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때 조선에 재팬 타운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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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식 술집과 다다미 가게가 있었고 수많은 일본인이 거리를 활보하던 곳. 5백년 전의 삼포(진해,부산, 울산)는 이국적인 모습의 외국인 촌이었다. 세종대왕 때 평화적 무역의 중심지를 선포하고 문을 연 재팬 타운, 삼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리고 왜 백년 후에 사라지게 된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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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재팬타운의 모습 |
제포에는 재덕산을 따라 긴 토성이 왜인촌과 조선인들이 살던 웅천 읍성을 가로지른다. 그 경계 너머에는 일본식 술집과 다다미 가게가 있고, 수많은 일본인이 거리를 활보했다. 이곳은 일본과 조선의 무역품을 사고파는 일종의 무역센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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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삼포 왜인의 정체 |
조선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대마도는 먹을 것이 부족한 곳이었다. 그래서 대마도사람들의 생계 조달은 자연스레 조선의 침략으로 이어졌다. 이런 상황의 해결을 위해 조선은 대마도를 정벌하고, 그들에게 제한적인 무역을 허락한다. 이렇게 상인의 모습으로 변신한 대마도의 왜구가 바로 삼포왜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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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무역항 삼포 |
무역항 삼포에는 구리, 면포, 관대에 들어갈 수우각(물소뿔)등이 오고 갔다. 삼포는 중국, 일본, 유구를 잇는 핵심적 중개 무역지에 자리잡으면서 그 영향력이 날로 커져 갔다. 심지어 이 곳의 통상수위를 억제하기 위하여 세종은 계해약조를 만들기까지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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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조선인과 왜인들의 관계 |
삼포의 조선인들과 왜인들은 잦은 왕래 속에 친분을 쌓아갔다. 하지만 종종 문화의 이질감으로 인해서 충돌을 빚기도 했다. 이렇듯 서로에 대한 배려와 갈등 속에서 그들만의 삼포 문화를 만들어 갔다. 그것은 조선이 한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경험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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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조선의 삼포경영 |
제포는 거제도 조선수군이 진을 치고 있어서 완전한 통제가 가능한 곳이다. 염포는 현재 울산 제 3부두자리로 영청과 수군진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부산포는 현 동래구 부근으로 역시 수군진에 의해 통제되었다. 즉 삼포는 내륙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으면서 군사적으로 완전히 통제되는 곳에 세워진 것이다. 또 한편으로 조선은 이곳 왜인들에게 무반의 지위를 줌으로써 회유책을 병행하여 삼포를 경영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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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삼포왜란 가는 길 |
이로써 왜구는 사실상 사라지고, 삼포는 백년 간의 평화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갈수록 폐해가 부각되고 반정으로 등극한 중종은 사회정화운동의 일환으로 삼포 억제책을 사용한다. 이는 결국 1510년 삼포왜란을 유발하게 된다. 항거 왜인들이 대마도와 연결하여 난을 일으킨 것이다. 삼포왜란은 보름 만에 진압되고, 왜인촌은 폐쇄된다. 조선 땅에 세워졌던 최초의 재팬타운은 이렇게 해서 그 짧은 역사를 마감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