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스페셜100선

35 화랑세기 필사본의 미스터리

사랑의고향길 2013. 9. 28. 18:52

화랑세기 필사본의 미스터리 
책 제목만 전하던 화랑세기를 필사했다는 책이 1300여년 만에 필사본으로 홀연히 나타났다. 이것은 역사학계를 뒤흔드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만약 이 책이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그대로 베낀 책이라면 이것을 바탕으로 신라사는 물론 고대사까지 다시 써야 한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1. 필사본 공개
화랑세기 필사본은 부산의 한 가정집에 보관되어 있었다. 필사본의 표지는 유실된 상태였고, 성수학명이라고 쓰여진 지금의 표지는 소장자의 남편이 만들었다고 한다. 한지에 쓰여진 필사본은 모두 16장. 대부분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 즉 대표 화랑들의 이야기이다.
2. 필사본의 내용
필사본에는 신라의 삼국통일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김유신과 김춘추에 대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특히 김춘추의 결혼에 관한 얘기도 구체적으로 전하고 있다. 또한 화랑세기 필사본은 화랑이라는 이름에 대한 유래를 명확히 밝혀주고 있다.
3. 필사본의 진위논쟁
필사본의 진위를 둘러싼 논쟁은 10년째 계속되고 있다. 특히 화랑세기 필사본에 등장하는 향가와 화랑들의 자유분방한 남녀관계에 대한 기록이 진위논쟁의 핵심이다. 김대문의 화랑세기가 전해져 오던 것을 그대로 베낀 것이 아니라 김대문이 쓴 것처럼 만든 가짜책이라는 것이다.
4. 필사본을 만든 박창화
화랑세기를 필사한 사람은 박창화이다. 일제시대 10여년간 일본 왕실도서관에서 조선의 고서적을 다루는 일을 했던 박창화는 해방직전 귀국했다. 해방 후 그는 정부관계자에게 왕실도서관에 중요한 책이 있는 곳을 알고 있으니 자신이 직접 찾아오겠다는 말을 자주 했지만 번번히 무시되었다.
5. 박창화의 소장책과 저서들
박창화가 소장하고 저술했던 책들은 필사본의 진위를 가려줄 단서가 될 수 있다. 취재팀은 그의 손자가 가지고 있는 소장도서와 저서들의 내용을 하나하나 확인해 보았다.
6. 필사본과 금석문의 비교
필사본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서는 돌이나 비석에 새겨진 당시의 금석문과 필사본의 내용을 서로 비교해 보는 것이 가장 객관적인 방법이다. 신라사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울주 천전리 암각화와 화랑세기 필사본을 직접 비교해 본다.
7. 포석정의 비밀
신라왕과 귀족들이 술 마시며 놀던 곳으로 알려져 있는 포석정.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김춘추가 포석사에서 결혼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화랑세기 필사본을 들여다보 면 볼수록 김춘추의 얘기라든지 포석사라든지, 구지처럼 뭔가 새로운 사실이 계속 나오고 있다. 

 

 

 

 

 

화랑세기 필사본의 미스터리

 

 

 

 

책 제목만 전하던 화랑세기를

 

필사했다는 책이 1300여년 만에

필사본으로 홀연히 나타났다.

 

 

이것은 역사학계를 뒤흔드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만약 이 책이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그대로 베낀 책이라면

이것을 바탕으로 신라사는 물론 고대사까지

다시 써야 한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1. 필사본 공개

 

화랑세기 필사본은

부산의 한 가정집에 보관되어 있었다.

 

필사본의 표지는 유실된 상태였고,

성수학명이라고 쓰여진 지금의 표지는

소장자의 남편이 만들었다고 한다.

 

한지에 쓰여진 필사본은 모두 16.

대부분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

즉 대표 화랑들의 이야기이다.

 

 

2. 필사본의 내용

 

필사본에는

신라의 삼국통일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김유신과 김춘추에 대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특히 김춘추의 결혼에 관한 얘기도 구체적으로 전하고 있다.

 

또한 화랑세기 필사본은

 

 

 

3. 필사본의 진위논쟁

 

필사본의 진위를 둘러싼 논쟁은 10년째 계속되고 있다.

 

특히 화랑세기 필사본에 등장하는 향가와

화랑들의 자유분방한 남녀관계에 대한 기록이

진위논쟁의 핵심이다.

 

 

김대문의 화랑세기가

전해져 오던 것을 그대로 베낀 것이 아니라

김대문이 쓴 것처럼 만든 가짜 책이라는 것이다.

 

 

4. 필사본을 만든 박창화

 

화랑세기를 필사한 사람은 박창화이다.

 

일제시대 10여년간 일본 왕실도서관에서

조선의 고서적을 다루는 일을 했던 박창화는

해방직전 귀국했다.

 

해방 후 그는 정부관계자에게

왕실도서관에 중요한 책이 있는 곳을 알고 있으니

자신이 직접 찾아오겠다는 말을 자주 했지만 번번히 무시되었다.

 

 

5. 박창화의 소장책과 저서들

 

박창화가 소장하고 저술했던 책들은

필사본의 진위를 가려줄 단서가 될 수 있다.

 

취재팀은 그의 손자가 가지고 있는

소장도서와 저서들의 내용을

하나하나 확인해 보았다.

 

 

 

6. 필사본과 금석문의 비교

 

필사본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서는

 

돌이나 비석에 새겨진 당시의 금석문과 필사본의 내용을

서로 비교해 보는 것이 가장 객관적인 방법이다.

 

신라사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울주 천전리 암각화와

화랑세기 필사본을 직접 비교해 본다.

 

 

7. 포석정의 비밀

 

신라왕과 귀족들이

술 마시며 놀던 곳으로 알려져 있는 포석정.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김춘추가 포석사에서

결혼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화랑세기 필사본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김춘추의 얘기라든지 포석사라든지,

 

구지처럼

뭔가 새로운 사실이 계속 나오고 있다.

 

 

 

 

 

 

추적 , 화랑세기 필사본의 미스터리

 

 

 

 

 

 

화랑세기는 신라시대 김대문이 쓴 역사책이다. 그러나 문헌상으로만 존재할뿐

실제로 책이 전해지진 않는다. 그런데 그런 화랑세기를 베껴쓴 화랑세기 필사본이 전해진다.

이 필사본은 화랑의 기원, 계보, 그들의 활동등 화랑15명을 기록한 화랑의 족보이다.

이 필사본은 1989년에 세상에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그런데 1995년 두번째 화랑세기 필사본도 공개됬다. 첫번째 필사본보다 내용이 훨씬

풍부했다. 이 필사본을 만든 사람은 박창화이다.

화랑세기엔 무슨 내용이 있을까? 화랑세기 필사본엔 김춘추도 화랑출신이 었다는 사실과

김춘추과 원래 부인이 있었고 딸도 있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밟힐수있는 사실이 있다.

또한 필사본엔 화랑이 신궁을 받드는 제사집단에서 기원했다는 것도 나와있다.

 

 

또 화랑의 명칭이 위화랑에서 비롯되었음도 기록되어있다.

하지만 이 화랑세기 필사본이 위작이라는 주장도 많다. 필사본의 진위논쟁은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지고있다. 화랑세기 필사본이 위작이라는 사람들의 주장은 무엇일까?

화랑세기 필사본엔 향가가 수록되어있는데 이것은 후대사서인 삼국유사를 참조했다는 의혹을

받고있다. 그러나 당시 향가를 거의 해독하는 수준에서 새로운 향가를 창작한다는것은

어렵다는것이 통설이다.

 

 

 

또 화랑세기가 위작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화랑들의 음란한 성생활을 예로 들고 있다.

특히 부하의 임신한 아내와 정을 통한다는 '마복자' 풍습은 오늘날 받아들이기 힘든 대목이다.

화랑세기 필사본은 일본식 종이와 일본식 양식으로 만들어졌다.

 

 

화랑세기를 필사했다는 박창화는

일본왕실도서관에서 10여년간 근무했다. 어쩌면 우리의 중요한 고서적이 잠들어

있다고 믿어지는 일본왕실도서관에서 박창화가 화랑세기를 우연히 발견하고

그것을 그대로 필사했을수도 있다.

 

 

화랑세기의 진위를 밝힐수있는 방법이 없는것일까? 또 화랑세기에 나오는 화랑들의 이름은

진짜일까? 화랑세기 필사본을 쓴 박창화는 한문소설을 많이 썼는데 화랑세기도 그런

소설들 중 하나일까?

천전리 금석문은 화랑들의 이름들이 대거 나와있다. 천전리 금석문과 화랑세기 필사본엔

비슷한 내용이 포함되어있으나 화랑세기 필사본의 이름과 금석문의 이름과 일치하는

이름은 단 하나도 없었다.  필사본 화랑세기의 백수십명의 인물중 금석문에 나타나는

이름이 하나도 없다는건 위작임을 의심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영일 냉수리비엔 갈문왕의 칭호가 나타나는데 화랑세기 필사본에도 이것과 비슷한

'부군'이란 칭호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걸로 진위여부를 가리긴 힘들다.

 

 

또 필사본엔 우리가 알고있는 포석정을 포사, 포석사등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실제

포석정에서 포석사로 적힌 명문기와가 출토 되었다. 이것은 포석정의 건립연대의

상한선이 6~7c 이상으로 올라갈수있다. 또 포석사는 사당으로 추측할수있다.

화랑세기 필사본의 진위논쟁은 오늘날까지 계속 되고 있다.

과연 화랑세기 필사본은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그대로 필사한것일까?

또 박창화는 왜 살아있을때 필사한 화랑세기를 세상에 화랑세기 필사본이라고

떳떳이 공개하지 않고 죽고나서 그의 유작으로 발견된것일까?

이것은 역사서가 아닌 , 박창화가 쓴 개인소설이기 때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