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스페셜100선

39 삼별초, 진도에 또 다른 고려가 있었다

사랑의고향길 2013. 9. 28. 19:00

삼별초, 진도에 또 다른 고려가 있었다 
일본에서 1271년에 작성된 '고려첩장 불심조조'라는 문서에서 고려가 진도로 천도했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당시 고려는 이미 몽고에 굴복해서 강화에서 다시 개경으로 천도한 뒤였다. 그런데 진도에 수도를 정한 또 하나의 고려정부가 존재했던 것이다. 바로 삼별초였다. 
1. 삼별초의 봉기
삼별초는 고려가 몽고와 싸울 때, 선두에 섰던 가장 핵심적인 반몽집단이다.
‘몽고병이 이르러 인민을 살육하니, 무릇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자는 구정으로 모여라!’삼별초는 고려왕조가 몽고에 굴복하자 반란을 일으킨다. 하지만 일본에 외교문서를 보내는 것은 한 나라의 정부만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그렇다면 삼별초는 나라를 세우고 정부를 구성했던 것일까. 삼별초가 난을 일으켰던 강화로 간다.
2. 진도를 택한 이유
삼별초는 개경 정부의 공격을 피하고 새로운 거점을 물색하기 위해 서둘러 강화를 떠난다. 당시 삼별초가 이끌었던 배는 무려 천 여 척. 거기에는 결연한 항몽의지가 실려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목포 앞바다의 진도에 닻을 내리게 된다. 삼별초가 진도를 선택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3. 삼별초의 정통성
삼별초는 진도에 새로운 도성을 마련하고 궁궐 용장성을 구축했다. 용장성은 웅장했고 한 나라의 성으로서 손색이 없는 면모를 갖췄다. 삼별초는 진도를 장기적으로 경영 하려했고, 몽고와 끝까지 싸우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고려라는 국호로 일본에 외교문서를 보낸다. 그렇다면 삼별초가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지 않고 굳이 고려의 정부를 내세웠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4. 삼별초의 세력권
삼별초는 내륙으로의 세력확장을 끊임없이 시도했고 그 기세 또한 대단했다. 삼별초는 워낙 정예 군대였고, 오랫동안 몽고와 전쟁을 치르면서 전투경험도 풍부해진 군대였다. 삼별초의 해상 능력은 막강했는데, 징과 북을 동원하고 함선에 괴상한 동물을 그려 바다에 비추는 등 위협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며 적을 먼저 심리적으로 제압했다. 그리고 그들은 진도를 거점으로 해상왕국을 구가했다.
5. 민중정부 삼별초
삼별초에 대한 민심은 각별했다. 특히 삼별초가 봉기 직후에 도적을 불태우면서 민심을 끌어당기게 된다. 도적이란 정부 문서를 말하는데, 여기에는 노비 문서도 포함된다. 노비문서를 불태우면서 삼별초는 모두가 평등한 사회, 그리고 민중의 정부를 지향했던 것이다. 하지만 고려는 신분제도가 엄격한 사회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런 의식이 가능했던 것은 삼별초 지휘관들의 출신배경 때문이었다.
6. 진도에서의 최후
1271년 5월15일. 진도는 급박한 상황에 직면했다. 여몽 연합군이 대대적인 공세를 펼친 것이다. 병선 4백 여 척에 군사는 만 명이 넘는 대규모의 병력이었다. 한달 여에 걸친 치밀한 준비를 마치고 감행한 총공격으로 삼별초는 순식간에 수세에 몰렸다. 그리고 용장성은 화염에 휩싸였다. 지금도 진도에는 당시의 상황을 대변하는 지명과 유적지가 남아있다.
7. 삼별초의 제주항쟁
김통정이                  이끄는 삼별초는 제주에 들어오자마자 우선 방비를 튼튼히 했다.    그리고                    겹겹의 저지선을 마련하고 다시 해상활동을 전개, 본토의 연안 지역을 공략해                 나갔다. 그러자 개경 정부와 몽고는 마침내 제주를 공격한다. 

 

 

 

삼별초, 진도엔 또 다른 고려가 있었다.

 

 

 

 

진도로 천도했다는 놀라운 기록이 있다. 바로 삼별초 항쟁이었다.

'고려첩장 불심조조'엔 몽고를 오랑캐라 적은 문서가 이상하다고 했다. 당시 고려는 원의 속국

이었는데 이런 외교문서를 일본에 보낼수있었을까? 삼별초는 고려가 몽고에 굴복하자

난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때 삼별초가 외교문서를 보낸것이다. 고려사엔 삼별초가

'승화후 온'을 왕으로 추대하여 봉기의 명분을 세우고 관직을 정비한다. 이렇게 해서

고려엔 2개의 정부가 세워지게 된다. 삼별초는 몽고와의 항쟁을 선언하고 1200척을 이끌고 강화를

떠나 진도에 도착하게 된다. 진도는 육지에 인접해있고 물살이 거센 울돌목이 있는데다

개경으로 가는 조운선을 차단할수 있었다.

 

진도에 들어온 삼별초는 성을 쌓고 궁궐을  세웠다. 궁궐터엔 기와,청자등 다양한 유물이 나왔다.

삼별초가 들어오기 전엔 용장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삼별초는 이 용장사를

확장시켜 궁궐을 세웠을것이다. 삼별초의 장기항쟁의 의지가 느껴진다. 용장성은

고려의 궁과 비슷하게 계단식으로 세웠는데 고려왕조를 부정하지 않고 계승했음을 알수있다.

삼별초는 왜 고려왕조를 부정하지 않았을까?

 

삼별초는 몽고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몽고를 오랑캐라 하는 등 반원적인 태도를 분명히 했다.

또 일본에 보낸 문서엔 천도라는 말을 사용하여 자기들이 고려의 정당한 정부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기존의 고려정부가 몽고에 굴복했기 때문이다. 삼별초는 일본에 고려의

정통성을 계승한 유일한 정부임을 자처했다. 삼별초가 일본에 문서를 보낸것은

몽고와 맞썰 군대와 쌀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삼별초는 자신들의 왕을 황제라 칭했던

기록이 있듯이 개경의 정부를 대신해서 독립국가인 고려의 자주성을 지키려 한것이다 .

 

삼별초는 다량의 선박과 해상전투경험을 바탕으로 고려남부일대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삼별초는 남해를 거점으로 경상도 지역까지 진출한다. 그들은 진도를 거점으로 한

해상왕국을 구축했다. 삼별초의 세가 확장되자 전국에서 삼별초를 호응하는 난이 전국 곳곳에서

일어났다. 특히 삼별초가 도적(노비문서)을 불태우는데 신분제를 부정한 사례이다. 이러한

삼별초의 행위는 일반백성으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신분을

초월한 민중의 사회를 구성하려 한것이다. 삼별초의 지휘관이 하층계급이 많았다는것이

이 사실을 입증한다. 고려 중기 무신정변이나 만적의난 등 신분질서가 흔들리고 있었다는

상황임을 감안하면 모두가 평등한 이념은 불가능한 사상이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삼별초 항쟁은 1년여만에 막을 내린다. 여몽연합군의 침략으로 용장성이

함락되면서 삼별초의 진도정부는 패망하고 만다. 삼별초의 잔여세력은 제주도로 옮겨가면서

 항쟁을 계속했다. 지금도 제주도 곳곳엔 삼별초가 쌓은 성이있다.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긴 삼별초는 다시 내륙으로 진출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제주도의 삼별초는 3년만에

여몽연합군에 의해 장악되고 만다. 삼별초의 4년간에 걸친 항쟁이 끝나자 고려는

100여년에 걸쳐 몽고의 지배를 받고 만다. 자주 독립국가를 지키고자 했던 항쟁의 정신.

오늘날 삼별초를 통해 본받아야할것이다 .