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의 훈요십조는 조작되었는가? |
고려 태조 왕건이 남긴 훈요십조의 8번째 조항, ‘차령이남과 공주강 밖은 산과 땅이 모두 배반하니 그곳 사람 또한 배반한다. 따라서 그곳 사람들이 조정에 들어오면 변란을 꾀하고 임금이 행차하는 길을 막아 난을 일으키니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벼슬을 주지 말라’ 역사스페셜이 지금까지 지역 차별의 원천적인 근거였던 훈요십조 8번째 조항의 조작의혹을 제기한다. |
1. 배역의 땅 |
천안에서 공주로 가다 보면 제법 숨가쁜 고개가 하나 나온다. 바로 차령고개인데, 이 차령고개는 예부터 서울과 호남을 이어주는 중요한 통로로 이용되어 왔다. 차령고개를 넘어서면 공주 땅에 들어선다. 고개를 지나자마자 보이는 넓은 강이 바로 공주강, 지금의 금강이다. 따라서 차령이남과 공주강외는 옛날 백제땅이 시작되는 경계였다. 그렇다면 훈요십조에서 지목한 금강은 어떻게 배역한다는 뜻일까. |
2. 고려시대의 비보풍수 |
호남 제일의 풍수를 지녔다는 조계산, 그 중에서도 가장 좋다는 곳을 골라 선암사가 자리잡고 있다. 이 절은 풍수적으로 보기 드물게 중후하면서도 안정된 곳으로 꼽힌다. 하지만 이 명당에도 치명적인 흠이 있다. 절터에서 뻗어 내려오는 양쪽 산줄기가 다물어지지 않고 벌어져 그 사이로 좋은 기가 다 빠져 버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흠을 보완하여 좋게 고쳐서 쓰는 방법이 있었다. 바로 비보풍수이다. 고려시대에는 나쁜 땅이라고 버리고 기피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땅으로 고쳐서 쓰려는 사상인 비보풍수가 일반적이었다. |
3. 왕건과 호남지역의 관계 |
왕건에게 호남 세력을 차별할 만한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을까. 신라말, 조선 초 한국 불교와 정치 사상을 이끌었던 도선은 당시 왕실을 포함한 모든 국민들의 정신적 지주였다. 또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통치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런데 훈요십조의 내용대로라면 도선은 배역의 땅에서 나온 인물이 된다. |
4. 훈요십조, 과연 지켜졌나? |
왕건은 다른 지역과 차별 없이 호남지역 사람들을 등용했고 측근에 두고 신임했다. 그리고 왕건이 나라를 세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호남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훈요십조의 제8조항을 왕건 스스로가 지키지 않은 셈이다. 훈요십조는 '중심장지'로 끝을 맺는다. ‘중심장지’란 말 그대로 마음 속에 깊이 새겨서 따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후대 왕들은 과연 훈요십조의 조항을 잘 지켰을까. |
5. 사라진 훈요십조 |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10가지 가르침! 그 가운데 가장 핵심은 8조항, 배반의 땅인 호남지역 사람에게는 벼슬을 주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훈요십조가 기록되었을 왕실 자료는 1010년 거란의 침입으로 모두 불타버렸다. 훈요십조의 모든 내용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따라서 왕건이 남긴 훈요십조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증거는 없다. 여기에 역사의 비밀이 숨어있었다. |
6. 훈요십조의 조작 의혹 |
현종때 고려 역사가 재편찬 되면서 사라진 훈요십조가 발견되었다. 불에 타서 사라져 버린 훈요십조가 태조실록을 재편찬하는 시기에 딱 맞춰서 나타난 것이다. 먼저 훈요십조가 처음 발견된 때인 현종의 시대로 돌아가 본다. |
7. 훈요십조의 조작 시기 |
현종을 왕위에 옹립 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신라계 출신들이었다. 훈요십조를 발견한 인물도 신라 혈통의 경주 출신이었다. 그렇다면 현종과 그의 측근들이 훈요십조를 조작한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 것일까. |
왕건의 훈요십조는 조작 되었는가?
<훈요십조의 8조항>
태조왕건이 남겼다는 훈요십조엔 호남지역 인재를 등용하지 말라는 조항이
있다. 지역화합을 위해 평생을 노력했던 왕건이 이런 유훈을 했을까?
훈요십조의 8조항엔 후백제 지역. 호남지역의 사람을 등용하지 말라는 내용이 있다.
조항의 차령이남, 공주강외의 지역은 배역의 땅이라고 한곳은 어디 일까?
< 반궁수 모양의 금강 >
< 고려사에 기록된 3대 배류수 > : 금강이 빠져있다.
조선후기엔 차령이남, 즉 호남의 땅이 배역지세라고 인식했다. 고려시대엔 금강을 대표적인
반궁수의 모양(배역의 지세)이라고 했다. 그러나 금강은 고려사의 3대 배류수에 빠져있다.
왜 왕건은 유독 금강을 배역지라고 지명한것일까?
호남 최고명당터에 세워진 선암사엔 양쪽 산줄기가 벌어져 기가 빠지는 곳에
누각을 세워 기가 빠지는걸 막았다. 풍수지리엔 이 처럼 안좋은 지세를 보완하는 방법이
있었다. 왕건이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지었다는 개태사는 후백제의 안좋은 기를 누르기 위한
비보사찰이었다. 이렇듯 나쁜땅은 버리거나 멀리하는것이 아닌 고쳐서 보완하는
비보풍습이 일반적이었다. 태조왕건이 풍수지리에 이치가 안맞는 유훈을 했을까?
<도선 국사>
또 왕건이 삼국을 통일하는데 도움을 줬던 측근들이 거의 호남출신다.
전남 광양 옥룡사지엔 성인인골이 든 석관이 발견되었다. 이 석관은 도석국사가 죽고 얼마
안되서 만들어진것이라 도선국사의 것으로 추정된다. 도선은 전남에서 태어났는데 왕건이
말한 배역의 땅에서 태어난것이 된다. 또 왕건의 둘째부인 역시 호남의 호족집안이었다.
특히 호남은 군사적이거나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고려의 개국공신 신숭겸은
왕건의 목숨을 대신해서 싸우다 죽은 공신이다. 그 역시 호남이 출생지이다. 왕건은
개경 출신이지만 그의 지지세력은 대부분 나주를 중심으로 한 호남세력이었다. 왕건은 생전에도
호남을 각별하게 생각했고 호남출신 사람들을 측근에 등용했다. 이러한 왕건의 훈요십조
8조항은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다. 이러한 왕건의 훈요십조는 후대에 정말 지켜졌을까?
왕건부터 성종까지 6대임금을 모신 최지몽은 호남출신이다. 이외에도 박영규, 현소, 김심언등
계속해서 호남인물들이 등용된다. 또 함부로 사찰을 짓지말라는 2조항도 지켜지지 않았다.
또 5조항과 6조항에 관련된 팔관회, 연등회도 자주 금하였다. 훈요십조는 전혀 지켜지지 않은것이다.
후왕들이 훈요십조를 지키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훈요십조를 몰랐던것이다.
훈요십조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거나 지금까지 알려져있는 훈요십조의 내용과는 다른것이 아닐까?
후왕은 물론, 왕건 자신조차 지키지 못한 훈요십조. 훈요십조는 무엇일까?
역사는 왕건이 구술한 내용을 박술희가 받아적었다고 적고있다. 그러나 훈요십조는 1010년, 거란의
침입으로 불타버린다. 사라진 훈요십조가 어덯게 다시 살아난것일까? 현종때 실록을
새로 편찬하면서 훈요십조가 다시 나타난다. 실록편찬에 관여했던 최제안과 최항에의해서다.
왕가의 중요문서가 어떻게 개인의 집에서 발견된것일까? 왕건이 남긴 훈요십조가 실제로 존재
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훈요십조가 다시 나타나는 과정이 이처럼 매우 수상하다.
누가 현종때 훈요십조를 조작한것은 아닐까? 삼국사기엔 현종의 외가쪽 혈통 (신라 혈통)을 매우
강조하는데 현종이후부터 고려의 주도세력이 후백제계에서 신라계로 바뀌는것을 의미했다.
현종은 새로운 혈통으로 고려의 역사를 다시쓴것일까? 훈요십조를 발견한 최제안과
최항 역시 신라계통이다. 훈요십조는 후백제계를 견제하기 위해 신라계인 현종과 최제안등에
의해서 정치적으로 이용된것은 아닐까? 실제로 거란의 침입으로 호남 삼례지역으로 피신한
현종의 행차를 가로막는 사건이 일어나게되는데 놀랍게도 훈요십조의 8조항과 유사하다.
삼례지역에 대한 현종의 반감과 거란에 대한 반감이 훈요십조에 포함된것이다 .
훈요십조의 전체조항을 생각해봐도 태조때 지었다기 보다 후세에 의해 조작됬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훈요십조엔 왕위의 형제상속을 정당화 하려는 조항이있는데 문종을 전후로 형제상속이
성행하고 있다. 그외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쓰던 신라계승론이 활발할때 위작되었다는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이렇듯 훈요십조는 백제계 축출이라는 정치적 목적에 의해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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