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비사 - 서희는 거란 80만 대군을 어떻게 물리쳤나 |
잔혹하고 포악하게 사람을 죽이는 민족, 거란이 80만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입했다. 건국 이후 고려에 닥친 최대의 위기였다. 하지만 강동 6주와 선물까지 받아낸 서희의 담판. 거란은 서희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 내막에는 고려, 송, 거란 사이에 형성된 보이지 않는 외교적 고리들이 감추어져 있었다. |
1. 호전적인 전쟁부족, 거란 |
내몽고 자치구에 속한 중국의 작은 도시 임동. 이곳에 세워진 상경궁터는 그 거대한 규모로 발굴당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유적 가운데 큰 도로가 9개, 양쪽에는 하수도도 깔려 있었다. 기마 민족이었던 거란은 무기, 군체제, 마술 등에도 능한 호전적인 부족이었다. 정복왕조를 꿈꾸며 요녕에 세운 '백탑'은 지금도 이곳의 상징물이다. 소손녕은 이곳에서 제의를 치르고 고려를 향해 출병을 단행한다. 그 명분은 거란의 영토인 ‘압록강유역’을 고려가 침범했다는 구차한 트집에 불과한 것이었다. |
2. 거란의 친선을 거절한 고려 |
왕건 25년에 일어난 한 사건은 거란거병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당시 거란은 낙타 50필과 사신을 고려에 보내 친선을 요구한다. 그러나 왕건은 사신을 죽이고 낙타를 다리에 매달아 굶겨 죽인다. 이것은 전쟁을 불사한 조치였다. 고구려의 계승의식이 투철한 고려는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이후 끊임없이 거란을 적대시하고 북진정책을 고수했던 것이다. 이에 거란은 고려의 ‘버릇’을 고쳐놓기 위해 출병을 감행한다. |
3. 서희의 국제감각 |
건국 이후 최대의 위기에서 고려를 구해낸 사람은 서희이다. 그는 호족중심의 관료들을 견제하기 위한 신진세력으로 과거를 통해서 관직에 올랐다. 그리고 22세에 송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그곳에서 국방부 장관에 해당하는 ‘검교 병부상서’라는 벼슬까지 얻는다. 이런 경력은 그로 하여금 국제관계를 꿰뚫는 혜안을 키워 주었다. |
4. 안융진 전투와 거란의 고민 |
서희의 담판은 전세 변화와 관계가 있다. 거란 침입 한달 후 두 군대는 안융진 전투에서 교착상태에 빠진다. 고려군의 검차 앞에서 거란의 기마군이 맥없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또 속도전에 강하고, 광활한 대지에서의 싸움에 익숙한 거란의 특성이 산악 지형인 고려에서 통하지 않자 소손녕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서희는 담판을 걸어왔다. |
5. 거란이 태도를 달리한 이유 |
고려의 땅을 뺏으러 온 거란은 담판이후 오히려 땅을 내주고 선물까지 바친다. 단지 전장에서의 전세가 바뀐 것만으로 거란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을까. 거란이 태도를 달리한 또 다른 이유는 송나라와의 대립관계 때문이었다. 예전에도 거란이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할 때를 틈타 송은 거란을 공격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서희는 거란침입의 본래 목적이 고려와 친교하여 송을 견제하는데 있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
6. 거란과 친교 후 고려와 송의 관계 |
송과 단교한 뒤에도 고려는 송과 문화교류를 끊지 않았다. 당시는 거란, 송 그리고 고려와의 힘의 균형을 팽팽히 유지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송나라로서도 고려와의 관계를 끊을 수 없었다. 이처럼 국제관계 속에서 힘의 균형을 이용하여 실리외교를 편 서희의 담판은 강대국사이에서 고도의 외교술을 요구하는 요즘의 우리나라 상황에서도 귀감이 되는 사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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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희, 거란80만 대군 담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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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송악산에 있던 고려의 왕성은 궁성을 높여놓은 터였던 만월대만이 남아있다. 고려 태조는 만부교사건으로 거란을 적대시하고 발해 왕자 대광현을 왕씨성을 주며 받아들이면서 그 유민 약10만을 압록강변에 살게 한다.
당시 고려의 병력은 모두해야 30만이었다. 보통의 방법으로 잔인한 유목민을 맞서기는 어려웠다. 대광현의 아들인 대도수가 이끄는 발해유민들이 청천강 이남의 안융진 전투에서 수성전투가 아닌 성밖전투를 벌여 거란군을 퇴각시켰다. 그런데 거대 기마병의 속도전에서 퇴각으로 인한 정체는 적지에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바로 포위로 이어질 수 있고 이는 11월 고려가 퇴각하며 곡식을 태운 상황에서 군량미의 고갈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평원에서의 평지전에 익숙한 유목민의 군대에게 산악에서의 전투는 낯설고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군사적 상황보다 더 중요한 것은 송과 거란의 전쟁에서 고려가 어느 쪽을 편들 것인가였다.
고려와의 전쟁이 교착되면서 거란은 이전에도 타국과 전쟁 중에 송이 침공한 적이 있었기에 위기감을 느꼈고 이에 서희와의 협상에 응한다. 광종대 과거는 1회 7명 2회 10명 등 매우 소수여서 세력이 미미했다. 서희는 이 초기 과거출신세력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가장 큰 목적이 고려가 송과 연합하는 것을 막고 거란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란 점을 간파하여 거란과 국교를 맺을 것을 제안하며 강동6주를 획득하고 거란으로부터 많은 양의 선물까지 받아냈다. (당시 조정에서는 항복하자는 의견도 많았다. 과거출신이던 서희는 차관직으로 송에 가서 장관직의 관직을 얻은 것으로 보아 국제관계 및 외교에 재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때문에 당시의 이런 국제관계에 대한 이해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거란과 송이 형제지간을 맺고 송이 거란에 엄청난 양의 조공을 받친 것 등은 고려의 이런 입장 결정에 의한 것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송과 정치적 관계를 끊은 뒤에도 무역상에서 고려는 면세, 고려정(숙박시설) 등 특혜조치를 받았고 조공사도 국신사로 급이 상향되었다. 이 또한 위의 관계에 영향이다. (당시 조공을 하면 중국 왕조는 대국의 자존심으로 많게는 10배를 주기도 했다.) 이런, 실익을 중시하고 중화정통왕조도 필요에 따라 버리는 서희의 외교책은 성리학과 중화주의에 빠졌다고 평가되는 조선시대 선비들조차도 인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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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희는 어떻게 강동 6주를 얻었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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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993년, 거란의 장수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쳐들어왔다. 당시 거란은 만주와 중원을 장악한 대제국이었다. 소손녕은 고려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만일 강변까지 나와서 항므舊?않으면 섬멸할 것이니, 고려의 군신들은 우리의 군영 앞에 나와 항복하라.”
대군의 위세 놀란 조정은 거란에 즉각 항복해야 한다는 ‘투항론’과 평양 이북 땅을 거란에 넘겨주자는 ‘할지론’으로 의견이 분분했다. 패배주의가 번졌다. 그때 한 신하가 나서서 “도대체 거란이 ‘왜’ 침입했는지 이유도 알아보지 않고 항복부터 하자는 것은 말이 안된다”며 “우선 이유를 알아보는 것이 순서”라고 주장했다. 분위기가 일순 바뀌었다. 그 주장을 내놓은 이가 서희(942~998)다. 왕명을 받아 적진으로 찾아간 서희는 소손녕과 담판을 지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거란군을 철수시킨 데다 압록강 이남의 ‘강동 6주’를 새로 얻는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김기홍 부산대 교수(경제학)가 쓴 <서희, 협상을 말하다>는 우리 역사에 다른 사례를 찾기 힘든 성공적인 협상과정을 통해 오늘 우리의 협상문화를 살피는 책이다. 그는 서희의 협상력을 면밀히 분석하면 오늘의 엄중한 국제관계에서 국익을 최대로 지킬 수 있는 방책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서희가 적장 소손녕과 벌인 협상을 보면, 상대방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꿰뚫어보는 협상가의 자질이 유감없이 발휘됐음을 알 수 있다. 서희는 거란이 영토를 넓히려는 목적으로 침입을 한 것이 아니라, 고려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더는 거란에 적대하지 못하게 하려는 데 근본 의도가 있음을 알아보았다. 신생국 송을 치려는데 고려가 걸림돌이 되면 안 된다는 게 거란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소손녕이 서희를 만나 “거란과 국경을 맞대고 있으면서 왜 송과 교통하는가” 하고 물었을 때, 서희는 이렇게 답했다. “압록강 안팎은 본디 우리 땅인데 여진 때문에 거란과 왕래가 곤란하다. 육로를 터준다면 당연히 국교를 맺겠다.” 7일에 걸친 협상 끝에 소손녕은 서희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그 협상의 결과로 고려는 여진이 차지하고 있던 강동 6주를 얻고 거란과 국교를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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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희와 소손녕은 서로 무슨 말을 나눴을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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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료
소손녕 : "그대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 났소. 고구려 땅은 우리의 소유인데 그대 나라가 침식하였고 또 우리와 국경을 맞닿았는 데도 바다를 넘어 송을 섬기고 있소. 그 때문에 오늘의 출병이 있게 된 것이니 만일 땅을 떼어서 바치고 조빙(朝聘)을 닦으면 무사할 수 있을 것이오."
서희 : "아니오. 우리 나라는 곧 고구려의 땅이오. 그러므로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하였으니 만일 영토의 경계로 따진다면 그대 나라의 동경이 모두 우리 경내에 있거늘 어찌 침식이라 하리오. 그리고 압록강의 내외도 또한 우리 경내인데 지금 여진이 가로막고 있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심하오. …… 만일 여진을 내쫓고 우리 옛 땅을 돌려 보내어 도로를 통하게 하면 감히 조빙을 닦지 않으리오."
2. 분 석
서희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외교가였다. 그는 크게 불리한 처지에서 벌인 담판에서 오히려 영토를 넓힐 기회를 찾아냈다. 926년 발해를 병탄하자, 요는 접경하게 된 고려에 사신을 보냈다. 그러나 태조는 요가 화친할 나라가 못 된다고 여겼다.
발해와 맹약을 맺었다가 갑자기 쳐서 멸망시킨 나라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신 30명을 섬으로 귀양 보내고 그들이 선물로 가져온 낙타 50마리는 모두 굶겨 죽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후삼국을 통일하고 새 왕조를 세운 정치가가 이런 태도를 보였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나라들 사이의 관계를 개인들 사이의 관계에 비긴 것은 너무 비현실적이고, 사절을 귀양 보낸 것은 동서고금을 따질 것 없이 존중된 국제 관행을 어긴 것이며, 낙타들을 굶겨 죽인 것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다른 나라의 외교적 움직임에 그렇게 대응한 왕조에서 높은 외교적 식견을 가진 지도자들이 나올 리 없다. 그래서 요와의 충돌을 예견한 사람이 없었고, 요가 고려를 치려고 준비한다는 여진의 제보가 있었어도, 그것을 무시했다.
그러나 큰 군대가 쳐들어오자, 이내 땅을 떼어 주고 화친하려 했고 서둘러 칭신(稱臣)했다. 고려 초기에 나온 이런 예는 우리 역사에서 너무 자주 되풀이되었다.
서희가 어려운 처지에서 큰 외교적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국제 정세를 잘 읽었기 때문이다. 979년 송이 중국을 통일한 뒤, 요와 송은 줄곧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서희는 그래서 요가 고려의 정복에 큰 힘을 쏟기 어려우며 고려를 견제하는 것으로 만족하리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참고 자료
거란족 : 퉁구스 족과 몽고족의 혼혈로 요하 상류인 시라무렌 유역에 살던 유목 민족인데, 당말의 혼란기에 야율아보기가 부족을 통일하고 거란 제국을 건설하였으며(916), 나중에 요로 이름을 바꾸었다(947).
거란은 중원 진출 계획을 세워 발해를 공격하여 멸망시켰으나(926), 중원에서 송이 통일 제국을 수립하자 양국의 세력은 대립·투쟁하게 되었고, 중국 정벌 전 배후를 안정시킬 목적으로 고려 침공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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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희[徐熙, 942~998]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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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이천(利川). 자 염윤(廉允). 시호 장위(章威). 960년(광종 11) 문과에 급제, 광평원외랑(廣評員外郞)에 이어 내의시랑(內議侍郞)이 되었다. 982년 송나라에 가서 중단되었던 국교를 트고 검교병부상서(檢校兵部尙書)가 되어 귀국했다.
993년(성종 12) 거란(契丹)의 내침 때 중군사(中軍使)로 북계(北界)에 출전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조정에서는 항복하자는 안(案)과 서경(西京) 이북을 할양하고 강화하자는 안 중에서 후자를 택하기로 했으나 이에 극력 반대, 자진해서 국서를 가지고 가 적장 소손녕(蕭遜寧)과 담판을 벌였다.
이때 옛 고구려 땅은 거란 소유라는 적장의 주장에 반박, 국명으로 보아도 고려는 고구려의 후신임을 설득, 거란군을 철수시켰다. 994년 평장사(平章事)로 청천강 이북의 여진족(女眞族)을 축출, 장흥진(長興鎭) ·곽주(郭州) 등을 축성, 압록강 진취의 전략기지로 삼았다. 또 압록강 문제를 전담할 압강도구당사(鴨江渡勾當使)를 두게 했으며, 이듬해 안의진(安義鎭: 安州) 등지에 축성하고 선주(宣州: 宣川) 등지에 성보(城堡)를 쌓아 지금의 평북 일대의 국토를 완전히 회복했다.
태보내사령(太保內史令)을 지내고 신병으로 개국사(開國寺)에서 죽었다. 성종 묘정(廟庭)에 배향, 덕종 때 태사(太師)가 추증(追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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