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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최초공개! 임진왜란 최후 전투도

사랑의고향길 2013. 9. 28. 18:49

최초공개! 임진왜란 최후 전투도 
지금까지 임진왜란 전투도들 중 가장 오래된 그림으로 알려져 있는 <평양성 전투도>는 전투가 끝나고 200년 후에 그려졌다고 하는데, 대강의 정황만을 형식적으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번에 입수된 <임진정왜도>는 마치 요즘의 종군기자들이 전투상황을 사진에 담아 보여주듯이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해주는 일종의 종군 기록화였다 
1. 종군기록화
<임진정왜도>는 순천왜성과 광양만 일대에서 벌어진 임진왜란 최후 60일 간의 격전을 담고 있다. 성을 지키는 왜병, 소서행장의 이름이 뚜렷이 보이는 군기가 이를 입증한다. 소서행장은 임진왜란이 끝날 무렵 순천왜성에 주둔해있었던 장수이다. 또한 화염에 쌓인 배와 바다로 몸을 던지는 왜군, 그리고 왜군을 공격하는 명군을 묘사하고 있는 이 한 폭의 그림은 너무나도 사실적이고 현장감이 넘친다.
2. 소서행장의 사령탑
그림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규모나 시설면에서 굉장한 성으로 보이는 한 거대한 왜성이다. 이 성에는 일본성이라면 반드시 성의 한 가운데 갖추어져 있는 천수각이라는 누각이 있다. 천수각은 왜성의 사령탑과 같은 곳이다. 지금도 순천 광양만 바닷가에 가면 소서행장이 지휘했던 천수각 축대가 확연히 눈에 들어온다.
3. 정유재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5년 후 풍신수길은 15만 명의 왜군을 이끌고 정유재란을 일으킨다. 다시 전쟁을 일으킨 왜군은 임진왜란 때와는 달리 전라도를 철저하게 유린하며 가는 곳마다 무자비한 살육을 자행한다. 하지만 명량에서 대패한 소서행장은 순천으로 퇴각, 왜성을 쌓고 주둔하게 된다.
4. 남해안의 왜성들
소서행장이 순천왜성에서 주둔한 기간은 약 11개월. 소서행장뿐만 아니라 다른 일본 장수들도 남해안을 따라 성을 쌓아 정유재란 전쟁 기간의 절반 동안을 주둔해 있었다. 이 왜성들은 일본으로 끌고 갈 조선인들이 잠시 머문 임시수용소의 역할을 했는데, 이곳을 통해 일본에 포로로 건너간 조선인의 수는 15만 명을 넘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이 왜성은 문화약탈의 센터였다.
5. 조,명 연합군의 왜성공격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왜성들이 25군데나 포진해 있는 남해안 일대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준비한다. 이른바 4로 병진작전이다. 4로 병진작전은 남해안 일대에 있는 왜성들을 육군과 수군이 네 개의 방향에서 동시에 공격한다는 것이다. <임진정왜도>는 이 수륙합동작전이 전개되는 60일간의 순천왜교성 전투를 처음부터 끝까지 세세하게 담고 있다.
6. 노량해전
피비린내 나는 격전, 노량해전. 숱한 왜병의 시체와 난파선이 바다를 피로 물들인 이 유명한 노량해전은 순천왜교성 전투의 수륙합동작전이 연합수군의 참패로 끝나고 일시적으로 소강상태에 빠져든 지 한달 뒤에 대대적으로 재개된 전투이다.
7.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 남해성 소탕작전
흔히 임진왜란 7년 전쟁은 노량해전과 함께 완전히 끝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노량해전이 끝난 뒤에도 <임진정왜도>의 그림은 계속되고 있었다.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가 노량해전이 아니라는 것이 이 그림을 통해 새롭게 밝혀진 것이다. 

 

 

최초 공개 ! 임진왜란 최후 전투도

 

 

 

 

 

 

임진왜란 전투기록화는 대부분 전쟁이 끝나고 한참후에 그려진것들이다 .

그러나 95년 미국에서 입수된 임진왜란 전투도는 전쟁이 일어났던 그때 그려진것이다.

당시 전쟁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있다. 아주 사실적이고 현실감이 넘친다.

그러나 현재 원본은 어디있는지 모르고 사진만 입수되었다. 이 여러장의 그림들은

'정왜기공도권' 이라 불리는 6.5m짜리 두루마리이다. 순천왜성그림에서 천수각이

지금도 순천에 남아있다. 순천왜성은 난공불낙의 성이었다. 이 성은 고니시(소서행장)가

쌓았다. 임잰왜란때 실패가 전라도 곡창지대를 점령하지 않았기 떄문이라고 판단한

도요토미히데요시는 정유재란을 일으키면서 전라도를 침공하였다.

 

 

일본은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해 이순신의 함대와 격돌하다 참패하면서 남하하기 시작하는데

고니시는 이때 순천왜성에서 주둔하게 된다. 이런 왜성은 남해안에 28개가 있다.

남해안일대의 모든 왜성들은 바다가 보이는 요새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지어졌다.

이들은 일본으로 끌고갈 조선인 포로를 임시로 수용하는 역활을 했다. 문화약탈인것이다.

왜성은 임시로 머무는 것이 아닌 오래 주둔하여 점령지역활을 목적으로 하였다.

조명연합군은 이런 왜성에 대한 총공세를 가한다. 그 중 유일하게 동양3국이 맞붙은

수륙연합작전인 순천성 전투 60일간의 기록을 그린것이 '정왜기공도권'이다.

 

 

조명연합군은 수륙합동작전을 개시한다. 그러나 왜성은 난공불낙이었다. 작전이

실패한것이다. 그날밤 수군도 총공세에 나섰으나 패하고 만다. 당시 명군제독이었던

유정의 모호한 태도 때문에 군사의 사기가 꺽였기 때문이다. 유정은 결국 퇴각명령을

내린다. 명나라와 유정의 소극적인 태도로 순천성 전투가 끝났다.

그로부터 얼마후 일본군의 철수명령이 내려졌다. 당시 소서행장 고니시는 유정을

매수해 안전한 귀국길을 보장받았다. 그러나 이순신은 연합수군을 이끌고

노량으로 나아간다. 7년 전쟁의 종지부인 노량해전인것이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이 전사한다.

 

 

노량해전은 고립된 고니시를 구하기 위해 출전한 구원병과 조명연합군의 전투인것이다.

그런데 이 그림은 더 이어진다. 노량해전이 끝이 아닌것이다. 그것은 조명연합군이 벌인

남해도 소탕작전인것이다. 일본의 패잔병들을 샅샅히 뒤져 소탕하는 모습을 그림은

묘사하고 있다.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는 노량해전이 아닌 남해도전투였다.

 

 

임진정왜도는 순천왜성전투 전개상황과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가 노량전투가 아닌

남해도소탕작전이었음을 알게해준 소중한 기록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