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백년의 대공사 - 조선에 운하가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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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나마 운하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뱃길이다. 연간 2만 척의 배가 지나다니는 이 운하는 4만 명의 인부가 무려 10년에 걸쳐 완공한 대규모 시설이다. 그런데 한반도에도 파나마 운하에 버금가는 운하가 있었다. 파나마 운하보다 700여 년이나 앞선 12세기, 운하공사는 장장 5백년 동안 실패에 실패를 거듭한 끝에 안면도에서 성공을 이루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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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평리의 운하 흔적 |
태안반도 한 가운데의 마을 인평리에는 이상하게 패인 골이 있다. 그 사이로 흐르는 하천은 묘하게도 직선이어서 평범한 하천과 대조된다. 정밀측정 결과 그것은 거대한 인공 수로였음이 밝혀졌는데, 그것은 배가 다니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운하를 뜻하는 것이다. 고려 인종 때 시작하여 조선 현종에 이르는 500여년 간 11차례나 시도된 국가적 대공사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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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운하의 목적 |
세금을 서울로 운반하는 것을 조운이라 한다. 도로가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 조운은 주로 바다를 통해 이루어졌는데, 태안반도의 안흥량은 험한 항로로 인해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계속되는 엄청난 인명과 세곡의 손실을 막기위한 근본대책은 운하 건설로 이어진다. 인평리 운하는 700km 뱃길을 12km로 단축시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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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운하 - 과연 어떻게 만들었을까 |
일일 공사인원 5천 명에 달하는 이 작업은 매번 실패를 거듭했다. 공사는 썰물 때만 가능했는데, 그나마 파낸 개펄의 흙은 바닷물에 의해 계속적으로 막혔다. 또 바닥에는 거대한 암반층이 있었기 때문에 오직 정과 망치만을 가지고 시도했던 공사는 난항을 거듭하게 되고 결국 목표한 깊이까지 파지 못하게 된다. 그러던 것이 태종 때 새로운 돌파구가 생기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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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운하 공사의 분기점 |
태종 때 하륜은 현대의 운하 공법과 유사한 축제저수(제방을 쌓아 저수지를 만드는 방식)법을 거론한다. 즉 수면의 높이가 각각 다른 5개의 저수지를 만들고, 배가 계단식 저수지 내에서만 움직여 전재를 옮겨 싣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이것은 갑문, 수문이 없을 뿐이지 현대식 운하와 같은 발상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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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발상의 전환. 바다에서 강으로 |
운하는 갈수기에 저수지 물을 채우기 힘들고, 조수간만의 차로 배가 저수지까지 오기 힘든 단점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한 고민은 바다 대신 강에 생각이 미침으로써 해결되었다. 내륙 수운의 기능을 발전시킨 것이다. 이로써 남한강의 수운은 대폭 열리게 된다. 그러나 운하공사는 중단하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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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성공한 운하 안면도 |
안면도 일대를 옛사람들은 ‘쌀 썩은 여’라고 불렀다. 난파한 배에서 쏟아져 나온 쌀이 썩은 곳이라는 뜻이다. 17세기 초 이곳의 원래 이름은 안면곶이었다. 그러나 숙종 3년에 안면곶은 안면도로 표기된다. 곶이 섬으로 바뀐 것이다. 이 곳에서 공사가 가능했던 이유는 암반이 화강암이 아니라 깨기 쉬운 편마암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그 위에 안면대교가 두 육지를 잇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