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임나일본부의 정체 |
일본의 역사왜곡은 한일관계의 큰 걸림돌이다. 그 중의 하나, 일본은 광개토대왕비문과 일본서기를 근거로 일본이 4세기부터 6세기까지 200년간 고대한국을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했다. 임나, 즉 가야지역에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와 같은 지배 기관인 ‘일본부’를 두었다는 것이다. |
1. 광개토대왕비문 조작시비 |
중국 길림성 집안시에 광개토대왕비가 있다. 여기에 쓰인 1800자는 현존하는 우리 역사기록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일본은 일부 구절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했고, 정인보는 그 반론을 펴기도 했다. 그런데 1972년, 한 재일사학자에 의해 광개토대왕비문이 일본군인에 의해 변조됐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이후 각 국의 학자들이 재반론을 거듭하면서 아직까지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
2. 거듭되는 논란 |
문제가 되는 비문 구절 바로 다음에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했다는 내용이 이어진다. 또 당시 고구려가 신라를 자신의 세력권에 편입시키고 백제를 복속 시켰음을 입증하는 증거들이 발견되었다. 일본학자들의 주장대로라면 왜의 속민이 되었어야 할 백제가 다시 고구려에 공격 당한 것이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광개토대왕비는 임나일본부설이 아니라 고구려 정복전쟁의 역사와 통일의지를 보여주는 증거로서의 가치를 지닌 비인 것이다. |
3. 임나일본부와 안라국 |
일본서기가 주장하는 임나일본부 또는 안라일본부는 경남 함안에 있었던 것으로 주장되는데, 이곳 안라국은 해상교역의 요충지였다. 얼마 전 이곳에서는 국내최초로 철제마갑이 출토되었다. 안라국의 위력이 상당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나 임나일본부의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오히려 700년을 이어온 안라국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었을 뿐이다. |
4. 일본서기에 나타난 임나일본부 |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는 임나일본부의 주석으로 ‘어사지’ ‘미코토모치’라는 말을 달고 있다. 이는 일반적으로 사신을 일컫는 말이다. 백제와 신라의 공격에 시달리던 안라국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일본에 이주한 동족들의 도움을 구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때 다시 가야 땅으로 온 이들을 일본서기는 사신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
5. 고대일본의 안라국에 대한 관심 |
가야는 각종 철기들이 발전한 나라다. 고대국가를 형성하고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철은 필수적인 요소였고 또 안라국은 해상교역의 요충지까지 끼고있는 최적의 중개무역 기지였다. 일본은 그래서 안라국에 관심이 많았다. 가야는 철과 선진문물을 일본으로 수출하여 일본의 고대국가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
6. 허구의 역사 |
임나일본부의 정체를 추적하는 작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철과 선진문물을 원했던 일본과 고대 한국간에 이루어진 역사다. 역사 왜곡을 서슴지 않는 일부 일본인들이 집착하는 임나일본부설. 그 왜곡된 역사는 언덕을 넘어선 수레의 운명이다. |
<< 임나일본부설 >>
일본은 4세기부터 6세기까지 200년간 왜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허구적인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억지논리요 비역사적인 일본의 치기에 불과하다. 최근 일본에서 일어난 구석기 유물 발굴 조작사건을 보더라도 일본이 얼마나 제 역사를 키우려고 안달했는지 짐작이 간다.
일본은 지난 92년에 70만년 전의 구석기 유물이 발굴됐다고 발표한바 있는데, 2000년 11월 마이니찌(每日) 신문은 이것이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라는 일본 역사연구가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이로 인하여 일본 역사는 57만년이나 후퇴하는 아이러니를 빚어냈다.
광개토대왕 비문까지 왜곡하는 일본
일본의 고대사 왜곡은 비단 구석기시대 유물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것은 광개토대왕비문에 대한 변조 의혹이다. 광개토대왕비는 서기 414년 장수왕이 아버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 6.39미터 높이의 이 거대한 비에는 1775자가 쓰여져 있는데, 삼국사기보다 무려 700여 년이 앞서는 석책(石冊)이다.
일본학자들은 광개토대왕비의 일부를 왜곡하여 고대일본이 고대한국을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증거라고 주장해 왔다. 즉 4세기부터 6세기 약 200년간 '임나(任那)' 즉 가야지역에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와 같은 지배기관인 '일본부'까지 두었다는 것이다.
광개토대왕 비문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신묘년(辛卯年) 부분은 而倭以辛卯年來, 渡□破百殘 □□新羅 而爲臣民라고 쓰여있다고 주장하는 글이다. 일본학자들은 이것을 서기 391년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임나(가라),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여 당시 왜의 한반도 남부지배를 확인해주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고구려멸망이후 묻혀있던 광개토대왕비가 새롭게 발견된 것은 청조 말의 농부에 의해서 였고, 1884년 일본 육군참모본부 중위 사카와 가케노부(酒勾景信)가 현지에 파견되어 조사를 해갔다. 사카와는 일본이 파견한 스파이로서 그는 탁본이 아닌, 비석에 종이를 대고 글자를 그린 일명 쌍구가묵본(雙勾加墨本)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로부터 5년 뒤, 일본참모본부는 국수주의 기관지인 회여록(會餘錄)에 비문의 내용을 공개했다. 이때부터 광개토대왕비문은 임나일본부설의 토대가 됐다.
일제의 조선침략 명분으로 사용된 임나일본부설은 해방 후 더욱 확산됐다. 그것에 앞장선 사람이 바로 쓰에마치(末松保和)였다. 고대일본이 군사를 보내 임나일본부라는 통치기관을 만들고 고대한국의 남부를 직접 지배하고, 신라와 백제까지 간접 지배하면서 고구려와 대치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위당 정인보(鄭寅普)가 최초로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였다.
일본은 당시 광개토대왕비문의 신묘년조를 고구려를 주어로 삼아, '왜가 신묘년에 오니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와 왜를 격파했다. 백제가 신라를 쳐서 신민으로 삼았다'는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1972년, 재일사학자 이진희씨는 일본이 광개토대왕비문을 변조했다는 주장을 제기함으로써 당시 한일 역사학계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이진희 씨는 광개토대왕비를 17,18년 동안 철저히 조사한 결과 사카와가 가지고온 것과 이후에 발견된 탁본들을 비교했고, 비문이 변조됐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냈다.
우선 사카와가 가지고 온 것 이후에 만들어진 탁본들의 글씨체가 일정하지 않다는 점, 게다가 없던 글자들이 사카와가 가지고 온 것 이후의 탁본들에 나타난다. 소위 원석탁본이라는 수곡탁본(水谷拓本)도 비문변조설을 뒷받침했다. 수곡탁본에는 '渡海破'라는 글자가 없었다. 이것은 사카와가 비문을 변조했다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이진희씨의 주장에 의하면 사카와가 비문을 위조했고, 그후 일본참모본부가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석회를 발랐다는 것이다. 이씨는 비문변조설 발표이후, 수 차례 현장답사를 통해 비문에 칠해진 석회의 흔적을 직접 확인했다. 석회 흔적은 지난 99년 이루어진 적외선 촬영에서 더욱 확실하게 드러났다.
한편 1985년 중국학자 王健群은 일본에서 열린 심포지엄에서 광개토대왕비문은 위조되지 않았다고 주장하여 일본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비문변조의 의혹은 국내학자들에 의해 계속 제기됐다. 이형구교수는 사카와의 것과 이후에 발견된 탁본들을 비교해 변조된 글자들을 새롭게 찾아냈다. 그는 신묘년조 첫글자 倭는 원래 後자이고, 來渡海는 不貢因이었으며, 지워진 부분의 글자는 倭寇新이라고 했다. 그 결과 '그후 신묘년부터 조공을 바치지 않았으므로 고구려가 백제·왜구·신라를 파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로 해석했다.
서영수교수도 변조설을 주장했다. 그는 신묘년조의 來자를 未자로, 海자를 王자로 읽었고.
지워진 부분의 글자가 倭降이라고 했다. 그리고 '백제 신라는 屬民임에도 불구하고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대왕이 백제와 그 동조자인 왜를 공파하고 신라는 복속시켜 신민으로 삼았다'는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비문이 재발견된 지 1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신묘년조에 대한 비밀을 담고 있는 광개토대왕비가 아직도 한일역사학계 최대의 논란에 휩싸여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묘년조 기사의 의문을 풀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永樂 6년조 비문을 주목하라
논란이 되고 있는 신묘년조 바로 뒤에 이어지는 부분을 보면 '영락6년, 광개토대왕이 몸소 수군을 거느리고 잔국, 즉 백제를 물리쳤다(而六年丙申, 王弓率水軍, 討伐殘國)'고 되어 있다. 일본학자들의 주장대로라면 백제는 이미 신묘년에 왜의 속민이 됐다. 그런데 신묘년조 바로 뒷 문장에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했다는 앞뒤가 맞지 않는 내용이 이어진다.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공격할 당시 고구려의 세력은 막강했다. 84만㎢의 면적에 350만 인구, 정규군은 30만 명에 달했다. 대부분의 군대는 궁수(弓手). 도끼를 든 부월수(斧鉞手), 창과 방패를 든 창수(槍手)였지만 10만 명은 갑옷으로 무장한 기마전사(騎馬戰士)였다.
이렇게 강력한 군대를 거느린 광개토대왕은 서기 396년, 수군을 이끌고 경기도 남양만에 상륙해 백제를 공격하여 수많은 성들을 점령하게 된다. 경기만 남부 남양만으로 상륙한 고구려군은 내륙 깊숙이 전진하여 수원·평택·용인·광주를 통하여 백제 수도인 한성의 후미를 급습했다. 그 당시 공격 점령한 58성의 분포도를 보면 서해안 지역 특히 남양만 지역이 매우 중요하였다.
비문의 내용대로 광개토대왕은 친히 수군을 이끌고 서해안을 지나 한강을 건너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공격하였고, 고구려의 승리로 백제왕은 광개토대왕에게 재물을 바치며 영원히 신하가 될 것을 맹세한다. 비문에 따르면 백제를 복속시킨 것은 고구려였던 것이다.
서기 371년 백제 근초고왕은 3만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쳐들어와 평양성에서 광개토대왕의 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을 죽였다. 이에 따라 광개토대왕의 입장에서 보면 할아버지를 죽인 백제는 가장 중요한 적이었다. 자기 주적을 멸칭(蔑稱)해서 백잔(百殘)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백제의 존재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상태가 광개토대왕비에 나오고 있는 것이다. 신라도 이미 고구려의 세력권에 편입돼 있었다. 낙랑군과 대방군을 몰아내고 백제의 북방영토 대부분을 점령한 광개토대왕이 남쪽으로 대대적인 정벌을 시작한 것이다. 경주에서 발견된 왕릉급 고분인 호우총이 그 사실을 보여준다.
호우총은 1946년 우리학자들이 최초로 발굴한 고분이었다. 청동 항아리 호우는 왕릉급 고분임을 알 수 있는 금동 파편들과 함께 출토됐는데, 항아리 바닥엔 광개토대왕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신라가 고구려의 영향을 받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고로 정복전쟁은 영토확장이 아니라 고구려의 천하관(天下觀) 즉, 주변을 정복해 식민지로 삼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를 중심에 두고 주변을 움직이게 하는 것을 실현하고자 함이었다.
고구려의 영향력은 한반도 남부까지 미치고 있었다. 광개토대왕 즉위 9년, 신라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왜인들이 국경에 가득 찼고, 성지를 파괴하고 있다고 보고하였고, 이에 따라 광개토대왕은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대대적인 신라구원 작전을 벌였다. 고구려군은 신라의 성과 주변에 있던 왜는 물론 도망가는 왜를 가야지역까지 추격해 물리친다. 신라를 공격한 왜는 대규모 군사집단이나 통일된 세력이 아니었다. 광개토대왕이 왜를 물리쳤다는 기록은 비문의 곳곳에서 확인된다. 왜는 때때로 고구려의 질서를 위협하는 세력에 이용당하는 부수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왜는 고구려에 있어 주 정복대상이 아니라 백제 신라 가야를 정복하는 과정에 등장하는 부수적인 존재로서 왜는 당시 고정적인 거점이 있거나 장기적으로 주둔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비문에 왜는 퇴(退), 추(追), 멸(滅)의 대상이었다. 이처럼 광개토대왕비는 임나일본부설이 아니라 고구려 정복전쟁의 역사와 통일의지를 보여주는 증거인 것이다.
광개토대왕비문에 등장하는 고대일본은 왜, 왜인, 왜구, 왜적 등 각각 다르게 표현돼 있다. 이것은 당시 왜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할 힘을 지닌 대규모 군사집단이나 통일된 세력이 아니었다는 것을 뜻한다. 또 비문에 나타난 왜에 관한 기록은 모두 광개토대왕이 이들을 물리쳤다는 내용이다. 결국 광개토대왕비문은 광개토대왕 남정(南征)의 역사를 기록해놓은 증거물인 것이다.
任那伽倻의 실체는 무엇인가
광개토대왕의 남정(南征)으로 비문에 기록돼 있는 임나가야는 김해를 중심으로 하는 금관가야의 세력이 약해지고, 고령을 중심으로 하는 고령가야와 함안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아라가야 혹은 안라국이 5세기이후 가야지역의 새로운 맹주국으로 떠오르게 되면서 등장하였다.
임나일본부는 <일본서기>에서만 확인되고 있는데 광개토대왕의 정벌이 있은 지 150여년 후인 541년부터 10여년 간의 기록에만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어 임나일본부는 이 시기 10여년 동안만 존재한 것이 된다. 그런데 일본서기에는 임나일본부외에 安羅日本府라는 용어도 보이는데, 임나일본부와 안라일본부가 함께 쓰였던 것을 증명한다. 안라일본부의 安羅는 경남 함안지역에 존재했던 안라국 혹은 아라국을 말한다. 함안군청 역사지에 따르면 삼한시대에 함안은 변진안야국(弁辰安倻國)이었고, 가야시대에는 6가야 중 아라가야(阿羅伽倻)였다. 고로 안야국이나 아라국을 안라국으로 기록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임나일본부와 안라국은 무슨 연관이 있을까. 안라국이 있었던 경남 함안에는 청동기시대 무덤인 160여 기의 고인돌과 고분들이 있다. 안라국이 일찍부터 세력을 형성했음을 보여주는 것들이다.
안라국은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곳에 세워졌다. 두 강을 통해 김해는 물론 내륙지방까지 연결된다. 동쪽으로 뻗은 산을 따라가면 마산, 창원에 이르고, 남쪽으로 난 계곡을 따라가면 남해안과 만난다. 안라국은 해상교역의 요충지에 있었다. 마산만과 진동만은 안라국 성장의 토대가 됐다. 안라국의 존재가 역사에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각종 기록이 증명하고 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안야국으로 나온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함안이 아시랑국(阿尸郞國)으로 표현돼 있고, <삼국유사>에는 아라가야(阿羅伽倻)로 등장한다. 안라국은 4세기 고구려 남정 이후 성장해 5세기 가야지역을 대표하는 맹주국으로 떠올랐다.
그 시기 만들어진 함안 고분군은 50여기에 달한다. 신라왕릉 급 무덤과도 맞먹는 거대한 무덤들은 안라국의 세력을 짐작케 한다. 함안의 안라국은 이미 3세기경에도 <위지 동이전>에 김해금관가야, 구야국에 못지 않은 양대 세력으로 나온다. 고고학적 자료로 김해보다는 약간 못한 세력으로 보이지만 다른 가야지역에 비해서는 이미 3세기에 앞선 국가였다. 당시 전기 가야연맹시기에 맹주국이었던 김해 금관가야가 4세기말에 신라와 고구려의 연합세력에 의해 갑자기 멸망당하는 바람에 함안은 어부지리를 얻어 5세기이후 다른 지역에 앞장서 발전하는 계기를 얻었다.
지난 92년, 함안의 말이산 고분군 근처 한 아파트 공사 증에 발견된 무덤에서 수많은 가야토기들과 함께 철제마갑, 즉 철로 만든 말의 갑옷이 출토되었다. 국내에서 처음 확인된 이 거대한 철제 마갑은 안라국이 상당히 강력한 세력이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안라국의 위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토기들이다. 다른 지역과 구분되는 함안토기들은
시기별로 다양하고 독창적이다. 안라국이 오랫동안 독자적인 문화를 유지했던 때문이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화염무늬토기로서 아랫부분에 불꽃문양의 구멍이 뚫려있는 이 토기는 5세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데 함안은 물론 마산, 창원 등지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김해지역 경주지역과 구분되는 독자적인 형태의 함안양식 토기문화는 4세기부터 아라가야가 멸망하는 6세기까지 지속적으로 연결선상에서 변화되고 있다.
임나일본부설이 제기된 후 함안은 물론 김해, 고령, 부산 등 가야지역 전체에서 수많은 발굴작업이 이뤄졌지만, 어디에서도 임나일본부의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가야지역이 백제와 신라에 흡수되는 6세기까지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때문이다.
실제로 4세기중엽부터 6세기까지 일본이 부(府)를 두고 임나가야를 통치했다고 한다면 이 지역에는 많은 일본무덤들이 있어야 한다. 이 시기 일본 무덤은 전방후원분(前方後園墳)인데 가야의 중심이 되는 김해의 대성동 고분이나 양동리 고분에서 전방후원분은 찾을 수 없다.
또 일본의 유물들이 200년간 나와야 하는데, 나오지 않고 있다. 오히려 가야지역의 기원전 1세기부터 6세기 중엽까지 자체 발전한 가야적인 성격의 유물들이 700년 동안 지속되고 있다. 이것은 가야지역이 왜뿐 아니라 신라와 백제로부터도 독립한 독립된 정치체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임나일본부가 있었다는 함안의 안라국지역에는 700년을 이어온 안라국의 역사가 살아 숨쉬고 있다.
기원전 1세기에 성립된 안라국은 이처럼 700년간 독립왕국으로 존재했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대형고분이다. 그 고분들은 수직으로 구덩이를 파고 그 주변을 돌로 쌓는 수혈식 석곽묘로 5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규모는 물론 부장품들도 대단하다.
그러나 당시 일본의 고분형식은 앞은 방형이고, 뒤는 원형인 전방후원분이었다. 함안의 고분들과는 외형이 전혀 다르다. 게다가 함안지역에서 이같은 전방후원분은 한 기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일본은 7세기 이후에 등장한 나라 日本이라는 말은 사실 7세기 이후에야 비로소 일본과 중국의 역사서에 등장한다. 그렇다면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일본부의 정체는 무엇일까.
일본서기 흠명기 15년 2월조에 보면 놀라운 사실이 나온다. 재안라제왜신(在安羅諸倭臣). 즉 안라에 있는 왜신들이라는 뜻이다. 임나일본부가 '안라에 있는 왜의 사신'으로 표현돼 있는 것이다. 도대체 왜 일본서기는 임나일본부를 사신으로 표현해 놓은 것일까.
일본 최고의 역사서인 <일본서기> 필사본(에도시대 1669년 출판. 전15권)에 보면 임나일본부의 바탕이 된 <일본서기>는 720년에 편찬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 일본서기 필사본에 임나일본부관련 내용은 541년부터 554년 기록에만 나타난다. 그런데 이 필사본에는 일본부의 부(府)자 옆에 어사지(御使持)라는 주석이 달려있다. 어사지는 일반적으로 사신을 의미한다. 군사통치기관이라고 주장하는 임나일본부가 사신으로 기록돼있는 것이다. 또 다른 장에는 일본부 옆에 야마토정권의 미코토모치라는 주석이 쓰여있다. 미코토모치 역시 왕의 명령을 전달하는 일회성 사신이었다. 이런 사실에 주목해서 임나일본부가 군사통치기관이 아니라 안라국에 파견된 사신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일본내 가야사연구가인 스즈키교수 역시 임나일본부가 외교사신이라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임나일본부의 실체는 인간집단이다. 정치조직이나 야마토정권이 임나를 지배하는 조직은 아닐 것이다. 지금 식으로 보면 외교사절, 혹은 외교활동을 한 사람들'이다.
그러면 안라국은 왜 사신이 필요했을까. <일본서기>에 임나일본부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그 시기, 백제와 신라는 가야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세력다툼을 벌였다. 그 속에서 안라국은 백제 신라를 견제하고, 안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이들을 적절히 이용했던 것이다.
신라가 낙동강을 건너서 서진 해오고, 529년까지 현재의 하동 대사지역을 점령한 백제가 섬진강을 건너 서쪽에서 안라국을 향해 동진해 올 때 안라국은 독립을 위한 노력이 아주 필요한 시기였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안라국의 독립에 이용됐던 사신은 총 7명이었다. 그중 吉備臣과 河內直이라는 인물은 가야지역에서 일본열도로 이주한 사람으로 기록돼 있다.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이주한 사람들은 대개 본래 일본 토착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구별하기 위해서 자신들이 이주한 땅의 이름을 쓴다. 吉備에 정착한 사람들은 길비를 성으로, 河內(지금의 오사카)에 정착한 사람들은 하내를 성으로 삼는다. 따라서 길비신 하내직은 한반도 지역에서 이주한 사람이 분명하고 이들이 씨족집단을 구성하여 길비씨 하내씨가 된다. 그 외에 가야인들의 이주 흔적은 일본 곳곳에서 확인된다. 오사카 후지데라시에 위치한 가라구니신사는 신국신사 또는 한국신사라 불리는데, 6세기경 가야인들에 의해 세워졌다. 4세기경에는 많은 가야인들이 이곳에 살기 시작했던 것이다.
4세기후반부터 6세기 무렵까지 왜와 가야국은 교류가 상당히 활발했다. 그래서 그때 가야인들이 오사카쪽으로 많이 이주해왔다. 6세기말경 가야가 멸망하자 가야사람들은 없어진 자신의 고향을 생각하면서 조상을 모신 것에서 이 신사가 생긴 것이라는 설이 있다. 이렇게 일본열도에 정착한 가야의 후손들이 안라국에 사신으로 보내진 것이었다. 그런만큼 이들은 가야지역을 위해 활동했다. 일본부는 안라국왕의 통제 하에 있었던 것이다.
일본부는 왜인계통의 인물이기는 하지만 백제를 위해 일하거나 왜에 대한 대표성도 없는 인물이었고, 오히려 가야전체의 독립을 위해 일하고 있었고. 신분상으로도 마치 그들이 함안 안라왕을 위해 일하는 것으로 보이고 있다.
안라국의 위상을 보여주는 함안 성산산성에서 6세기 후반에 안라국은 고대일본의 사신들과 백제, 신라의 사신들을 불러놓고 국제회의를 개최하였다. 그것은 신라와 백제로부터 가야지역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한 안라국의 외교전략이었다.
안라국왕의 위상은 왜의 사신을 조종하고 가야 여러 나라 왕이나 사신들을 이 지역에 불러모으거나 함께 백제의 사비(부여)에 가 외교활동을 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즉 가야를 통솔한 안라국은 주변세력을 적절히 이용할 줄 알았던 것이다.
이처럼 임나일본부는 고대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안라국이 신라와 백제의 틈바구니 속에서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하나의 방패막이로 사용한 왜의 사신들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들 왜 사신들은 철저하게 안라국왕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그러면 고대일본은 왜 사신까지 파견해 안라국의 독립을 도왔던 것일까.
철의 왕국 안라국
안라국의 위상을 보여주는 마갑총과 거대한 철제 말갑옷은 당시 안라국이 철이 풍부하고 문화가 상당히 발달돼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철은 고대국가를 형성하고 강력한 왕권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였다.
안라국은 이처럼 철자원이 풍부했을 뿐 아니라 마산항과 진동항이라는 해상교역의 요충지까지 끼고 있는 최적의 중개무역기지였다. 안라국에 대한 고대 일본의 관심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철은 안라국의 중요한 자원이었다. 안라국이 있었던 함안지역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손꼽히는 광산촌이었다. 지금도 폐광근처에서는 원석에 가까운 철이 쉽게 눈에 띈다. 곳곳에 널려있는 철지꺼기들도 이곳이 풍부한 철 생산지였음을 보여준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보면 함안을 비롯한 가야지역의 철은 옛부터 유명했다. 3세기경의 기록에는 '가야지역에서는 철이 생산되는데 한, 예, 왜인들이 모두 와서 사간다. 낙랑과 대방의 두 군에 공급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가야의 철이 수출된 것이다.
풍부한 철을 바탕으로 철기문화도 발달했다. 그중 가장 특징적인 것이 철제품을 만드는 일종의 철 소재인 덩이쇠, 철정이다. 철정은 무덤에서 많이 발견되는데 부장품일 뿐 아니라 화폐로도 사용됐다. 당시에는 철이 부와 권력을 의미했던 것이다.
국가체제를 완비하기 위해서도 철의 장악과 철 생산은 중요하다. 국가조직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군대조직이 완비돼야 하는데, 군대의 무기로 가장 유용한 것은 철제무기나 갑옷이다. 그 다음 철제농구와 개간사업에 유용한 공구다. 그런 의미에서 철의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당시 철은 강력한 고대국가를 형성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였다. 이는 철제마구, 투구, 갑옷 등 각종 철제무기류에서도 확인된다. 가야의 철기문화를 대표하는 철제갑옷은 얇은 철판을 이어만든 것으로서 당시 가야지역의 철기문화가 고도로 발달됐음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발견된 철제갑옷은 70여 개로서 김해 대성동, 부산 복천동 고분 등 한반도에서 출토된 갑옷의 90%가 가야지역에서 출토됐다. 가야의 철제갑옷은 대부분 4세기에 만들어졌다. 이 시기에 이미 철제갑옷으로 무장한 군대를 갖춘 강력한 고대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가야의 철기문화를 상징하는 철제갑옷이 일본에서도 흔히 발견된다. 일본의 철제갑옷은 가야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키타규슈박물관에는 1964년 발견된 철제갑옷이 있다.
가야의 철제갑옷보다 100여 년이나 늦은 5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가야의 철과 기술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 일본제 갑옷과 한반도 남부 가야의 갑옷은 매우 비슷하다. 철제갑옷의 루트는 한반도 가야지방이었던 것이다.
일본이 가야에서 철과 철기문화를 공급받았다는 것은 곳곳에서 확인된다. 나라현 가시하라박물관에는 10여 개의 철갑옷과 투구들이 전시되고 있다. 이들 또한 5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얇고 작은 철판을 이어만든 철갑옷들은 가야에서 발견되는 것과 비슷하다. 당시 일본은 가야에서 이런 철정을 수입해 철제품을 만들었다. 4-5세기 무렵 일본에서는 철을 만들 수 없어 가야에서 철을 수입해 철기를 만들었다. 일본에서 철제갑옷은 가야보다 100년이나 늦은 5세기 이후 급격하게 늘어난다.
가야로부터 철과 철기문화가 본격적으로 수입되면서 일본열도에 큰 변화가 나타난다. 나라, 오사카, 아스카지역을 중심으로 중앙집권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따라 가야에서 생산되는 철과 선진문물의 수입이라는 중요한 이해관계가 있고 선진문물의 수입과 그 교역권을 누가 장악하느냐에 따라서 고대 일본에서 누가 왕자가 되느냐, 누가 정권을 차지하느냐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가야의 철은 일본의 고대국가 수립에 결정적 영향
철 수입은 일본인들의 생활에도 영향을 미쳐 일본 토기의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다. 철 수입 이전에 일본의 토기는 은빛에 투박한 모양을 한 하지키라는 토기였는데, 5세기이후 일본의 토기는 고도의 기술로 만들어지는 스에키라는 토기로 완전히 바뀌었다. 회색빛의 스에키 토기는 쇠처럼 단단하고 두드리면 쇠소리가 난다고 붙여진 이름이었다. 일본 하지키토기는 야요이 토기의 전통을 잇는 것으로 일본 고유부터 있었던 것이다. 한편 스에키는 고도의 기술과 높은 온도, 기술의 집대성으로 일본에는 없던 것이다. 스에키는 가야토기와 비슷하다. 즉 가야도공들의 집단적인 이주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가야의 철과 선진문물은 일본의 고대국가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런 고대일본이 고대한국을 지배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가야와 왜의 관계는 일본 입장에서 보면 가야문물 구체적으로 보면 무구, 갑주, 마구 등의 많은 철기유물들, 철 소재자체를 왜가 사가는 상황에 있었다. 그에 따라 그것을 만드는 기술과 더불어 유명한 가야의 토기를 만드는 기술도 일본에 건너갔다. 이런 큰 흐름을 보면 가야가 있었던 시기에 한반도 문물이 일본에 전수되는 것은 거의 가야지역을 통해서 였다. 가야가 일본문화의 창구역할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고대일본은 가야의 철과 선진문물이 절실히 필요했다. 5, 6세기경 함안의 안라국은 왜의 그런 바람을 해결해 주었다. 이처럼 당시 왜는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기는커녕, 오히려 한반도 남부, 가야지역으로부터 철과 선진문물을 수입해 가는 입장이었다. 고대일본은 당시 독자적으로 철을 생산하고 철기문화를 형성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임나일본부설의 증거라는 광개토대왕비문, <일본서기>, 가야지역에서 확인한 문헌과 고고학적 유물들 어디에서도 임나일본부의 증거는 없다. 결국 고대 일본이 4세기부터 6세기까지 200년간 고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에 불과한 것이다.
임나일본부의 정체를 추적하는 작업을 통해 오히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철과 선진문물을 원하는 왜와 고대한국간에 이뤄진 교류의 역사이다. 일본은 바로 이 같은 사실을 왜곡해 임나일본부라는 허구의 역사상을 만들어 조선 침략의 명분으로 삼은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의 근대화를 위해 필요한 자원을 한반도에서 조달하려는 의도가 결국 임나일본부라는 허구를 창조해낸 것이다.
이제 임나일본부설은 일본 내에서도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하지만 구석기 유물발굴 조작사건에서 보듯, 역사왜곡을 서슴지 않는 일부 일본인들의 가슴속에 임나일본부는 아직도 살아있다.
<< 임나일본부의 정체는? >>
임나일본부설은 원래 우리나라 식민지사관 중의 하나였습니다.
임나일본부설은 4세기 경 임나 지역을(옛 가야 지방) 일본이 지배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이것을 일본이 고대사를 자기네로 편입하려는 의도로 보기보다는 당시 1930~40년대 우리나라민족에게 식민 지배를 정당화 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는게 맞습니다.
1930년대 일본은 본격적으로 우리민족의 정체성을 없애기위해 민족말살 정책을 하게 되는데요, 그중 역사교육에서 한국사를 왜곡하여 자신들의 한반도 지배를 정당화 시키려 합니다. 크게 정체성,타율성,당파성,일선동조론,반도론을 주장하였는데요, 그중에서 임나 일본부설은 타율성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주장들을 살펴보자면...
정체성- 한국사가 10세기 정도 이후에는 발전이 없다는 것
타율성- 한국 역사는 독자적 발전없이 외세의 간섭과 압력에 의해 진행됨
일선동조론- 한국과 일본의 조상이 같다는 주장
당파성론- 조선의 붕당처럼 우리 민족은 단결할 줄 모른다는 것
반도론- 한국은 반도에 위치하여 항상 중국 등 타민족의 지배를 받아왔다는 주장
그러니까 이러한 주장을 함으로써 한국은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을 수 밖에 없었고 자신들이 식민지 지배를 하는 것이 다른 나라의 침략을 막아주므로 다행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한마디로 '개소리' 들이죠.
문제는 일본의 늙은 보수파 '양반'들은 아직도 자기네가 맞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전에는 역사왜곡 교과서 가지고 우리나라와 마찰도 있었지요.-_-a
친일파가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채 흘러온 한국의 근현대사...
이제 이러한 것들을 청산하기 위해 우리가 노력을 해야겠지요..
올바른 역사관과 애국심을 기릅시다..!!
추적! 임나일본부의 정체 < 더빙원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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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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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여년의 침묵을 깨고 비석하나가 새롭게 발견됐다.그것은 바로 광개토대왕비였다.
일본은 광개토대왕비문과 일본서기를 근거로 4세기부터 6세기까지 200년간 고대일본이
고대한국의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했다.한일고대사를 둘러싼 논쟁의
시작이었다.광개토대왕비 재발견이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한일역사학계 최대의
쟁점,임나일본부.임나일본부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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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이틀 : 추적, 임나일본부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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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1.
최근 일본에서 일본역사를 뒤흔드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바로 구석기 유물
발굴 조작사건입니다.일본은 지난 92년 70만년전의 구석기 유물이 발굴됐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11월,일본언론에 의해 이것이 한 일본 역사연구가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입니다.이 사건은 일본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엄청난 충격을 안겨줬는
데요.고대사에 있어서 일본과 한국은 뗄래야 뗄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
입니다.일본의 역사왜곡은 오랫동안 한일관계의 걸림돌이 돼왔습니다.그중에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바로 광개토대왕비문입니다.광개토대왕비는 414년 장수왕이
자신의 아버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3층 아파트 높이에 달하는 이 거
대한 비에는 1800여자가 쓰여져 있는데 현전하는 우리역사기록 가운데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삼국사기보다 700여년이 앞서는 것입니다.그런데 일본학자들은 이것이 고대
일본이 고대한국을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증거라고 주장해 왔습니다.임나일본
부설은 4세기부터 6세기 약 200년간 고대일본이 고대한국을 지배했다는 것으로 '임나',
즉 가야지역에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와 같은 지배기관인 '일본부'까지 두었다는 것입
니다.광개토대왕비문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왜이'신'묘년래,
도해파백잔?? '신'라이위신민.일본학자들은 이것이 광개토대왕 즉위 1년인 391년,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 백제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로 해석하고 있습
니다.임나일본부의 정체는 무엇인지 우선 광개토대왕비문을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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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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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길림성 집안시.1300여년전만해도 고구려의 땅이었다.최근 개혁,개방의 물결과
함께 대도시로 탈바꿈하고 있는 집안은 400년간 고구려의 수도였다.고구려는 이때 최
전성기였다.집안은 도시 전체가 고구려의 유적지다.광개토대왕,장수왕의 무덤등 고구려
무덤만해도 만2천여개가 넘는다.바로 이곳에 광개토대왕비가 있다.고구려의 장수왕이
자신의 아버지인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중국에서 광개토대왕
비는 호태왕비로 불린다.호태왕은 왕중의 왕이라는 뜻이다.414년에 세워진 광개토대왕
비는 높이 6미터 39센티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비석이다.여기엔 1800자가 쓰여 있는데
현전하는 우리 역사기록중 가장 오래된 것중에 하나다.고구려멸망이후 묻혀있던 광개
토대왕비가 새롭게 발견된 것은 1884년.일본 육군참모본부 중위, 사카와 가케노부에
의해서였다.사카와는 일본이 파견한 스파이였다.그는 탁본이 아닌,비석에 종이를 대고
글자를 그린 일명 쌍구가묵본을 가지고 돌아왔다.5년 뒤,일본참모본부는 국수주의
기관지인 회여록에 비문의 내용을 공개했다.이때부터 광개토대왕비문은 임나일본부
설의 토대가 됐다.
# 이종욱 INT 주어진 문자 그대로를 역사적 사실로 이용해서 일본인들이
역사상을 만들어.그 역사상이라는 것은 왜가 391년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임나,가야,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는 것이다.이것은 일본인의 관점에서 보면 한반도
남부지역을 침략해서 지배했다는 역사상을 만드는 결정적인 자료가 된 것이다.
비문이 재발견되자 일본학자들은 열광했다.일본의 대표적인 역사학자 시라토리는 '이
비문에 의해 일본이 조선남부를 지배했음이 확실해졌다며 광개토대왕비를 일본에
가져와 박물관이나 공원에 세우자'고 했다.일제의 조선침략 명분으로 사용된 임나일본
부설은 해방후 더욱 확산됐다.그것에 앞장선 사람이 바로 일본최고의 학자인 쓰에마치
였다.고대일본이 임나일본부라는 통치기관을 통해 고대한국의 남부를 직접지배하고,
신라와 백제까지 간접지배했다는 것이었다.
# 김태식 INT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이 군사를 보내 가야를 정복했고, 그걸
토대로 마치 총독부와 같은 임나일본부라는 군사통치기관을 설치해 가야지역을 4세기
중엽부터 6세기중엽까지 200년간 통치했고 그걸 기반으로 신라와 백제까지 세력권에
놓고 간접지배를 하면서 고구려와 대치를 했다는 것이 기본을 이루고 있다
정인보는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 최초의 한국학자였다.일본은 당시 광개
토대왕비문의 신묘년조를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 신라를 쳐서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했다.그러나 정인보는 고구려를 주어로 삼아,왜가 신묘년에 오니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와 왜를 격파했다.백제가 신라를 쳐서 신민으로 삼았다는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그런데 1972년,충격적인 사실이 일본에서 발표됐다.재일사학자 이진희씨가
일본이 광개토대왕비문을 변조했다는 주장을 제기한 것이다.이진희씨의 주장은 당시
한일역사학계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 이진희 INT 유일하게 근거가 광개토대왕비였기 때문에 17,8년동안 철저히
조사를 했다.내자신이 그때 한국에 갈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고 중국에 갈수도 없는
형편이니까 주로 일본에 있는 일본얘들이 갖다놓은 자료를 철저하게 규명해 들어가는
그는 사카와가 가지고온 것과 이후에 발견된 탁본들을 비교했고,비문이 변조됐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냈다.우선 사카와가 가지고 온 것 이후에 만들어진 탁본들의 글씨
체가 일정하지 않다.게다가 없던 글자들이 사카와가 가지고 온 것 이후의 탁본들에
나타난다.소위 원석탁본이라는 수곡탁본도 비문변조설을 뒷받침했다.수곡탁본에는
'도해파'라는 글자가 없었다.이것은 사카와가 비문을 변조했다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 이진희 INT 내가 보기에는 없는 글자를 사카와가 비문을 떠왔고 그후
석회를 발라 그후에도 래도해파로 돼 있다가 석회가 떨어지니까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변조한 것.그러니 남북학자들이 왜놈들이 제시해준 비문을 어떻게 해석을 하는가 어디에
점을 찍어서 해석하느냐가 아니라 비문자체를 변조해 놓은 것이라는 것이 내설이다
사카와가 비문을 위조했고,그후 일본참모본부가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석회를 발랐
다는 주장이었다.이씨는 비문변조설 발표이후,수차례 현장답사를 통해 비문에 칠해진
석회의 흔적을 직접 확인했다.석회 흔적은 지난 99년 이뤄진 적외선 촬영에서 더욱 확실
하게 드러났다.
# 이진희 INT 여기 석회가 다 있잖아. 다 보인다. 석회 많이 남아있다.
이게 전부 석회다.광범위하게 남아있다.
변조설이 힘을 얻어갈 무렵,중국학자 왕건군에 의해 반론이 제기됐다.그는 1985년,
일본에서 열린 심포지엄에서 광개토대왕비문은 위조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왕건군의
견해는 일본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 왕건군 INT 일본참모부가 비문을 고쳤다는 주장에 찬성하지 않는다.
사카와가 이 비문을 고쳤다는 주장에도 반대다.그 당시 이탁본을 만들려면 한달이
걸린다.사카와같은 스파이가 한달씩 머물면서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당시 청의
상황이 엄중해서 이런일은 엄두도 못냈을 것이다.
그러나 비문변조의 의혹은 국내학자들에 의해 계속 제기됐다.이형구교수는 사카와의
것과 이후에 발견된 탁본들을 비교해 변조된 글자들을 새롭게 찾아냈다.
# 이형구 INT 조작이 안됐다고 하는데 저는 분명 조작이 됐을 것이다
그는 신묘년조 첫글자 왜는 원래 후자이고,래도해는 불공인이었으며,지워진 부분의
글자는 왜구신이라고 했다.그 결과 그후 신묘년부터 조공을 바치지 않았으므로 고구려가
백제왜구신라를 파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로 해석했다.서영수교수도 변조설을 주장했다.
그는 신묘년조의 래자를 미자로,해자를 왕자로 읽었고 지워진 부분의 글자가 왜항이
라고 했다.그리고 백제 신라는 속민임에도 불구하고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대왕이 백제와 그 동조자인 왜를 공파하고 신라는 복속시켜 신민으로
삼았다는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비문이 재발견된지 1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신묘년조에 대한 비밀은 풀리지 않고 있다.고구려의 역사가 기록된 광개토대왕비가
아직도 한일역사학계 최대의 논란에 휩싸여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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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2.
이처럼 신묘년조 기사는 지난 120여년간 임나일본부설을 둘러싼 논란의 핵심에 있었
습니다.그동안 재일사학자 이진희교수처럼 비문이 변조됐다는 주장도 끊임없이 제기
됐고,신묘년조기사의 해석을 달리하는 등 신묘년조 수수께끼를 풀기 위한 다양한 시도
들이 계속됐습니다.하지만 신묘년조 기사는 지금까지도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채
논란이 거듭되고 있습니다.그렇다면 신묘년조 기사의 의문을 풀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논란이 되고 있는 신묘년조 바로 뒤에 이어지는 부분입니다.이육년병신,왕궁
솔수군,토벌잔국.영락6년,광개토대왕이 몸소 수군을 거느리고 잔국,즉 백제를 물리쳤
다는 것입니다.일본학자들의 주장대로라면 백제는 이미 신묘년에 왜의 속민이 됐습니다.
그런데 신묘년조 바로 뒷문장에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했다는 앞뒤가 맞지 않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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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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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이 백제를 공격할 당시 고구려의 세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황해도 안악군
에서 발견된 안악3호분.이곳에서 고구려의 힘을 확인할 수 있다.고분 곳곳에 펼쳐진
벽화들.고구려 병사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병사들은 무기의 특성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이다.하지만 표정은 한결같이 진지하다.허리춤에 화살통을 매달고 활을 든 궁수.
도끼를 든 부월수,창과 방패를 든 창수,갑옷으로 무장한 기마전사.이들이 광개토대왕의
군대였다.이렇게 강력한 군대를 거느린 광개토대왕은 396년,수군을 이끌고 경기도
남양만에 상륙해 백제를 공격한다.광개토대왕이전 시기,백제는 고구려와 맞서는 상황
이었다.그러나 광개토대왕은 이 전투에서 백제의 수많은 성들을 점령하게 된다.
# 윤명철 INT 경기만 남부 남양만으로 상륙했을 경우 내륙 깊히 전진할 수
있어.수원 평택 용인 이런지역을 통해 광주로 가면 백제 수도인 한성의 후미를 급습할
수 있어.그리고 공격점령한 58성의 분포도를 보면 서해안 지역에 분포 특히 남양만
지역이 매우 중요.서있는 당성같은 경우 고구려가 점령한 이후 당성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비문의 내용대로 광개토대왕은 친히 수군을 이끌고 서해안을 지나 한강을 건너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공격한다.결국 전투는 고구려의 승리로 끝이나고,백제왕은 광개토대왕
에게 재물을 바치며 영원히 신하가 될 것을 맹세한다.비문에 따르면 백제를 복속시켰던
것은 왜가 아니라 고구려였던 것이다.
# 이종욱 INT 지속적으로 고구려와 백제사이에 전쟁이 있었다.그 예가 비문에
나오는데 그 이유는 신묘년 391년보다 20년전인 371년 백제 근초고왕이 3만명을 거느
리고 고구려를 쳐들어와 평양성까지 와서 광개토대왕의 할아버지인 고구원왕을 죽여,
바로 광개토대왕의 입장에서 보면 할아버지를 죽인 백제는 가장 중요한 적, 고구려의
입장에서 보면 주적이 백제였다.자기 주적을 멸친해서 백잔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백제의 존재는 분명한데 존재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상태가 광개토대왕비에 나오고
있는 것이다
신라도 이미 고구려의 세력권에 편입돼 있었다.낙랑군과 대방군을 몰아내고 백제의
북방영토 대부분을 점령한 광개토대왕이 남쪽으로 대대적인 정벌을 시작한 것이다.
경주에서 발견된 왕릉급 고분인 호우총은 이같은 사실을 보여준다.호우총은 제사때
쓰이는 청동 그릇인 호우가 발견됐다고 붙여진 이름이다.호우총이 발견된 것은 1946년.
일본이 아닌 우리학자들에 의해 이뤄진 최초의 고분발굴이었다. 청동 항아리 호우는
왕릉급 고분임을 알 수 있는 금동파편들과 함께 출토됐다.그런데 항아리 바닥엔 광개토
대왕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신라가 고구려의 영향을 받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정복전쟁은 영토확장이 아니라 고구려의 천하관을 실현하는 과정이었다.고구려의 천하
관은 주변을 정복해 식민지로 삼는 것이 아니라,고구려를 중심에 두고 주변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었다.
# 서영수 INT 광개토대왕비는 한일관계사의 쟁점으로 조명돼 왔는데 잘못된
것이다.실제로 광개토왕비는 당시 고구려의 천하관을 나타내는 것이 통일의지,대왕권을
기리기 위한 비다.당시 고구려의 경우 중국 천하관을 수용해 고구려를 중국과 대등한
독자적인 세계다 이런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고구려의 영향력은 한반도 남부까지 미치고 있었다.광개토대왕즉위 9년,신라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왜인들이 국경에 가득찼고,성지를 파괴하고 있다고 보고한다.그러자 광개토
대왕은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대대적인 신라구원작전을 벌인다.고구려군은 신라의
성과 주변에 있던 왜는 물론 도망가는 왜를 가야지역까지 추격해 물리친다.신라를 공격
한 왜는 대규모 군사집단이나 통일된 세력이 아니었다.게다가 광개토대왕이 왜를 물리
쳤다는 기록은 비문의 곳곳에서 확인된다.왜는 때때로 고구려의 질서를 위협하는 세력에
이용당하는 부수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 서영수 INT 광개토왕비에 나오는 왜는 정체가 명확하다.문자에 문제가 있는
것을 제외하면 왜가 영락9년 10년 14년에 나오는데 고구려에 있어 왜는 주 정복대상이
아니라 백제 신라 가라를 정복하는 과정에 등장하는 부수적인 존재.왜는 당시 고정적인
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왜의 성이 있다든지 장기적으로 주둔한다든지 이런식이 아니라
분산적으로 나타나고 고구려군인 비문에는 관군이라 표현돼 있는데 관군이 이르면
싸우지도 않고 도망가고 그래서 비문에 왜는 퇴, 추, 멸의 대상이다.
이처럼 광개토대왕비는 임나일본부설이 아니라 고구려 정복전쟁의 역사와 통일의지를
보여주는 증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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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3.
광개토대왕비문에 등장하는 고대일본은 왜, 왜인,왜구,왜적등 각각 다르게 표현돼 있
습니다.이것은 당시 왜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할 힘을 지낸 대규모 군사집단이나 통일된
세력이 아니었다는 것을 뜻합니다.뿐만아니라 비문에 나타난 왜에 관한 기록은 모두
광개토대왕이 이들을 물리쳤다는 내용입니다.결국 광개토대왕비문은 광개토대왕 남정의
역사를 기록해 놓은 증거물인 것입니다.자 여기를 보시죠 광개토대왕의 남정으로 비문에
기록돼 있는 임나가라,즉 김해를 중심으로 하는 금관가야의 세력이 약해지고,고령을
중심으로 하는 고령가야와 함안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아라가야 혹은 안라국이 5세기
이후 가야지역의 새로운 맹주국으로 떠오르게 됩니다.여기서 임나일본부의 문제가
시작됩니다.임나일본부는 일본서기에서만 확인되고 있는데 광개토대왕의 정벌이 있은지
150여년후인 541년부터 10여년간의 기록에만 집중적으로 나타납니다.일본서기 기록을
보면 임나일본부는 이 시기 10여년동안만 존재한 것이 됩니다.그런데 일본서기에는
임나일본부외에 안라일본부라는 용어도 보입니다.임나일본부와 안라일본부가 함께
쓰였던 것입니다.안라일본부의 안라는 함안지역에 존재했던 안라국을 말합니다.그렇
다면 임나일본부와 안라국은 무슨 연관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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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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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았음은 곳곳에서 확인된다.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고인돌이다.안라국이 일찍부터 세력을 형성했음을 보여준다.
# 이영식 INT 고인돌이 청동기 시대 무덤이고 이런게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쪽 야산으로 쭉 일렬로 늘어서듯이 있고,여기있는 마크는 여러해석이 있지만
마을의 안녕이나 풍요를 기원하는 주술행위를 할 때 새긴 것으로 본다면 어느정도
규모있는 마을이 존재했다는 것
함안지역에서 발견된 고인돌은 160여개.한 가정집 마당에 놓여있는 이 고인돌은 형태가
특이하다.주술행위를 할 때 새긴 무늬가 모두 연결돼 있는 것이 별자리를 연상시킨다.
안라국은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곳에 세워졌다.두강을 통해 김해는 물론 내륙지방
까지 연결된다.동쪽으로 뻗은 산을 따라가면 마산,창원에 이르고,남쪽으로 난 계곡을
따라가면 남해안과 만난다.안라국은 해상교역의 요충지에 있었다.마산만과 진동만은
안라국 성장의 토대가 됐다.안라국의 존재가 역사에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각종
기록에서다.삼국지 위지동이전에는 안야국으로 나온다.삼국사기 지리지엔 함안이 아시
랑국으로 표현돼 있고,삼국유사에는 아라가야로 등장한다.안라국은 4세기 고구려 남정
이후 성장해 5세기 가야지역을 대표하는 맹주국으로 떠올랐다.그 시기 만들어진 함안
고분군.눈으로 보이는 무덤만해도 50여기에 달한다.신라왕릉급 무덤과도 맞먹는 거대한
무덤들은 안라국의 세력을 짐작케 한다.
# 김태식 INT 함안의 안라국은 이미 3세기경에도 위지동이전에 김해금관가야,
구야국에 못지않은 양대세력으로 나온다.고고학적 자료로 김해보다는 약간 못한 세력
으로 보이는데 다른 가야지역에 비해서는 이미 3세기에 앞선 국가였다. 당시 전기가야
연맹시기에 맹주국이었던 김해 금관가야가 4세기말에 신라와 고구려의 연합세력에 의해
갑자기 멸망당하는 바람에 함안은 어부지리를 얻어 5세기이후 다른 지역에 앞장서 발전
하는 계기를 얻었다
지난 92년,말이산 고분군 근처 한 아파트 공사현장에서 놀라운 유물이 발견됐다.공사
중에 발견된 무덤에서 수많은 가야토기들과 함께 철제마갑,즉 철로 만든 말의 갑옷이
출토된 것이다.국내에서 처음 확인된 이 거대한 철제마갑은 안라국이 상당히 강력한
세력이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토기로만 보던 철제마갑이 실제로 나타나 안라국의
위상을 확인시켜준 것이다.안라국의 위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토기들이다. 다른
지역과 구분되는 함안토기들은 시기별로 다양하고 독창적이다.안라국이 오랫동안 독자
적인 문화를 유지했던 것이다.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화염무늬토기.아랫부분에 불꽃
문양의 구멍이 뚫려있는 이 토기는 5세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데 함안은 물론 마산,
창원등지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 이주헌 INT 안라 혹은 아라가야의 고고학적 증거는 토기문화다. 다른 김해
지역 경주지역와 구분되는 독자적인 형태의 함안양식토기문화.4세기부터 아라가야가
멸망하는 6세기까지 지속적으로 연결선상에서 변화되고 있다
그런데 취재도중 놀라운 사실이 확인됐다.지금까지 확인되지 않았던 함안토기의 생산
지가 향토사학자와 취재팀에 의해 최초로 발견된 것이다.꺠어진 토기 파편들은 겹겹이
쌓인채 거대한 토기층을 이루고 있었다.토기를 생산하던 가마터가 분명했다.위쪽까지
이어진 토기층들은 이곳에 여러개의 가마가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 조희영 INT 이집을 축조를 하면서 결과적으로 절개되면서 발견. 이지역
외에도 이와 유사한 토기와 토기층들이 나오고 있다
5세기에서 6세기경으로 추정되는 이 토기파편들은 함안식 토기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었다.
# 이영식 INT 본격적인 발굴이 돼야 하겠지만 가야문화전공자로 이런 유적은
처음본다.이 정도로 폐기된 가마에서 제작하다가 잘못 만들어진 이런 토기들이 무더기로
쌓여있는 것은 처음본다.규모도 상당하고 이런 것은 함안군의 중심인 가야읍 안라국의
중심지였던 곳과 2,3km 떨어진 곳에 있어서 안라국의 중심고분군인 말산고분군에서
출토되는 가야토기들이 바로 여기서 생산돼 그쪽에 공급됐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임나일본부설이 제기된후 함안은 물론 김해,고령,부산 등 가야지역전체에서 수많은
발굴작업이 이뤄졌다.그러나 어디에서도 임나일본부의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가야
지역이 백제와 신라에 흡수되는 6세기까지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 임효택 INT 실제로 4세기중엽부터 6세기까지 일본이 부를 두고 임나 가야를
통치했다면 이 지역에는 많은 일본무덤들이 있어야 한다.이시기 일본 무덤은 전방후원
분인데 가야의 중심이 되는 김해에서 등장을 해야 한다.그러나 지금까지 발굴 결과를
보면 김해의 대성동고분이나 양동리고분에서 전방후원분은 찾을 수 없다
# 김태식 INT 일본의 유물들이 200년간 나와야 한다.그런데 안나온다.오히려
가야지역의 기원전 1세기부터 6세기 중엽까지 자체발전한 가야적인 성격의 유물들이
700년동안 지속이 되고 있다.이것은 가야지역이 왜뿐 아니라 신라와 백제로부터도
독립한 독립된 정치체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임나일본부가 있었다는 함안의 안라국.그러나 이곳엔 700년을 이어온 안라국의
역사가 살아 숨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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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4.
기원전 1세기 성립된 안라국은 이처럼 700년간 독립왕국으로 존재했습니다.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대형고분입니다.이 고분들은 수직으로 구덩이를 파고 그 주변을
돌로 쌓는 수혈식석곽묘로 5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규모는 물론 부장품
들도 대단합니다.그러나 당시 일본의 고분형식은 이렇게 앞은 방형이고,뒤는 원형인
전방후원분이었습니다.함안의 고분들과는 외형이 전혀 다릅니다.게다가 함안지역에서
이같은 전방후원분은 한기도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고분에서 출토된 수많은 유물
또한 안라국의 독자성을 확실하게 보여줍니다.가장 대표적인 것이 함안식토기로 불리는
토기들입니다.그 중 5세기 안라의 특징적인 토기는 아랫부분에 이렇게 불꽃무늬 모양의
구멍이 뚫려있는 화염형무늬토기입니다.이처럼 안라국은 물론 가야의 어떤 지역에서도
임나일본부 존재의 흔적은 없습니다.일본이라는 말은 사실 7세기이후에야 비로소 일본과
중국의 역사서에 등장합니다.그렇다면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일본부의 정체는 무엇
일까요? 일본서기의 흠명기에는 놀라운 사실이 나옵니다.재안라제왜신.안라에 있는
왜신들이라는 뜻입니다.임나일본부가 안라에 있는 왜의 사신으로 표현돼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일본서기는 임나일본부를 사신으로 표현해 놓은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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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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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는 임나일본부를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취재팀은 도서관 지하서고에서
일본 최고의 역사서인 일본서기 필사본을 만날 수 있었다.
# 야마가미 유타카 INT 이것이 일본서기다. 에도시대 1669년 출판된 것이다.
전부 15권이다
임나일본부의 바탕이된 일본서기는 720년 편찬됐다.일본서기에 임나일본부관련 내용은
541년부터 554년기록에만 나타난다.그런데 이 필사본에는 일본부의 부자옆에 어사지
라는 주석이 달려있다.어사지는 일반적으로 사신을 의미한다.군사통치기관이라는 임나
일본부가 사신으로 기록돼 있는 것이다.또다른 장에는 일본부옆에 야마토정권의 미코
토모치라는 주석이 쓰여있다.미코토모치 역시 왕의 명령을 전달하는 일회성 사신이었다.
이런 사실에 주목해서 임나일본부가 군사통치기관이 아니라 안라국에 파견된 사신이
라는 주장이 제기됐다.일본내 가야사연구가인 스즈키교수 역시 임나일본부가 외교
사신이라며 기존의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했다.
# 스즈키 INT 일본부는 일본이라는 말이 7세기 후반에 등장한 것이기 때문에
와후,혹은 야마토의 미코토모치라고 부른 것을 일본서기가 8세기경 일본부라고 부른
것이다.임나일본부의 실체는 인간집단이라고 생각한다.정치조직이나 야마토정권이
임나를 지배하는 조직은 아닐 것이다.지금 식으로 보면 외교사절,혹은 외교활동을 한
사람들이다.
그러면 안라국은 왜 사신이 필요했을까.일본서기에 임나일본부가 등장하는 그시기,
백제와 신라는 가야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세력다툼을 벌였다.그 속에서 안라국은
백제,신라를 견제하고,안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이들을 적절히 이용했던 것이다.
# 이영식 INT 신라가 낙동강을 건너서 서진해오고 529년까지 현재의 하동
대사지역을 점령한 백제가 섬진강을 건너 서쪽에서 안라국을 향해 동진.이때 안라국은
백제의 동진과 신라의 서진에 직면에 있어 독립을 위한 노력이 아주 필요한 시기였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안라국의 독립에 이용됐던 사신은 총 7명.그중 길비신과 하내직
이라는 인물은 가야지역에서 일본열도로 이주한 사람으로 기록돼 있다.
# 이영식 INT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이주한 사람들은 대개 본래 일본
토착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구별하기 위해서 자신들이 이주한 땅의 이름. 길비에
정착한 사람들은 길비를 성으로,하내 지금의 오사카에 정착한 사람들은 하내를 성으로
삼는다.따라서 길비신 하내직은 한반도 지역에서 이주한 사람이 분명하고 이들이 씨족
집단으로 구성하게 되는데 길비씨 하내씨가 된다.
가야인들의 이주 흔적은 일본 곳곳에서 확인된다.오사카 후지데라시에 위치한 가라구니
신사.신국신사 또는 한국신사라 불리는 이곳은 6세기경,가야인들에 의해 세워졌다.
신사의 역사가 기록된 이 책에는 4세기경,많은 가야인들이 이곳에 살기 시작했다고
쓰고 있다.
# 이토 스스무 INT 4세기후반부터 6세기무렵까지 가야국과의 교류가 상당히
활발했다고 한다.그래서 그때 가야인들이 이쪽으로 많이 이주해왔다.6세기말경 가야가
멸망하자 가야 사람들은 없어진 자신의 고향을 생각하면서 조상을 모신것에서 이 신사가
생긴 것이라는 설이 있다
이렇게 일본열도에 정착한 가야의 후손들이 안라국에 사신으로 보내진 것이었다.그런
만큼 이들은 가야지역을 위해 활동했다.이는 일본부가 안라에 대한 왜의 계획을 백제나
신라에 가서 들었다.일본부 하내직이 왜와는 별개로 신라와 통했다.그리고 일본부가
안라를 위해 고구려와 내통했다.일본부는 안라를 아버지로 삼아 오직 그들만을 따른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에서도 확인된다.일본부가 안라국왕의 통제하에 있었던 것이다.
# 김태식 INT 그들이 왜인계통의 인물이기는 하지만 하는일은 백제를 위한
일도 아니고 왜에 대한 대표성도 없는 인물이었고 오히려 가야전체의 독립을 위해 일하고
있었고. 신분상으로도 마치 그들이 함안 안라왕을 위해 일하는 것으로 보인다
안라국의 위상을 보여주는 함안 성산산성.6세기 후반,안라국은 이곳에서 고대일본의
사신들과 백제,신라의 사신들을 불러놓고 국제회의를 개최한다.그것은 신라와 백제로
부터 가야지역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한 안라국의 외교전략이었다.
# 이영식 INT 안라국의 안라국왕의 위상은 일본서기와 마찬가지로 왜의
사신을 조종을 하고 가야 여러나라 왕이나 사신들을 이지역에 불러모으거나 함께 백제의
사비,지금의 부여에 가 외교활동을 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가야를 통솔한 안라국은 주변세력을 적절히 이용할줄 알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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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5.
이처럼 임나일본부는 고대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안라국이 신라와
백제의 틈바구니속에서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하나의 방패막이로 사용한 왜의 사신들
이었던 것입니다.게다가 이들 왜 사신들은 철저하게 안라국왕의 통제를 받고 있었습
니다.그러면 고대일본은 왜 사신까지 파견해 안라국의 독립을 도왔던 것일까요?
안라국의 위상을 보여주는 마갑총입니다.마갑총에서 출토된 이 거대한 철제말갑옷은
당시 안라국이 철이 풍부하고 따라서 그 문화가 상당히 발달돼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
습니다.당시 철은 고대국가를 형성하고 강력한 왕권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
였습니다.당시 안라국은 이처럼 철자원이 풍부했을뿐 아니라 마산항과 진동항이라는
해상교역의 요충지까지 끼고 있는 최적의 중개무역기지였습니다.안라국에 대한 고대
일본의 관심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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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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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은 안라국의 중요한 자원이었다.안라국이 있었던 함안지역은 얼마전까지만해도 손
꼽히는 광산촌이었다.지금은 광산들이 대부분 문을 닫았지만 폐광근처에서는 원석에
가까운 철이 쉽게 눈에 띈다.곳곳에 널려있는 철지꺼기들도 이곳이 풍부한 철생산지였
음을 보여준다.함안을 비롯한 가야지역의 철은 옛부터 유명했다.3세기경의 기록인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가야지역에서는 철이 생산되는데 한,예,왜인들이 모두와서
사간다.낙랑과 대방의 두군에 공급했다고 기록하고 있다.가야의 철이 수출된 것이다.
풍부한 철을 바탕으로 철기문화도 발달했다.그중 가장 특징적인 것이 철제품을 만드는
일종의 철소재인 덩이쇠,철정이다.철정은 무덤에서 많이 발견되는데 부장품일뿐 아니라
화폐로도 사용됐다.당시 철이 부와 권력을 의미했던 것이다.
# 신경철 INT 국가체제를 완비하기 위해서도 철을 장악해야 한다.철생산이
중요하다.국가조직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군대조직이 완비돼야 한다.군대의 무기로
가장 유용한 것은 철제무기나 갑옷이다.그 다음 농업생산,농구로 가장 유용한 것이
철제농구이고 대개간사업에도 가장 유용한 것이 공구다.그런의미에서 철이 없으면
불가능하다.철의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당시 철은 강력한 고대국가를 형성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였다.이는 철제마구,투구,
갑옷등 각종 철제무기류에서도 확인된다.가야의 철기문화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철제
갑옷이다.얇은 철판을 이어만든 철제갑옷은 당시 가야지역의 철기문화가 고도로 발달
됐음을 그대로 보여준다.지금까지 발견된 철제갑옷은 70여개.김해대성동,부산복천동
고분등 한반도에서 출토된 갑옷의 90%가 가야지역에서 출토됐다.가야의 철제갑옷은
대부분 4세기에 만들어졌다.이 시기에 이미 철제갑옷으로 무장한 군대를 갖춘 강력한
고대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런데 가야의 철기문화를 상징하는 철제갑옷이
일본에서도 흔히 발견된다.일본의 철제갑옷은 가야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취재팀은
키타규슈박물관에서 1964년 발견된 철제갑옷을 확인할 수 있었다.가야의 철제갑옷보다
100여년이나 늦은 5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가야의 철과 기술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 후지마루 INT 이 일본제갑옷과 한반도 남부 가야의 갑옷과 굉장히 비슷하다.
철제갑옷의 루트는 한반도 가야지방이었다고 합니다
일본이 가야에서 철과 철기문화를 공급받았다는 것은 곳곳에서 확인된다.나라현 가시
하라박물관에는 10여개의 철갑옷과 투구들이 전시되고 있다.이들 또한 5세기경에 만들
어진 것이었다.얇고 작은 철판을 이어만든 철갑옷들은 가야에서 발견되는 것과 비슷하다.
당시 일본은 가야에서 이런 철정을 수입해 철제품을 만들었다.
# 니시다시 INT 일본고분에서 철제라는 삼각형 철판이 출토됐다.철기를
만드는 재료인데 그것으로 철기를 만든거다. 4-5세기무렵 일본에서는 철을 만들 수
없었다.가야에서 철을 수입해 철기를 만들었다.
일본에서 철제갑옷은 가야보다 100년이나 늦은 5세기 이후 급격하게 늘어난다.가야로
부터 철과 철기문화가 본격적으로 수입되면서 일본열도에 큰 변화가 나타난다.나라,
오사카,아스카지역을 중심으로 중앙집권국가가 형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 이영식 INT 가야에서 생산되는 철을 수입해 가기위한 선진문물의 수입
이라는 중요한 이해관계가 있고 선진문을의 수입을 고대일본내에서 누가 장악하느녀
그 교역권을 누가 장악하느냐에 따라서 고대일본내에서 누가 왕자가 되느냐로 갈린다.
이것은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고대일본내에서 누가 정권을 차지하느냐하는 중요한 키
가된다
철수입은 일본인들의 생활에도 영향을 미쳤다.일본 토기의 급격한 변화는 이같은 상황을
잘 보여준다.철수입이전,일본의 토기는 붉은빛에 투박한 모양을 한 하지키라는 토기였다.
그러나 5세기이후 일본의 토기는 고도의 기술로 만들어지는 스에키라는 토기로 완전히
바뀌었다.회색빛의 스에키 토기는 쇠처럼 단단하고 두드리면 쇠소리가 난다고 붙여진
이름이었다.
# 야마모토 INT 일본 하지키토기는 야요이 토기의 전통을 잇는 것으로 일본
고유부터 있었던 것이다.한편 스에키는 고도의 기술과 높은 온도, 기술의 집대성으로
일본에는 없던 것이다.
스에키는 가야토기와 비슷하다.가야도공들의 집단적인 이주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 니시다니 INT 구별이 안될 정도로 똑같다. 결국 스에키를 만든 사람은 가야
토기를 만든 사람일것이다.즉 가야에서 기술자가 건너와서 만든 것이 스에키일것으로
생각한다.
가야의 철과 선진문물은 일본의 고대국가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이런 고대일본이
고대한국을 지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 임효택 INT 가야와 왜의 관계는 일본입장에서보면 가야문물을 많이 받아
가는 구체적으로 보면 가야는 각종 철기들이 아주 발전한다.무구라든지 갑주라든지
마구라든지 이런 많은 철기유물들, 철 소재자체도 일본에서 사가는 상황에 있었고
그것을 만드는 기술도 건너갔고, 유명한 가야의 토기를 만드는 기술도 일본에 건너가고
이런 큰 흐름을 보면 가야가 있었던 시기 한반도 문물이 일본에 전수되는 것은 거의
가야지역을 통해서 간다. 가야가 일본문화의 창구역할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대일본은 가야의 철과 선진문물이 절실히 필요했다. 5, 6세기경 함안의 안라국은 왜의
그런 바람을 해결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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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6.
이처럼 당시 왜는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기는 커녕, 오히려 한반도 남부, 가야지역으로
부터 철과 선진문물을 수입해가는 입장이었습니다. 고대일본은 당시 독자적으로 철을
생산하고 철기문화를 형성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임나일본부설의 증거
라는 광개토대왕비문에도 일본서기에도 가야지역에서 확인한 문헌과 고고학적 유물들
에서도 임나일본부의 증거는 없었습니다. 결국 고대 일본이 4세기부터 6세기까지 200
년간 고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에 불과한 것입니다. 임나일
본부의 정체를 추적하는 작업을 통해 오히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철과 선진문물
을 원하는 왜와 고대한국간에 이뤄진 교류의 역사입니다. 일본은 바로 이같은 사실을
왜곡해 임나일본부라는 허구의 역사상을 만들어 조선 침략의 명분으로 삼은 것입니다.
이제 임나일본부설은 일본내에서도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구석기 유물
발굴 조작사건에서 보듯, 역사왜곡을 서슴지 않는 일부 일본인들의 가슴속에 임나일본
부는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한일고대사 최대의 쟁점, 임나일본부. 왜곡된 역사는 가려질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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