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보물창고, 외규장각 |
1886년 병인양요, 프랑스군은 외규장각에 보관된 서적을 비롯한 360여 점의 귀중품을 약탈해 본국으로 우송했다. 하지만 조선정부는 프랑스군을 물리친 승리감에 도취되어 외규장각 도서 중 일부가 프랑스로 건너간 사실조차 몰랐다. |
1. 120년만에 등장한 외규장각 |
1866년 11월 19일 병인양요 당시 외규장각은 프랑스군에 의해 철저히 파괴된다. 그러나, 1993년 미태랑 대통령이 고속철도 사업권을 따내기 위해 외규장각의 약탈한 책들 중 한 권을 반환하면서 외규장각의 존재도 부각되기 시작한다. 그 책은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묘소 휘경원 조성사업을 기록한 ‘휘경원 원소도감의궤’였다. |
2. 둘도 없는 보물, 어람용 의궤 |
의궤는 의식과 궤범이라는 뜻이다. 즉 중요한 의식이 있으면 그것이 본보기가 되어 국가 의식을 치를 수 있게 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의궤 자체 값어치도 크지만 프랑스에 가있는 의궤는 의미가 각별하다. 의궤는 보통 관청에서 보관하는 분상용과 왕실보관용으로 어람의궤가 있다. 현재 국내에는 분상용만 남아있는데 비해 프랑스에 가있는 것은 어람용 의궤인 것이다. |
3. 조선 왕조 최고의 보물 창고, 외규장각 |
정조가 규장각을 세웠던 이유는 당쟁으로 인한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도하고 규장각을 새로운 정치기구로 이용하고자 함이었다. 정조 자신의 상징물을 보관하고 국내외 수많은 서적들을 망라해 정책을 수립하고 결정했던 규장각은 왕권의 상징이자 핵심 권력 기관이었다. 그러던 중 다시 정조는 강화도에 외규장각을 만든다. 그것은 영원히 보존할 가치가 있는 것들을 보다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함이었다. |
4. 최고의 보관처, 강화도 |
정조는 이렇게 귀중한 물건들을 왜 강화도에 보관했을까? 강화도는 이미 고려시대 몽고군에 맞서 40년간 항쟁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또 난리가 일어날 때 국왕들의 피난처이기도 했다. 특히 물살이 급한 해로와 드넓은 개펄이 있어 천연의 요새다. 정조는 이런 강화도야 말로 최고의 안전지대라 믿고 외규장각을 설치했던 것이다. |
5. 영상복원, 외규장각 |
강화군은 5년 전부터 외규장각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를 시작했다. 70년대 고려궁지를 성역화 하면서 졸속으로 세운 담장 때문에 발굴작업은 어려움에 부딪쳤다. 난관 끝에 최대한 고증에 입각한 외규장각이 영상으로 복원되었다. |
6. 외규장각은 왜 그렇게 쉽게 불탔는가? |
프랑스 극동함대가 강화도를 침범할 때 병력은 군함 7척에 군인 1460명이었다. 이들 앞에 수대에 걸쳐 외성과 내성을 쌓고 거기에다 돈대까지 쌓은 강화도는 의외로 허무 |
하게 무너진다. 당시 정규군은 훈련을 제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단 프랑스군은 무력으로 손쉽게 강화를 점령했지만 조선 사람들의 문화수준에는 감탄한 나머지 자존심이 상할 정도였다고 한다. |
사라진 보물창고, 외규장각(外奎章閣)
프랑스 군대가 약탈해 간 우리의 기록문화 - ‘외규장각 도서’
1866년 11월 19일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은 외규장각에 보관된 서적을 비롯한 360여 점의 귀중품을 약탈해 본국으로 우송했다. 당시 외규장각은 프랑스군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다. 하지만 조선정부는 프랑스군을 물리친 승리감에 도취되어 외규장각 도서 중 일부가 프랑스로 건너간 사실 조차 몰랐다.
1866년 11월 19일 병인양요 당시 강화부 외규장각 주변의 프랑스 군인들.
(사진출처 / 김기동, 오마이뉴스)
1866년 11월 19일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은 외규장각에 보관된 서적을 비롯한 360여 점의 귀중품을 약탈해 본국으로 우송했다. 당시 외규장각은 프랑스군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다. 당시 강화도의 외규장각 소장품은 왕실 관련 귀중품 99점과 도서 1,007종 5,067책이었다. 프랑스는 이 중 359점을 약탈하고 나머지는 모두 불질러 버렸다. 이때 국보급 의궤(儀軌)류인 숙종 때 태조 이성계를 그린 '태조대왕 영정정모사의궤' '인현왕후 숭모의궤' '인조대왕 산릉의궤' 등이 모두 불탔다.
1864년 대원군은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대항하기 위하여 천주교도를 이용하여 프랑스와 협조를 시도하였으나 무산됐다. 오히려 대원군이 머무는 운현궁에 천주교도들이 출입한다는 비난을 받게 되자 천주교를 박해하게 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로 알려진 천주교 탄압의 과정에서 조선에 있던 프랑스 선교사 12중 중 9명이 학살되고 국내 신도 8,000여명도 죽임을 당했다. 이때 탈출에 성공한 프랑스 리델 신부가 중국에 있는 프랑스 해군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이 사실을 알림으로써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1866년 10월 병인박해의 보복을 명분으로 프랑스 로즈 제독은 함대 7 척과 600 명의 군인을 거느리고 강화해협에 도착하여 강화도를 향해 맹포격을 실시한 후 갑곶돈대에 상륙했다.
그러나, 1993년 미태랑 대통령이 고속철도 사업권을 따내기 위해 외규장각의 약탈한 책들 중 한 권을 반환하면서 외규장각의 존재가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 책은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묘소 휘경원 조성사업을 기록한 ‘휘경원 원소도감의궤(徽慶園 園所都監儀軌)’ 였다.
의궤(儀軌)는 의식과 궤범이라는 뜻이다. 즉 중요한 의식이 있으면 그것이 본보기가 되어 국가 의식을 치를 수 있게 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의궤 자체 값어치도 크지만 프랑스에 가있는 의궤는 의미가 각별하다. 의궤는 보통 관청에서 보관하는 분상용과 왕실보관용으로 어람의궤가 있다. 현재 국내에는 분상용만 남아있는데 비해 프랑스에 가있는 것은 어람용(御覽用) 의궤인 것이다.
‘휘경원 원소도감의궤(徽慶園 園所都監儀軌)’
휘경원 원소도감의궤(徽慶園 園所都監儀軌)는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있던 외규장각 도서 중 1권으로 1993년 미테랑 대통령이 반환한 도서이다. 어람용(御覽用) 의궤로 비단과 가죽과 경첩, 걸쇠로 아름답게 제본되었다.
1993년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이 고속철도 사업권을 따내기 위해 외규장각에서 약탈한 책들 중 한 권을 반환하면서 외규장각의 존재가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가 가지고 온 책은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묘소 휘경원 조성사업을 기록한 ‘휘경원 원소도감의궤’였다.
미테랑 대통령은 당시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있는 다른 규장각 도서를 반환 할 수도 있다는 애매한 표현을 사용했다. 이러한 제안은 당시 프랑스, 독일, 일본이 치열한 경합을 벌이고 있던 경부고속철도의 차량을 TGV가 따내려는 의도에서였다. 결국 경부고속철도 사업권은 프랑스에 넘어 갔지만, 그 후 외규장각 도서는 한 권도 반환되지 않았다.
정조가 규장각을 세웠던 이유는 당쟁으로 인한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도하고 규장각을 새로운 정치기구로 이용하고자 함이었다. 정조 자신의 상징물을 보관하고 국내외 수많은 서적들을 망라해 정책을 수립하고 결정했던 규장각은 왕권의 상징이자 핵심 권력 기관이었다. 그러던 중 다시 정조는 강화도에 외규장각을 만들었다. 정조는 이렇게 귀중한 물건들을 왜 강화도에 보관했을까?
강화도는 이미 고려시대 몽고군에 맞서 40년간 항쟁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또 난리가 일어날 때 국왕들의 피난처이기도 했다. 특히 물살이 급한 해로와 드넓은 개펄이 있어 천연의 요새다. 정조는 이런 강화도야 말로 최고의 안전지대라 믿고 영원히 보존할 가치가 있는 기록서고를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해 강화도에 외규장각을 설치했던 것이다.
강화부 궁전도. 가운데 건물이 ‘외규장각(外奎章閣)’ 이다.
강화읍성은 고려시대 몽고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고려 왕조가 강화도로 피난했을 당시 고려의 궁궐로 사용되어 고려궁지로 불려진다. 외규장각은 1781년 조선시대 정조 때 강화읍성 내 행궁 자리에 만들어졌다. 외규장각은 창덕궁에 설립된 규장각의 분소와 같은 역할을 하였으며, 창덕궁에 있던 규장각 도서 가운데서도 특별히 보존할 필요가 있는 중요한 서적과 왕실의 족보, 어필, 어제, 옥인, 금보등을 강화도로 이송 보관하였다.
강화군은 5년 전부터 외규장각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를 시작했다. 70년대 고려궁지를 성역화 하면서 졸속으로 세운 담장 때문에 발굴작업은 어려움에 부딪쳤다. 난관 끝에 최대한 고증에 입각한 외규장각이 영상으로 복원되었다.
프랑스군이 강화에서 외규장각 도서를 약탈 할 당시 조선인의 문화 수준에 너무나 놀란 나머지 문화인이라 자부하던 그들의 자존심이 상할 정도였다 한다. 1866년 병인양요때 강화도를 침공했던 프랑스 해군 장교 주베르는 이런 기록을 통해 당시 조선 사람들의 책 문화에 그들이 깊은 감명을 받았다는 사실을 역사에 남겼다.
‘이곳에서 감탄하면서 볼 수 밖에 없고 우리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또 한 가지는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도 어디든지 책이 있다는 것이다.’
1. 잃어버린 역사, 강화도 외규장각!
인천광역시 강화읍 고려궁지내 빈터.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지만
130여 년전 이곳은 조선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곳이었다.
사라진 조선의 보물창고, 외규장각은 과연 무엇인가?
"오늘 우리가 살펴볼 것은 강화도 외규장각입니다.
1866년 11월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은
이곳 외규장각에 보관된 조선 왕실의 보물 300여 점을 약탈한 후
나머지는 모두 불태웠습니다.
그로부터 1,300여 년간 잊혀졌던 이 외규장각이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된 것은
1993년 당시 프랑스 대통령인 미테랑 대통령이
한 권의 책을 반환하면서부터였습니다.
<휘경원원소도감의궤>라는
왕실의 어떤 행사를 기록한 책입니다.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이 약탈해간 책 중에 한 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1970년대말까지만 하더라도
이 책의 존재는 물론
외규장각이나 약탈 당한 물건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늦게나마 이 책이 돌아오고,
외규장각의 존재가 부각된 것은
프랑스에서 살던 한 한인학자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2. 1978년 프랑스박물관서 외규장각 도서 마침대 발견!~
외규장각의 도서가 약탈 당한 행방을 알게 된 것은 1978년.
당시 프랑스 박물관에 사서로 근무하던 박병선 박사에 의해서였다.
외규장각 도서를 찾는데 일생을 바친
박병선 박사(프랑스 거주, 서지학자).
(*박병선 - 1955 프랑스 유학,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 일하면서 두가지 우리 귀중한 유물 프랑스에 현존함을 세상에 알림.
1972년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 1377년) 알림.)
외규장각 도서를 찾는 일이 한국과 프랑스 사이에 비화된 이래
줄곧 언론 취재를 피해오던 박씨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같이 일하는 분이 베르사이유(본관)에 있었어요.
본관에서 일하던 분이 분관에 출장 나왔죠, 일 보러 늘 나와요.
점심 먹다가
'내가 이런 책을 찾고 있는데, 혹시 본 일이 있으면 좀 가르쳐 달라'고 했죠.
누구한테라도 저는 골백번도 더 되풀이하는 소리니까,
어느 분관에서 왔다고 하면 '너희 분관에 이런 책이 없더냐?'
이렇게 물어 보는 게 저의 인사예요.
물어보니까,
'응, 우리 거기에 있어' 그러더군요."
외규장각 도서가 약탈 당한 지 100여 년,
박씨가 이 책을 찾은 지 20여 년만이었다.
한국일보 1978년 10월 28일. '외규장각 도서 파리서 발견'
"정말 눈물 없이는 못 봤어요.
그 번호가 나오는데 소름이 쫙 끼치고 말도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구요."
- 박병선, 서지학자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 의궤.
기록문화로써 세계적인 자랑거리인 조선의 의궤들은
발견 당시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파손도서창고에 방치되어 있었다.
겉표지만 약간 훼손되었을 뿐
보관상태는 양호한 편이었는데,
당시엔 '중국서적'으로 분리되어 일련번호가 붙어 있었다.
"책은 완벽한 상태였어요.
표지만 좀 상했다 뿐이고, 책 번호가 '중국, 몇 번' 이렇게 써져 있었어요.
그걸 지금은 그대로 놓고 줄 하나 긋고 '중국' 대신 '한국'으로 고쳐져,
그 번호는 그대로 놓고 있는 거예요.
- 박병선, 서지학자
박병선 박사가 외규장각 도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프랑스인 달레가 한국 천주교의 역사를 쓴, <조선교회사>라는 책을 읽으면서부터였다.
1874년 파리에서 발간된 이 책에는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이 외규장각에 불을 지른 사실과
불을 지르기 전에 그곳에서 360여 점의 보물을 약탈해 본국으로 우송해갔다는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거기 목록으로서 금궤가 몇 개고, 책들이 수 백 권 갔고, 옥책문도 가 있고....
그런 것이 달레가 쓴 <한국 교회사>라는 책에 기록되어 있어요.
그것을 저는 읽었으니까 틀림없이 가져왔다는 것을 확신 할 수 있었죠."
- 박병선, 서지학자
외규장각 도서의 행방은
병인양요에 참가했던 프랑스 해군장교 주베르에 의해
이미 프랑스 국내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주베르 여행기 게재 - <세계여행>, 1873년.
"그 책들의 대부분은 , 어떤 책들은 훌륭한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그것은 현재 파리 국립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그러나 프랑스군을 물리친 후
승리감에 더욱 쇄국의 문을 굳게 걸어 잠그었던
당시 조선 정부(흥선대원군 때)는,
프랑스측에 어떤 책임 추긍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외규장각 도서의 일부가 프랑스로 건너간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외규장각 도서를 쫓던 박씨에게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 것은
19세기말 모리스 쿠랑이 편찬한 <조선 서지>였다.
<조선 서지>, 1895년 파리, 모리스 쿠랑.
이 책에는 약탈한 조선 도서에 대한 상세한 목록과 함께
그것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음이 언급돼 있었다.
박씨는 이와 같은 사실을 근거로 20여 년간 프랑스 박물관을 샅샅히 뒤졌다.
그러나 도서관 어디에서도 책을 찾을 수 없었다.
"국립도서관에 번호까지 있는데 실물이 없어요.
이거 어떻게 된 거냐,
그러니까 저는 처음에 생각하기를 1차나 2차 대전 때 분실된 건줄,
거기 있었지만, 중간에 없어진 걸로 알았어요."
- 박병선 박사
그러던 중 프랑스 국립도서관 베르사이유 별관에 근무하던
동료의 귀뜸으로 운좋게 이 책의 행방을 알아낸 것이다.
이때부터 한국에 남아있는 의궤들과
베르사이유에 와 있는 의궤들을 비교, 연구하던 박씨는
그 결과를 한 권의 책으로 발표했다.
'노대통령님께...'
한편, 박씨는 한국정부에 이 책들의 반환요구를 촉구했다.
그 결과 그는 프랑스 박물관측에 밉보여 사직을 강요받았다.
"그러니까 불란서 사람들 한테는 반역자고요,
한국 사람들 한테는 머리카락 잡혔죠.
그런 것을 발표 안 해줬으면 이렇게 복잡할 것도 없고 머리 아플 것도 없는데
왜 이 일을 만들어 놓고 남 못살게 구느냐고 그랬죠.
그래서 욕도 바가지로 먹었어요."
중앙일보 - '불 정부에 반환 요청'
그러나 박씨의 노력이 헛되지 않아
외규장각 도서의 반환 노력이 다각도로 진행되었다.
1993년 당시 고속철도 건설 사업을 놓고
일본, 독일과 경쟁을 하던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은
외규장각 약탈 도서 중 한 권을 가지고 와서 협상에 임했다.
1993년 9월 15일 외규장각 의궤 1권 귀환
상, 하, 두 권으로 만들어진 <휘경원원소도감의궤>.
1882년에 사망한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묘소, 휘경원 조성사업을 기록한 의궤였다.
이 책 한 권이 돌아오기까지 역사는 그렇게 길었다.
"당시 미테랑 대통령은 <휘경원원소도감의궤> 뿐만 아니라
프랑스가 보관하고 있는 외규장각의 나머지 도서들도 반환하겠다고 언급을 했습니다.
그런데 고속철도 부설권을 따내고 난 프랑스측에서는
무조건 반환은 있을 수 없다 이렇게 말하면서
동등한 가치의 문화재와 교환하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와 외교 마찰을 빚고 있는 의궤(儀軌)를 보시겠습니다.
우아한 장정에, 특이한 문고리 모양 손잡이,
우리가 흔히 보아온 다른 장정과 다른 점이 많습니다.
또 이 안을 보시면 아주 다양하고 화려한 그림이 곁들여 있습니다.
도대체 의궤란 무엇이며,
어느정도의 가치가 있는 물건이기에
국가 정상간의 합의까지 깨가면서 반환을 거부하는 것일까요?
외규장각을 알기 위해선 우선 이 책의 가치부터 알아야 합니다."
3. 조선 의궤(儀軌)란 무엇일까?
서울대 규장각.
현재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의궤는 모두 3,500여 권.
그 중 정신문화연구원에 장서각 서고에 보관되어 있는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서울대 규장각 서고에 보관되어 있다.
조선 전기부터 제작되기 시작한 의궤는
왕과 왕비의 책봉, 왕실의 혼인과 장례, 왕과 세자의 책봉, 궁중 잔치, 궁궐 건축 등
다양한 국가 행사의 전말을 기록한 책이다.
의궤는
행사의 절차와 예법에 적합한지를 사전에 왕에게 보고한 내용과
왕의 지시를 받고 행사의 전말을 글과 그림으로 상세히 기록했다.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에
첫장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 의궤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이번 가례 시에 거행해야 할 일들을 모두 전례에 의해 이렇게 마련 했습니다.
이대로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렇듯 의궤는
국왕에게 미리 보고한 행사의 도상 연습이기도 했다.
"'의궤(儀軌)'는 한자로 '의식과 궤범'이라는 뜻입니다.
즉, 중요한 의식이 있으며 그것을 하나의 본보기로 삼아가지고,
그 다음에 행사가 있을 때 전례에 따라
그대로 의식을 치룰 수 있게 하기 위한 목적에서 의궤가 편찬 되었습니다."
- 신병주 박사, 서울대 규장각
행사가 끝나면 의궤청을 마련하여
행사에 동원된 인원과 경비, 유공자의 포상, 설계도 등
구체적인 내용까지 상세하게 기록했다.
의궤 자체의 값어치도 크지만
우리가 프랑스와의 외교적 마찰까지 감수하며
외규장각 도서의 반환을 요구하는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프랑스 해군이 가져간 의궤 도서는
왕실보관용으로써 왕이 직접 보는 '어람용 의궤'라고 합니다.
국내에도 의궤라는 것이 많이 남아있습니다만,
국내에 있는 것은 '비어람용 의궤'이라고도 하고, '분상용 의궤'라고도 하는데
대개 관련 관청의 보관용입니다."
- 이태진 교수, 서울대 국사학과
의궤는 보통 예일곱권씩 만들었는데
그 중 네 권은 4대사고(오대산, 태백산, 적상산, 정족산)에 하나씩 보내고
한두 권은 예조 등 관련 관청에 배치되었다.
특히 국왕전용의 '어람용 의궤'는
임금이 관람한 후 규장각에 보관하다가
1782년 외규장각이 설치된 후
강화도에 보내져 특별히 관리되었다.
따라서 병인양요 이전에 편찬된 어람용 의궤는
모두 프랑스에 가 있고,
국내에 의궤는
4대사고와 관련 관청에서 보관되던 소위 분상용인 것이다.
내용은 같지만 어람용 의궤와 분상용 의궤는 차이가 있다.
우선 겉표지만 하더라도,
어람용은 비단으로 장정을 해
삼베를 쓴 분상용보다 호화로웠다.
장정도
어람용은 화려한 문양의 놋쇠 물림에 다섯 개의 국화 문양의 점을 박았는데
분상용은 무쇠 물림에 세 개의 점을 박는데 그쳤다.
고리 또한 확연히 구분된다.
종이 또한
어람용은 최고급 초주지(草注紙)를 사용한 반면,
분상용은 일반 닥종이(=저주지楮注紙)를 사용했다.
내용물에도
어람용은 당대 최고 도화서가 맡았던 반면
분상용은 그 정교함에서 차이가 난다.
특히 어람용 의궤가 분상용 의궤보다 공을 들인 부분은
글씨를 쓰기 위한 주홍색 인찰이다.
"어람용 같은 경우에는 인찰을 할 때
당주홍이라는 안료를 써서 일일히 수작업으로 긋는 반면에,
분상용은 목판을 대고 자로 쭉 긋는 것이니,
인찰에 들어가는 정성과 재료면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죠."
- 박정혜, 홍익대 강사
어람용 의궤라는 것 말고도
외규장각 도서는 또 다른 중요한 가치가 있다.
건국대 전기공학과 남문현 교수,
그는 외규장각 도서 때문에 천당과 지옥을 오간 적이 있었다.
1980년대 중반, 남교수는
세종때 두 종류의 물시계를 복원하는데 골몰하고 있었다.
당시 그가 재현복원하려고 한 것은
장영실이 만든 보루각의 물시계와 흠경각의 옥루라는 자동 물시계.
"우리가 자격루라고 하는데
12지시마다 울리는 시기((時機)하고 ,
1경-5경까지 북과 징을 울리는 경점을 자동적으로 알려주는 것이죠.
다행히 보루각 물시계(報漏閣 新漏)는
현재 실물이 남아있고,
실록에도 상세한 기록이 있어 복원이 그다지 어렵지 않았지만,
흠경각 옥루(欽敬閣 玉漏)는
기록이 없어 현재 복원이 어려운 상태입니다.
"흠경각 옥루라는 시계는 '흠경각기'가 아주 짧게 되어 있어요.
'보루각기'처럼 자세하게 안 되어 있기 때문에 복원하는데 아주 애를 먹었습니다."
- 남문현 교수, 건국대 전기공학과
흠경각 옥루를 복원하는데 기록이 없어 고심하던 중,
남교수는 <정조실록>에서 결정적인 단서를 발견했다.
기록에 따르면
정조가 흠경각 물시계 중건을 지시하며
시계 만드는 법을 상세히 기록한 옛날 문헌을 읽어봤다는 것이다.
"12선동 등의 의기를 만드는 법이 자세히 기재되어 있어서
충분히모방하여 설치할 수 있을 것이다."
"정조께서 흠경각 옥루 만드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하신 것을 보면
그것이 의궤로 남아있지 않겠나 이렇게 생각한거죠."
- 남문현 교수
남교수가 확인한 결과
광해군때 보루각과 흠경각을 중건할 때 사용한 두 종류의 의궤가
외규장각에 보관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外奎章閣 形止案(외규장각 형지안)>
흠경각영건의궤(欽敬閣營建儀軌)
보루각수개의궤(報漏閣修改儀軌)
제작 과정과 설계도를 상세히 기록하는 것이 의궤이기 때문에
그것만 찾으면 물시계 제작은 시간 문제인 것 같았다.
"그러나 흠경각의궤와 보루각의궤는 두 권 다 없어요.
어디도 없는 겁니다.
유일본인데,
프랑스에 가져가지도 않았고,
불태워버렸을 때 그 자리에 남아있다가 불타버린 겁니다."
- 이태진 교수
당시 외규장각에 의궤 중 부본이 전하지 않는 유일본은 275권,
그 중 40여 권이 약탈당하고,
소실된 것이 235권인데, 남문현 교수가 찾은 것도 그 중에 하나였다.
"차라리 지금 생각해보면 약탈하려면 다 가지고 가든지,
그것이 어느 나라에든 있으면,
우리가 그것을 찾아서 복사를 해서라도 보면 우리가 재현을 해볼 수도 있을텐데,
그것을 태워버렸으니까 저희로서는 참 분통터지는 일이지요."
- 남문현 교수
"병인양요 이전까지 보관되었던 외규장각 어람용 의궤는
모두 불타거나 약탈당했습니다.
그런데 어쩐일인지 이 한질만 남아 보존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경모궁 의궤(景慕宮 儀軌)'>입니다.
초록색 장정을 입힌 이 책,
아쉽게도 물림쇠는 떨어져 나갔지만,
이 의궤는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경모궁 건립의 전말을 기록한 책인데요,
1782년 정조는
모든 어람용 의궤를 외규장각으로 옮겼습니다만,
아버지 사도세자와 관련된 <경모궁 의궤>만은 별도로 이곳 경모궁에 보관했습니다.
아버지가 보고싶을 때마다 와서 보기위해 그랬다는데요,
정조의 효심이 이 의궤를 살린 셈입니다.
그런데 정조가 이 책을 뺀 나머지
어람용 의궤를 모두 강화도로 옮긴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4. 1872년, 정조, 강화도에 외규장각 짓다!
18세기 영,정조대에 조선이 최고의 문화적 전성기를 누린 배경엔
탕평책을 기반으로 한 강력한 왕권이 있었다.
특히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당파싸움의 결과로 보고 있던 터라
즉위초부터 왕권강화를 위해 노력했다.
1776년 스물 다섯살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정조는
즉위 즉시 규장각 설립을 명했다.
창덕궁 후원에
주합루라는 이층 건물을 지어
규장각의 중심 건물로 삼도록 했다.
"아버님의 죽음을 당하고 나서
정계가 소용돌이 치는 과정에서 세손으로서 자리가 불안했어요.
그러다 왕위에 오르고 나니까
자신의 친정 체제를 구축하기 어려워 새로운 기구가 필요했는데
갑자기 새로운 기구를 세우면 남들이 또 의심을 할 수 있으니까,
이미 숙종때에 있던 규장각이라는 기구를 빌어서
새로운 정치 기구로 만들어낸 것입니다."
- 정옥자 교수, 서울대 규장각 관장
정조는 이 건물 2층에 주합루(宙合樓)라는 간판을 달아
신하들과 학문과 정사를 논하는 장소로 썼다.
그리고 아랫층엔 규장각(奎章閣)이란 편액을 달고
자신의 왕권을 상징하는 물품들을 보관하기로 했다.
원래 '규장'이란 제왕이 지은 제문이나 조칙 등을 가리키는 말인데
정조가 이곳에 자신의 글과 인장, 서류 등을 왕권을 상징하는 물건을 보관한 이유는 무엇일까?
"숭유, 유학을 중시하겠다는 것이거든요.
이 규장각이 유학을 중시하는 그런 기구로써 새로이 만들어낸 기구지만,
실제로는 정조가 자신의 정적을 타도하는 왕권 강화를 위해,
초기에는 그런 정치기구의 성격이 확실합니다."
- 정옥자 교수, 서울대 규장각 관장
규장각에 자신의 글과 인장, 서류 등을 보관한 정조는
주합루 서남쪽엔 봉모당을 두어 역대 선왕들의 유물을 보관케 했다.
열고관, 개유와, 서고 등 도서관을 지어
젊은 신하들이 이곳에서 정책을 개발토록 해 이들을 자신의 친위 세력으로 키웠다.
국왕 자신의 상징물을 보관하고
국내외 수많은 서적들을 망라해 정책을 수립하고 결정했던
이곳 규장각은 강화된 왕권의 상징이자 정조 시대 핵심 권력 기관이었다.
통치 체제를 강화한 정조는
1872년 이곳 강화도에 외규장각을 설립했다.
외규장각은
규장각에 보관한 책들과 왕실의 유물들 중
영원히 보존할 가치가 있는 것만 옮겨온 특별 서고였다.
정조 6년에 완성되어
왕실의 책보, 어필, 주요 서책 등 762종, 4,892책이 이곳으로 봉안됐다.
"정조대에 외규장각에다 왕실 문서를 다 보관을 하고 새로 만든 의궤들의 품위를 높인 것은
1차적으로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 것이 목적이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사대부들이 왕실 권위에 도전하는 분위기를 굉장히 강하게 보이고 있으니까
사대부들을 누르고 왕실을 높이는 각종 사업을 했고, 그 중 하나가 외규장각 사업이지만,
보다 궁극적인 바램은 백성을 위한 진정한 유교 정치,
백성이 주인인 나라를 실현하려는 이런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 이태진 교수
5. 강화도!
최고의 보장처?~ 최후의 피난처?~
"외규장각은
조선 왕조의 소중한 유물을 보관하는 일종의 보물 창고였습니다.
왕이나 왕비의 책봉 사실을 옥에다 기록한 옥책,
또 왕실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금보,
그리고 어람용 의궤 등,
정조가 죽은 뒤에
창덕궁의 규장각은 단순히 도서를 관리하는 부서로 전락했지만
이곳 강화도의 외규장각만큼은 그 역할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조선 왕실이 그토록 귀중한 왕실 유물을
서울이 아닌 강화도에 보관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고려 시대,
몽고군에 맞서 근 40년간 항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강화도.
수도 서울과 60킬로 밖에 떨어지지 않은데다가
한반도의 남과 북을 잇는 해로상의 요지라는 점에서
일찍부터 국왕의 피난처로써 주목을 받았다.
특히 물살이 급한 해로와 드넓은 갯벌이 강화도를 천연적인 요새로 만들었다.
조선 초기만 해도 강화도에 배를 댈만한 곳이 동북으로 두어곳에 불과했다.
이런 이유로 강화도는 조선 초기부터 확실한 보장처로 꼽혀 왔다.
"북쪽으로 승천포 건너, 동쪽으로 갑곶, 오직 두곳에만 배를 댈 수 있다."
- 택리지 팔도총론
"보장처라는 이야기는 전쟁이 일어났을 때
왕과 조정이 그곳에 들어가서 지키면서 전란을 극복할 수 있는 곳이란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최고, 최후의 안전 지대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곳이죠."
- 이민웅, 서울대 박사과정, 18세기 강화사 전공
더구나 강화도는 임진왜란때에도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
전쟁후 선조가 유일하게 불타지 않은 전주사고의 서적들을
이곳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로 옮긴 것도
이곳 강화도가 비교적 안전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후로도 강화도는 보장처로써의 구실을 톡톡히 했다.
후금의 등장으로 북방 정세가 복잡해지자
광해군은 강화도에 태조의 어진을 모셨다.
정묘호란 이후 인조는
또 다른 화가 미칠 때를 대비해
강화도에 임금의 임시 거처인 행궁을 세웠다.
보장처로써 이곳의 위상을 한층 높여준 것은 이곳의 비옥한 토지다.
특히 강화도는 갯벌이 넓고 해안의 굴곡이 심해 간척사업의 최적지였다.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고려 고종때 이미 둑을 쌓아 농사 지을 땅을 넓혔다는 기록이 있다.
"제포와 와포에 둑을 쌓아 좌둔전을 만들고
이포와 초포에 둑을 쌓아 우둔전을 만들다."
- <고려사절요 고종 안효대왕편
이렇게 국가 주도로 간척을 한 것은 고려때부터다.
13세기 몽고 침입을 맞아 최우 정권이 강화도로 임시 수도를 옮기고
몽고군과 장기전을 벌이며
군량 문제를 자체적으로 해결하려는 목적에서 시작되었다.
그 뒤 임진왜란 이후 강화도 간척은 본격적으로 이뤄진다.
당시만해도 마니산은 강화도와 떨어진 섬이었는데
숙종 무렵 간척을 하면서 지금처럼 하나의 섬으로 연결되었다.
강화진영 민진원이 숙종의 명으로 만든 선두평.
현재 도로로 사용하고 있는 이곳이 숙종 당시 만든 선두포 제방이다.
그런데 간척 사업으로 토지는 크게 늘었지만 문제가 생겼다.
갯벌이 줄어들어 지형이 변하면서 배가 정박할 수 있는 곳이 늘어난 것이다.
선두포 축언시말비
"그 전만 해도 벌이 상당히 넓은 지역이었는데
지금 강화도에 해안도를 따라 있는 평지의 논은 모두 간척지였거든요.
그럼 벌써 예전 보다 벌의 규모가 엄청 축소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상태에서 강화도는
이제 예전과 같이 적이 상륙하지 못하는 지역이 아닌 것이죠.
그리고 실제 청의 침략을 경험하죠."
- 노영구, 서울대 박사과정, 돈대 전공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가 청나라에 함락된 이후
강화도의 방어책이 본격적으로 거론되었다.
"만약 적이 조강으로부터 배를 이용하거나
혹 떼를 타고 내려오면 어느 곳이고 배를 댈 수가 있어
방어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 강화유수 조복양의 상소
즉 해안선의 변화로 배를 댈 곳이 많이 생겨
방어할 곳이 많아졌다는 문제 제기가 있었다.
북벌 정책이 논의 되던 효종때에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동쪽 해안선을 따라 강화 외성을 쌓았다.
숙종때에는 각 해안 전역에 감시 초소에 해당하는 돈대를 세웠다.
오삼계의 난으로 청나라의 정세가 불안해지자
강화도의 방어가 한층 강화된 것이다.
망루와 포대의 기능이 결합된 돈대는
임진왜란 이후 불랑기포라는 화포를 중국에서 도입하면서 생긴 새로운 전술 개념이다.
분오리 돈대
조준 사격이 가능한 대포가 등장하자
예전처럼 해안선을 따라 성곽을 축조하지 않고,
해안선에 일정 간격으로 작은 성곽인 돈대를 세우는 게
방어하기에 효율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돈대라는 개념이
임진왜란 이후에 이미 조선에 도입되었어요.
최초의 돈대는 척후의 개념이 강하거든요.
조선에서는 강화도 주변 49곳에 돈대를 설치하고
거기에 당시 발달한 화포를 가지고
강화해역을 방어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든 것입니다.
그 상태에서 예전보다 훨씬 작게 만든 불랑기포라는 정확한 화포를 가지고
상륙하는 적의 배를 교차사격으로 저지가 가능한 시기가 된 것입니다."
- 노영구, 서울대 박사 과정
숙종 5년, 49개의 돈대가 만들어졌는데
특히 북쪽 조강 유역과 김포를 마주보는 염화 일대에 집중적으로 세워졌다.
돈대 포구는 굴곡이 심한 강화 지형을 잘 이용해 설계되었다.
만으로 침입하는 적을 향해
돈대와 돈대의 교차사격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요새화 작업과 함께 통합 방어망도 정비되었다.
인조때는 남양만 화량에 있던
경기수영을 강화로 옮긴 뒤 삼도수군통어영으로 확대 개편했다.
북벌을 준비했던 효종때에는
영종진과 초지진, 제물진, 승천보 등 원래 경기도 서북 육지쪽에 있던 진과 보를
모두 강화도 가까이 속속 배치했다.
"삼도수군통어영은
삼남지방에 있던 삼도수군통제영에 대비되는 것으로써
경기도, 황해도, 충청도의 수군을 통괄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통어영이 강화도에 생기고,
진과 보들이 강화도를 중심으로 해서 재배치되었다는 점은,
강화도를 중심으로 방어체제를 성립시켜나갔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 이민웅 서울대 박사과정, 18세기 강화사 전공
이렇게 막강한 방어체계를 갖춤으로써
조선의 왕들은 강화도는 어떤 경우에도 함락되지 않을 거란 확신을 가졌다.
이런 강화도이기에 정조는 1782년 외규장각을 세웠던 것이다.
"지금 제가 서 있는 곳이 바로 강화도의 갑곶입니다.
조선의 왕들이 강화도를 얼마나 중시했는가 하는 것은
저기 김포쪽에서 바라보이는 문수산성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최후의 보장처인 강화도를 지키기 위해 성벽을 서울쪽으로 쌓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특이한 것은 성문입니다.
성문이 바다쪽으로 나 있습니다.
그것은 유사시 강화도로 내왕토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처럼 강화도 외곽에다 성을 쌓아 천혜의 요새 진을 설치한데다가
외성과 돈대까지 쌓은 후 비로소 외규장각을 세운 것입니다.
갑곶에서 강화행궁까지는 십리길,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외규장각에 왕권의 상징물을 보관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물품이었을까요?
그리고 그 귀중품들은 어떻게 보관이 되어있었을까요?"
5. 외규장각 터, 그리고 왕실의 상징물들!~
강화도는 5년전부터 외규장각 터를 발굴 조사를 시작했다.
외규장각의 정확한 위치를 찾기 위해서다.
세차례에 걸쳐 발굴 조사를 했지만
아직 외규장각의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했다.
원래 이곳은 고려 시대엔 고려궁,
조선 시대엔 조선 행궁이 있었던 자리다.
외규장각 이외에도 이곳엔 여러 건물이 있었던데다
병인양요로 불탄 이후엔 이곳에 주민들이 살아 건물의 배치를 가름하기 힘들다는 것이
관계자의 설명이다.
현재 외규장각의 터로 유력하게 꼽고 있는 곳은
70년대 조성한 고려궁지 뒤쪽이다.
"외규장각 부재들이 지금 이 담장 안쪽으로 들어가고 있거든요.
해서 현재 고려궁지라는 담을 제거를 해야만, 어디서 어떻게 끝나는지 알 수 있거든요."
- 김종규 연구원, 한림대 박물관
고려궁지 뒷편에 옛 담장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70년대 고려궁지를 성역하며 졸속으로 세운 담장 때문에 발굴 작업이 어려움에 부딪혔다.
그 담장을 제거하고 그 안쪽 일대를 발굴해보면
외규장각의 건물 배치를 알 수 있다.
1783년 강화유수 김노진이 편찬한 <강화부지(江華府志)>는
행궁 일대를 복원하는 중요한 자료다.
이 책에 외규장각은
'행궁의 동쪽, 진전으로 표기된 장령전의 서쪽'으로 표기돼 있다.
행궁 - 외규장각 - 진전(장령전)
외규장각의 위치를 확인해줄 또 하나의 자료는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있는 <강화부 궁전도>다.
고종 18년 강화 행궁 일대를 복원하려는 목적에서 그린 이 지도에도
행궁의 오른쪽 아래 외규장각이 들어섰음을 보여주고 있다.
정면 6칸의 외규장각 건물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모두 넉 장으로 구성된 궁전도를 합성하면
행궁 일대의 건물 배치가 한 눈에 들어온다.
그렇다면 이 건물들의 실제 배치는 어떻게 될까?
언덕위 큰나무 뒤편엔 영조의 영정을 모신 만령전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명위헌이 있던 자리가 장령전이 있던 곳이다.
그 왼쪽 옆으로 빈터에 바로 외규장각이 있었다.
그 옆 서쪽 끝으론 인조때 세운 행궁이 자리하고 있었다.
행궁(인조) - 외규장각(정조) - 명위헌(장령전) - 만령전(영조 영정)
그런데 외규장각 내부에는 어떤 물건이 어떻게 보관되어 있었을까?
1857년에 작성된 <외규장각 형지안>.
외규장각 목록격인 이 책에는
보관된 물품의 명칭과 숫자, 보관 위치까지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책보(冊寶), 보략(譜略), 지장(誌杖), 어제(御製),
어필급장치서적형지안(御筆及藏置書籍形止案)
예를 들어 한가운데에는 봉안장(奉安欌)이 있어
왕과 왕족의 신분을 상징하는 금보, 옥책, 교명, 옥보, 죽책 등을 보관했다.
<외규장각 형지안>에 따라
130년전 외규장각 내부를 복원해보자.
우선 외규장각 내부 한가운데 정간 봉안장이란 장이 하나 있었다.
봉안장 안에는
왕과 왕비의 책봉 사실을 기록한 옥에 새겨 기록한 옥책과
왕자나 공주 등 왕족을 책봉할 때 대나무쪽에 기록한 죽책이 있었다.
백철로 주조하고 황금으로 도금한 임금의 인장, 금보나
왕의 친필(어필) 등
왕실의 권위을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품목들이
이 장 안에 보관되어 있었다.
봉안장 좌우에 두 개의 탁자가 있었다.
왼쪽 탁자(정간 좌탁)엔 병풍과 탁본, 서화, 족자류가 보관되었고,
오른쪽 탁자(정간 우탁)엔 귀중품을 담은 네 개의 상자가 올려져 있었다.
이 안엔 정조 유능과 어제 등 역대왕들의 유물이 보관되어 있었다.
그 밖으로 동쪽엔 탁자가 있어(동탁)
고금의 중요한 서적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북쪽에는 탁자가 두 개 있었는데(북탁)
바로 이곳이 의궤를 보관하던 곳이었다.
단일 품목으론 숫자가 가장 많았던 의궤는
북쪽 탁자를 메우고도 모자라 서쪽 탁자(서탁)까지 이어졌다.
1866년 병인양요 당시 이곳엔
왕실 관련 귀중품과 의궤, 일반 도서 등
총 5,067권의 도서가 보관되어 있었다.
왕족 신분표지물 25점.
어제어필 68점.
의궤 401종 667책.
기타 도서 606종 4,400책.
6. 1866년, 프랑스 함대 강화도 침범!
외규장각 약탈, 그리고 불을 지르다!~
"당시 이곳에 보관되어 있던 물품은 하나하나가 국보급 유물이었습니다.
금보나 옥인, 옥책과 같은 물건은 물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물건이었고,
왕의 친필 문서도 또한 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여기에 보관된 의궤 중에는
부본이 없는 유일본이 무려 275권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17세기 들어 서양배들이 출몰하면서
이 천험의 요새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개항을 요구하면서 열강들은
한결같이 수도 한양의 관문격인 강화도를 주목했던 것입니다."
1866년 10월 11일.
로즈사령관이 이끌던 군함 7척, 천여 명의 프랑스 극동 함대는
프랑스 신부 처형(병인박해)를 구실로
중국 산둥성을 출발해 강화도를 침범했다.
3일후, 그들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강화도 제 1의 방어 지점인 갑곶에 정박한다.
이때 길잡이로 동행했던 리델신부(조선교구 6개 교구장 역임)의 보고서에 의하면
강화도는 거의 무방비상태였다.
오죽했으면 프랑스군이 조선이라는 나라를 걱정할 정도였다고 전했다.
도착 즉시 프랑스 장교 몇이 뭍에 올라가 요새를 둘러봤다.
"요새 안에는 포가(砲架)도 없고
녹이 슨 보잘것 없는 몇 개를 발견했는데,
프랑스 장교들은 이 불쌍한 민족이 방어를 제대로 할 수 있을거란 생각조차 하지 않을 정도였다."
- 리델 신부, 보고서
갑곶에 도착한 지 이틀째인 10월 16일,
프랑스군은 강화 남문을 공격해
단 한 명의 피해도 없이 강화성을 점령했다.
당시 강화도를 지키던 병력은 육, 해군 합쳐 2천여 명.
하지만 이는 명부상 숫자에 지나지 않았다.
수대에 걸쳐 외성과 내성을 쌓고 거기다가 돈대까지 쌓은 강화도가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진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정규군들은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면 봄, 가을에 두 차례씩 정기적으로 실시되는
군사훈련조차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였으므로
사격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 서인한 연구원, 군사편찬연구소
강화읍성을 점령한 프랑스군은
강화 일대에 정밀 수색을 시작했다.
이들은 소총이 만여 자루 보관된 무기고부터 접수했다.
점령군은 한 창고에서는 대량의 은괴까지 발견했다.
당시 로즈사령관은 은괴를 수습하고,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본국에 보고했다.
"한 창고에서 은괴 18상자를 발견했습니다.
본인은 즉시 위원회를 구성해
그것을 정확히 소유하기 위해서 계산하고
숙영지로 운반케 했습니다.
위원회는 그것이 195,217프랑의 가치가 있음을 인정하였습니다."
- 1866년 10월 22일, 로즈
프랑스군이 발견한 이 은괴는 어떤 용도로 보관되어 있었을까?
"비상시에 쓸 돈은 '봉고은'이라고 하는데,
은으로 마련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은을 궤짝에 넣고,
겉에 종이로 발라 도장을 찍어뒀기 때문에
허가없이 누구도 열 수 없는 것이었지요."
- 이태진 교수
무력으로 강화를 점령했지만
당시 프랑스군은 조선 사람들의 높은 문화수준엔 감탄을 금치 못했다.
프랑스군 장교 주베르는 귀국후 쓴 여행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우리 자존시을 상하게 하는 또 한 가지는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도 어디든지 책이 있다는 사실이다."
가정집에 책을 보고 자존심이 상했던 프랑스 군인들이
의궤를 비롯한 외규장각의 책들을 보았을 때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
리델 신부는 다음과 같이 보고서를 썼다.
"우리는 이 책들의 뛰어난 인쇄술,
양피지로 만든 것 같은 종이,
글자를 금으로 상감해 만든 수많은 책들,
구리 경첩에 구리로 된 쇠붙이로 장식한 제보술을 보고 감탄했다."
- 리델 보고서
로즈는 위원회를 구성해 물품들을 수습하고 본국 해군성에 목록을 보고했다.
가철된 큰 책 300권
가철된 작은 책 9권
흰색 상자에 든 소책자 13권
소책자 10권
소책자 8권
한.중.일 지도 1점
천체도 1점
족자 7점
한문이 적힌 대리석판(옥책) 3점
대리석판을 담고있는 소 상자(옥책함) 3점
갑옷과 투구 3벌
가면 1
모두 359점.
- 1866. 10. 20 작성한 보고서.
이들은 이미 이때 이 약탈품들이
자기들 국립도서관에 보관될 가치가 있는 것임을 보고하기도 했다.
가철된 300권.
이것이 바로 반환 문제 전면에 떠오른 의궤들이다.
"비단과 구리로 장식이 잘 되어있죠.
열어보니 그림도 있죠.
그러니 이것은 중요한 고문서다, 그렇게 생각하고 가져갔을 거예요."
- 박병선 교수, 프랑스 거주, 서지학자
11월 9일, 정족산성에서 양헌수 부대에게 일격을 당한 로즈사령관은
이튿날 황급히 철수하면서 조선 행궁 일대를 모조리 불태웠다.
이로써 외규장각은 역사의 뒷편으로 사라졌다.
7. 약탈된 300권의 의궤들!
그 행방을 찾아!~~
300권의 의궤 중
박병선 박사에 의해
297권이 프랑스 국립도서관 베르사이유 본관에 있음이 먼저 확인되었고,
나머지 두 권이 프랑스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음이 추가로 밝혀졌다.
300권의 의궤 중 나머지 한 권은 이태진 교수에 의해 확인됐다.
1992년 이교수는 영국에 유학 가 있는 한 한국 학생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결정적인 제보를 받았다.
"그 학생한테 제가 의궤 이야기를 했더니,
런던에서 한국 관계 학회가 열렸는데
북한 학자들이 두 명 와서 그 안내역을 자기가 맡게 되었고,
대영박물관에 가게 되었는데,
거기 큐레이터가 그분들한테 아주 아름다운 그림이 있는 책을 한 권 보여주었는데,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책이 그 책이 아닌지 모르겠다고 하기에,
제가 귀가 번쩍 띄여서 찾아갔지요."
- 이태진 교수
<기사진표리진찬의궤(己巳進表裏進饌儀軌)>
곧바로 런던의 국립박물관에 달려간 이교수는
<기사진표리진찬의궤>라는 이 책이
외규장각에서 분실된 300권 중 마지막 한 권임을 확인하고
직접 사진을 찍어와 공개했다.
1809년,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의 회갑을 맞아
옷감과 음식을 올리는 전말을 기록한 의궤였다.
이 의궤에는 회갑 잔치에 동원된 사람들의 배치는 물론
동원된 악기의 배치와 모양과 명칭 등
화려한 회갑 잔치의 이모저모가 화려한 그림과 함께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제가 펼쳐보고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어요.
제가 서울 규장각에서 도저히 볼 수 없었던 그런 그림이 있는 의궤였어요.
아마 이 의궤가 최상품이었던 것 같아요."
- 이태진 교수
프랑스군이 약탈한 이 책이 어떻게 영국까지 건너가게 되었을까?
영국 대영박물관엔 그 경로를 알려주는 영수증이 남아있었다.
영수증엔 그것이 조선의 왕실 의식을 기록한 책이라는 점과
1894년 10월 24일 대영박물관이 파리의 한 상회로부터 10파운드에 구입했다고 적혀 있었다.
"누군가가 파리국립도서관에 보관된 책 중에 한 권을 빼낸 것이겠지요.
자기가 보기에도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돈이 될거라 생각하고 의궤 한 권을 빼돌린 것이겠죠."
- 이태진 교수
"이 외규장각의 도서들은 프랑스 뿐만 아니라 영국에 있는 것도 있습니다.
또 이 프랑스가 약탈해간 360여 점의 물품 가운데
의궤외에 행방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는 물품들도 많이 있습니다.
사실 이 물품들도 행방을 추적해 마땅히 돌려받아야 하는 것이지만
이 소재가 밝혀진 의궤조차도 프랑스는 돌려주지 않고 있습니다.
남의 문화재를 약탈해갔으면 돌려주는 게 우리의 상식이지만
국제사회에서는 이런 상식조차 통하지 않고 있는 모양입니다.
정조가 만들었던 130여 년전 강화 외규장각.
프랑스군에 의해 약탈당하고 불탔던 외규장각은
이제 그 아픈 역사를 잊고 복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은 건물의 복원만이 아닙니다.
그곳에 있었던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도 원래 자리에 놓여져야 할 것입니다."
- 유인촌의 역사스페셜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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