 죽음에 대한 기록이 전혀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건국2년 667년 나이 76세에 죽었다."
이것은 소정방이 당나라에서 병 등의 자연사로 죽은 것이지,
신라인들에게 피살된 것은 아니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렇다면 앞서본 삼국유사와 상반된 기록이 되는데요 어떻게 된 일일까요?
그런데 우리는 당 역사서에서 몇가지 의문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황제가 말하기를
소정방은 나라에 공이 있어 포증(褒贈)하는 것이 마땅한데
그대들이 말하지 않는 것은 어쩌서인가?"
원래 당에서는 공신이 죽으면 갖가지 포상을 해주는 게 관례로 되어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공신인 소정방이 죽은 후에는 신하들이 그에 대한 포상 부분에 함구하고 있었고
이에 대해 황제가 꾸짖고 있는 대목입니다.
왜 신하들은 소정방에 대해 포상을 건의하지 않았을까요?
소정방! 그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중국 현지를 다녀왔습니다."
당나라의 수도였던 장안.
중국 역사상 가장 강대한 나라를 이룩했던 당 제국의 자취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당의 천하통일의 꿈은 바로 이곳 장안에서 출발했다.
당 태종.
그는 전통적으로 중국을 위협했던 북방의 돌궐을 제압하고
서쪽으론 페르시아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정복전쟁을 일으킨다.
그에게 남은 건 고구려뿐이었다.
소정방은 바로 이 고구려전에서부터 두각을 나타낸 장수다.
"당나라의 대고구려 정책이 교란작전으로 벌어집니다.
소규모의 군대를 동원해서 수상으로, 육상으로 양면 침공해서,
고구려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하는 작전으로 들어가요.
바로 그때 소정방은 영주도독으로 있던 정명진을 따라서
중낭장의 자격으로 전투에 출정합니다.
그러다가 돌아와서 장군으로 발탁되면서,
소정방 인생에 중대한 기점이 된거죠."
- 황유복 교수, 북경 중앙민족대학
장군으로 발탁되면서
소정방은 각종 정복전쟁에서 큰 공적을 올리게 된다.
당의 대규모 정복전쟁에 맞춰 소정방은 서돌궐을 정복하고(657년)
660년 돌궐의 반란을 정복하여 왕을 생포한다.
그리고 백제까지 정복하여 최고의 전공을 세우게 된다(660년)
이 공적으로 그는 좌효위대장군이라는 관직과 함께 형국공에 봉해진다.
"공(公)은 당나라 황실에서 신하들에게 주는 작위였다.
왕 다음으로 높은 작위였다.
- 마치 교수, 섬서사범대학 당사연구소
형국공이란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소정방.
그런 인물의 죽음에 대해 어떻게 기록되어있을까?
섬서사범대학.
당서에 나와 있는 인물열전.
역시 소정방의 열전도 들어있었다.
그런데 그의 죽음에 대해서 단지 '그냥 죽었다'고만 되어있는 것이다.
"배장사실도 거론하지 않았고 장례 대우도 제대로 없다... 좀 이상해요."
-오홍림, 섬서사범대학교 역사과
현지인조차 이상하게 여기는 소정방 죽음에 대한 기록.
그렇다면 다른 인물들에 대한 기록은 어떨까?
소정방과 비슷한 시기에 활약했던 유인궤.
당서 유인궤전.
돌궐 진압과 백제부흥운동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운 장수다.
"(그가 죽자) 황제가 3일간 조회를 열지않고,
모든 신하들에게 문상을 하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황제의 무덤인) 건릉에 함께 배장하고 그의 집안에 식읍 3백호를 하사했다."
역시 당서 열전에 나타나 있는 설인귀.
소정방과 같은 시기에 당 태종을 따라서 고구려전에서 공을 세운 장수다.
'병졸'.
소정방과 달리 설인귀는 병으로 죽었다는 기록이 구체적으로 되어있다.
"(그가 죽자) 관에서 상여를 만들어 가족들에게 역마를 지급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게 했다."
왜 지위와 전공에서 소정방과 비슷한 이들에게 장례 예우를 후하게 해주고 있을까?
당 고종의 무덤인 건릉.
이곳에선 황제의 무덤 뿐아니라 태자나 공주, 황실의 친척,
그리고 중요한 공신들의 무덤도 함께 발견된다.
유인궤묘.
죽어서 후한 장례 예우를 받은 유인궤의 무덤도 이곳에 배향되어있다.
"신하를 황제릉에 배장하는 이유는 그가 평생 쌓은 공적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 고 발, 건릉박물관 조사부
나당전쟁에 참가해 패배했던 이근행의 무덤 역시 이곳에 있다.
정복왕조였던 당 제국.
수많은 정복전쟁을 치루며 충성스런 장군들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그들이 죽으면 융숭한 장례 예우와 함께 황제의 묘역에 배장하는 게 관례였다.
그러나 삼국을 멸하고 최고의 전공을 쌓은 소정방의 무덤은 이곳에서 발견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의 고향에는 무덤이나 기념물이 남아있을까?
당서에 기록되어 있는 소정방의 고향 하북성 무읍현,
오늘날 북경 근처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여기가 무슨 마을입니까?
"소가장(蘇家莊) 마을입니다."
"소정방을 아세요?"
"잘 모르겠어요."
"무덤이 어디 있는지 아세요?"
"몰라요"
소정방은 이 작은 마을에서 배출한 최고 인물 중 하나다.
그런데도 고향사람들은 그의 존재 자체도 알지 못했다.
이 마을에도 소정방과 비슷한 공적을 남긴 인물들은 분명한 자취를 남기고 있었다.
한나라때 재상이었던 도영의 무덤.
이 지역이 남긴 대표적인 인물 도영과 소정방.
하지만 도영의 무덤만이 사적지로 보존되고 있는 것이다.
조그만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최고의 전공을 쌓은 소정방.
그러나 생존의 화려한 업적과는 달리 그의 죽음에 관해선 미스테리만 남아있다.
중국땅 그 어디에서도 소정방의 죽음은 확인할 수 없었다.
4. 나.당연합군의 백제 멸망,
그러나 당은 백제의 주도권을 독차지하고!~
"전쟁에서 패한 경험이 단 한번도 없고, 황제 바로 아래 지위에 있었던 소정방!
그럼에도 그의 무덤도 없고 어떤 흔적도 없다?
혹시 당에서는 소정방이 신라에서 피살된 게 수치스러워 일부러 은폐하려 했던 건 아닐까요?
실제로 당서에선 전쟁에서 패하면 기록에서 뺀 예가 종종 있었습니다.
이런 몇가지 의문들은
소정방이 신라에서 피살되었다는 사실을 더욱 강하게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그래도 신라에서 소정방을 죽였다는 사실을 의심해보는 것은,
바로 동맹국이던 당과 신라의 관계 때문입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팽팽한 긴장을 이루던 때,
신라의 김춘추는 백제를 치기 위해 당나라에 원병을 청하게 됩니다.
오랫동안 고구려를 정복하고자 했던 당나라는
신라의 원병을 받아들여서 13만의 대군을 파견하고
이때 백제를 점령하기 위해 온 당나라 총사령관이 소정방입니다.
그리고 신라의 대장군은 김유신입니다.
그런데 김유신은 왜 소정방을 죽였을까요?
이 두사람의 관계를 자세히 알아보면 의문의 실마리가 풀릴 것입니다."
덕적도.
소정방이 13만대군을 이끌고 이 땅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곳이다.
당 고종의 명을 받아 백제점령군의 총사령관으로
산둥반도를 출발, 덕적도에 진을 친 것이다.
덕적도는 예로부터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수군도 이곳에 진을 쳤던 흔적이 남아있다.
수군절제사 김학성 추모비.
"충청도나 황해도를 경계할 수 있는 거점이거든요.
백제를 치기 위해 소정방이 13만대군으로 와서
소정방은 소야도에 있었고
이 덕적도 일대에 당나라 군사들이 포진하고 있었지요."
- 이세희, 웅진군지 편찬위원
덕적도와 소야도 일대에 주둔한 소정방.
신라는 태자 김법민과 김유신에게 병선 100여 척에 식량과 군수물자를 실고 맞이하게 한다.
소정방의 본영이 설치되었던 소야도에는
이때 신라로부터 군수물자를 보급받은 장소가 지역사람들에게 하나의 지명으로 전해져오고 있다.
* 감 : 썰물때를 가리키는 말.
소야도에서는 '소정방의 군량을 나르던 길'이란 뜻의 지명.
"여기가 사람이 왕래를 많이 하지.
썰물때 여기 '감'을 통해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고
또 소정방이 여기 '감'을 지나 저기 진을 쳤다고 하지."
- 배병윤, 웅진군 덕적면 소야리
소정방에겐 무엇보다도 신라의 군수지원이 절실했던 것이다.
"당나라 군대가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 가장 어려운 것은 식량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덕물도는 그런 작전기지로써 신라로부터 식량을 지원받을 수 있고
또 작전지역으로써도 활용하기 위해 덕물도로 온걸로 알고 있습니다."
- 이종학, 서라벌군사연구 소장
마침내 나당연합군의 백제 공격이 시작된다.
소정방의 당군은 서해안에서 백마강으로 진입하고,
신라군도 황산벌을 거쳐 진격한다.
사비성앞 웅진성에서 합류한 양군.
하지만 만나자마자 소정방과 김유신 사이에 갈등이 시작된다.
신라와 당이 합류하기로 한 날보다 하루 늦게 도착했다는 이유로
소정방이 신라 장군 김문영의 목을 베려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군기(軍期)를 어겼으니 김문영의 목을 베겠노라'
이에 김유신은 그 부당성을 지적하며
차라리 먼저 당을 치겠노라고 강력하게 대응하게 된다.
"죄도 없이 치욕을 당할 수 없으니 먼저 당나라군사와 결전을 한 후 백제를 쳐부수겠소.'
-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이 사건은 신라와 당의 갈등을 야기하는 전초전에 불과했다.
"이 사건은 표면상으로 보면 작전 기일이 몇일 늦었다는 것입니다만
사실은 신라군의 기세를 꺽고, 작전지휘권까지도 장악하려는 의도를
김유신이 간파했기 때문에 반발했던 사건으로 알고 있습니다."
- 이종학, 서라벌군사연구 소장
660년, 마침내 사비성이 함락되어 백제는 소정방의 손에 넘어가게 되고
의자왕은 굴욕적인 항복을 하게 된다.
의자왕은 소정방의 손에 의해 태자 부여 융을 비롯해 1만 2천명의 백성들과 함께 끌려가
결국 북망산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게 된다.
"소정방이 의자왕과 태자, 대신 그리고 백성 1만 2천 8백 7명을 당의 수도로 끌고 갔다."
700여 년의 백제 역사는 끌려가는 의자왕과 함께 백마강의 깊은 물결속에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백제를 차지한 소정방은 전후처리를 두고 또 한차례 김유신과 갈등을 겪게 된다.
소정방은 백제 땅을 떼어 김유신, 김인문 등의 신라 장군들에게 식읍으로 지급할 것을 제의한다.
"이제 빼앗은 백제 땅을 공들의 식읍으로 나눠 주겠노라"
그러나 김유신은 이런 소정방의 제의를 단호히 거부한다.
"어찌 우리들만이 이득을 취하겠는가?"
표현은 완곡했지만 신라왕이 아닌, 소정방이 주는 땅을 일방적으로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당은 김유신과 김인문에게 백제 영토의 일부를 떼어서 식읍으로 지급하고자 했는데
이것은 당나라가 백제 영토를 자기 나라 영토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또 한편으로는 식읍을 그들에게 지급함으로써 신라 지배층 내부에 분열을 획책하고자 했다고도 보여집니다.
그러나 신라로써는 그 의도를 간파하고 영토 지급받기를 거부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 주보돈 교수, 경북대 역사학과
부여에 있는 정림사지 오층석탑.
소정방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이 탑에 아랫단엔 소정방이 새겨놓은 비문이 남아있는 것이다.
백제 정복의 정당성과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대당이 백제국을 점령했다는 비문과 함께
백제 지역의 통치를 위해 5도독부를 설치했다는 것을 새겨넣고 있다.
'大唐平 百濟國 碑銘(대당평 백제국 비명)'
"이 책은 중국 역사지도책으로 상당히 권위가 있는 책입니다.
서쪽으로는 페르시아에부터 중국 중심으로 들어와서 동쪽으론 한반도까지,
고구려, 백제가 동일색으로 중국 영토안에 들어가있는 그런 지도입니다.
아마도 중국에서는 한반도가 중국에 예속된 것으로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
지금 만드는 지도에도 같은 색깔로 한 걸로 보입니다."
- 변인석 교수, 아주대학교 동양사학과
신라를 도와 백제를 정벌한 당!
그러나 당은 이미 백제를 자신의 영토로 편입시켜버린 것이다.
삼국전쟁 시기 신라와 백제는 치열하게 싸웠다.
그러나 신라가 당나라에 원병을 청하면서 백제는 멸망하게 되고
결국 백제는 이민족인 당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5. 드러나는 당의 음모,
신라마저 당의 식민지로 전락할 위기에 처하다!~
"소정방은 백제 통치 기반을 확립시켜놓은 후
고구려 원정 준비를 위해 다시 당으로 돌아갑니다.
이후 당의 식민통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백제 유민들은 거세게 봉기를 하게 됩니다.
3년에 걸친 치열한 투쟁,
그러나 백제의 꿈은 결국 당에 의해 좌절되고 맙니다.
그러나 이에 놀란 당은 뭔가 새로운 조치를 생각해냅니다.
그때 생각해낸 것이 바로 부여융이었습니다.
소정방의 손에 의해 의자왕과 함께 당에 끌려갔던
태자 부여융을 다시 데려와서 새 도독으로 앉히게 됩니다.
그것은 백제 유민들의 마음을 달래고,
당의 직접 통치를 원할하게 하기 위한 당의 책략이었습니다.
백제에 대한 새로운 통치 방식을 구사하면서
당은 이제 서서히 신라에게까지 압박을 가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신라와 당의 갈등의 골은 점점 깊어만 갑니다.
과연 이 두나라 사이엔 어떤 갈등들이 시작된 걸까요?"
웅진도독부가 있었던 충남 공주 취리산.
664년 이곳에서 웅진도독부의 주둔 장군이었던 유인원의 주도 아래
새로 웅진도독이 된 부여융과 신라 문무왕이 화해를 맹세하는 의식이 치뤄진다.
"차례에 의하면 여기 제단이라는 이야기가 나와요.
단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제물을 차려놓고, 백마의 목을 쳐서 그 피를 입에다 바르고서,
그것을 하늘에 고하고, 맨 처음엔 천신과 지신, 냇물, 이런 신께 제사를 올린 연후에,
맹약문을 낭독을 하고, 그것을 따로 금궤에다 보관을 해가지고, 그건 신라의 종묘에다 보관을 하고,
여기서 사용한 모든 제물들과 희생된 물건들은 그 북쪽에다 묻었다는 기록으로 봐서,
여기에선 무슨 거창한 행사를 했다는 것보다는
'백마의 회맹', 맹세라고 하는데 더 의미가 주어지지 않았을까, 저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 유원재 교수, 공주교육대학교 박물관장
<삼국사기>엔 당시 맹약의 내용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전 백제 태자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임명하여 조상들에게 제사를 드리게 하며
옛 땅을 보전하게 할 것이니 서로간에 묵은 감정을 버리고 우방이 되어야 할 것이며
함께 조칙을 받들고 영원히 당의 번방으로 복종해야 할 것이다."
- 당 황제가 직접 내렸다는 조서.
회맹시.
중국의 황제가 자신의 제후국을 소집해 충성을 맹세케 하고, 백마의 피를 입에 바르게 하는 의식이다.
이 의식에 참가하는 자체가 이미 그 나라에 속국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결국 신라로써는 백제와 마찬가지로 당의 속국임을 인정하는 치욕적인 맹세를 한 셈이다.
"웅진도독이었던 부여융을 그들이 백제의 왕들의 제사를 잇게 하고, 영토를 보존케 하여 신라와 대등한 관계에 놓고,
이 기미정책에 의해서 당에서 신라와 백제를 동등하게 통치하겠다고 하는 의도가
바로 이 '백마의 맹약'속에 이미 깔려있었던 것이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 유원재 교수, 공주교육대학교 박물관장
취리산 회맹 이전에도 이미 당은 신라를 자신의 속국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663년 당은 신라에 계림대도독부를 설치하고 문무왕을 계림주도독이라 임명했다.
신라에 계림대도독부를 둔다는 것은 신라도 당의 영역이라는 당의 본 의도가 나타난 것이다.
"신라에 계림대도독부를 설치하고 김법민으로 하여금 이를 통치하게 했다." - <자치통감, 663년조>
신라를 병탄하려는 당의 의도는 660년 백제를 공격할 당시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백제를 점령한 후에도 소정방 군대는 바로 철수하지 않았다.
내친 김에 신라마저 치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신라군은 이를 알아차리고 당군을 선제공격할 작전을 짤 정도로 위기상황이었다.
"아군에 백제옷을 입혀 먼저 당군을 공격한 후 반격할 때를 기다려 치면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 <삼국사기> 김유신전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의자왕과 대신과 병사 2만을 포로로 잡아서 당나라로 귀환했을 때,
당 고종이 소정방에게 묻기를 '이왕이면 왜 신라까지 정벌하지 않았느냐?' 묻습니다.
소정방이 말하기를, '신라의 왕은 어질고 또 백성을 대단히 사랑합니다.
백성은 또 왕에게 진심으로 충성하기 때문에, 적은 나라이지만 함부로 침공하지 못해서 그냥 왔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런 문답으로 보더라도 이미 침략의 의도를 가지고 출병했었음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 이종학, 서라벌 군사 연구소장
취리산 회맹 이후에도 당이 신라를 자극하는 사건이 계속 일어났다.
지금의 서울 근처인 한성주의 사령관들이 잇따라 반란을 일으킨다.
이들은 하나같이 당의 사주에 의해 백제와 결탁한 혐의로 처형을 당하게 된다.
"이 사람들은 김춘추, 즉 무열왕의 즉위에 대단히 반감을 가지고 있는 그런 세력이었고
삼국통일전쟁이 일어나게 되는 배경도 그런 이유였는데,
신라 귀족층 내부의 분열을 적절하게 이용을 해서 대당 분열을 조장해
대신라전쟁에 적절히 활용하려는 계획을 세웠기 때문에,
또 지리적으로 중앙에서 굉장히 멀리 떨어진 곳이기 때문에
한성주도독을 일임한 사령관들을 이용하기 용이했던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됩니다."
- 주보돈 교수, 경북대 역사학과
백제를 차지하고 신라마저 자신의 식민지로 만들려는 당의 음모.
삼국통일을 이루려던 신라는 오히려 자신마저 식민지로 전락할 위기에 처하게 됐다.
6. 소정방, 신라를 압박하기 위해 계립령을 넘었으나
김유신에게 당교에서 피살 당하다!~
"백제와 신라를 식민지로 차지하고, 고구려 공격의 전진기지로 삼으려 했던 당의 음모.
그 음모가 노골화되면서 신라의 불만은 점차 쌓여갑니다.
하지만 신라는 강대국 당나라에 전면전으로 맞서지 못하고 양국간의 긴장은 팽팽히 맞서게 됩니다.
그런 와중에 신라와 당은
마침내 나당동맹 십여 년만인 668년, 고구려 평양성을 함락시키게 됩니다.
고구려의 패망,
이것은 곧 당나라에겐 이제 신라 하나만 정복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당은 신라를 위협하기에 이르렀고, 이 시점에 맞물러 소정방이 피살됩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소정방이 피살된 당교가 문경에 있었다는 겁니다.
문경은 당시 전쟁지역이었던 고구려땅이 아닌 신라땅이었습니다.
왜 소정방군대는 전쟁지역도 아닌 신라 문경지역까지 내려와 있었던 걸까요?"
소정방이 피살되었다는 당교 부근.
소정방 군대가 주둔한 흔적이 마을 곳곳에 남아있다.
"저 동네, 이 동네, 동네이름도 다 뙤따리(당교리)입니다.
저 위에 밭은 뙤 밭(唐田)입니다.
여긴 당군이 있었다는 다방 터(唐兵터),
저 위에 모퉁이를 저놈들의 요새가 있는 곳이다, 뙤비탈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기는 전부 그 사람들 이야기고,
특히 당군이 몰살된 뒤의 지명을 보면 두산(頭山, 머리뫼), 머리를 쭉 끊어서 묻었다 해서 두산, 머리뫼고,
그리고 저기 시내 내려가는 곳이죠? 저길 머리내(頭川), 머리를 잘라 피가 내를 이루었다 해가지고 머리내,
두천, 두산, 뙤 밭, 뙤다리, 뙤 방, 전부 지금까지도 부리는 지명이지요."
- 신동철, 문경 향토사 연구소장
당시 싸움터도 아니었고 고구려와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왜 이곳에 당군이 주둔하고 있었을까?
당교 근처에 있는 문경의 계립령(하늘재, 문경읍 관음리)
문경과 충추를 잇는 고개길이다.
오늘날은 거의 이용하지 않지만 삼국시대엔 중요한 교통로였다.
"삼국사기에 보면,
신라 아달라왕 3년인 156년에
국가의 간선도로망으로써 계립령 길이 개통이 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은 신라가 한반도 중부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해
꼭 거쳐야만 했던 중요한 요충지가 되었던 길목이 됩니다.
이곳은 낙동강 상류지역하고 남한강 하류지역을 연결시켜주는,
문경지역과 충주를 연결시켜주는,
그런 요지에 자리잡고 있는 요충지가 되는 것입니다."
- 이도학 박사
신라는 당교, 계립령을 넘어야만 한강유역과 당항성, 평양에 이를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고구려에 머물던 당나라군이 신라로 오기 위해서는 계립령을 통과해야 했던 것이다.
삼국사기에서 소정방이 당교로 왔던 사건을 짐작해볼 수 있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신라가 백제땅을 공격하자 당 황제가 노해 사신 김양도, 김흠순을 옥에 가두고
결국 김양도는 옥사를 하는 사건이다.
"왕이 백제땅과 유민을 차지하자 당 황제가 노해서 사신들을 억류했다." - <삼국사기> 문무왕 10년조
"이처럼 당나라측에서 신라 사신을 감금하는 가혹한 행위를 했던 것은
당시 당나라가 의도했던 동방정책이라는 것이 신라의 정면 도전을 받아 위기에 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백제를 멸망시키고 백제땅에 당나라군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 땅을 신라가 점유하려고 시도를 했고,
그런 의미에서 신라와 당의 정면 충돌이랄까 이런 것이 빚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당나라측에서는 신라에 대한 압박을 가하기 위해
경상도 지역의 당교로 당군을 파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이도학 박사
고모산성 - 경북 문경시 마성면.
문경엔 신라성들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그만큼 이 지역은 신라에게 중요한 전쟁기지였다.
고모성도 신라 전쟁시기에 세워진 성이었다.
"저 뒤에 보이는 산이 주월산인데,
왼쪽에 보이는 계곡이 조선때 뚫은 조령이고,
오른쪽에 뚫은 것이 신라때 계립령입니다.
양쪽에 다 길이 있어서 문경에서 만나서
이쪽 왼쪽으로 따라가면 낙동강이 연결되고
오른쪽 고개로 넘어가면 포천을 지나 당교쪽으로 연결이 됩니다."
- 김규천, 문경사 향토사 연구위원
소정방은 당시로서는 신라로 가는 유일한 길목 계립령을 넘어 당교지역에 주둔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신라 본토 침공을 준비했을 것이다.
"당교라고 하는 것은 소백산맥 안에 들어서면 나타나는 그런 전략적인 지역이 되겠는데,
이곳에 당나라군이 들어왔다는 것은
신라 조정을 직접 압박하고 신라를 위기속에 몰아넣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러자 태대각간이었던 김유신이 직접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그런 상황에서 이 당교라고 하는 주변에서
신라군대가 당나라군대를 유인해서 괴멸시킨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 이도학 교수
김유신은 소정방을 살해하고 머리를 이 당교 밑에 묻었다.
아마 소정방의 머리를 밟고 다니게 하여 신라군의 전의를 복돋으며 삼국통일을 향해 약진해가지 않았을까?
7. 마침내 나. 당 전쟁에 돌입!,
매소성과 기벌포에서 당군 축출, 삼국을 통일하다!
"소정방이 피살될 즈음에 서해안에 대규모 함선들이 출현합니다.
당나라 장군 설인귀가 대규모 선단을 진주해놓고 신라 문무왕에게 서한을 보내게 됩니다.
'듣건데 왕은 사심이 발동하여 변경에 무력을 배치한다 하오니
신라를 위하여 중국이 군사를 일으키니 중국에 유익한 일은 적고 쓸떼없는 일은 많았습니다.
옛날에는 충의를 다하다가 지금은 역신이 되었으니 왕은 사유를 말하고 우리와의 관계를 명백히 말씀하시오'
이 서한을 보낸 설인귀의 당시 직책은 계림도행군대총관이었습니다.
계림도는 신라며, 행군이란 대외원정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설인귀는 신라 공격에 총사령관이었던 셈이었죠.
바로 그런 신분으로 이런 서한을 보냈다?
이것은 단순 외교문서가 아니라 당이 신라에게 보내는 최후통첩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에 문무왕은 다음과 같은 답서를 보냅니다.
'당태종은 내가 두 나라를 평정하면 백제땅을 전부 신라에게 주어 길이 편한토록 한다고 말했다.'
648년 당시 원조를 청하러 김춘추가 당에 건너갔을 때 당 태종과 동맹을 맺게 되는데
백제땅을 신라에게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신라와 당의 갈등은 당이 이 약속을 어기면서 비롯된 것입니다.
'일만명의 당 군사가 일년 동안 신라의 식량을 먹고 신라의 의복을 입었으니
모든 병사의 가죽과 뼈는 비록 중국 땅에서 태어났으나 피와 살은 신라의 것이었다.'
숙적이었던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당은 신라의 지원이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백제땅까지 주겠다고 약속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신라까지 삼키겠다고 하는 것에 문무왕은 토사구팽의 애길 들며 강하게 반발합니다.
'고구려와 백제가 평정되기전까지는 사냥개처럼 심부름을 시키더니
들짐승이 없어진 지금에는 도리어 삶아먹히는 사냥개의 박해를 당하고 있도다.'
대규모 함선을 주둔시키고 신라에게 항복을 할테냐, 전쟁을 할테냐,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신라가 전쟁을 각오하고 당에 거침없이 맞대응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신라는 7년간의 나당전쟁에 돌입합니다."
경주 남산 기슭에 있는 사천왕사터.
신라 문무왕때 세워진 큰 사찰이었다.
이곳에서 출토된 녹유사천왕상전.
사천왕은 불법수호신이며 동시에 나라를 지키는 호국신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사천왕사의 건립 동기를 짐작할 수 있다.
"당나라 군사가 대거 신라를 침공한다는 보고가 들어오면서 신라 조정에서는 대책회의에 고심을 했습니다.
그때 명랑이라는 스님을 모셔와서 대책을 여쭤보면 어떻겠냐는 의견이 나왔고,
명랑스님에게 물어본 결과, 이곳 '사천왕사 절을 지으면 국난을 헤쳐나갈 수 있다'고 하여
이 절을 짓게 되었다고 합니다."
- 박방룡,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관
사천왕의 힘을 빌어 국난을 이겨내려던 문무왕.
그러나 미처 사찰이 세워지기도 전에 신라는 당의 침략을 받는다.
당시 제대로 격식을 다 갖출 수 없었던 신라는
우선 비단으로 벽면을 치고, 풀로 신상을 만든 뒤,
사천왕전에 당군을 물리쳐달라는 염원을 빌었다.
급박했던 당시의 상황을 말해주는 것이다.
사천왕사 건립초기 불사 상상도.
사천왕사를 세움으로써 문무왕은 외세에 대항하여 국민들의 의지를 결집시켰던 것이다.
이와 함께 대대적인 군제개편이 이루어진다.
백제 유민을 군대 편입시키고, 각종 신무기들을 개발한 것이다.
"군사력에 징발하는 국민의 다양한 성분을 들 수 있습니다.
예컨데 왕경인을 중심으로 하는 중당,
백제인으로 구성된 백금서당 등 군사조직을 강화합니다.
또 신무기 개발에 전력투구를 하여,
말갈 기병에 대항하는 무기 장창에, 기병부대 장창감,
또 노(弩, 사거리1,000보 이상의 우수한 성능)의 성능을 개량해서 만든 노당 등,
신무기를 중심으로 한 군사조직이 이루어집니다.
이렇듯이 문무왕 후반기, 즉 670년대 군사적 대비는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광범위하고 심도깊은 그러한 개혁조치였다고 생각합니다."
- 이문기 교수, 경북대 역사교육학과
부여 인근에 있는 석성산성.
신라가 처음으로 당과 전투를 벌인 지역이다.
669년 전쟁 준비를 마친 문무왕은 직접 군사들을 이끌고 웅진도독부를 총공격한다.
그리고 이내 백제지역을 거의 점령한다.
나당전쟁 초반기의 양상은
신라가 웅진도독부를 직접 공격하면서
고구려땅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을 지원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을 적극 포섭하는데 주력한다.
계유명 삼존천불비상.
백제 유민들이 전쟁때 죽은 조상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이 비를 세운 사람들의 관직명에서
'대사(大舍), 소사(小舍)' 같은 신라 12, 13 관등이 발견된다.
당시의 신라가 백제인들에게 관직을 수여했음을 알 수 있다.
"673년에 백제 유민들을 포섭하기 위해서
본국에 있을 때의 관등을 기준으로 해가지고 전체적으로 신라 관등을 지급합니다.
이것은 당나라와의 전재에 대비하기 위해 백제 유민을 전체적으로 포섭한 게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 주보돈 교수
신라가 백제땅을 완전히 점령한 나당전쟁 후반기.
전세는 점차 임진강 일대로 옮겨온다.
당은 대규모 군대를 투입해 원정을 단행하게 되고,
신라는 백제, 고구려 유민들을 투입하여 대항하게 된다.
당. 말갈. 거란 연합군은 임진강을 건너 치열하게 공격했지만 격퇴당한다.
그리고 마침내 한탄강의 매소성에서 최후의 전투가 벌어진다.
경기도 연천군에 있는 대전리산성.
나당전쟁때 최고의 격전이 벌어진 매소성으로 추정되는 지역이다.
한탄강을 넘어 남하하려던 당군에게 매소성은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곳에서 뺏고 뺏기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것이다.
"대전리산성은 한탄강을 넘어오는 적군을 방어하는데 가장 유리한 지역입니다.
특히 이 지역은 추가령지구대로 회랑지대로 구성이 되었기 때문에
아주 험준한 지세를 이용할 수 있고 나즈막한 이와 같은 산세지만 단애를 최대한 이용을 하고
그 위에다가 굽은 능선위에 이와 같이 산성을 구축을 했던 것입니다."
- 강성문 교수, 육군사관학교 사학과
이근행이 이끄는 20여 만의 당군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고 퇴각한다.
이로써 한탄강을 넘어 남하하려던 당군의 의도는 좌절되고
한탄강 너머는 신라연합군의 주도권으로 넘어오게 된다.
"당시 당군은 이근행 휘하 당병과 말갈과 거란병이 중심이었습니다.
특히 말갈과 거란병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연합작전을 수행하는데 있어 비효율적인 부분이 있어 대단히 어려움을 컸고,
여기에 반해 신라군은 고구려의 부흥운동을 지원했고,
이제는 도리어 신라군이 주동이 되어 부흥운동을 흡수, 통합해서
그들까지도 지원을 받는 이러한 효율성을 잘 드러냈기 때문에 작전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입니다."
- 강성문 교수
지상전에 이어 나당전쟁 최후의 전장은 군산 장항 일대의 금강 하구 기벌포였다.
이곳에서 수십 차례의 공략끝에 서해바다를 공략하려던 당의 의도는 완전히 좌절된 것이다.
"전쟁을 오랫동안 하다보니까 당이라는 외세, 하나의 공동의 적을 만나게 되니까,
이제 과거의 대립된 감정보다는 민족의식에 호소하고,
그것을 보다 표면에 내세우는 감정이 크다보니까 강렬한 민족의식이 살아나고
이것이 투명된 게 삼국통일전쟁을 수행해낸 동력이 아닌가 이런 생각입니다."
- 신영식 교수, 이화여대 사학과
660년, 기벌포를 지나 이곳에 온 소정방.
그러나 그는 15년후 바로 이곳에서 신라, 백제, 고구려 연합군에 의해 패배를 당하게 된다.
그것은 당나라군대가 한반도에서 벌인 마지막 전쟁이었다.
"나당전쟁!
정말 대단한 전쟁이었습니다!
매소성 전투에 당나라가 투입한 병력은 말갈, 거란군까지 포함해서 20여 만명이었습니다.
이런 최강의 부대를 신라는 여지없이 깨트린 것입니다.
20여 만명 대군의 격파!
말 3만 880필 획득!
이 정도면 당나라가 다시는 이 땅에서 전투를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타격인 것입니다.
'기벌포에서도 20여 차례 해전끝에 당군 4천명의 머리를 베었다'
지상에서 뿐만 아니라 바다에서도 당군의 주력부대를 완전히 격멸해버린 것입니다.
결국 당은 이 기벌포전투를 끝으로
백제에 설치했던 웅진도독부와 고구려의 안동도호부를 만주로 철수시키게 됩니다.
애당초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고 했던 당의 야심은 수포로 돌아가게 됩니다.
신라가 거대국인 당과 싸워서 승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이 같이 힘을 합쳐 싸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신라를 도와서 당과 싸웠던 것일까요?
서로 적대국으로 싸워왔던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당과 맞서 싸우면서 바로 동료의식이 살아났던 것입니다.
이 전쟁을 거치면서 삼국간에는 '민족'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생겨나는데
바로 이 점이 삼국통일전쟁이 가진 역사적 의의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라의 소정방 피살은 민족 개념의 성립이라는 역사성의 발견에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겁니다."
- 유인촌의 역사스페셜(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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