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스페셜100선

30 가야인은 성형수술을 했다

사랑의고향길 2013. 9. 28. 18:49

가야인은 성형수술을 했다 
경상남도 김해시 예안리에서 발견된 가야인들의 집단 무덤에서는 수많은 가야인들의 뼈가 거의 완벽한 형태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같은 시대 가야인들과는 달리 얼굴 폭이 좁고 미간에서 정수리까지의 길이도 짧은 특이한 인골들이 있었다. 인골은 역사를 파악하는데 있어 더없이 중요한 유물이다. 이 인골을 통해 가야인의 생김새는 물론 생활모습까지, 가야의 생생한 역사를 되살린다. 
1. 수수께끼의 인골
김해시에 위치한 작은 마을 예안리. 그저 평범한 농촌의 한 귀퉁이 논에서 1600년 전의 역사가 깨어난 것은 우연에 의해서 였다. 당시 땅주인이 논을 개간하려고 흙을 파내자 예사롭지 않은 유물이 나왔던 것이다. 땅속에서는 오래된 무덤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고고학자들은 이 놀라운 발견에 주목했다. 그곳은 가야인들의 집단 무덤터였던 것이다. 무엇보다 놀라운 발견은 가야인의 인골이었다.
2. 편두를 한 가야인
중국의 역사서에는 가야인에 대한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전하고 있다. ‘아기가 태어나면 돌로 머리를 눌러 납작하게 했다. 지금도 진한 사람들은 모두 머리가 납작하다’ 기록 속의 진한에는 김해지역의 가야인도 포함된다. 머리를 납작하게 한다고 해서 그 당시에는 이를 편두라고 했다. 역사 속에서만 존재했던 편두의 실체를 예안리에서 확인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가야인들은 어떻게 편두를 만들었을까.
3. 예안리 무덤터
가야인들이 조성한 예안리의 무덤은 밀집된 이중구조를 보이고 있다. 여기에서 발견된 인골만 해도 190여 체. 그 동안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인골을 모두 합해도 예안리 인골의 숫자에는 미치지 못한다. 왜 예안리 땅에서만 이렇게 많은 인골이 나왔을까. 겉으로 보기에 무덤터는 그저 평범한 땅이였지만 그곳에 뜻밖의 실마리가 있었다.
4. 인골에 담긴 가야인의 삶
1600년 전 가야인들은 어떤 생활을 하고 어떤 질병을 앓았으며, 또 무엇 때문에 죽음에 이르렀을까? 인골에는 그 사람에 대한 정보가 담겨있다. 특히 인골 중에서도 치아는 가장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있다. 예안리 가야인의 인골들은 기나긴 세월의 침묵을 깨고 자신들의 삶을 말해주고 있었다.
5. 가야와 늑도 그리고 일본
경남 사천시 앞 바다에 위치한 늑도는 100여 가구가 살고있는 작은 섬이다. 섬전체가 유적지라고 할 정도로 늑도에서는 지금도 기원 전의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그런데 늑도에서 출토된 인골이 예안리의 인골과 똑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예안리 가야인들과 같은 계통이었던 것이다. 늑도에서 발굴된 한 인골은 송곳니를 뺀 것으로 보이는 발치의 흔적을 하고 있었는데, 일본의 큐슈 지방에서도 발치를 한 인골이 출토되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이렇게 똑 같은 풍습이 나타난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 실마리를 찾은 것은 늑도에서 출토된 유물에서였다.
6. 가야 사회의 변화
4세기 이후 가야인골에서 편두의 풍습은 사라진다. 그리고 무덤의 양식도 변했다. 그리고 느닷없이 이전에는 없었던 매장문화가 등장하게 된다. 바로 순장이다. 이것은 가야를 지배하고 있는 정신문화가 사라지고 새로운 문화가 등장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가야인은 성형수술을 했다 .

 

 

 

 

 

경남에서 1600년전 가야인들의 집단무덤터가 발견되었다. 이 무덤터엔 여러인골이 출토되었다.

김해시 예안리에 한 농민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다.

이 집단 무덤터엔 180여개 무덤과 2천여점의 유물이 나왔다. 190여구의 인골이 양호한 상태로

출토되었는데 두개골이 눈길을 끈다. 예안리에서 발견된 이 두개골은 일반 두개골에 비해

납작하게 눌러져있다. 아마 어떤 압력을 가해 일부러 기형으로 만들었을것이다.

 

 

이는 중국문현에도 확인된다. 머리를 납작하게 만든다고해서 이것을 편두라고 한다.

편두를 하는 방법은 태어난 아기의 앞이마를 돌로 눌러 만든것이다. 압력을 가한

뼈는 얇아지는데 편두골이 많이 훼손된것도 이 때문이다.

편두 인골을 복원해보니 일반 가야인에 비해 이마가 뒤로 눕혀졌고 코가 뾰족하고

턱이 작았다. 편두는 일종의 성형수술이었다. 편두의 풍습은 가야뿐 아니라 이집트, 마야에서도

발견된다, 그런데 예안리 인골의 편두는 여자에게만 나타나며 일부에게 국한되어있다.

아마 무당과 같은 특수한 직업이었을것이다.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인골을 합쳐도

예안리에서 발견된 규모에 못미친다. 예안리 무덤터에선 패각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이곳은 바닷가 백사장이었던것이다 .

비가 오면 무덤을 덮고 있는 패각이 녹으면서 인골에 칼슘을 제공하여 인골이 지금까지 보존되게

도와주었다. 지하수와 토양의 알칼리화도 인골보존에 도움이 되었다.

예안리 인골중엔 두개골에 인공적으로 도려낸 흔적이있다. 가야인들은 뇌수술을 했던것같다.

뼈를 분석하면 여러가지 질병들도 알수있다.

척추디스크나 충치도 그 당시에 흔한 질병이었다. 특히 가야인들은 치아에 균열이 많은데

딱딱한 음식을 먹었을것이다, 사천늑도에서도 예안리 인골과 똑같은

인골이 발견되었는데 이를 뽑은 발치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일본에서도 비슷한 모양의

인골이 발견되었는데 오래전 한반도 남부인들이 바다를 건너 왜로 간것이다.

 

 

편두풍습은 6c 이후 완전 사라진다. 무덤양식의 변화와 순장문화의 등장은 가야주도세력에

큰 변화가 있었을것이다, 가야는 4c이전 목곽묘에선 부장품을 시신옆에 두었으나 4c이후부터

부장품을 따로 두거나 시신발밑에 두었다. 무덤양식이 변한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문화가 등장

했기때문이다. 북방세력이 한반도 남부로 이동하여 이런 문화가 등장했을수도 있다.

가야는 신비의 왕국으로, 앞으로 연구를 지속적으로 해야할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