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스페셜100선

48 66세 신랑, 15세 신부 - 영조의 결혼

사랑의고향길 2013. 9. 28. 19:04

66세 신랑, 15세 신부 - 영조의 결혼 
240년 전에 집필 된 ‘가례도감의궤’는 궁궐에서 진행된 66세 왕과 16세 소녀의 결혼식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가례도감의궤’는 왕이나 왕자, 공주의 가례, 즉 결혼을 기록한 것으로 오늘날로 말하면 일종의 결혼 보고서이다. 우리는 당시 영조의 결혼 장면을 통해 왕가의 결혼식 모습과 혼례의 전 과정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1. 왕과 왕비의 의장행렬
‘반차도’에 의하면 결혼식은 참가인원 1188명에 말이 391마리나 된 국가적 축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퍼레이드는 창경궁, 홍화문, 돈화문을 아우르는 방대한 영역에 걸쳐 시행되었다. 66세나 되는 영조는 웃어른이 없어 스스로 결혼식을 처리하는 가운데 15세 소녀를 왕비로 맞았다.
2. 새 왕비를 맞이한 영조
왕이 왕비를 맞이하는 이유는 ‘교명문’에 적혀있다. 이에 따르면 첫 왕비가 승하했고 영조 나이 66세에 계비를 맞기 위함임을 알 수 있다. 영조가 남아있던 후궁 중에서 왕비를 뽑지않은 이유는 숙종때 후궁인 장희빈이 왕비를 모함해 왕비자리에 오른 폐해를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3. 왕비의 자격요건
우선 새 왕비를 뽑기 위해 전국에 금혼령이 내려진다. 이후 후보자들은 왕실에 참가신청서를 내는데 그것을 단자라 하였다. 단자에는 규수의 제반 사항이 자세히 적혀있다. 왕비 후보자는 그 중에서도 특히 가문이 중요한 요건이었다.
4. 간택의 기준
왕실의 웃어른에 의해 이루어지는 간택의 경우 삼간택이 필수였다. 모두 가문이 명문인 바에야 간택의 결정적인 요소는 아름다움, 자태, 언행, 교양 이었다. 당시에도 아름다움은 필수적이어서 인상이 견실하고 건강해 보이는 미인이 선호되었다. 통상적으로 조선시대 미인으로 알고있는 풍속화의 둥글둥글하고 귀여운 얼굴의 미인은 서민형이다. 권력층에서는 이를 천한 얼굴로 여겼다.
5. 영조가 간택을 한 이유
최후로 올라간 후보 3인은 가문이 명문이지만 부모의 지위가 높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영조가 삼간택을 거치면서 정순왕후를 직접 고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선택에는 신분 콤플렉스와 당파싸움의 폐해를 뼈저리게 경험한 배경이 있었다. 그런 이유로 영조는 충청도 지역의 학통을 잇는 집안의 정순왕후를 선택했다.
6. 정순왕후는 어떻게 살았나
영조의 치밀한 정치적인 계산 속에서 왕비로 선택된 경주 김씨 김한구의 딸 정순왕후. 그녀는 간택 되자마자 원삼에 족두리 차림으로 별궁에 들어가게 된다. 이때부터 그녀의 인생은 180도로 달라져 왕비로서의 생을 살게된다. 하지만 그 삶이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아들인 사도세자나 며느리 혜경궁 홍씨도 그녀보다 10살이나 많았고, 사이 또한 좋지 않았다. 영조는 결혼 16년만에 승하했고 홀로 남은 정순왕후는 권력에 집착했다. 나이 어린 순조 대신 수렴청정을 하게 된 정순왕후는 이후 죽을 때까지 고집스러운 섭정을 계속했다.
7. 영조의 결혼 비용
\'가례도감의궤\'에는 결혼식에 사용된 소품목록도 상세하게 적혀있다. 영조는 국가 재정에 매우 밝아 국혼정례를 만들어 혼례 비용을 줄이도록 한 임금이었다. 그런 까닭에 영조의 결혼에는 다른 임금들의 결혼과는 다른 특징이 있었다. 수리소가 그것이다. 이전의 왕들이 물품을 새로 만들어 사용했다면 영조는 옛 것을 고쳐서 사용한 것이다. 외화가 부족했던 당시 영조는 스스로 검약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자신의 통치철학을 실천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