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최대 미스터리 - 북한군, 왜 3일간 서울에서 머물렀나? |
1950년 6월 25일 새벽, 기습적으로 공격을 시작한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하기 시작해 단 3일만에 남한의 심장부인 서울을 점령했다. 그러나 북한군은 갑자기 서울에서 진격을 멈춘다. 세계 어느 나라 전쟁에서도 초기에 진격을 멈추는 예는 없었다고 할 만큼, 전쟁초기에 상대방에게 시간을 준다는 것은 군 전략상 아주 치명적인 것이라고 한다. |
1. 문제의 3일 |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이에 비해 한국군은 방어능력을 거의 상실한 상태였기 때문에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뒤 곧바로 한강을 건넜다면 전황은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북한군이 서울에 머물러있는 3일 동안 한국군은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고, 미군이 긴급 투입되었다. 때문에 김일성은 서울에서 머문 이 3일을 전쟁을 실패요인으로 지적했다. |
2. 북한군, 도하하려면 할 수 있었다. |
당시 서울은 미아리 방어선을 돌파한 북한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국군이 인도교를 폭파한 상태였다. 하지만 북한군은 경부철교나 나루터를 이용해 강을 건널 수도 있었다. 때문에 비록 다리가 폭파되고 특별한 도하장비가 없었어도 북한군이 강을 건널 의지만 있었다면 28일 서울 점령 직후에도 충분히 가능했다. |
3. 서울 제한점령론? |
북한군이 서울만 점령하면 남한 내 남로당이 봉기를 해서 군사적으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남한을 점령할 수 있다는 서울 제한점령론. 이에 따라 북한군은 서울에서 3일간 기다리지만, 봉기가 일어나지 않고 더욱이 미군이 예상보다 빨리 개입하게 되자 작전을 바꿔 남하를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한때 학계에서 자주 거론되었다. |
4. 북한군의 원래 계획 |
다리 폭파로 강을 건널 수 없었던 것도 아니고, 김일성과 스탈린이 서울만 제한점령 하려 했던 것도 아니라면 과연 북한군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전쟁직전에 만들어진 북한의 남침작전지도에 북한군의 원래 의도가 들어있었다. |
5. 춘천전투 |
북한군 작전의 핵심은 1단계 작전에 있다. 북한군 주공부대가 서울을 점령하여 한국군을 강 이남으로 밀어내면, 춘천을 점령한 북한군 조공부대가 수원으로 내려와 강 이남으로 내려온 한국군을 포위해서 섬멸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춘천을 점령한 후 수원으로 내려와야했던 북한군에게 문제가 생겼다. 춘천을 하루 만에 점령한다는 계획이 무너진 것이다. |
6. 말고개 전투 |
춘천에서 작전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아 홍천으로 진격해 가던 북한군의 12사단 중 2개 연대를 춘천으로 급히 보낼 정도로 북한군의 상황은 급박했다. 하지만 설사 춘천지역에 문제가 생겼더라도 북한군 12사단이 계획대로 홍천을 점령했다면 춘천을 방어하던 국군의 6사단에게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북한군 12사단 역시 제대로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다. |
7. 춘천전투, 그 이후 |
춘천-홍천 지역에서의 전투가 끝난 뒤 곧바로 북한군과 소련고문단은 북한군조직의 대대적인 개편을 단행한다. 춘천, 홍천 점령의 총책이라고 할 수 있는 2군단장을 교체하고 2사단장도 해임한다. 이외에도 2사단과 12사단의 책임자들을 일제히 바꾼다. 그리고 북한의 남한점령계획은 무너졌다. |
1950년6월부터 1953년 7월까지..
이땅에선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기나긴 전쟁기간중에 있었던 무수히 많은 전투들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 중에 춘천전투는 그다지 많이 알려져있지않습니다.
제대로 방어 한번 하지 못하고 쫓겨내려왔던 초기전투 중의 하나로
묻혀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살펴본대로 춘천전투엔 큰 의미가 담겨져있습니다.
춘천에서의 효과적인 방어는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주력부대의 한강남하를 막았으며
이로인해 단 1달만에 남한을 점령하겠다던
북한군의 남침작전은 무너지게됩니다.
그리고 또한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한국전쟁 초기전하면
일방적으로 북한군에 밀려 후퇴했으며
미군이 개입한 뒤에야 재정비를 갖출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미군이 개입하기 이전...
춘천에서의 성공적인 방어전으로 인해 우리는 이미 재정비의 기틀을
마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국전쟁 당시 이 땅에서 벌어졌던 수많은 전투-
그 중에서 지금 우리가 춘천전투를 기억하고 돌아보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역사스페셜 33회 클로징 대본-
북한군, 왜 3일간 서울에서 머물렀나?
북한군이 서울을 완전히 점령한 건 6월28일 오전이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본격적으로 강을 건너기 시작한 건 7월1일이다. 우리가 의문을 갖는 건 바로 이 6월28일부터 7월1일까지 3일간의 북한군의 동정이다. 이들은 왜 3일간 강을 건너지않고 멈춰있었던 것일까? 뭐 어쩌면 이상한 일이 아닌지도 모른다. 당시 한강다리는 이미 끊어진 상태였고 남한의 심장부인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이 기쁨에 들떠 잠시 축제의 분위기에 젖어있을 수도 있습니다.그리고 쉴새없이 진격해 내려온 북한군이 군의 재정비를 위해 잠시 쉴 수도 있는 시간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북한군이 서울에서 3일 머문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데엔 이유가 있다. 바로 이 3일 때문에 전쟁의 양상이 아주 달라졌기 때문이다.
미군사령부가 매일매일 군부대에 내려보냈던 군정보가 있다. 그 중에 1951년 5월15일자를 보면 당시 북한군이 낙동강방어선을 뚫지못하자 김일성은 북한군 사령부에 그 원인을 분석하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여러 가지 원인을 뽑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서울을 점령한 뒤 한강을 건너는데 시간을 지체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서울에서 3일간 머문 건 김일성 스스로가 전쟁실패의 원인으로 분석할 정도로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실제 3일은 전쟁에 어떤 영향을 미친걸까?
1950년 6월28일,강이북은 북한군의 수중에 있었다. 그리고 강이남엔 다리가 폭파된 뒤 중장비는 모두 버리고 나룻배를 이용해
겨우 몸만 빠져나온 한국군이 주둔해있었다
반면 강이북의 북한군- '6월28일 서울은 해방됐습니다.' 6월28일 오전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듯했다. 당시 북한군은 다섯 개의 사단과 함께 350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방어능력을 거의 상실한 한국군에 비해 북한군의 전력은 막강했던 것이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뒤 곧바로 한강을 건넜다면 전황은 겁잡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만일 북한군이 한강을 곧바로 건넜고 이후 1일 25키로 속도로 진격했다고 가정한다면 북한군은 3일만에 조치원, 그리고 6일만에 대전을 점령하게된다. 무서운 속도로 남한을 점령하게되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군은 강이북에서 갑자기 진격을 멈췄다. 그리고 그것은 북한군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준다. 바로 그 사이 한국군은 재정비를 하게 되는 것이다.
28일 오후부터 한국군은 분산철수하는 낙오병들을 수습한다. 그리고 다음날 시흥에 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수습된 세개부대를 한강이남에 배치하게 된다.. 북한군이 강이북에 머물러있는 사이 한강이남의 한국군은 방어선을 구축하게 된 것이다. 그런가하면 그 사이 한국에선 새로운 변수가 발생한다. 6월29일,수원비행장에 도착한 맥아더는 한강의 상황을 보고 미군의 참전을 결정한다. 그리고 이틀 뒤인 7월1일 미군 육군 부대가 긴급히 투입된다.
이렇게해서 북한군이 서울에 머물러있는 3일동안 한국군은 방어력을 갖추게된다. 북한군에 밀려 한강이남으로 쫓겨내려왔던 3일전과는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그리고 이후 전쟁의 양상도 바뀌게된다. 방어력을 갖춘 한국군은 지연전을 펼치게 되었고 그사이 시간을 번 한국군은 반격작전을 준비하게된 것이다. 북한군이 서울에 머물러있었던 3일의 시간은 이렇게 한국전쟁의 양상을 바꾸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북한군은 3일동안 서울에 머물러 있었던 겄일까?
<러시아 국립자료보존소>에서 발견한 것으로 전쟁직전 만들어졌던 북한의 남침작전가 있다. 이 작전도에서도 당시 북한이 서울만 제한점령하려한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북한의 진격방향은 한반도남단까지 그어져 있다. 뿐만아니라 이 작전도는 북한이 어떻게 남한을 점령하려 했는지도 아주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다. 작전도를 살펴보면 일단 1차목표지점은 수원,원주,삼척이다. 그리고 이후엔 세개 방면으로 나눠서 남한을 완전히 점령한다는 것이다. 북한의 원래계획은, 속전속결로 남한을 점령하려했다. 그러기위해 1단계작전이 중요했고 수원포위의 타이밍이 아주 중요했다
단계작전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보면 (1단계) 특히 수원이북지역이 강조되어있다. 이는 서울에서 한국군을 강이남으로 밀어내면
춘천을 거쳐 수원에 도착한 부대가 한국군을 포위섬멸한다는 것이다.-2단계부분 이렇게 수원이북에서 한국군주력부대를 포위섬멸하면 이후엔 큰 저항없이 쉽게 진격한다는 계획이다. 선제타격작전이라고하는 건 세계 제 2차대전가운데 독일군과 소련군이 사용했던 전략전술개념이었다. 주공병력으로서 전면공격을 하고 조공병력으로 포위공격한다는 것이 핵심내용이다. 당시 북한은 한국의 주력부대를 섬멸하면 1개월내 전쟁이 끝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군의 개입을 막기위한 속전속결의 작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당시 춘천으로 투입된 부대는 북한군 2사단이다. 이들은 북한군이 전쟁 2개월전에 실시한 검열작업에서 최우수 정예부대로 뽑힌 부대로 6월25일 새벽,38선을 넘어 춘천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38선을 넘은 북한군 2사단은 채 30분도 지나지않아 이곳 모진교를 돌파했다. 당시 2사단은 춘천을 하루만에 점령한 뒤 곧바로 가평..가촌을 거쳐 수원으로 향하도록 되어있었다.그 작전의 첫 목표지점인 모진교돌파는 예상대로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옥산포였다. 당시 이곳 옥산포는 보리밭이 넓게 펼쳐져있었다. 춘천을 방어하고있던 한국군 6사단은 뒤늦게 남침소식을 듣고 이곳에 도착했다. 그리고 진격해오는 북한군을 향해 일제히 사격을 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북한군은 잠시 멈칫했다. 오후가 되자 북한군은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때 한국군은 이미 예비대까지 출동해 우두산측면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거세어진 한국군의 반격에 북한군은 또다시 주춤하고 말았다. 결국 북한군은 옥산포에서 더 이상 진격을 하지못한채 하루를 보내게된다.
당시 북한군의 병력과 화력손실은 막대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손실은 춘천을 하루만에 점령한다는 계획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당시 철저히 준비를 하고 진격해왔던 북한군을 어떻게 한국군6사단은 막아낼 수 있었을까? 당시 한국군 6사단은 옥산포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북한군이 남침했다는 소식을 들은 한국군6사단은 곧바로 이곳 진지로 투입돼 진격해 오고있는 북한군을 향해 정확히 총을 겨눌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6사단7연대는 전쟁이 나기 한달 전 군사병들과 춘천중고등학교 학생들을 동원해 이곳 우두산에 참호를 팠다. 그리고 참호의 주인을 정해놓고 실전처럼 훈련을 했다. 유비무환의 일면이었다.
이렇게 이틀간 옥산포를 지키고있던 한국군은 다음날 소양강일대로 후퇴한다. 물에서 소양교로 팬 양구쪽에서 진격해오고 있는 북한군으로부터 포위의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양교를 사이에 두고 북한군과 한국군6사단은 이틀간이나 격전이 벌어졌다. 소양교는 춘천으로 들어가기위한 마지막 관문이었다. 작전을 제대로 수행하지못한 북한군 2사단은 소양교를 건너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미리 진지를 구축하고있던 한국군의 거센 반격에 꼼작을 하지못한다.
춘천전투 틸다운 무극리전투 6사단은 춘천전투외에도 많은 전과를 올린 부대다. 당시 한국군 6사단의 병력과 화력은 북한군에 비해 현저히 약했다. 병력은 북한군에 4분의 1도 안되는 수준이었으며 화력도 북한군의 수준에 못미쳤다. 당시 포만 비교해봐도
북한군의 포는 122미리포였고 한국군6사단의 포는 105미리 곡사포였다. 사정거리만으로도 그 성능이 두배가까이 차이가 났다.
그런데도 한국군의 포는 북한군에게 위력적이었다.
포병은 다른 병과와 틀려서 제 요소가 통합되었을 때 올바틀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다. 예를들어 사격지휘라든지 관측등 제요소가 서로 통합되었을 때 요망하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이건 평시 교육훈련을 통해 가능하다. 당시 미리 구축해놓은 방어진지에서 철저히 실전훈련을 했었기에 화력이 약한 포로도 북한군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군6사단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서부전선은 모두 허물어진 상태였다. 결국 27일저녁엔 6사단도 후퇴하게되었다. 하지만 한국군 6사단은 하루만에 춘천을 점령한다는 북한군의 계획을 무너뜨리고 사흘이란 시간을 지연시켰다. 그리고 춘천에서 작전대로 일이 진행되지않자 홍천쪽으로 진격해가던 북한군 12사단중 2개연대를 춘천으로 급히 보낸다. 이는 당시 춘천지역에 있던 북한군의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홍천쪽은 어떠했을까? 당시 홍천에 투입된 북한군 12사단은 중공군출신으로 실전경험이 있는 아주 막강한 부대였다. 설사 춘천지역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북한군 12사단이 계획대로 홍천을 점령했다면 춘천을 방어하고 있던 6사단에게는 아주
치명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북한군 12사단 역시 제대로 임무를 수행하지못했다.
홍천점령의 임무를 맡은 북한군12사단은 양구를 거쳐 홍천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국군방어선을 뚫고 거침없이 내려오고 있었다. 이러한 12사단의 발목이 잡힌 곳이 이곳 말고개다. 당시 북한군의 피해는 막심했다. 북한군의 가장 강한 무기인 탱크가 이곳에서 10여대나 부숴졌다. 당시 이곳을 지키고있던 부대는 한국군 6사단 2연대였다. 북한군 12사단에 밀려 후퇴하던 한국군 6사단은 이곳에 마지막 방어선을 구축했다.
당시 북한군이 보유하고있던 T-34는 85미리 포를 장착하고 있는 최신형의 중전차였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미군의 경전차를
일거에 부술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T-34전차에 맞설만한 무기는 아무것도 없는 셈이었다. 6사단 2연대는 좁은 길을 따라서 진격해 T-34전차와 맞서기위해 인근산에 대전차포와 소총을 배치했다. 그리고 11명으로 구성된 육탄돌격대도 결성했다. 당시 육탄돌격대들은 꼬불꼬불한 지형을 이용해 길옆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대전차포의 기습을 받은 탱크들은 느린 속도로 진격해오고 있었다. 그리고 전차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육탄돌격대들은 전차에 뛰어올랐다. 전차에 수류탄을 던지고 다시 뛰어내리는 것이 육탄돌격대의 임무다. 대전차포와 육탄돌격대의 기습으로 6월28일 말고개에서는 북한군의 전차진입을 막을 수 있었다. 당시 육탄돌격대원 대부분이 유명을 달리했다.
이렇게 한국군6사단 2연대의 방어전으로 인해 북한군 12사단 역시 28일까지 홍천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춘천,홍천지역의 점령을 맡았던 북한군 2사단과 12사단의 계획은 무너졌다.
북한군 2사단이 춘천을 점령한 건 6월28일이다. 당일 점령계획에서 3일이나 지연된 것이다. 이후 이들이 남하해 양평쪽의 한강을
넘은 건 7월1일이었으며 용인을 점령한 건 7월5일이었다. 이로인해 북한군의 계획엔 차질이 생긴다. 북한군 2사단이 수원에 도착한 건 7월5일이었다. 이때 강이북에 있던 북한군도 내려오지만 이미 한국군은 이남으로 안정된 후퇴를 하고 있었다. 수원이북에서 주력부대를 섬멸하려던 계획이 무너진 것이다. 더욱이 이미 이 때 한국군은 전력을 보강했으며 미군과의 협력하에 방어계획을 수립한 뒤였다. 이렇게해서 한달만에 한국을 점령하려던 북한의 작전은 무너진다.
김일성은 전쟁실패의 원인을 한국군을 섬멸하지 못하고 남쪽으로 밀어냈기 때문이라며 통탄했다.
한국전쟁 최대 미스터리 : 북한군 , 왜 3일간 서울에 머물렀나?
북한군은 6월28일-7월1일 . 3일간 서울을 점령하고 머물렀다. 왜일까?
이것은 한국전쟁 최대의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서울에서 3일간 머문것은 전쟁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전쟁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이 곧바로 한강을 건넜다면 전쟁은 어떻게
흘러갔을지 모른다. 그러나 북한군은 진군을 멈춘다. 북한이 진군을 멈춘사이 남한은
재정비시간을 벌어 한강 이남에 방어선을 구축할수있었다. 그리고 6월29일 미군은 한국전쟁에
참여한게된다. 전쟁양상이 바뀐것이다. 또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도 벌어
북한의 진군속도가 늦어지게된다. 전쟁초기에 왜 진격을 멈췄을까?
남한은 북한군이 서울로 진격해오자 한강의 다리를 끊었다. 탱크와 중장비가 건너가기엔
힘들었을것이다. 그러나 4개의 다리중 1개의 다리는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다.
도하장비없이도 강을 건널수 있었을것이다, 실제로 북한군은 나룻배로 강을 건넜다.
전차는 다리를 보수해 건넜다. 북한군이 진격을 멈춘건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면
남한의 공산세력이 봉기를 해서 전쟁을 끝낼수있다고 생각한건 아닐까?
서울만 점령하면 자체폭동과 내분으로 끝낼거라고 생각했다. 당시 남한의 빨치산활동을
기대한 박헌영과 달리 김일성은 빨치산 활동을 기대할수없다고 봤다.
실제로 빨치산은 한국전쟁 이전에 거의 소탕되었다.
즉, 북한군은 서울만 제한점령할려는것이
아니었다. 미국을 의식한 소련은 북한의 남침을 승인했다. 국제적인 정세가 소련에
유리했기 떄문이다. 소련은 북한을 지원하면서 미군참전이전에 전쟁을 끝낼려고했다.
북한군은 1단계 작전에서 서울을 점령한 주력부대와 춘천을 점령하고 내려온 중부전선의 부대가
밀려간 남한군을 수원에서 격파하는 계획을 세웠었다.
당시 춘천에 파견된건 최정예부대인 제2사단이었다. 그런데 옥산포에서 발목이 잡힌다.
애초에 서울을 점령한 부대와 합병한다는 작전이 꺠진것이다. 춘천6사단이 사흘의 시간을
끌어주었다. 또 홍천을 점령할려했던 12사단도 가는 고개에서 발목이 잡혔다. 이렇게
춘천과 홍천에서의 전투는 북한군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 두지역에서 지연된 시간 때문에 서울에 주둔하였던 주력부대는 서울에 3일간 머문것이다 .
작전이 뒤틀린것이다. 이때 남한은 전력을 보강하고 미군과 작전을 세웠다.
1단계 작전 실패로 북한군은 이후 공격이 둔화되었다.
북한의 속전속결 남한정복잔전이 실패한것이다. 춘천에서의 방어로 북한군이 서울에서
머물게 하였고 북한군의 작전을 실패하게 했다.
또 전쟁초기 일방적으로 밀리게 된 양상과 달리 우리가 선전한 전투로 한국전쟁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전투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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